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 : 1 - 5절
“칭찬을 받는 자”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목사님들이 많은데 그런 목사님들의 후임으로 들어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굉장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활하게 교체가 잘 된 교회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을 해서 심지어는 교회가 깨지는 상황까지 가는 교회들이 많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의 후임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 중에 하나가 동안교회라고 김동호 목사님이 시무했던 교회인데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교회 개혁을 외쳤던 분이었기 때문에 교회 개혁을 원하는 분들이 그 교회에 몰려들어서 5,000명이 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동호 목사님이 별안간 그 교회를 떠나서 높은뜻 숭의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동안 교회에 후임 목사님이 들어가셨는데 김동호 목사님이 나가고 나서 반절 정도의 인원이 그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교회적으로 보면 큰 위기일 수밖에 없었는데 후임 목사님께서 위기의 순간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그 위기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면 그깟 새벽기도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나간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설득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게 기도를 했더니 다시 회복이 되어서 한 5,000명 정도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서 파트 타임으로 목회를 하고 있던 한 목회자와 친분이 있어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세워지고 건강해 지는 교회가 되려면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야 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그와 같은 은혜를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을 잘 말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한 교회들도 수가 날마다 더해가는 교회가 될 수 있었는데 그 원인을 보면 믿음이 굳세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었냐면 우리가 앞에서 봤던 것처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적절한 판단을 내려서 그 규례를 따르도록 전하게 하였더니 그것을 통해 믿음이 굳건해져서 수가 날마다 더해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규례가 대단한 것이었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내용이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할례까지 받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기본적인 것을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 것” 이 정도만 지켜도 된다고 했더니 그 규례가 그 사람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서 그 믿음을 통해 교인의 수가 날마다 더해가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것에 대해서 듣고 순종을 했더니 그것으로 인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복된 교회들이 다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각자의 생각대로, 각자의 마음대로, 각자의 의견대로, 각자가 옳게 생각하는 대로 하게 되면 아무리 그 생각이 옳고 바르고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그런 것들이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고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있어서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결정한 내용들이나 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세자들이,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해 나가는 일에 마음을 같이 해서 함께 동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교단의 총회나 지방회의 결의 사항이나 개교회의 사무총회에서 결정된 것이 성경을 벗어난 결정이 아니라면 온전히 순종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 믿음이 굳세어지고 그 교회가 잘 될 수 있는 비결이지 그런 결정에 대해서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계획을 앞세우기 시작을 하면 그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큰 변화는 동행하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는 바나바, 마가 같은 사람들이 함께 동행을 했지만 2차 전도 여행에서는 처음부터는 실라가 동행을 했고 오늘 말씀에 보면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디모데라는 사람을 선택을 해서 동행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의 주목적이 15장 36절에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이런 목적을 두고서 출발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1차 여행 때 방문을 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고니온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반대하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이 돌로 치려는 것을 알고 도망을 쳤던 곳이고, 루스드라는 발을 쓰지 못했던 사람을 걷게 하고 나서 바나바는 제우스가, 바울은 헤르메스가 될 뻔 했던 곳입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 경험 했던 두 곳에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2차 전도 여행 때 봤더니 두 곳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던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디모데라는 사람이 두 곳 모두에서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었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면 1,2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어머니는 유대 여자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라는 것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밖에는 다른 표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디모데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 보면 디모데를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이 정말 사랑하고 아들처럼 생각할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던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표현을 우리는 우습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신실하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도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결 같다는 것이고,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좋은 표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디모데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조각가 다낵커라는 사람은 신실한 기독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꿈꾸고 있던 예수님상을 조각하기로 마음을 먹고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작품을 완성한 다낵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교회학교 학생을 불러다가 물어보았습니다. “얘야, 이 조각의 얼굴이 누군지 알겠니?” 아이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의 대답에 실망한 조각가는 수정 작업에 들어갔고, 2년 후 다시 작품을 수정한 후에 그 학생을 불러다가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조용히 조각을 들여다보며 “이 분은 우리들의 친구 예수님이세요.” 이렇게 대답을 했고, 이 대답을 들은 다낵커는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식이 널리 퍼졌고 마침내 프랑스 당국에서는 프랑스의 신으로 모시는 비너스상을 조각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물론 엄청난 작업비도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낵커는 “나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상을 조각한 사람입니다. 어찌 내 손으로 이방의 더러운 신을 조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신실함이 있어야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영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고,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고, 화장하기 전 다르고 화장 후에 다르고, 교회에서의 모습 다르고 교회 밖의 모습이 다르면 우리는 신실함으로 칭찬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신실한 디모데를 바울이 데려다가 할례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할례는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할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를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할례를 하지 말라고 말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인데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의 혈통을 가지고 있던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 뻔 했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디모데는 할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디모데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9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비슷한 내용인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 2절에 보면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두 말씀의 공통점은 디모데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말씀을 통해 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구원을 받고 그 위로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넘치는 위로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를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디모데 같은 특별한 사람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칭찬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디모데처럼 칭찬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인 우리가 위로 받는 것도 중요하고, 위로 받아야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그 위로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은혜를 흘러 보내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지 굳이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로마서 14장 18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실하게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칭찬을 많이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디모데처럼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서 살다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