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비에스에서 하루 밤을 잘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벌써 며눌아기와 아들은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 과일과 빵등 간식을 준비해 놓았다.
아들은 승민이가 피부가 일어나 응급실로 데리고 나가고 우리는 7시50분경 체크 아웃을 하고 부산 국제 여객선부두로 갔다.
불과 1km 남짓하기 때문에 걸어서 갔다. 저번 규수를 가기위해서 나오고 처음이다. 8시 10분경 도착하니 아들도 벌써 승민
이를 데리고 와 있다. 가이드에게 여권을 주고 아침 식사를 했다. 깔끔하게 먹을 만 하다.
9시50분경 출국수속을 밟고 오로라 호에 승선하였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나 좋고 파도도 덜 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아이들에게 1km의 거리는 가까운 곳이 아닌데 잘도 걷는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보안구역에 들어와서 출발전 한 컷.
오늘 우리가 타고 갈 오로라호이다. 쌍동선으로 250명 정도 타는 작은 선박이다.
쌍동선은 파도에 약하여 멀미가 무척 나는 선박으로 아이들이 고생 좀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10시에 출발한
배는 잘도 달리고 아이들도 잘 참아 냈다.
11시40분경 일본 쓰시마시 히타카츠 국제여객선 부두에 도착하고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12시경이다.
히타카츠항에는 일본 해안경비대 선박들도 정박해 있다. 부두 앞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우동과 밥, 튀김등으로 점심을 들었다.
승민이 수민이는 숟가락이 없어도 젖가락으로 잘 먹는다. 점심을 먹고 전용버스를 타고 13시 만제키바시(万關橋)로 향했다.
대마도는 전체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길이 2차선으로 되어 있는 곳과 좁은 곳은 외길이고 터널이 많았다.
날씨가 너무나 좋아 공기가 맑고 봄꽃이 만발하여 기분이 좋다.
오늘 우리는 히타카츠로 입항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만제키바시를 보고, 이즈하라의
무사거리 니카라이 기념관, 하치만구신사,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본다고 한다.
14:30 만제키바시에 도착하였다. 오늘도 수고가 많은 아들부부.
다리 전의 벚꽃이 만발한 주차장에서 내려 걸어서 남쪽으로 갔다.
대마도는 남북이 이어져 있었으나 선박의 통행이 불편하여 1900년 당시 노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 정부가 인공 운하를 만들어
각종 함선이 통하게 만들었다. 이곳 곳곳에 포대를 설치하고 함정을 은익시키는 등 철저한 전쟁준비를 한 일본함대가 얼마나 용이주도했는지 말하여 준다.
이에 비하여 러시아 발틱함대는 약한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북해에서 출발하였으나 당시 일본과 동맹인 영국에게
시달리고 스에즈 운하 통과도 하지 못해 희망봉을 돌아 전대원이 각종 질병과 기아헤 시달리며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동남아에서 석탄을 가득 실어 속력이 급감하였으니 일본함대에 싸우기전 부터 전세가 기울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리 중간에 포토존 앞에서
온 가족이 기록을 남긴다. 눈이 부시게 햇빛이 강하여 아이들이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다.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본거지는 진해로 1905년 5월 27일 일본 정보선의 러시아 발틱함대 출현 보고를 받은
도고는 '날씨는 맑고 파도는 높다' 라는 말을 남기고 출항하여 해전에 임하게 된다. 일본은 저속과 사기가
떨어진 발틱함대에 빠른 기동력과 정확한 포격술, 그리고 도고 턴(T字 戰法)에 의한 전략전술을 이용하여
발틱함대를 궤멸 시킴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계획에 더욱 매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대한해협과 일본 해군의 전진기지에 오게 되어 감회가 깊다.
1980년대 말부터 일본의 급속한 해군 성장을 눈여겨 보고 일본 자위함대 기지 곳곳과 자위함대사령부 상황실을 보면서 느낀 바가 컸던
나로서는 이러한 곳을 방문하게 되어 옛 생각이 새롭게 다시 난다.
14:50 만관교 끝의 쉼터에 오니 안내판과 기념비도 있다. 만관교 안내를 다시한번 읽어 본다.
옛날 운하가 없을 때는 배를 끌어올려 넘기는 식으로 통행을 했던 모양이다.
15:10 이즈하라 하치만궁 앞의 주차장에서 내려서 이곳 주위를 도보로 돌아보게 된다.
옛날 이즈하라에는 성과 성주를 보호하는 사무라이 들이 있었으면 이 사무라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보존하여 사무라이 마을로
남겨 둔 곳이 ‘나카무라지구’ 이다.
안내판을 보니 보다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거리는 현지인은 전혀 보이지가 않고 한국관광객만 차례로 들랑거린다.
무사거리 입구 집 안에 무사의 동상이 있다. '소 요시토시' 라고 한다.
안내자의 설명은 전혀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의 주요 인물이라 정리해 본다.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년-1615년 1월 31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며 다이묘로
소(宗) 가문의 제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이다.
* 다이묘라는 칭호는 본래 오오나누시(大名主)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생긴 것이다. 나누시란 말 그대로 "이름을 가진 자",
즉 봉건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씨를 칭할 수 있는 한 마을의 실권자를 뜻하고, 여기에 크다는 의미가 붙어 규모가 커지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는 호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 쓰시마 후추 번(일본어: 対馬府中藩)은 이즈하라 번(厳原藩)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는 쓰시마 번으로 불릴 때가 많다.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300번(藩)의 하나.
그는 임진왜란시 선봉인 제1군을 이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영향으로 카톨릭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다리오로 그의
사위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는 그의 아내이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격변을 거치지만 조선과 일본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한
인물로 보이나 조선에서는 교활한 자로 여겼던 자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나 일본은 도쿠가와 이예야스 파(동군)과 이시다 미츠나리 파(서군)로 갈라져
서로 권력투쟁을 하여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참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러나 모두 처벌되었으나 자신은 조선과의
화해 등을 필요로 여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화해로 평화를 완수한 요시토시는
후추번의 초대 번주가 되고 역대 대마도주들의 묘원인 쓰시마섬의 “반쇼인(만송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이 일제 강점기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다.
무사거리거리 입구에서 조금 지나 왼쪽으로 돌면‘나카라이토스이관’이 있다.
현재는 쓰시마시의 ‘마을조성 커뮤니티 지원교류관’으로 사용중인‘나카라이 토스이(半井 桃水)’라는 인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장소이자
그의 생가 였던 곳이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기자로 활동을 하다가 소설가가 된 인물로 조선의 유학에 심취하여 조선의 문학을 연구하던 중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알리기도 하고 오시츤보 등 다양한 작품활동을 한 업적이 있는 소설가였다고 한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이라는 제자를 두기도 했는데 일본화폐 5000엔에 인물이 새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들은 일본 근대 문학사에 길이 남고 있고 스승인
나카라이 토스이 보다도 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단다.
히구치 이치요가 12살 연상인 나카라이 토스이를 흠모했지만 꿈쩍
하지도 않았다니 황진이가 사랑한 서화담(서경덕 1489~1586년)
황진이 같다고나 할까.
빨간 매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는 고즈늑한 돌담길이 참 아름답다.
영국계통 성공회 교회로 일본에서 교회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명치유신이후 영국의 문물을 받아 들였던 일본이 그 당시 부터 성공회가 들어왔다면 역사가 깊을 것 같다.
민박집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이제 무사마을을 나와서 주차장 앞에 있던 하치만구 신사로 향한다.
15:25 하치만궁 신사 입구
하치만신(八幡神)은 일본 신토(神道)에서 섬기는 황실의 조상신으로 특히 세이와 겐지(淸和源氏), 긴무
해이시(恒武平氏)등 일본 전국의 무가(武家)에서 무운의 신, 즉 군신(軍申)으로 써 ⌜弓矢八幡⌟으로써
숭배 대상이다.
하치만(八幡)은 훈독으로 야하타노카미(やはたのかみ)라고도 읽으며, 혼다와케노 미코토(誉田別命)라고
불렸고, 일본 제15대 천황으로 알려진 오진 천황(応神天皇)과 동일시 되었다고 한다.
신사 안에서 바라본 입구(이즈하하 시내)
신불습합(神仏習合)이 이루어져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이라 불렸고, 신사 안에 진구지(神宮寺)가 세워졌다.
그래서 하치만궁신사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신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봉헌내용이 왼쪽에 늘어서 있다.
하치만 신을 제사지내는 신사는 하치만구(八幡宮) 또는 하치만 신사(八幡神社)・하치만노야시로(八幡社)・
하치만 님(八幡さま)・와카야마 신사(若宮神社)라 불리며, 그 수는 1만에서 2만 곳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이나바 신사(稲荷神社)에 이어 일본 전국 규모 2위이며, 오카다 쇼지(岡田荘司)에 따르면 제신(祭神)
으로써 일본 전국의 신사를 분류할 경우 하치만 신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신사는 모두 7,817곳으로 일본
전국 1위라고 한다.
하치만 신사의 총본사는 오이타현(大分県) 우사 시(宇佐市)에 있는 우사 신궁(宇佐神宮, 우사 하치만구
宇佐八幡宮)이다.
일본에서는 흔히 3대 하치만으로써 오이타 현 우사 시의 우사 신궁과 교토 부 야와타 시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그리고 후쿠오카 시의 하코자키 하치만구를 꼽는데, 하코자키 하치만구 대신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를 더하기도 한다. 3년전 우사 신궁과 20년전 가마쿠라 신사는 가 보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치만궁 신사를 들어가면 왼쪽 위로 홀로 외로이 있는 신사가 있다. 이 신사는 동서군 전쟁 후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 당하자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년-1615년 1월 31일)는 도쿠가와 정권에
잘 보여 영지의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즉시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아들도 추방하였다고 한다.
그 후 요시토시는 소 가문에 여러 괴변이 일어나자 소용돌이 속에서 이혼되어 쫓겨난 그의 아내였던
고니시 마리아와 일본인 신부가 되어 순교한 그의 아들 고니시 만쇼(小西マンショ、1600-1644) 모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하치만구 신사의 한쪽 구석에 신사를 세워 그 넋을 위로 하였다.
그러한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하니 더욱 고니시 마리아의 처지를 생각케 되고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제 걸어서 거리를 지나 덕혜옹주 봉축비로 향한다. 일본은 병의 치료보다는 예방에 주력하여 동네 마다 소 건강을 위한 의원이 많단다.
덕혜옹주 봉축비로 향하는 길에는 꽃들이 피어 흐드러졌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나 좋아 한 껏 걸음을 가볍게 한다.
15:55 덕혜옹주 봉축기념비 입구
성터 문에 대한 설명이 있다.
조선통신사절단들이 일본 본토로 가기전 처음으로 일본땅에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에도 막부는 쓰시마번의 중개로 교섭을 거듭한 결과 국교를 회복하였고 1607년 부터 1811년 까지 12회에 걸쳐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는 쇼군이 바뀌면 쓰시마 번사를 부산에 파견해 알리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쓰시마(대마도)사절단은 부산의 왜관에서 기다리며 한성에서 통신사 일행이 오면 그들을 쓰시마로 안내 하였다.
쓰시마에서 에도(도쿄)까지의 안내와 경호도 쓰시마번이 담당하였고 막부는 조선 국왕과의 국서를 주고 받고 통신사를 접대하며,
국내 외에 그 위신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아낌없이 사용하였고 최고 수준의 의례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반인이나 학자, 문화인의 사이에서도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 통신사가 통과하는 각 지역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내일 한국전망대에 가면 또한 자료들이 많다고 한다.
이제 안쪽에 덕혜옹주 봉축비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