삯꾼 목사가 얻은 진정한 자유
권신찬
주일학교 학생으로
나의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장로교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영수직이었고(나중에 장로로 안수됨) 어머니는 집사로서 부인전도회 회장직을 맡으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성경 암송대회에서나 그 외에 주일학교 학생이 탈 수 있는 상은 거의 다 탈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래서 성경의 어려운 부분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계신 것은 자연히 믿게 되었고 남을 욕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어서 욕을 하지 않으며 자랐다. 상스러운 욕은 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 공부도 남달리 열심히 한 것 때문이었는지 한번은 아버지 옆에서 잠을 자는데 잠들기 전에 아버지께서,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한 번의 말씀이 내 생애의 목표가 되었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어머니와의 사별
내가 열두 살 때(당시 4학년), 어머니께서 49세의 늦은 나이에 둘째 동생을 분만하셨다. 우리는, 여덟 살 위인 누나와 세 살 위인 형, 여섯 살 아래인 여동생까지 모두 4남매였다. 뒤늦게 쌍둥이 동생을 낳으셨는데 새로 난 동생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쌍둥이를 분만한 어머니께서도 어쩐 일인지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 가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겠지만, 그곳은 산파도 없는 시골이었다. 설령 병원이 있다 하더라도 돈을 낼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었다.
결국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산에 따라가서, 어머니의 관이 땅에 묻힐 때는 나도 들어간다고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막연하기는 했으나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부활 때에 반가운 얼굴로 어머니를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겨우 견딜 수는 있었으나, 정말 어머니 없는 세상은 캄캄하고 처절하며 앞날의 희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슬픔도 컸지만 아버지의 슬퍼하시는 모습 또한 형용할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신 후에 밖에 서서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한숨짓고 실성한 사람처럼,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내가 어떻게 살라고 먼저 가버린단 말이오” 하시면서 계속 우시는 그 모습은 정말 너무 불쌍해 보였고 처량해서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어머니께 귀여움만 받으며 살던 나의 생활은 끝이 났다. 얼마 후에 18세 밖에 안 되는 형이 결혼을 했다. 누님도 시집을 가버리고 집에 여자라곤 어린 여동생뿐이었다. 살림을 맡을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형이 일찍 장가를 갔는데 형수는 성품이 착하고 참을성이 있고 효성스런 여성으로 홀아비 된 아버지를 잘 모시고 살아갔다.
그때 우리집에는 방이 두 개 밖에 없었는데 방 하나는 형님 가족이 쓰고 다른 하나는 나와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쓰게 되었다. 한 방을 쓰게 되니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되었다. 나와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은 예배당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어 방안에서도 설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방에 누워 계시면서 내게 “설교란 생활이 뒤따라야 힘이 있는 것이다. 행실이 설교와 일치하지 않으면 힘이 없고 감동을 줄 수 없다” 라고 하셨다. 언젠가 너는 자라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았다. 그 말씀은 오랜 후에 내가 목사가 되었을 때 목회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대동아 전쟁 발발
일본인들이 대동아 전쟁이라고 말하는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 확전되었다.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군의 공습으로 거의 파괴되었다는 뉴스가 들리자 일본 사람들은 들뜨게 되었다. 그때 나는 참으로 큰 실망감을 느꼈다. 언젠가 일본에 건너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미국의 한 섬에 불과하며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록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승리는 아니며 오히려 전쟁은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이 반격을 시작했다.
비록 일본 육군이 중국과 동남아 일대를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나 미군 역시 동남아로 상륙해서 일본군과 맞섰기 때문에 일본이 고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19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젊은이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무기나 탄약이 부족해서 집에 있는 쇠붙이들을 모두 거두어간다는 소식도 조금씩 나돌았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희망은 차츰 줄어들어갔고 꿈이 깨져가는 것을 느꼈다.
타향 길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아버지와 당숙께서는 내게 좋은 처녀가 있으니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 경험도 없고 식구를 먹여 살릴 경제력도 없는 내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리였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으나 어른들의 꾸지람과 형님 식구들이 다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따르기로 했다. 결혼할 상대는 당숙의 친구 되시는 분의 막내딸이었다. 그 아가씨는 인물이 꽃봉우리 같다고 모두들 탐을 내고 있었다. 큰 부잣집에서도 청혼이 들어와 사윗감을 고르고 있던 차에 청혼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어도 천국에 가려면 권 장로같이 믿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군 내에서는 믿음의 가정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쪽에서 상당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또 18, 19세를 지나면 혼기를 놓치게 되고, 일본 정부에서 한국 처녀들을 차출해서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로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을 때였기에 더욱 결혼을 서둘렀다. 해가 바뀌어 내 나이 20세, 신부 나이 19세 되던 해 이른 봄날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에 있다 보면 언제 일본 사람에게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나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누님이 남편과 서울로 이사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갓 시집온 신부를 고향에 두고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디든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데려오리라 생각하고 떠났다.
그러나 세상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까지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에 김포읍에서 살게 되었다. 거기서 어떤 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고향 쪽 사람이라 친근히 대해 주었다. 내 사정을 말하고 보호해 주기를 부탁했다. 김포읍에서는 일정한 주민등록도 없이 살고 있었으니 식량 배급도 탈 수 없었다. 가끔씩 근처 시골로 가서 식량을 얻어다 겨우 연명했는데, 어떤 날은 시골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논두렁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눈이 퉁퉁 붓게 울었다. 내게는 없는 것이 세 가지였다.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조국. 어머니 생각이 가시지 않았고 일제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객지로 떠도는 내 신세가 한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사가 찾아와서 자신이 건수를 올려야 진급을 하는데 통 진급할 수 없으니 주변에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즉 밀고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죽어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었고 협조하지 않으면 나를 고발해서 끌려가게 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버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포에 그대로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아 떠나기로 결심하고 시골의 처가 동리로 내려갔다. 아내는 거기서 딸을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
해방의 기쁜 소식
내 나이 스물두 살. 동리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전기회사의 일을 보는 직원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8월 14일 밤에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전화 연락을 받은 그 직원은 밤중에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그 결과 천황이 항복을 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동리에 남아 있던 청년들을 동원하여 산 넘어 동리 동리로 돌아다니면서 만세를 부르며 밤을 새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기뻐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독립의 기쁨을 가라앉힐 길을 찾지 못하여 나는 연극 각본을 한 달 동안 쓰고 청년들을 동원시켜 한 달간 연습을 시켰다. 아마추어 연극단을 만들어 이 동리, 저 동리를 돌면서 연극을 보여주었는데 ‘빛나는 독립 청년’이라는 제목이었다. 잘 된 연극은 아니었으나 연극을 별로 보지 못한 시골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재미있고 뜻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여운형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김세영 목사가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공산당의 술책이었으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독립정부인 줄 알고 인민위원회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자신이 정부에서 임명한 그 지역의 장이라도 되는 줄 알고 매일 6킬로미터나 떨어진 면소재지에 출근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통 정부도 아니며 공산주의 색채가 짙다는 소문이 차츰 들려왔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양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객지 생활을 하느라 때로는 일 년 이상 교회에 나가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한 번도 버리지 않았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해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집사직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었고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서북 청년단을 조직하고 각처에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등 반공 운동을 전개했다. 그중 대여섯 명이 우리 마을에도 찾아왔다. 나는 식사를 제공하고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반공 강연을 하게 했다. 정치가가 되고자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다. 무신론에 대항해서 싸운다고 생각한 것이다.
10. 1사태
그러던 중 여순 반란 사태가 일어났고 대구에서는 10. 1사태가 발발했다. 10. 1사태는 지방으로도 확산되었고 우리 고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청년동맹원들이 산에 모여 어떤 일을 꾸민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어서 경찰들이 습격해 여러 명의 청년을 체포하고 문서를 압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문서 중에는 지역 주민 중 살해할 사람의 명단도 있었는데 내 이름이 제일 먼저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때는 공산주의자들이 밤중에 시내를 습격해서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차츰 폭력을 사용하자 경찰도 무력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국민회의 안에 대동청년단이 조직되면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치상황은 지방까지 확산되어 갔다. 나중에 대동청년단과 경찰이 합세해서 좌익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고향에는 소위 양반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권씨 문중이 숫자적으로도 제일 많았고 소위 행세한다는 유지들이었는데 해방 후에 공산주의의 우두머리가 거의 나의 일가들 중에서 나왔다. 권병희, 권병술 씨 등은 나의 먼 친척이 되는 사람들로 지주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왜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는가? 그들 대부분이 일제 시대 때 항일투쟁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시대의 항일투쟁가들이 쉽게 사회주의와 연결되고 지하운동이나 해외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며 해방과 함께 그들이 여운형의 인민위원회의 지도자로 추대되면서 자연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대동청년단의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나중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대동청년단이 좌익의 집을 습격해서 불을 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신론이란 문제 때문에 공산주의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휘두르며 집에다 불까지 지르는 일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츰 가담하기도 싫어지고 “내가 과연 이 운동에 참여해서 지금까지 해온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가? 너무도 어려운 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희생적으로 한 일이 과연 뜻있는 일일까? 그런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보람찬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츰 그 일들에서 손을 떼고 옛날에 “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세웠는데...” 하는, 성경 말씀을 전하자는 본래의 마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신학생이 되기까지
그때 기독교계에는 서울조선신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수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51명의 신학생들이 김재준 교수는 신신학자라고 반기를 들고 총회에 제소하여 김재준 교수가 정죄되었다. 그리고 해방 전에 만주 봉천에서 신학교를 하다가 해방 후에 고려신학교로 옮겨 온 박형용 박사를 모셔다가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의 계승이라 함)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박형용 박사의 제자였던 강용서 목사가 내 고향 교회에 시무하러 오셨다. 그래서 강 목사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나도 신학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때 강 목사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권 집사는 얼마든지 신학을 할 수 있습니다. 정규적인 중학 과정을 밟지 못했으니(일제 시대에는 중학교가 5년제로 지금의 고등학교 정도였다) 검정고시를 치르면 입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며 용기를 주었다. 자기가 신학교에 연락해서 입학 수속과 검정고시에 대한 수속 자료를 보내게 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일은 쉽지가 않았다. 아내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것이다. 목사는 세상과 물질에 대하여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하니 어찌 그 가난과 고생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신학을 한다면 자살할 것이라고 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며 나의 천직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아내의 반대는 개의치 않았다.
그 무렵 내 형편은 전보다 좀 나아져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그때까지 경작하던 땅이 소작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농토가 생긴 것이다. 또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활이 나아진 것은 형의 노력 덕분이었다. 내 앞으로는 논 500평 정도가 배당되었다. 그것이 나의 전 재산이었다. 그것을 팔아서 서울에 있는 강용서 목사의 성냥 공장에 맡겨놓고 학비를 타 쓰며 아내와 1남 1녀 세 식구는 형님 집에 맡겨두고 신학교에 가기로 했다. 심하게 반대하던 아내는 할 수 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나는 결국 검정고시를 거쳐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본과는 신학자가 되는 과정이고 전문과는 목사가 되는 과정인데 나는 전문과에 입학했다.
신학교 생활에서 느낀 환멸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신학교 생활이 시작되니 처음에는 하늘로 날듯이 기뻤다. 해방되었을 때의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 있었다. 신학교는 남산 위의 옛날 신궁 자리 근처에 세워진 성도교회 자리였고 기숙사는 동국대학 뒤편에 있는 영락교회 김응락 장로의 집이었다. 수십 명이 숙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다다미방이었고 한편은 김 장로의 가정이 사는 큰 집이었다. 신학교와의 거리는 약 4킬로미터쯤 되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나 이를 멀다 하지 않고 매일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박형용 박사의 조직신학은 너무 어려운 말들로 되어 있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밖에 교수들의 종교철학이나 윤리학도 난해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실력 있는 학생들은 슬슬 놀면서 공부했으나, 나 같은 독학생은 어려움이 많았고 따라서 주야로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학 과정으로 헬라어, 히브리어, 영어 등을 이수해야 하는데 다른 필수 과목 때문에 영어 외에는 선택하지 않고 영어만 조금씩 공부했다. 그것도 중학 강의록에서 알파벳을 익힐 정도밖에 못해서 힘쓰지 않고, 전공과목인 신학 과목과 주경신학만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흥미가 있었던 과목은 변증학으로 항상 궁금했던 문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신의 존재를 변증법적인 논리로 입증하고 사실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변증하는 과목들에서 숨통이 약간은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학기말 고사 때 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 학점이 중간 정도로 나왔고, 어떤 과목은 상당히 성적이 잘 나왔다.
한 학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친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얘야, 그래서는 공부를 할 수 없겠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몇 달 동안 살이 쭉 빠졌기 때문이다. 본래도 좀 깡마른 상태이나 한 끼에 한 공기씩 하루 두 끼를 먹고 지냈으니 살이 쭉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괜찮습니다. 넉넉히 견딜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학교 생활이 무척 즐거웠기 때문이다.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웃지 못 할 일이 기숙사에서 벌어졌다. 신학생끼리 부엌에서 심하게 다툰 것이다. 이유인즉 밥 양이 너무 적으니 빨리 자기 밥을 먹고 나서 밥솥에 있는 누룽지를 끓여다가 먹는데 그러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기숙사가 떠들썩하게 싸웠는데, 그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신학생이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은가. 처음에 들어올 때는 천사들이 모인 곳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차츰 눈에 거슬리는 일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누룽지 때문에 저렇게 핏대를 올리며 원수같이 싸운대서야 어떻게 나가서 양 무리를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겠는가 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그 후부터는 모든 일이 계속 꼬리를 물고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또 하루는 학우회 총회가 있었는데 내게 작은 쪽지가 전해졌다. 회장은 누구, 부회장은 누구, 서기는 누구 하면서 경상도 학생이 회장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쪽지를 받고 나서 나는 완전히 실망했다. 내가 못 올 곳엘 왔구나. 한 예수를 믿으면서 영남이 어디에 있고 호남이 어디에 있고 이북이 어디에 있는가.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 왜 지역을 초월하여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할 수 없는가. 이들이 나가서 목사가 되면 교회 또한 지역별로 감정 대립하고 싸우지 않겠는가. 신학생들의 상태에서 교회의 미래상이 내다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신학교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영남 뿐 아니라 이북 출신도 마찬가지, 호남 출신도 마찬가지로 전부 자기 지역 학생이 학생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것은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세력 확장을 위한 것이다. 그곳이 작은 정치 연습장으로 보였다. 나는 속으로 심히 반발하고 고민했다.
목회의 시작
내 마음속에는 은근히 ‘나는 신학교를 졸업해도 설교하는 목사 생활(목회)은 하지 않으리라’ 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환멸을 느꼈고, 또 당시 모든 교회는 심한 갈등과 반목 속에서 벌써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도에서는 목회 생활이 의미가 없는 것 같았고 보람을 느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부를 더 많이 해서 대학생을 능히 다룰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농촌 아이들을 위해서 손에 흙을 묻히면서 그들과 함께 청년운동, 농촌운동 같은 것을 해볼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6.25 전쟁이 났다. 고향에 내려와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겨울이 되자 복교가 되었다고 등교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갈 수가 없었다. 내 학자금의 출처인 강용서 목사 동생의 성냥 공장이 동란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떤 곳에서 연락이 왔다. 이웃 영양군의 산간에 있는 세 교회가 합쳐서 교역자 하나를 구하는데 누군가 나를 추천해서 나에게 목회를 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도사로 취임해 달라는 것인데 아무것도 할 일 없이 노는 판이니 가리라 생각하고 부임을 했다. 보수로 쌀 세 말을 준다고 했다. 본래부터 되는 대로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돈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그리로 갔다. 세 군데의 교회를 한 주 걸러 한 번씩 순방했다. 그들은 세 주 만에 전도사를 만나보는 셈이 된다. 열심히 설교 준비도 하고 심방도 해서 교인들과 호흡을 맞추어가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중공군이 쳐내려와 서울이 다시 비게 되었고 신학교도 다시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1951년도 봄, 부산으로 신학교가 옮겨져서 거기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하여 교회의 동의를 얻어 교회의 후원으로 피난 신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진 교회당이 상당히 커서 1층 지하실을 교실로 사용했는데 거기에서 공부를 마치게 되었다. 졸업반 1학기가 6.25로 중단되었으니 한 학기만 이수하면 되었다. 9월에 졸업식이 있었다.
그해 11월에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도사 고시 중에 설교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환도 잡은 현실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쳤을 때에 주님이 꾸짖으시기를 환도 쓰는 자는 환도로 망한다 하셨다. 지금 현실 교회는 환도를 잡고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전 노회원 목사와 장로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 설교를 마쳤을 때에 여러 목사들이 찾아와서 통쾌했다고 하면서 장래에 유능한 설교자가 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나는 속으로 매우 부끄러웠다. 배운 것도 별로 없는 것이 너무 큰소리 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울분이 터진 것이었다.
사실 나는 목사는 되지 않으려고 부친께도 목사 안수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호되게 야단만 맞았다. 너를 목사로 키우는 것이 내 소원이었는데 어렵게 신학을 공부하고선 이제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소리가 웬 말이냐고 하시면서 책망하셨다.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릴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그때가 29살 때였다. 강도사 시험의 설교가 주효해서 그 후에 이곳저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흥 강사로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번도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나는 위선자였다
그 즈음 나는 마음에 심한 갈등이 있었다. 교회가 이렇게 부패하고 목사들이 권력이나 명예에 눈이 어두워서 싸우고 있으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젊은이로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일이기는 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는 독야청청하리라. 혼자만이라도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을 읽던 중에 문제에 걸리고 말았다.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해서 나는 자신을 잃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본 부친의 모습을 통해 무의식 속에서 참된 신앙생활의 이상을 가진 것이었다.
부친은 무식하고 가난한 촌로이기는 해도 생각만은 올바른 분이셨다. 내가 일곱, 여덟 살 때 어떤 불쌍한 거지가 밥을 얻으러 왔다. 그때가 겨울철 저녁이었다. 문을 여시고 거지를 한참 보시더니 추우냐고 물으셨다. 예, 춥습니다 하면서 거지가 떨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체 없이 솜저고리를 벗어 덮어주시면서 입고 가라고 하셨다. 어떤 때는 거지를 방으로 불러들여 윗목에서 며칠을 재워 보내기도 하셨다. 거지에게서 떨어진 이가 방에 기어 다니기도 했다. 어떤 신자의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 도울 길이 있으면 당장에 돕고, 도울 길이 없으면 밤을 새워 울면서 기도를 하셨다.
내 고향은 동해안이라 6.25 때 피난 나온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교인들은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 집이 바로 교회와 한마당이라 우리 집 사랑방에는 항상 함경도 피난민으로 차 있었다. 어떤 때는 부친께서 피난민들의 임시 숙소를 찾아가서 비밀히 쌀 그릇을 조사한 뒤 쌀이 없으면 쌀을 거두어서 가져다주시곤 하셨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얽힌 이야기가 많이 있다. 나는 이런 부친 슬하에서 자라면서 저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마음에 믿고 그 이상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꿈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으니 갈등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고 작정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과연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가 반문해 보았다. 그리고 부친 생각이 나서 부친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나도 양복을 벗어 불쌍한 사람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옷걸이를 보니 헌 옷은 나누어주고 새 옷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고학생이 찾아왔는데 아내가 없는 틈을 타서 큰 자루에 쌀을 퍼 주었다. 아내가 들어오다가 고학생이 쌀을 메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싸움이 벌어져 5일간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지들이 동냥 오면 한 끼 먹을 돈을 주자고 결정하고 있었으나 줄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작은 동전을 주면서 “미안하다. 이것밖에 없어” 하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지만 내 마음에는 가책이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대구 약정골목을 걸어가는데 어떤 거지가 한약방 앞 연탄 아궁이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나는 발이 못에 박힌 듯이 움직이질 못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저 거지를 저대로 두고 가서 내일 내가 어떻게 설교를 하겠는가’ 10년 전에 시골에 있을 때 비오는 날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이 논둑가에서 헤매는 것을 집으로 데려가 방 한 칸을 완전히 비워서 재워 보냈는데 온 방 안이 흙으로 가득 차서 가족들이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저 거지를 데려갈 수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때 문득 옛날 소년 시절 부산에 있을 때 내가 덮던 이불을 거리의 거지에게 가져다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집에 가서 이불을 하나 가져다주리라고 집으로 달려갔으나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김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의 반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용기가 사라졌다. 사실은 가져다주기 싫었던 것이리라.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온갖 생각들이 스쳐갔다. ‘목사 꼴이 참 말이 아니구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흰 쌀밥으로 배를 채우는데 거리에 노숙하며 떨고 배곯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도 설교 강단에 서면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 위선인가. 결국 나는 위선자이며 삯꾼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이지 성령의 진리가 내 삶에 역사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열두 살 때 부친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시면서 목사의 설교는 생활이 제대로 서야 힘이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어느 날 경북 노회 목사 수양회가 구룡포에서 열렸다. 목사들만 모인 곳이니 별별 목회의 경험담들이 오갔다. 내가 하는 말들이 남다른 관심을 끌었는지 사람들은 내 주위로 잘 모여들었다. 내가 “목사님들, 나는 이제 목회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 둘러앉았던 목사 중에 누가 “무슨 소리요? 권 목사는 목회 성공자라고 정평이 나 있는데 권 목사가 못하면 누가 한단 말이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 집 쌀독에 쌀 두 되가 있으면 한 되는 가난한 자에게 주고 한 되는 내가 먹어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또 다른 목사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것은 너무 심한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그렇게 한단 말이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라고 거든다. “그러나 성경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성경대로 하지 않고 어떻게 설교합니까?” 라고 했다. 나는 목사 수양회에서도 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대구 칠성교회로
그러던 중에 대구 칠성교회에서 소식이 왔다. 옮겨올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은근히 에큐메니칼* (* 신교통합주의)측 교회로 옮기고 싶던 터라 승낙의사를 밝혔다. 한 번 와서 설교해 주면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서 설교하러 갔다. ‘나는 삯꾼이다’ 라는 특이한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사실 그것은 양심의 소리였다. 삯을 받기 때문에 설교나 목회에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삯꾼으로서 최선을 다 해 보겠다고 결론을 맺었다. 처음에는 다들 이상한 눈으로 듣고 있더니 그래도 합격이 되어서 칠성교회로 옮겨갔다. 시골 촌뜨기가 발전해서 도시의 한복판에 진출한 셈이다. 또 내심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욕심도 있어서 그리로 옮기자마자 곧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저녁에는 문법 강의를 들으러 가고 새벽기도를 일찍 끝내고는 부지런히 회화공부를 하러 다녔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겠다는 목표가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장준하 씨가 내고 있는 <사상계>를 계속 읽고 있었는데 함석헌 옹이 쓴 글에 ‘창녀는 먹고살기 위해서 몸을 팔고 선생은 먹고살기 위해서 학교에서 지식을 팔고 목사는 먹고살기 위해서 교회에서 윤리 도덕을 판다. 무엇이 다른가’ 라는 대목이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예리한 칼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사는 창녀보다 더 위선적이며 악하다. 창녀는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그것이 얼마나 솔직한가. 그러나 나는 설교하려고 강단에 설 때에 가운으로 거룩히 가장하고 입으로는 비단 같은 선한 말을 하지만 창녀의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 내 속에도 있지 않은가. 음란한 행동은 하지 않으나 미모의 여성을 보면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도둑질은 하지 않지만 돈 뭉치를 보면 욕심이 생기니 창녀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교인들에게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같이 선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맙소사. 이제는 더 이상 이 거짓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날 밤 예배당에 나가서 혼자서 대성통곡을 했다. 평소에는 새벽마다 울고불고 기도했으나 그날은 밤중까지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던지 사찰 집사가 밤에 찾아 들어와서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나는 날 좀 혼자 있게 가만 두어달라고 했다. ‘하나님, 이제는 이 거짓된 일을 더는 할 수 없습니다. 내게 어떤 능력을 주시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주시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내 생명을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탄원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설교하는 것이 두렵고 설교 단상에 서면 천정에서 “네 이놈, 거짓말쟁이야.” 라고 꾸지람하시는 것 같고 언제나 마음속에는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탄식 소리뿐이었다.
그런 반면 인기는 점점 더 올라가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시내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어떤 장로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 교회의 적임자는 권 목사라는 말이 돌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같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교회 제직회의 결의로 부흥회를 열기로 했다. 강사를 초빙하려고 하니 내 마음 상태가 곤고하여 웬만한 강사는 시시해서 청할 사람이 없었다. 특히 나는 신비주의가 싫었다.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것이 유행하여 여신도 중에서 주요 인물들이 거기 빠져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강사는 아예 싫었다. 여자 권사나 집사들이 추천해 왔지만 다 거절했다. 내 마음에 그분이면 좋겠다 생각했던 분이 한 분 있었는데, 당시 부산에 계신 김인서 장로(나중에 목사가 됨)였다. 성경을 바로 가르친다고 정평이 나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께 편지를 내었다. 와서 집회를 좀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사례금을 얼마 정해주면 가겠다는 답장이왔다. 그 말이 솔직한 말이었으나 당시 내 마음에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례금을 미리 흥정하는 강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영원히 강사로 모시지 않겠다고 거절해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누군가가 길기수(Keith Glas)라는 네덜란드 선교사를 소개했다. 한국어를 잘 하고 부흥회 인도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섭을 하여 집회를 하기로 했다.
새로운 계기가 된 집회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길기수 선교사와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서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했다.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커졌지만 질적으로는 잘못되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집회는 일주일간이었다. 오전과 저녁만 모이고 새벽은 간단히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첫날부터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데 나나 한국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과는 약간 방향이 달랐다.
집회 일정을 정해놓고 나서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집회는 죄에 대해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보통인데, 우선 내가 내 죄를 미리 정리해야 집회 때 은혜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두어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시골 영양읍 교회에서 일할 당시 구호물자를 취급했는데 철저히 잘 하려고 했지만 잊은 것이 하나 생각났다. 분유 한 박스를 내 마음에서 사기로 하고 돼지를 먹인 일이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짐승의 사료용으로 분유를 만들어 깡통에 담았는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식량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돼지 사료에 섞어서 먹이면 돼지가 잘 큰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영부영하는 중에 값을 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한 박스 값의 돈을 준비하고 편지에 설명을 써서 후임자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어쩌자고 그런 것을 보내서 남을 괴롭히느냐, 자기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는 답장이 왔다. 그렇건 말건 내 마음은 다소 가벼워졌다.
설교를 들으면서 무언가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은 금요일이라고 기억되는데 낮 설교 시간에 설교자가 갑자기 강대상을 세게 두드리면서 ‘여러분 거듭났습니까?’ 라고 크게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거듭났다고 믿고 살아왔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시간에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믿는 것은 거듭났으니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듭나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 선교사는 거듭나는 것은 자신이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의 말이 사실이면 그것은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이 지난 후에 강사에게 잠깐 좀 만나자고 하여 사택 방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거듭났습니까? 하는 질문에 나는 ‘예’ 하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의 말이 “내가 한국에 와서 집회를 인도할 때 제일 무서운 사람이 목사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마치 벽을 향하여 이야기하는 것 같고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권 목사와 이야기할 때는 다른 목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에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그래서 “아닙니다. 의심은 없습니다. 성경은 100퍼센트 믿고 지금 죽어도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됐지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된 것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나와는 통한다는 말은 현재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을 때 의견이 일치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도 말은 맞는다. 거듭났을 때에 영 안에 참 믿음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믿음은 영 곧 양심 속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 곧 이성적인 믿음이었다. 이성적인 믿음 곧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지식의 믿음인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어도 마음의 평안이 없는 것은 그것이 영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인도한 집회는 끝이 났다. 내가 그 집회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나도 철저히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쯤 되었을 때에 갑자기 이상근 박사(제일교회 목사이며 한국 내에서도 실력자였다)로부터 청탁이 왔다. 시내 동로교회에서 3일간 집회가 있고 첫 날 강사로 자기가 지명되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출타해야 하니 권 목사가 대신 한 시간 수고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그 교회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대구 시내에서는 제일 유명한 장로들이 모인 특수한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계명대 학장 신태식 박사나 인제병원장 손인식 장로 등이 나가는 교회인데 나 같은 것이, 그것도 이상근 박사의 대신으로 갈 수 있는지 겁이 났으나 이 박사는 이미 그 교회에 나를 소개했다고 했다. 이상근 박사가 나를 인정한 것 같아서 나는 마지못해 승낙했는데 한편으로 마음이 우쭐해졌다. 내가 이 박사의 대신으로 인정받을 만큼 되었다는 것에 은근히 자부심이 생겼다. 그 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 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큰 소리로 설교했다. 워낙 귀가 높은 사람들이라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나 무사히 넘겼다.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다
동로교회에서 설교한 날은 목요일이었고 다음 주일 본 교회에서 설교하기 위해 토요일 날 서재에 앉아 설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61년 11월 18일이었다. 며칠 전 동로교회에서 로마서 1장 16절을 설교했으니 이번에는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구절을 중심으로 설교하기로 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제목을 붙이고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를 써놓고 읽으면서 설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의 출현이었다. 그 말씀은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몰라서 책을 참고하면서 설교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0-21 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 그 말씀을 찾아 상고했다. 20절에도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 하였고 21절에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라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대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셨는데 그 의가 바로 내 의이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2-4
그러면 내가 여태껏 고민해 왔던 마태복음 22장 39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율법을 나는 할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내 대신 하신 것이 되지 않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죄를 함부로 지으면서 살아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이 나를 구속하지 않아도 성령이 인도하시니 함부로 방종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로마서 3장 20, 21절이 깨달아진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고 10여 년간 양심을 짓누르던 문제가 없어지고 내가 위선자라는 생각도 사라졌다. 하도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문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문제가 없어졌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면서 설교 원고 쓰는 것을 중단하고 찬송을 찾아서 부르기 시작했다.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찬송가 210장
이 찬송을 거듭 불렀다. 이제는 나에게 정죄가 없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부르고 또 불러도 끝이 없었다. 오후 두시 경에 시작해서 해가 이미 저물어버린 일곱시 경까지 찬송가를 계속 불러댔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도 먹으러 가지 않으니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제 동생을 데리고 찾아왔다. 문을 열면서 미친 듯이 찬송을 부르는 나를 보고 “아버지, 조심하세요. 도신 것 같아요.” 한다. 나는 “오냐, 그래. 내가 돌았는지 네가 돌았는지 알 수 없으나 너도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설교는 반쯤 준비되었으나 더 이상 준비할 수 없었다. 다음 예배 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먼저 이렇게 말했다. “목사 생활 10년, 예수 믿은 지 39년(당시 39세)만에 이제 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설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월요일은 목사가 쉬는 날이다. 그러나 그대로 있으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성경을 손에 들고 대구역 광장으로 갔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아니면 지옥 갑니다.” 소리소리 질렀다. 사람들은 웬 미친 사람인가 하는 눈치였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전도를 하는데 매일매일 전도지(주로 빌리 그래함 목사가 쓴 것)를 가지고 이웃의 집집을 찾아 다니면서 전도했다. 한번은 부흥 협회에서 핸드 마이크를 빌려서 달성공원에 갔다. 관상쟁이가 커다란 관상 그림을 펴놓고 있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저 거짓 것에 사람들이 속고 있다 싶어서 나도 그 옆에서 마이크로 소리쳤다. 사람들이 마이크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한참 떠들어댔으나 효과가 없었고 관상쟁이 영업 방해만 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기쁜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전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난 후에 길기수 선교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더니 손을 덥석 잡으면서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것이며 거듭난 것입니다” 라며 기뻐했다. 성경을 깨닫기는 했어도 그것이 구원인지 거듭난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과연 그렇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라고 했고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 10:35 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곧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거듭나고 나니 성경이 전에 읽던 성경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해지고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호화로이 사는 사람도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신앙생활의 가치관도 달라지고 과거가 다 부정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이전 것은 다 지나가 버렸다.
첫댓글 볼수록 새롭네요. 항상 솔직하시고 소탈하셨던 분, 가식과 권위의 껍질을 몰랐던 분, 엄청난 고난과 세상압력을 극복하며 사신 분, 자주 독일 오셨서서 생각나네요.
저는 좀 주제넘는 이야기인데요. 그 나라가면 반갑게 웃으며 대해줄 것 같은 분이 두 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하고 권목사님....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었으니까요.. 아무 말이나 서슴없이 했고
인자하셨지만 세미한 성령의 소리에는 추상 같으셨던 분이셨어요. 그 분의 일생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사용 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