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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네째 날(9월 6일)
(31)
명선교 유감
서생포 동첨절제사가 있는 진지의 아랫마을이라 해서 진하(鎭下)라 했다는 마을.
늦게 도착하고 늦게 먹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 '늦게'기록의 정자 주변을 살펴보았다.
울창한 송림 사이에 웰빙 스포츠시설이 있고 구기장도 있고 넓은 세면대,개수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 해수욕철에는 천막 야영장으로도 활용되는 공원인 듯.
철은 지났지만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울산 제1의(큰) 해수욕장으로 여름이면 울산은 물론 부산고객까지 많이 불러들인단다.
해수욕장 개장 전에는 멸치 어장으로 알려졌던 마을이 1970년대에 길이2km 폭100m의
해수욕장 개장으로 급격히 커진 마을이란다.
민박과 펜션, 여관과 모텔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것이 예외 없는 공식인가.
허전한 모래밭을 걸어 명선교 앞 까지 갔다.
천성산(경남 양산)에서 발원해 회야호 넓은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마지막으로 서생면
(진하리)과 온산읍(강양리)을 가르며 동해로 뛰어드는 회야강 위에 놓인 다리다.
"진하와 강양을 연결하는 결속의 다리,
지역을 이어주는 화합의 장,
이 곳을 건너면 우리는 하나가 된다"
명선교를 띄워주는 표석의 글이다.
진하리와 강양리,서생면과 온산읍,남과 북을 잇는 다리가 맞지만 여기가 분쟁지역인가.
썰렁한 개그 같은 느낌이다.
휴전선 어느 다리 옆에 서있어야 하는데 위치를 잘못 선정한 것 같다.
울주군 또는 울산광역시의 통근 투자(100억)로 세운 것이 아니고 두 마을의 공동발전과
번영을 위한다는 명목의 원전특별지원금으로 건립되었다는 다리.
"비상하는 한쌍의 학으로 형상화한 주탑과 케이블은 울주군의 발전과 미래상의 상징"이
라고 하는 이 다리가 바로 신고리 원전 5.6기 건설의 사례품에 다름 아닐 것이다.
건설방식에 진하리, 곧 서생면의 손을 들어줬다잖않은가.
길이145m, 폭4.5m, 높이 17.5m에 주탑이 27m인 울주, 울산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사장
인도교의 명물 반열에 들 다리.
진하와 강양은 새 원전계획 덕에 명품다리를 소유한 마을들이 되었고 울주군은 새로운
랜드마크를 거저 갖게 된 셈이다.
양 마을 주민의 손익(득실)은 어떠할까.
코앞에 두고 30분을 허비해야 했던 양 안의 주민들.
5분으로 단축되었다면 25분 때문에 뜸했던 양쪽 마을민의 왕래가 빈번해짐으로서 거저
생긴 25분이 주는 효과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날로 인기를 더해간다는 해수욕장마을(진하)과 옛 면소재지였다는 자부심마을(강양)에.
명선인도교에는 장애인 노약자를 배려한 승강기도 양쪽에 설치되어 있다.
장애인 우대는 배려의 덕목을 넘어서 시민권차원이기 때문인지 기본으로 되어 있다.
노약자는 장애인 우대 차량에 무임 승차한 꼴이지만.
(비록 2012년 9월 6일 아침 8현재 한쪽은 고장상태지만)
바닷길이 열린다는 명선도가 지근이고 하구 회야강 양안에 정박중인 진하항(어촌정주
어항)과 강양항(소규모어항) 어선들이 대치중인 옛 수군함정들을 상상해 보게 했다.
온산읍의 고민일 수 있다
온산읍(溫山邑) 땅.
이름의 뜻이 회야강(回夜江) 어귀의 양지 바른 마을이라는 강양리(江陽)로 갔다.
한 때 면소재지였던 후광인지 온산읍에서 현 면소재지 덕신리 다음으로 큰 마을이란다.
곧 국가산업단지에 막힐 것을 예상하면서도 해안 주택 골목길로 들어섰다.
개발된 텃밭 뒷산을 넘는 지역민들의 해안길이 있을 듯 해서 였는데 마침 밭에서 내려
오는 젊은 여인이 동의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비록 낮은 산이라도 모처럼 산을 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다듬어진 산길은 얼마 못가 한 무덤 앞에서 끊기고 희미한 흔적만 이어갔다.
후손들의 산소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흔적도 자주 끊기는 것으로 미루어 산나물꾼들의 길일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군부대의 출입제한 경고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 등산로는 없다.
평생을 산과 함께 살아온 늙은이가 황당함을 느끼며 되돌아 내려와야 했다.
그 여인은 늙은 길손에게 왜 그랬을까.
체력보다 귀한 1시간여를 낭비한 것이 아쉬웠다.
해안을 따라 난 송림 우거진 길을 얼마쯤 걷다가 길가의 쓰레기 줍는 두 여인을 만났다.
강양의 낙천적이고 매사에 긍적적인 경인생(63세) 유씨와 인상대로 새침데기 김씨.
일당 2만원 용돈 받으며 소풍다니는 행복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화합형 유씨는 트러블
슈터 기질인데 보배가 묻혀 있는 것 아닌지.
초코파이 하나씩 주고 김밥과 배, 곱절로 받았다.
공단이 없다면 지방어항 우봉항으로 이어졌을 길인데 신한기계에 막혔다.
이미 거쳐온 거제시 옥포 대우조선해양(DSME)의 자회사로 해양 거주구(居住區/Living
Quarters)제조회사다.
어항도 마을도 모두 폐쇠 또는 이주했고 도로도 끊겨 31번국도 당월삼거리로 밀려난다.
아마, 31번국도도 많이 밀렸을 것이다.
도장작업중 기상악화, 돌풍에 의해 페인트가 비산하는지, 회사 주위 도로변 주차차량에
피해가 발생해도 회사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합법적인 작업이니까 피해를 각오하고 주차하라는 배짱에 다름 아니다.
이 지역 거주민의 삶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안내판이다.
신한기계 정문을 거쳐야 도로로 갈 수 있다.
68세라는 정문 수위 김씨는 10년 연상의 길손에게 예의 바르게 호의적이었다.
얼음 냉수를 주고 길도 안내하고.
연간 계약직인가 늙은이라도 건강하면 다음해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단다.
건강이 여의주(如意珠)다.
외지인은 물론 온산읍민에게도 1970년대 이후 온산은 바다가 없는 내륙이다.
13개 법정리 중에서 8개 리(우봉, 당월, 원산, 이진, 대정, 산암, 방도, 처용)가 폐리 또는
1~9세대(1~19명)씩 잔존하고 5개 리(덕신, 강양, 삼평, 학남, 화산)가 있을 뿐이다.
이 중에도 상당 부분이 사라질 운명이다.
이에 반해 인구는 작은 군에 해당하는 10.500여 세대에 25,000여명에 육박한다.
240여 업체의 연간 총생산액이 18조원에 달한다니 공단 유치에 혈안일 수 밖에.
패전후 일본은 복구에 일로매진하여 잘 살게 되었다.
메이지(明治)시대에 300 :1, 다이쇼(大正) 초기 100 :1이던 일본의 대학졸업자수가 5 :1
비율로 폭증했다.
"돌을 던지면 대졸자가 맞는다(石を 投げれば 大卒に あたる)"는 말이 나돌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현장노동력(blue collar)의 절대부족현상이 왔다.
육체노동력이 있는 지역을 찾아가는 유목공장(遊牧)의 폭증으로 지방도 고학력시대를
맞음으로서 공해산업, 소위 3D업종이 위기에 처해졌다.
그들을 구제해준 그들의 구세주는 박정희 김종필의 5.16쿠데타정권이다.
거만하게 목에 힘주고 보다 유익한 조건으로 선별해 받아와도 고맙기 그지없을 그들의
공해를 비럭질하듯 모조리 들여왔으니까.
제이의 이완용을 자처하며.
세월이 얼마쯤 흐른 후 같은 현상이 한국에서 재현되었다.
일본은 박정희를 비롯한 한국의 충신들이 구해주었으나 한국을 구할 충신은 없다.
그래서 유목공장부지로 외국을 택했으나 일본에서 발생한 공식 때문에 애를 먹는다.
외국에서 해결사들을 대폭 데려왔으나 미구에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온산읍의 고민일 수 있다.
십년 세월에 차곡차고 쌓인 빚 어찌할까
거대 국가산업단지 답게 별의별 대형차량들이 넓은 도로를 질주하지만 별도로 인도도
있어서 걷는데는 지장이 없다.
한국제지를 지나 온산역과 사거리, 온산항사거리도 지나 처용리의 공사중인 온산-두왕
간 도로에 들어섰다가 쫓겨났다.
울산자유무역지역과 신일반산업단지로 묶여 텅 빈 처용리 지역이다.
울산의 도심지역 해인에 내가 걸을 길은 없다.
31번국도 따라 마냥 가면 되지만 아주 건조한 선택이다.
통과 방법과 코스를 궁리하며 걷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울산의 청엽 김제석(靑葉金濟石/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 72번글 참조)으로부터다.
간밤에 통화했으나 휴대폰이 되다말다 해서 포기했는데.
지체없이 달려온 그는 GS25 울산덕하점(장터삼거리) 앞에서 나를 픽업했다.
작년(2011년) 3월, 75일간의 이베리아 반도길 떠나기 직전에 들렀으니까 1년반 만이다.
늘 서울 늙은이를 싱싱한 울산회로 포식하게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닷가로 달린 것인데 그림의 떡처럼 되어있는 해안구간을 생략하게
하기 위해 점프했으며 그의 현명한 배려다.
도착한 곳은 마을 입구에 당산제를 지내는 당집(堂舍)이 있었다 해서 '당사리'라 한다는
마을의 해변.
울산광역시 북구의 지방어항이다.
화려한 '당사 자연산 직판장' 건물이 새로 들어서서 회 마니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울산광역시 서적, 종합교재사를 경영하고 야생화와 분재 모임 울산초목회 회장인 그는
치밀한 분이다.
당사항에도 이미 예약을 해놓은 듯 반갑게 맞는 호스트.
회는 이따금 먹는데도 매번 생소한 음식처럼 느껴진다.
고기 이름도 먹는 방식도 맛도.
울산이라는 도시도 그렇다.
1970년대 중반, 현대자동차 신차를 인수하러 온 것을 시작으로 제법 들른 곳이다.
푸짐한 잡고기로 이름난 방어진의 어떤 횟집도 갔고, 밤중에 장생포의 고래고기 거리도
거닐었고, 태화강가 어느 결혼식장에 까지 왔는데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괴이쩍게도
매번 생소하다.
김제석과도 시내에서 수차 함께 식사했지만 역시 아득하다.
올 때마다 급격하게 변한 모습이라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일까.
울산의 도시계획 지도를 살펴보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낯선 도시가 될 것 같다.
워낙 많은 변화가 예정되어 있으니까.
이와 달리 산에서 만났거나 산과 곤련해 만난 사람과 그 산에 대한 기억은 늘 또렷하다.
김제석이 그러하고 간월산 자락(울주군 상북면) 배내골의 여인양(메뉴'백두대간과아홉
정맥' 68번글 참조)이 최근의 일 처럼 느껴진다.
뇌 구조가 편파적으로 경도되어 있나.
비록 부분적으로는 파괴될 망정 의구한 산이라 그럴 것이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기지만 싱싱한 자연산으로 포식했다.
부산 L과의 식사 이후 처음 겸상이 소주를 곁들여서인지 거나하게 행복해지는 듯 했다.
10년 전 12월21일 이후 강산이 변할 세월에 그에게 진 빚이 차곡차곡 쌓였는데 갚을 길
없이 늙어만 가니 어찌하면 좋을까.
국가어항 정자항 미스터리
김제석과 작별한 시각은 15시 15분,
바쁜 그가 나를 위해 3시간여를 바쳤다.
이 곳 강동축구장이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때 터키팀의 훈련캠프였던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가, 10년의 세월에도 안내판을 철거는 커녕 어떻게 관리하는지
퇴색도 하지 않고 선명하다.
당사항 횟집에서 알려준 대로 마을민만의 해안길로 우가항까지 걷기를 다시 이어갔다.
유포봉수대(柳浦烽燧臺/울산광역시 기념물제13호)가 있는 우가산(牛家山)자락에 있다
해서 우가라는 마을의 소규모어항이다.
'강동사랑길'이 있나.
우가항에서 확인한 것은 정자에서 금천까지 7개구간으로 나누어 구간마다 다른 테마를
부여했다는 것.
애잔하기도 하고 그럴싸한 테마들이 언젠가는 전설(설화)로 갈아입을 수도 있겠다.
당사에서 정자까지는 5개 구간인데 일부는 아마 내 가는 길과 겹치기도 할 것 같다.
당장에 그 길(1027번도로?)을 따라야 했는데 '금실정'이야기가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사포마을(흥덕면)에도 있으며 다른 곳에도 더러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일송(二一松) 이야기다.
사연은 다르나 강조하는 결론은 같은.
연리지(連理枝)와 유사한 뜻이다.
금슬(琴瑟/금실의 본딧말)이 좋기 바라나 이일송 나무 옆이 바쁘다.
다시 도로를 떠나 제전마을의 어촌정주어항 제전항(楮田)으로 내려섰다.
구유동(舊柳洞)에 속했으며 예전에 닥밭이 있었다 하여 저전인데 제전으로 읽히고 있다.
원전효과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가 경로당과 어민휴게실이 초라하다.
별점을 좋아했던 곳인가 복성(卜星)마을을 지나 구유동의 다른 어항 판지항으로 갔다.
판지는 해안에 반석이 판자처럼 깔려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나 한자 뜻이 다르다.
판지(判知) 앞 바다 속에 있는 한 바위가 울산광역시기념물제38호로 대접받고 있단다.
'미역바위'(곽암/藿巖)다.
해안의 미역이 자생하는 바위로, 고려태조 왕건이 개국공신인 박윤웅(朴允雄)에게 내린
채지(采地/강동,농소지방)의 일부란다.
"이조 후기의 미역 생산과 관계가 있는 곳으로 당시의 경제사 복원에 중요하며,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가해진 문화재와 구별되는 자연물로서 가치가 있다"하여 문화재가 된 듯.
한데, 어촌정주어항(법정항)에서 해제된 소규모어항(비법정항)인 것으로 미루어 어업이
부실한가.
정자항에 당도했다.
오래 전, 마을 가운데 24그루의 포구나무(느티나무)정자가 있어 정자(亭子)라 하였다는
마을의, 울산광역시에서 방어진과 함께 단 둘인 국가어항이다.
국가어항에 걸맞기 위함인가 대규모 '판지어촌계 수산물구이단지'가 시선을 끈다.
'정자활어직판장'도 '판지수산물구이단지'다.
개인 업소 상호(옥호)가 아닌 집단이 왜 정자동과 무관한 구유동의 한 통(統)에 불과한
꼬마마을 이름을 빌어쓰고 있을까.
외항선의 편의치적선(便宜置籍船/flag of convenience)이 생각났다.
선적이 선주의 국가 아닌, 제도적 편리와 경제적 이익을 주는 나라에 있는 배를 말한다.
우리나라 선박이 외국기를 달고 오대양을 누비는 이유다.
인구 4만명의 경남 함안군에 고급 외제차가 4천여대라는 뉴스도 떠올랐다.
차량등록지방채 구입비용이 서울의 4분의 1에 불과해서 그리로 몰리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이같은 경제적, 제도적 이익과 무관한 차명(借名)을 왜 하고 있을까.
남방파제 일대의 판지 땅 일부가 정자항에 포함되었기 때문일까.
그렇다 해도 왜 판지어촌계?
소규모 마을에 이처럼 거대한 단지를 건설하고 운영할 어촌계를 구성할 인원과 재력이
있기나 한가?
국가어항 정자항의 미스터리(mystery)다.
울산군수와 바꾸지 않는다는 포경선 선장 자리도, 고래잡이의 메카라는 장생포도 옛적
일이 된 이후 울산의 최대, 최고의 번화 어항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정자항.
회 도락가들에게는 그렇겠지만 내게는 다만 번잡할 뿐이었다.
등대는 다양한 형상으로 치장하는 것보다 선박의 안전 항해를 보다 더 도와주는 임무의
완수를 위한 시설의 개선이 더욱 중요하며 경박한 외치보다 내실을 다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매력있는 시각적 효과도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되레 해로운 것이니까.
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어도 모두 보지 못했다는 정자.
정자 없는 정자마을인가.
북쪽 정자해수욕장 끝까지 뒤졌으나 실패했다.
뒤늦게 생각이 들었지만 정자가 있다 해도 울산의 찜질방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디카의 배터리가 죽어가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