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문학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의 건축
최 상 대 /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이사, (전) 대구경북건축가회 회장
선비의 땅, 안동(安東)
안동은 도산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 여러종택과 고택마을들이 있어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인 봉정사 극락전이 있고, 퇴계 이황선생의 삶과 학문의 흔적이 남아있어 우리나라 유학의 본고장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안동의 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 유교랜드,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등의 건축들은 전통 유교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다양한 문화콘텐츠이다.
안동(安東)은 중국에서 바라보아 편안한 동쪽의 땅이었다. 공자의 탄생지 유교의 발원지보다도 유학의 경지가 높아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던 높은 정신문화의 땅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도(道)가 동쪽으로 간곳이 도동(道東)서원이요, 달마가 동으로 간 까닭이 있었고, 당태종이 마지막으로 절터를 찾아 지은 대견사도 동쪽의 땅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고요했던 선비의 고장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변화를 겪게 된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과 1980년대 임하댐 건설로 오래된 땅의 고장은 물의 고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편안한 풍수지리의 땅에서 수백 년 세월을 지켰던 종택 고택마을, 마을을 지켰던 당산나무와 삶의 터전이었던 논밭들이 물에 잠기었다. 청량산과 주왕산에서 흘러내리던 강의 물줄기는 갇혀서 호수가 되었다. 호수를 바라보는 산자락 언덕에는 이주 마을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전통건축과 전통마을이 사라지고 옮겨졌다는 상실에 비할 바 아니지만, 호수와 물의 고장으로의 변모는 관광자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고전적 전통고장의 바탕 위에 현대를 아우르는 시설공간의 동행은 미래적 삶의 바탕을 이루기도 할 것이다.
최근 건립된 '이육사문학관' (2008년 개관)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2017년 개관)은 그동안 널리 알려져 있었던 안동의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이육사의 저항문학과 독립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문화콘텐츠이다.
근대의 상실, 강점기
19C 서양에서의 근대는 문명의 혁신으로 변화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시기였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반도는 초토화 되었다. 대원군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궁궐 경복궁 복원에 온 국력을 쏟지만 결과적으로 조선 붕괴의 길을 걷는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잠깐의 근대국가 ‘대한제국’도 쓰러져 버렸다. 희망의 20C가 열려야 할 1900년 조선은 일본에게 강점을 당하며 나라를 잃고 말았다. 근대기의 유럽은 세기말의 혼돈과 구시대에서 탈피, 현대의 전단계로서의 다양성의 근대기였다. 르 꼬르뷰제 등 근대 건축가들의 활동들은 현대건축으로 이어지고, 시장경제의 발달, 국제화는 각 나라들의 도시와 건축이 정립되는 근대의 시기였다.
나라를 잃고 근대를 상실한 일본강점기 그 불행한 시기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심훈 등의 저항시인들과 고귀한 문학을 탄생시켰다. 고난과 역정의 삶이었기에 미처 해방을 맞기도 전에 문학만을 남기고 그들은 생을 다하였다. 생전에는 시집 한 권 간행도 어려웠다.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들은 그 험난한 시대를 살고 간 시인들의 삶과 문학을 기억하고 현창해야하는 것이다. 남겨져 있는 또 다른 근대의 불행이 있다. 친일파라는 지나간 시간의 멍에에 갇힌 문인 예술가들은 아직도 이 땅에 발을 딛지도 못하고 있다.
이육사문학관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시 ‘광야’ ‘청포도’는 온 국민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퇴계 선생의 14대 후손이요 안동선비 가문이 바로 고향이라는 것을 이곳 문학관에 와서야 세삼 실감하게 된다. 이육사문학관은 도산서원 길을 지나 퇴계종택 바로 인근 원천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퇴계의 학문 선비정신과 이육사의 문학 독립정신은 도산면 토계천을 따라서 바로 몇백미터 안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문학관이 없었다면 원천마을에 까지 외부인의 발걸음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고난의 시대에 탄생한 거친 서사문학은 평화시대의 서정문학보다도 강렬한 빛과 감동을 더욱 발하고 있다. 일본강점기 독립투쟁에 몸으로 저항했던 시인은 삶과 몸의 언어가 자체가 곧 그의 문학인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며 시는 곧 의미예술이라고 하겠다. 목숨이 스러져 갔어도 남겨진 글과 시는 영원히 남겨지는 강력한 무기이다. 난중일기, 징비록, 윤동주, 이육사의 글과 시는 고난의 시대를 표현하는 저항의 무기인 것이다.
원천마을 초입길 왼편의 이육사문학관은 작은 계곡을 따라서 앉아있다. 건물 첫 만남은 날카로운 모서리 기둥의 노출과 면벽의 입면이다. 건축 조형적 표현은 온난하지 않았던 고행적 작가의 삶을 표현하는 침묵 속에서의 외침으로 해석해본다. 계곡 산세를 따라서 남북으로 앉은 건물 도로면은 1층이다. 벽면을 따라 왼편으로 오르면 서측 마당에서는 2층 입구로 진입하게 된다. 앞마당에는 ‘절정’시가 세겨진 바위 앞에 이육사는 책을 들고 앉아서 손님을 맞이한다. 마당 안쪽 계곡 가까이에는 발코니가 있는 문학생활관이 별동으로 배치하고 있다.
로비 홀에 들어서면 바깥 자연을 배경으로 시인의 흉상이 있어 방문객들은 인증사진을 찍는다. 홀을 중심으로 왼편에 다목적홀, 오른편으로 전시공간이 배치한다. 1층(지하) 벽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는 공간은 2개 층이 트인 오픈 전시공간이다. 마치 지하 감방으로 내려가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문학관의 전시실 내부평면과 동선은 대체적으로 사각형 삼각형 사선 조합으로 구성된다. 그 중앙은 중정공간이 자리하여서 내부에 빛과 바람 자연적 요소를 제공하며 동선을 유도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치열한 민족정신으로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일본 중국 만주 등 타국을 떠돌며 항일투쟁에 매진했던 저항시인의 삶을 기록하고있다. 잦은 옥고 고문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뒤에는 총칼 대신 날카로운 펜을 휘둘러 싸웠던 항일투사로서의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17차례의 투옥생활로 그의 이름조차도 수인번호 264 李陸史로 살았다. 광복을 한 해 앞둔 39세 마감한 그의 생은 짧았다.
문학관의 꽃은 육필원고이다, ‘이육사육필전’에는 빛바래고 얼룩진 편지, 엽서, 일기, 원고가 전시되어 있었다. 국내 유명시인들의 육필 원고와 시 작품이 액자 속에서 전시되어 있었다. 현대의 컴퓨터 인터넷시대에는 손으로 쓰는 육필(肉筆) 상실의 시대에 살고있다. 연필과 만년필 땀 냄새가 밴 손 글씨가 사라졌기에 시인의 체온으로 쓴 육필 원고지와 시는 더욱 그리운 것이다.
2층 남측 발코니에서 바라보면 원천마을 겨울들판이 멀리 펼쳐져 있다. '하늘이 처음 열리고 닭 우는 소리 들렸던 광야(曠野)' 바로 여기가 광야가 아니었던가!
(상징광장 조형물 '구국의빛') (제2전시관 '의열관' 내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경북 안동은 퇴계 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유학자들이 국난 극복을 위한 활동과 희생으로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자정순국자를 배출하였다. 경북은 독립학생운동이 전국에서 처음 일어난 지역이며 안동은 가족과 가문 마을단위의 독립운동이 유난히 많았던 지역이다.
임하댐아래 반변천이 휘돌아 나가는 언저리에 내앞마을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영남 4대 길지 중 하나로 바로 이곳 내앞마을(川前理, 천전마을)을 꼽았다. 내앞마을에는 의성김씨 종택(보물450호)을 중심으로 귀봉종택, 제산종택, 추파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 백인재 등의 고택이 있으며 후학을 양성하던 기산서당, 운곡서당, 우곡초당이 있는 선비마을이다. 내앞마을 바로 건너편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위치한다.
독립운동기념관 건축은 내앞마을의 질서를 존중하듯 여러 채의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건축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건축은 거대하거나 웅장하지도 않다. 안동의 정서와 주변 산과 들의 경관에도 순조롭고도 편안하게 앉아있다. 서측의 주차마당에서 건물에 진입하게 된다. 건축시설은 독립관(제1전시관), 의열관(제2전시관), 신흥무관학교(체험관)과 외부공간에는 추모벽, 구국의빛, 가산서당 별당이 배치하고 있다.
기념관 건물의 남측 정면으로는 상징 기념공간으로, 기념비와 여인상 조형은 태극기와 불꽃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전시시설인 독립관과 의열관을 관람하고 나오면 만나게 되는 서측 외부마당은 ‘추모의 벽’이 수평으로 길게 둘러싸고 있다. ‘1,000인, 광야에 서다’라는 타이틀이 거느리고 있는 듯, 길게 뻗은 하얀 화강석 벽면의 검은 판석에는 독립운동 희생자 1,000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세계 지구의 구(求)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추모의 벽’은 독립운동기념관의 클라이맥스요 ‘죽은 자’를 위한 장소이다.
뉴욕 ’그라운드제로’에는 9,11테러 희생자 이름이 세겨진 벽체 아래로는 24시간 눈물처럼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중국 ‘난징대학살기념관’ 캄캄한 방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러 퍼져 12초마다 한 명씩 살해당했음을 상기시킨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 관을 상징하는 직육면체의 콘크리트 기둥 2천7백 개가 도열해 서있는 도시공원이다. 예루살렘 서쪽 ‘통곡의 벽’은 뿌리를 잃은 유대인들이 통곡을 하고 기도를 올리는 장소이다. 바로 추모와 기억의 클라이맥스 장소요 공간이다.
인, 의, 예, 지 유교정신의 계승으로 스스로 자기혁신을 이루며 곧 나라사랑 독립정신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며 임진왜란에서부터 의병항쟁, 6,10만세운동, 의열투쟁, 광복군 등의 기록과 유물을 1945년 광복까지 나라 찾기에 가문과 가족을 바친 숭고한 실천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기억속의 독립기념관은 매년 광복절 행사를 치르는 대한민국 상징의 거대한 ‘천안독립기념관’을 떠올리고 있었고 독립운동 애국심 나라사랑은 역사 교과서와 주입식교육으로만 경험하고 있었다. 교육이 실종되어가고 정치가 어지럽고 국제정세가 다변화할수록 우리국민의 가치관과 올바른 정신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이곳을 떠나며 생각해본다.
안동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가문과 전통마을은 곧, 지금 남아있는 고택과 마을이 거의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 전통건축물로서의 건축 가치로만 보아왔던 시각을 달리하게 된다. 다음 걸음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정자 는 안동의 답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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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꾸준히 열심히 글 쓰시는 활발한 모습 보기 좋습니다.
이육사 문학관 스케치는 여전히 멋지고요. 잘 계시는지요?
송년 모임도 없이... 꽁꽁 언 세상에 봄날이 오겠지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