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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래요? 어떻게 해서 이별하게 되었나요?”
“그건 사적인 일이라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한 것을 물어봤군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꼭 제 동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제 눈으로 보기에는 두 분이 너무나 닮아 친자매임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흡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 만남을 주선해 볼까요?”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만나기는 꺼림칙하고, 좀 우연히, 은밀하게 회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제가 혹시 그 분을 다시 조우하게 된다면, 아가씨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조영이 여미아 닮은 어처를 다시 만난 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 태후를 침전인 장생전에 모셔다 드리고 곧장 궁을 나서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어처는 시녀들을 거느리지 않고 단신이었다.
황혼이 질 무렵,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때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조영의 발걸음과 얼굴에서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가 느닷없이 조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 여인이 건물과 나무 사이에 서 있다가 조영이 지나는 길목에 나타났던 것이다. 조영이 흠칫 놀라 바라보니, 다름 아닌 그 어처였다. 조영은 인적이 드문 이런 으슥한 곳에서 여인을 만나자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일었다.
조영이 입을 열려하자 그녀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인 듯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조영의 소매를 잡아끌며 어느 외진 전각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망자의 사당 같았다.
그녀가 속삭이는 음성으로, 고려어를 사용해 말했다.
“우리의 만남을 남들이 알게 되면 큰일 나요. 장군님은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조영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은 안전해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 여미아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지요?”
“궁 밖으로 외출하실 기회가 있을 때, 저희 집으로 직접 찾아오시면, 제가 두 분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잠시 숙고하다가 조영이 대답했다. 이어서 조영은 자신의 집 주소와 특징을 자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언제가 좋을까요?”
“연락을 위해 사흘 후, 그러니까 스무하루 날이 좋겠습니다.”
“그럼 그날 오정까지 제가 장군님 댁으로 가겠습니다.”
조영은 그녀와 헤어지고, 누가 혹시 지켜보지 않았을까 두려워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걸음을 재촉해 황급히 북궁의 문을 벗어났다.
조영의 집 뜰에 환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을날이다. 이 환꽃나무들은, 조영이 환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 태후가 특별히 구해서 보내준 것들이다.
아침부터 어여쁜 아가씨, 송막도독 이진영의 딸 이루하와 그녀의 시녀 여미아는 조영의 집을 찾아와 행복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국화향이 진동하고, 가을바람 선선한데 햇볕을 받은 선남선녀들의 얼굴은 참으로 화사한 꽃처럼 피어있었다.
“여인들을 꽃에 비유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남자를 가리켜 무슨 꽃을 닮았다고 말하는 건, 쉬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이루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조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영도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니, 이루하 아가씨는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그윽하게 피어난 매화를 닮았고, 여미아 아가씨는 보는 이의 눈을 현란하게 쏘아대고 사로잡는 천상의 색깔 진분홍 모란화의 각인刻印을 담고 있습니다.”
조영은 이렇게 말한 후 속으로 ‘아차!’했다. 이루하 앞에서 여미아를 지나치게 높여 칭찬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루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여미아는 마음이 좀 불편했으나 역시 조용히 앉아있었다.
“조영 공자님은 무슨 꽃과 흡사한지 제가 얘기해볼까요?”
이루하가 조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하하하! 제가 꽃을 닮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조영은 웃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얼버무리려 했다.
“공자님은 환꽃을 닮았어요.”
“어떤 면에서요?”
“그냥 풍기는 인상이 그래요. 말로 뭐라 묘사하기 어려워요.”
이루하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꽃이라도 감상하듯, 장부다운 기개가 넘쳐흐르면서도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조영의 해맑은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제가 환꽃을 닮았다니,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근데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조영이 오히려 무안해서 물었다.
“아니에요. 환꽃의 늠름한 기상을 감상하는 중이에요.”
그녀는 역시 여장부였다. 마음을 끄는 남자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속을 털어놓았다.
훗날 어떤 사람이 측천여황(무 태후)의 총애를 받던 미남 장창종에게 “육랑六郞의 얼굴은 연꽃을 닮았다”고 말했다지만, 조영을 환꽃에 비유한 이루하의 발언은 대담하고 엉뚱한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그 속에 우연히 일치하는 어떤 비의秘義가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승 고양원의 시 속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환꽃은 고려백성 모란화를 사랑한다. 그 모란화는 원래 볼품없는 들꽃이었다. 하지만 환꽃동산에 옮겨진 후 화려한 모란화로 거듭났다.
이루하는 부지불식간에, 고조영이 여미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의 발언을 한 셈이다. 방금 전 조영이 여미아를 모란화에 비겼기 때문이다. 이루하와 조영은 아직 거기까지 의념이 미치지 못했지만, 총명하기 짝이 없던 여미아는 이루하가 조영을 환꽃에 비기는 순간,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잠시 후 이루하와 조영도, 고양원 대덕의 “전설야화”라는 시를 상기하고, 꽃에 관한 그들의 얘기 속에 조영과 여미아가 한데 엮이고 있음을 깨닫자 은근히 불안해졌다.
조영은 이루하가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한편으로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일면으로는 자신이 환꽃 같다는 이루하의 언어와, 여미아가 모란화 같다는 그 자신의 묘사를 상호 연결하면서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이루하도 이를 깨닫고,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를 만회할 길은 없을까?
그 때 조영이 입을 열었다.
“환꽃과 모란, 매화 가운데 연중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매화죠. 그 다음이 모란, 그리고 환꽃은 맨 나중에 피어요.”
매화는 보통 음력 정월부터 핀다. 모란은 따스한 봄에 개화하고 환꽃은 여름에 꽃망울을 터뜨린다.
여미아와 이루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조영이 말을 이었다.
“동지섣달에 꽃을 본 듯이 날 좀 보아 달라고 우리 고려 사람들은 노래하죠. 눈이 아직 녹지 않았을 때 핀 매화가 어쩌면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루하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동지섣달에 피는 꽃은 동백꽃이에요.”
이루하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하하하! 저도 언젠가 동백꽃을 보았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마치 모란화처럼 화려해보이지만, 모란화가 버틸 수 없는 눈보라 속에서도, 동백은 태연자약하죠.”
조영이 웃음으로 상황을 호전하려 애썼다.
그 때 여미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조영과 이루하도 깜짝 놀라, 여미아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하인이 열어젖힌 대문 사이로 멀리 여인들의 자취가 눈에 들어왔는데, 매우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 한 여인이 네 명의 하녀를 거느리고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아차! 어처마마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조영이 급히 일어나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았다. 조영은 그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을 친히 안내해 집으로 들어왔다.
이루하는 어처의 신분과 기품에 눌려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송막도독 이진영의 딸 이루하가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어처도 매우 겸손하게 그녀의 절에 응대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여미아의 얼굴을 보고 어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여미아 역시 어처를 보고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어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여미아 언니 아니신가요?”
“맞아요. 전 여미아예요.”
여미아가 얼른 꿇어 엎드리며 공손하게 절했다.
“언니!”
그녀는 언니라는 말을 내뱉고 목이 메었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언니, 저를 모르시겠어요? 저는 극시아예요. 언니 동생 극시아極示雅!”
어처가 여미아를 잡아 일으킨다.
“극시아?”
여미아의 음성이 마치 대나무 속의 얇은 막처럼, 아니 대금大笒의 갈대 청淸마냥 부드럽게 진동했다. 여미아의 눈에도 어느 덧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두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극시아!”
“언니! 흑흑흑!”
극시아라 불린 어처는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두 여인의 해후를 목격하던 조영과 이루하도 괜시리 눈에 이슬이 맺혔다.
두 여인은 한참이나 껴안고 말없이 흐느꼈다.
“언니와 헤어진 후 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마침내 어처 극시아가 입을 열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살아계시니?”
“저도 몰라요. 언니를 보내고 일 년 후에 할아버지께서 저를 내 보내셨어요.”
“그럼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느냐?”
“전혀요.”
“근데 넌 어떻게 해서 황제폐하의 어처가 되었느냐?”
“말하자면 길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할아버지께서 신신당부하셨어요.”
여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서 방으로 들어가죠.”
조영이 권하자 일행은, 밥상이 준비되어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언니는 옷 입은 게 왜 이래요?”
극시아가 여미아의 수수한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
“난 송막도독 이진영 어르신의 공주마마이신 여기 이루하 아씨의 비자란다.”
“네? 어떻게 해서······.”
“나도 말하자면 길단다. 하지만, 나 역시 할아버지로부터 누구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단다. 용서해다오.”
이루하는 두 자매의 말을 듣고 돌연 여미아의 출신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녀가 오래 전부터 여미아의 출신을 캐물었지만, 여미아는 말씀드리기 어렵다고만 대답했었다. 아버지 이진영도 그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렸었다.
“너야 말로 어떻게 황궁까지 들어가 폐하의 어처가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여미아는 이렇게 말하고 조영과 이루하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우리 두 자매 이야기를, 외인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뭐 별것도 아니지만, 밝히기가 좀 거북한 면이 있습니다. 묻지도 말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네 사람의 식사 자리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감돌았다. 극시아는 처음 몇 마디 외에 도통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수심도 깃들어 있었다. 여미아와는 대조적이었다.
여미아의 얼굴은 마치 맑게 갠 하늘처럼 티 하나 없고 깨끗하며 우아하고 밝고 화사하고 성스럽고 명랑하고 아름다운데, 극시아의 낯은 일면 무척 고혹적이면서도 어느 모로 슬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조영은 두 여인의 닮음과 다름을 속으로 헤아리며 의아해했다.
‘두 여인은 얼굴 생김새가 몹시 닮았으면서도 어쩜 이렇게 풍기는 분위기가 서로 어긋날까?’
조영은 그 차이가 어디에서 연원된 것인지 묵묵히 사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들어 극시아를 바라보았는데, 그 때 극시아도 우연히 조영의 낯을 힐끔 쳐다보는 것이다. 극시아는 조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았다.
조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으나 머릿속은 극시아의 눈빛에서 뭔가 강렬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놀랐다. 그런 기운은 바로 이루하가 자신을 바라볼 때 자주 나타나던 것으로서, 하늘 은하의 옅은 푸르름을 담고 있는 한편, 오경 무렵의 맑은 밤하늘처럼 어둠의 천지를 새하얗게 장식한 어떤 현란하고 강렬한 빛이었다.
조영은 가슴이 뜨끔해 다시는 어처 극시아를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식사 후 얼마 있지 아니해 극시아는 작별을 고했다.
“저는 궁으로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여기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매인 몸이라······.”
그녀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니와 이루하 아가씨가 부럽습니다. 두 분은 너무나 자유로운 것 같아요.”
극시아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장군님, 궁에서 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영에게 이 말을 남기고 극시아는 시녀들과 함께 떠나갔다. 마치 붉은 꽃들을 이고 있는 한 무리의 푸른 나무들처럼 그들은 조영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방안에는 아직도 극시아의 향취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조영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그의 귀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공자님, 제가 한 가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이루하였다.
“네, 말씀하세요.”
“항간에 공자님을 가리켜 고이랑高二郞이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그건, 고씨 집안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뜻이다.
“글쎄요, 저는 장남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사람들이 고이랑, 고이랑 하면서 수군거렸는데, 좋지 않은 말 같았어요.”
“풍소보 회의대사를 일러, 풍일랑馮一郞이라고 하는 말은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분은 첫째 아들인가요?”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조영은 차마 말하기가 어려웠다. 풍소보가 풍씨 집안의 맏이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그것은 강호에서, 무 태후의 첫째 남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종의 은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무 태후의 둘째 남자라고 부른단 말인가? 조영은 속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우리 가문, 송막의 장수 이해고 장군에 대해서는 이삼랑李三郞이라고 해요. 제가 알기로, 그 분은 셋째 아들이 아니에요.”
이해고는 조영과 함께 번갈아 가며 무 태후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뭐, 그냥 사람들이 부르기 편한 대로 지은 별명일 겁니다.”
“절 속이지 마세요!”
이루하가 정색을 했다.
“방금 전 어처 극시아가 공자님을 쳐다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네? 저는, 전혀······.”
조영이 말을 얼버무렸다. 이루하는 총명하고 예리하면서도 노골적이었다.
“공자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폐하(무태후)의 전殿에서 아무 일도 없는 거죠?”
“그럼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저는 공자님의 인격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루하와 여미아가 나간 후, 조영은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 이루하의 그런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어처 극시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이루하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영이 궁금했던 것은, 여미아와 극시아의 현저히 대조적인 신분과, 두 사람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전혀 다른 색감이었다. 여미아는 너무나 밝고 화사하고 성스럽고 행복해 보였는데, 반대로 극시아는 지나치게 어둡고 우울하고 슬퍼보였던 것이다.
그런 슬픔과 비창한 고독의 빛이 고혹적인 얼굴과 어우러지자 극시아의 낯에서는 여미아와는 다른 기이한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그 후로 한동안 조영은 궁 안에서 어처 극시아의 그림자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조영의 시야에 잡힌 것은, 낙양성의 가을 정취가 제법 눈을 현란하게 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조영이 퇴근하는 길목에서 홀로 기다리던 그녀가 대담하게도 조영의 손목을 쥐고 뭔가를 손아귀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없이 사라졌다. 조영이 펼쳐보니 그것은 곱게 접힌 비단종이였다.
깜짝 놀라 종이를 품에 넣고 집에 와서 급히 펼쳐보니, 아담한 글씨들이 작은 종이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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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2. 9.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