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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 스스로 판 무덤이요,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만구 이늠의 무소불위, 안하무인격의 행동에 더 이상은 당하고 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더는 견딜 여력도 없어져버렸다.
결혼 5년째, 어떻게 보면 우리는 아직 신혼이랄 수도 있는데 만년의 싱글인 이 자는 체면도, 염체도 없이 마치 제 집 드나들드끼 불쑥 불쑥 들어온다. 술에 한 잔 나께 째린 늦은 밤에도 남의 안방을 턱 차지하고는 마치 제 마누라 부르듯이, 아니 옆집 개 부르듯이 우리 마누라를 떡 불러서는,
"썬한 맥주 한 꼬뿌 갖고 오보소"
"쏙 풀고로 맵삭하게 국시기 함 끓이보소, 콩나물 팍팍 넣고"
이 정도라면 남녀평등이 우떻고 삿는 요즘 세상에서 보통의 필부(匹夫)가 밤늦게 한잔하고 들어가서 자기 마누라한테라도 대놓고 요구하기 힘든 일들이 아닌가 말이다.
주말에 낚시라도 함 갈라치면 으레 우리 마누라에게 전화질이다.
"제수씨! 올징에 낚시갈라카는데 함께 바람이나 쐬로 안갈라요?"
'함께 바람 쐬러' 말이야 좋다.
아니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게 어때서' 하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만구의 이 말은 정말 헛소리에 지나지 않고 실상은 먹고 마시는 뒤치닥거리 하러 가자는 것이다. 더 웃기지도 않는 사실은, 우리 마누라 자신이 가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어도 싫은 내색 한번 못하고 꼼짝없이 따라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누라가 만구에 대해 고양이 앞에 쥐처럼 되어버린 사연은 좀 있다가 말해드리겠으니 잠깐만 기다려 보시고 -
우리 마누라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 보고 있어도 내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는데 작년부터는 내게 하는 행동도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마치 대원군 불알싸게라도 얻은 거 마냥 길길이 날뛰는 모양을 더는 보기가 힘들어졌다. 뻑 하면 '목이 마르다' '한 잔 사라' 이러 지를 않나, 그것조차 언제라도 그냥 처먹는 법이 없었다. '안주가 시원찮다' '자기 파트너가 못하다'면서 사사건건 트집이었다.
그늠이 우리 마누라와 나를 괴롭힌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자면 며칠 밤을 세워도 모자라겠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왔다. 한데 더 이상은 참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
얼마 전, 봄비가 꼽꼽하게 내리던 어느 날, 얼라도 즈거 이모가 데리고 가버려서 달랑 부부만 남게 되다 보니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그슥 맘이 동하여 막 잔치를 함 벌릴라카는 판에 대문이 활짝 열렸다. 마음도 급했을뿐더러 누가 늠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오겠나 싶었기에 미처 잠궈지 못한 우리의 불찰도 있긴했다. 물론 만구 그늠이 노크도 없이 넘집 대문을 화들짝 열고 들어온 것을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늠의 행사에 이전부터 그런 면이 있었으니 이해를 한다 치자. 하지만 지늠이 눈꼽만큼이라도 눈치가 있고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아직도 벌겋게 달아 있는 부부의 얼굴을 보고서 조용히 돌아가 주던지, 최소한 모르는 체는 해주었어야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말이다. 근데 이 늠이 그 자리에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따 벌건 대낮에 낮걸이 함 할라캤던가베"
'내 같은 늠은 비도 찔찔 오는 오늘 같은 날 어데 가서 함 풀꼬?"
"언 늠은 밤에도 못풀어서 바늘로 허벅지를 꼭꼭 찌르며 참는데 이 집은 낮에도 이카는가베"
내사 같은 남자요, 친구니까 그렇다하더라도 지가 말하는 소위 '제수씨' 앞에서 이게 할 말인가 말이다. 그리고는 턱 퍼질러 앉았다.
"제수씨! 잔치는 난주 징에 하고 명태찌짐 한 접시하고 맵삭한 고추찌짐 함 부치보소. 참 막걸리는 주전자 때기로 파는 그거 쫌 사오고요. 다른 막걸리는 영 맛이 아이라서...."
분위기 함 잡아보려다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진 마누라는 그래도 찍 소리 함 못하고 고개를 팍 떨군 체 그저 '예' '예'다. 그리고는 술은 할매가 따라도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라며 제수씨 보고 따르란다. 그때 겉모습은 웃고 있지만 참으로 처연해진 아내의 눈빛의 보게 되었다.
그질로 시작한 술자리는 해가 질 무렵 끝나게 되었다. 만구 이늠이 거실에 몸을 실 눕히려는 것을 살살 달개서 겨우 돌려보내고는 만구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나 자신과 늘상 당하고만 있는 불쌍한 아내를 생각하며 지금 내가 할 놀라운 발설로 인하여 마누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순간의 문제임을 위안으로 삼으며 비밀 한 가지를 털어놓을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빙구 엄마!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용서하래이 고마!"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 만구와 나는 사실, 낚시터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둘 다 총각으로서 객지에 나와 살아가는 처지라 어디 한곳 구속받을 데가 없는 몸이었다. 평일 퇴근 후에도 그렇고 주말에도 그렇고 의기만 투합 되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집안의 장손인 나더러 빨리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집요한 강요는 참으로 피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다 인연이란 것이 있는 법이며, 혼사가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닌 일일텐데. 하여간 일단 선만 보고 끝을 내려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합성동터미널 구내다방에서 처음 만난 그 처자에게 덜컥 맘을 뺏겨버린 것이었다. 라디오도 재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오지마을 출신인 그 처녀의 순수함에 나도 모르게 그냥 빠져버렸다.
신혼의 달콤함이야 말할 수 없었다. 가정형편상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양반집안이라 예의 바르고 착하게 성장한 아내였다. 단칸방에 차려진 새 살림은 마치 소꼽놀이처럼 재미가 있었다. 단짝으로 붙어 다니던 만구도 우리가 신혼재미를 만끽하라는 배려였는지 자주 찾지를 않았다. 돌이켜보아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낚시길이었다. 겁이 많아서 혼자 집에 있기도 무섭고 또한 생물을 잡는 것도 그렇게 탐탁지 않게 여겨 낚시하러 가는 것을 극구 말렸다. 만구도 나의 낚시에 대한 소망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로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말은 못하고 그저 침만 꿀뚝꿀뚝 삼키고 있었다. 만구라는 지금의 이 원수 같은 늠이 그때는 그렇게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그런 자였다. 그랬던 그 자가 180도 바뀌게 된 것이 바로 나의 순간적인 판단 미스 때문이었는데 -
어느 날 만구를 만나서 그간 나의 고민을 털어놨다.
"다른 거는 다 존데 낚시를 마음대로 몬 댕기고로 하니 딱 죽겄다. 무신 존 수가 없으까?" 그 말이 불행의 서막이었다.
"사람 사는 기 다 졸 수가 있건나? 하나씩은 포기도 하민서 살아야지"
"방법이 영 없다 말이가?"
"엄기야 와 엄겐노 마는 이뿌고 착한 마누라하고 살다보마 낚시 같은 하잖은 취미 하나야 당연히 포기하고 살아야지, 세상에 존 것을 다할라카마 그거는 나쁜 심뽄기라" 이렇게 만구가 실실 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이의 작전에 내가 완전히 말려간 택이었다.
"존 방법이라! 어서 말 쫌 해바라"
"그냥 그래 살아라카이" 내가 더욱 바짝 달았다.
"잘 되모 내가 한잔 나끼 사께"
"허, 거참! 친구가 이러침 어렵다 샀는 거로 외면할 수도 없고. 또 우리 순진한 제수씨를 생각하모 내가 방법을 칼카주서도 안되고.....거 참! 진퇴양난일세"
"개안타, 방법을 말 해바라"
"이거 한 방이모 낚시도 맘대로 댕기고 평생 꽉 잡고 살기는 하겠지만......"
만구가 '평생'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지만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윽고 만구가 입을 열었다.
"니하고 내하고 입만 꽉 다물고 비밀을 지키모 댈끼다. 내가 느거 마누라 약점을 하나 콱 잡아 줄낀께네 니도 우옛기나 맘 약하게 묵지말고 단디해라"
"알았다"
"그래고 이번 건의 의뢰인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댈끼다. 니가 내한테 요구를 해서 내가 들어주는 것이지 내가 먼저 우짜자 마자 캔 것은 절대 아니데이. 즉, 다시 말해서 나는 니 부탁을 받고 순수하게 도와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인기라"
"알았다. 내가 도장이라도 찍으라카마 찍으께" 낚시병이 도져서 그랬던지 당시는 눈에 뭐가 쒸여도 단단히 쒸였던 것 같다.
"낼 징에 느거 집에서 보자"
그때가 신혼 3개월이 약간 안되었을 무렵이었다.
다음날 저녁 -
만구가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하여 와서 턱 풀어놓으며
"제수씨! 결혼하고 살림한다고 고생이 많은데 내 오늘은 제수씨 기분 좀 풀어줄라꼬 맛있는 것도 많이 사오고 했으니 맘 푹 놓고 친구랑 셋이서 한 잔 하입시더"
"만구야, 우리 집사람은 밀밭 두둑만 밟아도 취해뿌는 사람인데....."
"개안타, 자꾸 묵으사마 술도 느는기라. 그래고 늠들이 카는데 밀밭에서 그슥 하모 억시 좋다샀던데 이집도 담에 그래 함 해볼라카마 밀밭 근처만 가도 취해가지고야 되건나. 제수씨 몸은 아직 개안치요?"
혹시 우리 마누라가 임신 중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묻는 것 같았다. 이렇듯 당시의 만구는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괜찮은 인간이었다. 수줍음 많은 아내는 대답 대신 -
"한 잔만 묵으모 취해뿔낀데예. 혹시 실수하마 우짜지예?" 하며 잔을 받았다.
"그렇게 쭉 - 넘가 보소. 한 잔만 넘어가면 갠찮을끼라요" 안주를 집어주며 거듭 만구가 잔을 독촉했다. 두 잔을 마신 아내는 볼이 볼그스레해지며 눈동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마치 연체동물 마냥 흐물흐물 해지고 있는데 만구가 뭘 섞더니 각각 한 잔씩 앞에 놓고 건배를 제의한다. 거의 비몽사몽간에 들이킨 아내는 완전히 비(非)생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놀랍게도 완벽하게 제조된 폭탄주였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술 중에서 가장 빨리 반응이 온다는 그 폭탄주! 인간이 취하기에 최적의 알콜도수라는 그 폭탄주! 모두가 점잔을 떨고 있어 분위기가 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폭탄주를 돌릴 때, 폭탄주의 첫잔 한잔씩이 좌중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먼저 마신 자가 벌써 화장지를 머리에 두르고 테이블로 기어올라간다는 그 폭탄주를 아내가 마셔버린 것이다.
"만구야 너무 심한 거 아니가? 우리 마누라 죽을라"
"낚시길 영 포기할라카나? 얼쭉 다 되가는데 와 맘 약한 소리를 해샀노. 잔주꾸 있어바라"
하면서 만구가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니 나온다.
"인자 고마 제수씨 안방에 모시다가 눕히라" 시체같은 아내를 안아서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방안에서 찌른내가 확 난다. 이불이며 방바닥이 온통 흥건하다.
"만구야! 니가 지금 므슨 짓을 핸것꼬?"
"잔소리 말고 그 옆에다가 그냥 제수씨 눕혀놓고 나온나 마! 내캉 한 잔 더하고 거실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어나마 만사 오케이다"
그 지랄용천의 밤이 가고 새날이 밝았다.
"친구야! 인자 느거 마누라 깨배라" 결혼 후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잔 만구가 그전과는 달리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
"알았다. 깨배께"
"보소, 정신이 드나 우짜노" 하면서 안방문을 막 열고 들어서는데 만구가 따라 들어온다.
"제수씨 어제 과음하더마는 몸은 갠찮응교?"
만구가 먼저 코를 막고 못볼 것을 봤다는 듯이 화들짝 놀랬다.
"옴마나 이기 다 머꼬?" 만구의 말에 반사적으로 내가 나섰다.
"이거는 엊저녁 만구 니가......" 라고 말하는 찰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운 만구의 눈은 처음 보았다.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닫아버렸다.
"친구야! 내가 어제 제수씨 한테 술을 많이 맥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래까지야 될 줄 알았나? 제수씨가 화장실 갈 기운도 없던가베" 그때서야 상황을 눈치챈 마누라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만구가 나에게 눈을 껌뻑 껌뻑하며 그만 나가자 한다. 거실로 나온 만구! 안방으로 보고 큰소리로 말한다.
"제수씨 몸조리 하이소. 갠히 내가 제수씨 기분 풀어줄라카다가 이래 되뿐네요" 만구가 복장을 챙기고 집을 나서며 낮게 속삭인다.
"친구야 내 갈란다. 이제 므슨 감이 좀 잡히제? 그런거트마 어문 소리 하저 말고 처신을 잘해라" 만구가 떠나가도록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만구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했지 않는가.
다음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제일 먼저 바뀐 것은 우리 마누라의 태도였다. 특히 만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도 그런 쥐가 없었다. 해질 무렵 아니면 아침나절, 새벽 등 언제든지 만구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며 '친구야! 낚시 가자' 하면 '조심해서 잘 댕기 오이소'였다. 그전 같으면 어쨌든 난관이 많았을 일이 그렇게 쉽게 쉽게 풀려가고 있었다. 겁이 많은 새색시가 혼자서 하룻밤을 지세야 하는 것은 그전과 변함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무섭다'는 말은 일체 나오지 않았다. 또한 생물을 잡는 것은 해로우므로 낚시를 가지마라는 말도 전혀 없었다.
내가 새벽까지 마시고 들어가는 날에도 역시 별스런 잔소리를 들어본 기억은 없다.
'너무 많이 잡수저 마이소. 몸 베립니더'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만구의 처신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완장'을 하나 찬 것처럼 사람이 변했다. 밤늦게 찾아와서는 마치 자기 마누라 부리듯 했다. 허긴 자기도 우리 마누라에 대하여 큰 약점을 하나 잡고 있으니 그 정도 만구의 변화는 사단이 벌어지던 그날부터 전혀 각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만구가 나와 내 마누라 사이의 약점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
어느 날 저녁, 만구가 술을 한 잔 사라했다. 그쯤이야 예사로운 일이어서 별 생각 없이 응했는데 평상시 아무 군말 없이 사주는 대로 잘 처먹던 그늠이 까탈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구 니늠이 와이카노?"
"와 이카다이? 심들게 낚시길 피이게 도와주었더니만 대접이 영 썬찮네. 늠 은공도 모리고 말이야" 느거 마누라가 그렇게 당한 일을 여차하면 확 불어버릴 수도 있다는 태도였다. '모든 것이 너의 간절한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는 않았겠지?' 이런 협박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꼽지만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다, 만구야 내가 잠시 생각이 짧았다. 안주가 니 입맛에 안맞제? 좀 나슨 집으로 옮기자" 그렇게 나는 만구의 따까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각각 만구에게 야무치게 물리는 바람에 당해온 그 험난했던 세월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런데 그 비오는 날의 <잔치방해사건>때 아내의 눈망울을 보고 맘을 고쳐먹었다. 나는 내 죄의 벌을 받는다지만 아내는 무엇인가? 왜 만구에게까지 이렇게 험난한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가?
이리하여 모든 것을 아내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한 동안 말이 없던 아내!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허기야 왜 안그럴까? 4년에 걸쳐 만구로부터 당한 그 모진 시집살이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가 보다. 물론 그 가혹한 시집살이에는 나도 가세했음을 부인할 수 없고.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던 아내가 눈물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 보았다가 까딱하면 타죽을 뻔했다. 어쨌든 아내는 이미, 시집 올 때의 그 천진무구한 처자가 아닌, 아줌마 경력 5년의 여자임을 상기했어야 했다.
"살아온 날 보다는 앞으로 살날이 많은 거로 위안 삼을랍니더"
그 말이 무슨 뜻이었던 지는 천천히 알게 되었다. 정말로 아주 천천히, 두고두고.
그때였다.
넘 '잔치'를 방해해놓고 낫게 째려서는 집으로 돌아가 자빠져 자는 줄 알았던 만구가 상당히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다.
"낮에는 잔치한다꼬 분위기 좋더마는 시방은 와이래 분위기가 팍 주저 안자뿐노? 이 집은 낮걸이 전문인가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뜻으로 내가 눈을 껌뻑껌뻑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제수씨! 한 상 나끼 채리보소"
"......."
같잖다는 듯이 만구 한번, 즈거 신랑 한번 째려보더마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져주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에게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만구한테 통보해주라는 시간을 준 것일테다. 아직도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만구가 말한다.
"어데 아녀자가 신랑 눈을 똑바로 치다보고 그라꼬, 어데서 배운 버릇이꼬?"
"만구야! 마, 인자 끝났다. 올징에 다 털어나뿟으니 니도 본 정신으로 돌아오는 기 졸끼다"
순간, 만구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술이 확 깨는지 두 주먹으로 눈을 막 비비며 묻는다.
"니 시방, 머시라 캔노?"
"어문 소리 그만하고 내한테도 이제 가오 고마 잡는기 졸끼다. 우리 마누라가 앞으로 니한테 우짤낀지는 내도 모리겠고......."
그때 부엌에서 마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소, 빙구 아부지! 술상 다 봤는데 이제 들고 가까예? 올 징에는 폭탄주 한잔씩 팍팍 해보이시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만구가 일어섰다. 그 동작은 마치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어사출두할 때, 눈치빠른 이웃마을의 사또들이 사라지는 순간을 보는 듯 했다.
"와예, 만구씨! 그냥 갈라꼬예? 파전도 맵삭하게 꿉고 나중에 국시기도 얼큰하게 끓일낀데예"
"아입니더, 뒤에 오서 묵지예. 올징에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서.........." 만구 이늠이 뒤도 안돌아보고 내빼버렸다.
그렇게 집을 나간 만구는 몇 해가 흐른 이즉지 우리집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하여 존 술을 사주겠다고 나오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존 술이 있으면 뭐하나 내가 땡 하면 들어가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마누라 허리 주물러줘야 하는거로.
'그때 두 양반 낚시 따라다니면서 찬이슬 맞아 들었던 골병이 이제사 도지는 갑소. 아이고 허리야, 허리야! 그나저나 내가 만구 그 양반을 함 만나야 되낀데'
2005. 1. 7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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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아직도 그때 그일로 땡하면 들어가서 밥하고 마눌님 허리 주무르고 잇는건 아니겟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