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시절 일본서 ‘제주4.3운동’불씨 피운 3인방의 조우
[현장 인터뷰] 김석범 소설가-김명식 시인-강창일 의원, 67주년 4.3추념식서 28년 만에 만남
좌용철 기자 ja3038@hanmail.net 2015년 04월 03일 금요일 13:3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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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67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서 만난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씨(90), 김명식 시인(72), 강창일 의원(64). ⓒ제주의소리
그러니까 28년 전이다. 4.3진상규명 운동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 된 ‘4.3 40주기 추모제’를 작당모의(?)한 3인방이 처음 한 자리에 모인 건 1987년이다.
그 3인방이 제주4.3 발발 67주년이 된 날 한 자리에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일본이 아닌 4.3의 땅, 제주에서다. 제1회 제주4.3평화상을 수상한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씨(90)와 김명식 시인(72), 강창일 국회의원(64) 이야기다.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 그는 192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제주시 삼양 출신이다. 지금도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조선인’ 신분으로 살고 있다.
4.3이 침묵과 금기의 시대였던 1957년 당신의 최초의 4.3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해 일본 사회에 제주4.3의 진상을 알렸다.
1976년 소설 <화산도>를 일본 문예 춘추사 ‘문학계’에 연재하기 시작해 1997년 원고지 3만매 분량의 원고를 탈고,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위 글이나 쓰던 김석범 선생을 꼬드긴 건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강창일 의원(새정치민주연합)과 재일동포 지문날인 거부운동에 앞장섰던 김명식 시인이다.
이들은 이듬해 4.3발발 40년이 되는 해를 그냥 보낼 수 없다며 1년간 ‘4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날에 대해 김석범 선생은 “(김)명식이와 (강)창일이가 찾아와서는 ‘글만 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제는 실천해야 할 때’라는 말을 하는데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1년간 준비한 끝에 ‘40주년 추모제’를 지냈는데, 당시 도쿄에 수백 명이 모일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며 “이게 아마도 4.3진상규명 운동이 양지로 나온 첫 사건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식 시인은 40주년 추모제를 앞둬 지문날인을 거부한 혐의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잘된 일이 됐다. 국내로 들어온 김 시인은 서울과 제주에서 ‘4.3 40주년 추모제’를 이끌어내는 산파 역할을 하게 된다.
김 시인은 ‘4.3 40주기 추모제’를 회고하며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거야. 살아 있는 역사를 만드는 것 이것 역시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로, 살아 있는 자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사실 김 시인은 제주4.3사건과 미국의 책임관계를 저술한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 시리즈를 펴내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 책은 지니기만 해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됐다. 이 책은 훗날 ‘제주4.3연구소’를 설립하는 단초가 된다.
이런 역사를 꿰고 있는 강창일 의원이 “이미 20년 전에 4.3평화상을 만들자고 한 게 명식이 형이다. 30년 전에 미국(당시 미군정)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도 바로 명식이 형”이라고 거들었다.
강 의원은 “1988년 일본에서 진행된 ‘4.3 40주기 추모제’가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 국내에서는 4.3이란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던 때라 일본에서 4.3의 불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라며 “그 일을 계기로 4.3진상 규명운동이 국내외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섯 자녀와 함께 전기도 들지 않는 강원도 산골에서 문명을 거부한 채 살아온 김 시인은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시(詩) 한편을 건넸다. 아무리 은둔 생활을 하는 그지만 4.3과의 질긴 인연은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 90을 넘긴 노(老) 소설가도, 두메산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시인도, 정치판에 뛰어든 역사학자에게도 4.3은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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