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농악보존회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
이 마을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두레 농악패가 존재했습니다.
정초에는 지신밟기를 하고 농사일이 시작되면 두레풍물을 치면서 마을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최은창이라는 걸출한 농악의 명인이 탄생합니다.
대대로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태어난 최은창은 일찍부터 농악에 재주를 보여 16세에 벌써 마을 두레농악의 상쇠를 쳤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면서 마을단위를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연희패에 가담하게 되고 절걸립패에도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하여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고잽이로 비나리꾼으로 쇠꾼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업을 버린 것은 아니어서, 1년 중 농사철에는 평궁리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는 걸립패로 나서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서울에서 남운형을 중심으로 옛 명인들이 다시 모여 만든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농악경연대회 출연요청이 오면 여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최은창의 기억으로 “평택농악” 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것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농악경연대회에서라고 합니다. 이때 그는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구성하여 “평택농악” 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갔습니다. 근근히 유지되던 절걸립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해체됩니다. 이때부터는 고향 평궁리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편 간간히 〈민속극회 남사당〉활동을 하던 중 1980년 평택군으로부터 전국민속경연대회 출연 요청을 받자 다시 단체를 구성합니다. 옛날의 연줄을 통해 서울ㆍ천안ㆍ안성 등지에서 불러온 전문연희패 출신들과 평택군내에서 이름이 나 있던 사람 그리고 평궁리 마을사람들로 단원구성이 이루어 졌지요. 단체의 이름은 역시 〈평택농악〉이었습니다. 경기도 대표로 대회에 나간 〈평택농악〉은 대통령상을 받게되고 이를 계기로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됩니다. 〈평택농악〉이 명실공히 전통적인 웃다리농악의 가락과 판제를 이은 것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평택농악〉은 웃다리농악의 전통을 지키고 이를 다시 전승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성격적인 특징
이미 평택농악의 유래에서 살폈듯이 평택지방은 넓은 소사벌을 배경으로 자연히 농업이 발달하였고, 두레에 의한 마을단위의 풍물도 발달하였다. 한편, 웃다리지역에서는 보다 전문적인 풍물패가 형성되어 나중에는 풍물 자체를 업으로 삼는 직업적인 유랑 연희패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형성된 평택농악은 따라서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최은창이 평생 거주해 온 평궁리 넓게 잡아도 평택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던 마을 두레패 성격의 농악이요, 또 하나는 최은창이 성인이 된 이후 넓은 지역을 유랑하면서 활동하던 전문연희패 성격의 농악이다. 평택농악이 전자의 성격에만 머물렀다면 웃다리 지역을 포괄하는 농악으로서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 했을 것이요, 후자의 성격만 가지고 있었다면 농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두레농악의 대동적 신명을 가지지 못 했을 것이다. 이렇게 평택농악은 그 형성과정상 두레패의 전통과 웃다리 지역 전체를 넘나들던 전문연희패의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평택농악은 마을 두레패의 성격보다는 전문 연희패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현재 평택농악의 기능보유자인 최은창이 주로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했다는 점과 평택농악의 구성방식 그리고 구성원의 주요 인맥에서도 나타난다.
가락의 특징
평택농악에 사용되는 가락의 특징은 경기민요를 비롯한 이 지역의 다른 음악의 특징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무겁기보다는 막히지 않는 경쾌함, 구르기 보다는 맺음이 분명한 겹가락, 잔가락의 기교보다는 힘이 있는 속도감 등이 그것이다.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락의 종류는 많지 않지만 한가락 한가락의 변주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판굿의 특징
판굿은 굿패들이 가지고 있는 갖은 기예를 보여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놀이와 진풀이를 순서대로 짜서 마당에서 벌이는 풍물놀이다. 평택농악의 판굿은 빠르고 힘있는 가락에 맞추어 진풀이도 생동감이 넘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전문연희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굿패 구성원 개인의 만족보다는 구경꾼들과 함께 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고정된 진 안에서 행해지는 개인놀이는 생략되고 전체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다양한 진풀이를 보여준다. 특히 다양하게 펼쳐지는 무동놀이(동리)는 평택농악 판굿의 백미다. 맞동리로 시작하는 무동놀이는 던질사위, 3무동, 만경창파 돛대사위, 앞뒤곤두, 5무동의 곡마단과 동거리 등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7무동까지 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위에 든 기예 중 전승되고 있는 것이 일부분에 불과하다.
고사의 발달
평택농악은 결립을 주로 했던 전문연희패의 성격상 고사소리 즉 비나리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현재 평택농악의 기능보유자인 최은창은 현존하는 최고의 비나리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신밟기나 걸립을 할 때, 화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 주기를 비는 사설이 여러군데 들어간다. 이 중 짧고 간단한 것을 지신풀이라고 하며, 마지막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고사상 앞에서 하는 소리를 보통 고사소리 또는 비나리라고 한다. 최은창과 더불어 이성호도 고사의 명인으로 오늘날 사물놀이패 비나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장고잽이이긴 하지만 이세진의 고사소리도 걸쭉하고, 김용래ㆍ김육동ㆍ이세진이 받아주는 뒷소리는 고사꾼의 소리를 푸짐하게 받쳐준다. 김용래가 치는 고사반주 북소리는 정평이 나 있다.
평택농악은 형성, 배경상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물굿의 형태도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마을단위의 풍물형태로는 두레굿과 지신밟기가 있고, 전문연희패의 형태로는 걸립굿과 난장굿이 있다.
두레굿은 두레노동을 할때 협동심을 북돋우고 힘든 노동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힘을 내게 하는역할을 한다. 두레굿은 모내기에서 시작되어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날까지 주로 행해졌다.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백중날은 백중놀이또는 호미씻이라고 하여 마을 공터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풍물을 치며 걸판지게 논다. 그 동안에 힘들었던 노동의 피로를 마음껏 풀어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두레굿 또는 두레풍물이라 한다.
지신밟기는 정초에 마을의 풍물패가 모여 집집마다 돌면서 풍물을 치고 지신을 밟아주며 고사를 해주고 쌀과 돈을 추렴하는 세시풍속이다. 이것은 개인에게는 잡귀 잡신을 물리치고 액을 막아 주며 한해 동안의 재수 소망을 빌어 주는 뜻이 있고, 마을 전체에는 마을의 안녕을 빌고 마을의 공동 제의나 행사에 사용할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다.
1) 촌걸립 : 어떤 공동체에서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거나 특별한 경비를 모을 필요가 있을때, 전문연희패와 계약을 맺는다. 연희패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고사를 통해 축원 등을 해 주며 그 대가로 돈이나 곡식을 받는다. 모아진 재물은 걸립을 요청한 쪽과 연희패가 계약에서 정한 지분대로 나눈다. 이를촌걸립이라 하며, 이런 일을 하는 풍물패를 촌걸립패라 한다. 옛날에는 이러한 형태의 걸립을 통하여 다리를 놓거나 소방서 같은 공공건물을 짓기도 하고, 심지어 학교를 세우는 일도 했었다고 한다. 대개 30여명의 대식구였다. 이들은 고사도 잘 해야 했지만 그보다는 주로 연희패의 솜씨에 의존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여 줄 화려한 기예를 가지고 있었다. 걸립지역은 대개 한정되어 있었고, 걸립시기도 가을부터 봄 사이의 농한기때 행해졌다. 주로 농촌지역을 돌아다녔기에 촌걸립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2) 절걸립 : 절걸립은 사찰을 수리하거나 중수하는 등 절에서 쓸 비용마련을 위해절과 연희패간에 계약을 맺고 행하는 걸립이다. 연희보다는 고사를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름난 고사꾼들은 대개 절걸립패에 많았다. 판굿을 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았기에, 행중은 대개 7~8명으로 많아야 10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였다. 걸립지역에 제한이 없어 거의 전국을 무대로 떠돌았다. 걸립시기도 제한이 없이 사시사철 행해졌다. 촌보다는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았으며 주로 시장의 상인들을 상대로 하였다.
난장굿
난장이란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날 외에 임시로 특별히 열리는 장을 말한다. 평택지역에서는 주로 명절을 맞아 난장을 텄으니 ‘파일 난장’ ‘백중 난장’ 등이 그것이다. 난장이 열릴 때, 보다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을 끌어보아 시장이 활발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사람들에게 보여줄 꺼리가 필요했다. 이런 목적으로 전문적인 기예를 가진 풍물단체를 불러다가 장터 한가운데서 굿을 놀게 했으니 이것이 난장굿이다. 파일날에 연희를 놀면 파일난장굿이요, 백중날에 놀면 백중난장굿이라 했다. 특히, 파일난장굿을 칠때는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놀이판 한 쪽에 높다랗게 등대를 세워놓고 굿을 놀았으니 이를 등대굿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오늘날 평택농악의 발표공연 때 행하는 파일난장굿은 바로 이것을 재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