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無謀)한 진보의 고용 팀 킬(team kill)
시인, 칼럼리스트 朴 大 星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누가 뭐래도 위대한 경제자립으로 부국의 반열에 오른 지구상에서 몇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국가이다.
201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 대학의 앵커스 디턴의 저서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과 같이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빈곤과 죽음의 가난 속에 갇혀있다. 그 가난의 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 남겨지고 일부는 도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빈곤과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세계 인류의 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우리 한국은 운 좋게도 그 빈곤과 죽음으로부터 일단은 탈출에 성공한 나라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빠르게 성공한 대한민국은 충분히 위대하고 그 주체적 주인공은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들 국민이다.
그러나 21세기 초입인 2018년 이 가을은 남북 정상회담을 판문점의 봄부터 시작해서 세 번에 걸쳐 성공 하였으면서도 아직은 뭔가 믿기지 않고 을씨년스럽고 왠지 흡만(洽滿)치 않은 기분이 엄습하는 것은
지난 재작년 겨울 그날들의 촛불민심으로 정치권력이 보수에서 진보로 뒤 바뀐 과정에서 국민들이 민권의 승리라고 외치며 빛깔 좋은 새 옷을 디자인 하여 입혔는데도 아직도 우리 몸에 제대로 착복이 안 된 것 같고 어딘가 불편한 것은 지난 10여 년 그 전 10년간의 진보정권이 기도했던 소위 방만한 신자유주의 대북 대미정책의 실패에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 그뿐인가 그 후 또 9년의 보수정권시절 4대강이니 자원외교니 경제민주화니 뜻도 애매모호한 창조경제니 하면서 우리 곁에 회자되는 소위 자칭 보수와 진보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시각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듯한 기분으로 별로 탐탁치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현실의 경제 딜레마를 자초하고 있는 집권 세력인 진보 정권의 속살의 실체를 가닥별로 굳이 분류해보자면 진보란 지난 역사의 예에서 봤듯이 변화니 개혁이니 혁신을 떠벌리다가 오버패스하여 음흉한 그물을 치고 기회를 엿보던 탐욕의 보수에게 휘어 감기어 실패하는 게 자연스런 과정인양 끝없이 되풀이 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원초적으로 가진 것도 별로 없고, 할 일도 많지 않고, 일단 이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기득 사회에 불만을 갖고 무모하게 세상을 뒤엎으려고만 하는 저돌적 이긴 하나 다행스럽게 해악의 저의가 전혀 없는 무지한 전위대 진보, 거기에 두뇌도 명석하고 머리도 좋으나 진보의 가면을 쓴 가짜진보, 이를 테면 힘도 안들이고 투쟁 현장의 뒤에서 몸 사리며 눈치나 보다 중요한 과실을 잽싸게 주워 먹으며 때가되면 그럴듯한 요직을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진보도 있고
진짜 진보지만 무식하지도 명석하지도 않으면서 우직하게 혁신을 부르짖는 용감한 진보, 어찌 보면 모든 진보의 귀감 인 것 같으나 경험도 자기경영의 노하우도 거의 없는 백수진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권력을 쥔 그들의 그 실험대에 올라선 국민의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여 잘못하면 영세서민에서 부터 작은 행복까지도 날려버려야 하는 미덥지 않은 진보이다.
빠른 셈법으로 임금을 올리다가 그 일자리를 사라지게 하는 낭패를 범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일자리는 일이 있는 건설 현장이나 산업현장, 그것을 컨트롤 하는 기업오피스나 일반 자영업자가 필요에 따라 만드는 것이지 국가의 통치권을 가지고 세금을 걷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하는 건 아니다.
잘못하면 고용시장을 왜곡하여 자기면역 기전을 약화시켜 앵커스 디턴이 말한 위대한 탈출을 방해하여 자기 팀킬로 인한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가 연출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억지로 일자리만 만들면 되는 게 아니고 그 일자리를 지속하며 이익을 창출 하여야만 그에 상응한 임금과 복리 후생비가 지속 지출되는 것이기에 그에 걸 맞는 처우 개선 없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꾼다는 두서없는 논리는 허울 좋은 개살구 빛 정책에 불과한 것으로 국민 혈세로 고용시장을 교란하는 조삼모사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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