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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부 무지개의 꿈
제7부|무지개의 꿈
신의 문
어떤 학자는 우수를 한자의 '牛首'로 보아 '쇠머리'라고 번역 하는데 이는 한자의 우수가 아니라 고미어의 오스(熊)처럼 '리더쉽'을 상징하는 것이며 히브리어의 '우스'처럼 '비옥한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여기서 바로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아사(朝)', '아스' 그리고 '아침' 등의 말이 나왔을 수도 있다.
산동성의 곡부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의 동부에서 살았던 동이족이 조상 소호(小昊)가 발해의 동쪽에서 왔음을 중국의 사서들은 명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소호족이 볼가강 상류의 카잔에서 카마강을 타고 올라 가다가 우랄산맥을 넘는 북방경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온 고아시아족의 일부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호족은 유일신을 섬기는 천손(天孫)사상을 배경으로 가부장적 부계사회를 형성하였고 회색토기와 삼족기 그리고 새 모양을 토기를 비롯한 동이문화를 발전시켰고, 우수한 제철기술과 학문은 역대의 황제가 동이족의 인정을 받아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소호족의 원류가 되는 고아시아족의 본류는 어떤 경로를 따라서 '동해밖의 큰 골짜기'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일까?
언어학자 강길운박사는 그의 저서인『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에서
"오늘날의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계의 언어 중에서도 특히 시베리아계에 속하는 길약(Gilyak)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순수한 길약족은 지금 수천 명에 불과하며 주로 아무르강 하류와 사할린 북부 지역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특이한 지명을 몇 개 발견할 수 있는데 즉 그 하나는 블라디보스토크 바로 위에 있는 '우수리스크'라는 도시이고 거기서 아무르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우수리강'이 있으며 또 하나는 새야호수와 아무르강 사이에 있는 '우수문'이라는 지명이다. 이와 비슷한 지명은 한국에도 있는데 즉 춘천의 옛 이름이 바로 '우수'인 것이다.
어떤 학자는 우수를 한자의 '牛首'로 보아 '쇠머리'라고 번역 하는데 이는 한자의 우수가 아니라 고미어의 오스(熊)처럼 '리더쉽'을 상징하는 것이며 히브리어의 '우스'처럼 '비옥한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여기서 바로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아사(朝)', '아스' 그리고 '아침' 등의 말이 나왔을 수도 있다. 지도를 보면 '우수'라는 지명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 남쪽에는 '우스펜스키'가 있고 알마아타 북쪽에는 '우스토베'가 있다. 또 우랄산맥의 북쪽에는 '우사강'이 있고 크라스노야르스크 북쪽에는 '우수토에'가 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로 '우스트(Yst)는 …의 입구'라는 뜻인데 러시아에는 이 '우스트…'라는 말이 붙은 지명이 수 십 개나 있다.
더 흥미 있는 것은 이 지명들을 모두 줄을 그어 연결하면 우랄 서쪽으로 간 핀족과 고미족 그리고 우랄 북동쪽으로 올라간 우구르족의 루트와 시베리아를 지나서 바이칼호를 건너 아무르강 쪽으로 이동한 고아시아족의 루트 그리고 알타이산맥으로 들어간 알타이, 몽골족의 루트와 곤륜산 북쪽을 거쳐 황하의 상류로 들어간 하화족의 루트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려지는 것이다.
이 루트를 따라가 보면 우리의 선조들인 고아시아족은 바이칼 호수를 건너 야블로노비 산맥의 북쪽 기슭을 돌아 세야호수 밑의 우스문을 거쳐 아무르강을 따라 남하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우수리강을 따라 연해주 쪽으로 내려왔으며 또 다른 줄기는 바로 아무르강과 합쳐지는 송화강을 따라 올라가 하얼빈 쪽으로 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아시아족의 주류가 송화강변의 하얼빈 쪽으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는 또 한가지가 있다.
대홍수 이후에 인류가 삶의 첫발을 디뎠던 그 땅은 아라랏산을 정점으로 좌우에 타우루스산맥과 자그로스산맥이 벌려서 있었고 그 남쪽에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강이 흐르다 두 강이 하나로 연합하여 폐르샤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형이 있다.
그 땅에서 바벨탑을 쌓다가 실패한 그들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그 곳과 닮은 땅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중에 여러 형제들이 여기가 바로 그 '우수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남거나 갈라져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동쪽을 향하여 온 소아시아족은 결국 그 유랑의 끝에서 그럴 듯한 땅을 찾아냈다. 바이칼 호수를 지나자 눈 앞에는 야블로노비산맥이 펼쳐 있었다. 그들이 이 산맥의 뒤를 따라서 들어가자 해발 2,999미터의 차라봉이 나타났고 그 곳을 정점으로 하여 다시 동쪽에는 스타노보이산맥이 뻗어 있었다.
그 두 산맥의 가운데 있는 골짜기는 '우스트-퉁기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퉁기르'라는 말은 수메르어의 '딩기르'와 몽골어의 '뎅기르' 즉 '신' 또는 '하나님'과 같은 유형이고 '우수트'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의 입구'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 두 산맥의 남쪽에 흐르는 아무르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그 강이 또 송화강이라는 또 하나의 강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티그리스와 유브라데강이 합류하여 페르샤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과 같았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송화강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대평원의 중심부에 있는 '하얼빈' 쯤의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 사람들은 대궐이나 가옥의 터를 잡을 때 높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양쪽에 산맥이 벌려 서고 그 남쪽에 강이나 시내가 흐르는 곳을 소위 '명당'이라고 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아사달'의 위치에 대하여『위서(魏書)』와『고기(古記)』의 두 가지 기록을 인용하면서도 나름대로 주석을 달아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위서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천 전에 단군왕검이 있는 도읍을 아사달(阿斯達)로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일컬었으니 고(高)와 동시라 하였다."『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
그런데 일연은 이 '아사달'에 대하여 자신의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다.
"경(經:(산해경)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고 하고 또한 백악(白堊)이라고도 하니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연은 또『고기(古記)』라 하여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자료를 소개했다.
"당고(唐高)가 즉위한지 50년인 경인(庚寅)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컫고 그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 하니 치국하기 1500년이었다."
여기서 '궁홀산'이나 금미달은 모두 '곰골' 또는 '곰달'을 의미하니 다 '아사달'의 의미이며 그 위치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는 고려사의『김위제전』에 인용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들어 아사달이 '하얼빈'일 단정하고 있다.
"저울대는 하얼빈이요 저울추는 안시성이요 저울판은 평양이로다."『고려사』김위제전
"이두문의 독법에 부소(扶蘇), 비서(非西), 아사(阿斯)는 '아스;로 읽으며 오덕(五德), 오비(五非), 안지(安地), 안시(安市)는 '아리'로 읽으며 백아강(白牙岡), 낙랑(樂浪), 평원(平原)은 '파라'로 읽는 것이다." 신채호『조선상고사』신지의 역사
우리는 이렇게 해서 결국 송화강변의 하얼빈이 소호의 본향인 '동해 밖의 큰 골짜기'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하얼빈으로 가는 북방항공 SZ4602편 비행기를 탔다.
하얼빈 공항에 내린 우리는 호텔에 짐을 푼 다음 하얼빈 시내를 둘러보았다. 어딘가 우리 선조의 입김이 남아 있을 것 같은 하얼빈은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을사늑약을 주고한 일본의 총리대신 이등박문을 저격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얼빈에 조선족이 4,5000 명 살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우리 선조들의 냄새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러시아 풍의 건물이 많아 지난날 아시아의 유럽으로 불리워졌던 하얼빈은 지금 인구 360 만에 중국의 여덟 번째 도시로 북경이나 상해에 비해 진전이 늦기는 하나 분명히 개방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송화강변의 스탈린 공원에는 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 강변의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탐사대는 오랜 탐사의 피로도 풀겸 유람선을 타고 송화강 물 위를 달렸다. 송화강의 옛 이름은 열수(列水)인데 이는 곧 '아리수'이며 압록강과 마찬가지로 '새의 강'이라는 뜻이었다. 아라랏산과 러시아 평원과 시베리아를 거쳐 길고 험한 끝에 BC2333년 이 곳에 도착하여 비로소 유랑의 날개를 접었던 우리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지금 이 송화강변에 와 있는 것이었다.
아사달을 찾아서
금대고도(金代故都)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약도에는 아골타의 묘지와 황성의 터와 함께 도읍의 이름을 백성(白城)이라고 표시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잘 알지도 못하고 옮겨 적었던『고기(姑記)』이 백주(白州), 백약(白岳), 백악산아사달(白嶽山阿斯達), 백악궁(白嶽宮)이 아닌가?
우리 선조들이 그 유랑의 날개를 접었던 아사달로 추정되는 그 땅 아성(阿城)에서 고아시아족 최후의 세력인 금(金) 제국이 일어났었다.
하얼빈은 이제야 비로소 잠에서 깨고 있었으나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하얼빈에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대경(大慶)이라는 중국 최고의 석유 생산지가 있고 농작물 생산량도 엄청나다.
한국이 통일되는 날이면 하얼빈은 한국과 러시아를 이어주는 이상적인 무역도시로 탐바꿈하여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얼빈 박물관은 마침 '수리중'이라는 이유로 관람이 허락되지 않았다. 갑자기 방문처를 잃어버리게 된 형국이었으나 곧 우리는 다시 새로운 탐사 계획을 세웠다. 하얼빈에서 동남쪽으로 25킬로 지점에 '아성(阿城)'이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내었던 것이다.
"아성(阿城)이라면… 그것은 아사달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아성은 어떤 곳입니까?"
"금(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아성입니다."
AD 1115년 금(金)을 건국한 아골타(阿骨打)는 아무르강변에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의 한 지류인 여진족의 추장이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아성(阿城)에 터전을 잡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스스로 그 이름을 아성 출신이라는 뜻의 '아골타'라고 했다. '아성'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혹시 그 곳이 바로 '아사달'이라면 그 것은 고아시아족의 터전인 동시에 오스(雄) 또는 검(儉), 감(上) 등으로 표현되는 리더쉽의 상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성에서 금(金)을 세우고 태조가 된 아골타(阿骨打)는 황해도 평산 땅에 살다가 북으로 이주해간 고려 사람 김함보의 후손으로 발해의 유민과 거란인을 모두 포섭하여 요(遼)를 멸하고 북송을 병합하여 대 제국을 이루었으나 도읍을 연경 즉 오늘의 북경으로 옮겨 중원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나라 이름을 자신의 성씨로 한 금(金)의 태조가 국력을 결집하는데 사용했던 특이한 체제가 '맹안 모극제'였는데 기이한 것은 그것이 천 부장 제도와 족장 체제를 겸용했던 모세의 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금제국은 고아시아족의 건전한 국풍(國風) 진작을 위해 매우 애를 썼으나 결국 백성들의 급속한 한화(漢化)를 막지 못하여 점점 그 국력이 약화되다가 10대 만 120년 만인 AD 1234년 징기스칸의 후계자 오고타이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이 대제국 금(金)은 고구려와 발해가 사라진 이후 만주 대륙을 지키며 고아시아족의 명맥을 이었고 이후에는 다시 몽골족 원(元)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역시 금의 '맹안 모극제'를 이어받아 천하를 경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성에 도착한 우리는 금의 유적이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유물의 관리가 허술한 것은 우리가 곡부에서 소호의 능을 찾았던 때보다 더 한 것 같았다. 좁은 흙탕길을 지나 여러 번 길을 물은 끝에 우리는 겨우 금(金)의 토성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금경토성(金京土城)에 세워진 비에는 1982년 2월 23일 국가 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되었다는 기사가 새겨져 있었고 많은 회색토기의 조각들이 토성의 흙더미 이에 묻혀 있었다. 토성을 쌓기 위해 흙을 파 올리기 이전부터 그 흙 속에 회색토기의 문화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또 금 태조의 능비에는 아골타가 송화강이 지류인 '아스하'(阿什河)의 유역에 살던 완안부(完顔部)의 수령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아스하가 어디지요?"
"저쪽 멀리 보이는 완달산 아래도 아스하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스하는 송화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 중의 하나이지요."
'아스'는 '밝는' 날을 뜻하는 일본의 '아스'와 아침을 의미하는 '아사'(朝)와 같은 계열이 어휘이면서 동시에 고미족의 오스(熊)와 일본의 오스(雄)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검(儉), 가무(上) 또는 가미(神)의 의미를 가진 말로 지도자가 있는 곳의 지명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더구나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금대고도(金代故都)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문에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그 약도에는 아골타의 묘지와 황성의 터와 함께 도읍의 이름을 백성(白城)이라고 표시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잘 알지도 못하고 옮겨 적었던『고기(姑記)』이 백주(白州), 백약(白岳), 백악산아사달(白嶽山阿斯達), 백악궁(白嶽宮)이 아닌가?
우리 선조들이 그 유랑의 날개를 접었던 아사달로 추정되는 그 땅 아성(阿城)에서 고아시아족 최후의 세력인 금(金) 제국이 일어났었다. 그 곳에는 아리수(列水) 즉 송화강의 지류인 아스(阿什)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들판에서 한동안 감동에 젖어 있었다. 바로 여기서 시작하여 우리 선조들은 만주 대륙에 정착하였고 다시 그들 중 일부인 소호(小昊)족을 중국 대륙의 산동지역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사서 회남자(淮男子)는 이 동방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동방의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동방의 목덕이 어진고로 군자의 나라가 있다 하나니라. 그 나라 사람들이 관면을 쓰고 신대를 두르고 칼을 차고 육식을 하며 표범과 호랑이를 부리나니라."『회남자』
우리가 동방에 있던 군자의 나라를 생각하여 감회에 잠겨 있을 때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이벤허 박사가 말했다.
"아직 감동하기에는 이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혼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벤허 박사는 묘한 여운이 있는 말과 함께 우리를 이끌고 심양으로 들어갔다. 그 심양에 이박사가 우리에게 보이려는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심양이라는 것이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가 서로 접촉하고 있는 매우 민감한 장소인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여신과의 만남
심양은 중국 요녕성(遼寧省)의 성도이다. 소위 '요동지역'이라 불리우는 곳으로 여기서 하북성의 북경을 거쳐 중국대륙으로 들어가려면 발해만으로 흘러 내려가는 세 개의 큰 강 즉 요하(遼河), 대능하(大凌河)와 란하(樂河)를 건너야 한다.
이 세 개의 강은 늘 하화족과 동이족의 고대사를 논할 때 그 경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지점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국대의 윤내현 교수는 단군의 도읍지 중 백악산 아사달은 란하의 하류에 정당경은 대릉하의 하류에 그리고 평양성은 요하의 하류에 있었다는 것을 중국 사서들을 통해 논증하고 은(殷)의 멸망과 함께 망명한 기자(箕子)에게 고조선이 내 준 땅은 란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으며 한(漢)의 위만이 들어와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세운 위만조선이 있던 곳도 그 곳이며 한이 나중에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 임둔, 진번은 란하와 대증하 사이에 있었고 현토군(玄兎郡)은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으므로 하화족은 단군조선이 붕괴된 BC 1세기 경까지 요하의 동쪽으로 넘어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 진시황제가 조선을 두려워하여 쌓은 만리장성이 란하의 하류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에서 시작된다는 점도 윤교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이벤허 박사가 우리 탐험대에게 아직 감동하기에는 이르다면서 우리를 그 요하의 동쪽에 있는 심양으로 인도한 것은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는데 바로 심양의 요녕성(遼寧省) 역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요녕성역사박물관은 요하(遼河) 유역에서 원시농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하화문화를 집중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채도문화와 용(龍)의 문화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심양의 박물관에서 우리가 더욱 놀란 것을 흙으로 빚은 여신(女神)의 두상(頭像)이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 두상은 크기와 거의 사람 얼굴만 하고 약간 넓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온 것은 우리와 비슷했으나 옥으로 만들어진 푸르고 큰 눈이 박혀 있어서 꽤 이국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두상이 여자의 것임은 함께 출토된 유방과 손이 조각이 그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우리에게 떠오른 것은 중국 사람들이 떠받드는 '서왕모'(西王母)라는 존재였다.
하화족은 티벳의 북방에 있는 청해(靑海)의 곤륜산을 그들의 본향으로 여기는데 그 곤륜산의 여신이 바로 서왕모였던 것이다.
"다시 서쪽으로 350리를 가면 옥산(玉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은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는 곳이다. 서왕모는 그 형상이 사람같지만 표범의 꼬리와 호랑이 이빨을 학 휘파람을 잘 불며 더부룩한 머리에 머리 꾸미개를 꽂고 하늘의 재앙과 모형을 주장한다.『산해경』
곤륜산 아래의 타림 분지가 하화족과 관계있으며 그 산을 옥산(玉山)이라고 할 정도로 옥이 나오는데 산인대 여신 두상의 눈이 푸른 옥으로 된 것을 보면 그것이 곤륜산에서 온 하화족이 것임에 틀림이 없었고 산해경의 기록이 단순한 전설이나 상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 여신 두상이 출토된 곳은 심양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의 상류에 있는 능원(凌源)의 우하량(牛河梁)이라는 곳이어서 일단 관심의 초점은 요하에서 대능하 쪽으로 한발 물러서기는 했다.
그러나 요녕성 서쪽 끝에 있는 능원의 출토품을 굳이 요하의 동쪽에 있는 심양까지 가져다가 전시해 놓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는 동이족의 활동이 하얼빈에서 시작하여 요동반도와 중국 대륙의 동부를 다 차지하고 살았으리라 추정했었는데 바로 그 겨드랑이 깊숙히 하화족의 서왕모로 추정되는 여신의 두상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혼란에 빠진 우리를 이끌고 이벤허 박사는 심양역으로 갔다.
초야
유브라데의 최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홍수 이후에 인류가 새 역사를 시작했던 아라랏산에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결단하리라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었던 것이다.
공작부에는 우하량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의 석기, 토기들도 전시되어 있었고 제당에 일렬로 놓았던 도관(陶罐)과 채색토기들, 그리고 동전모양의 장신구, 소형 삼족기와 첨저형 토기들도 보였다.
우리는 다시 지석총을 보기 위해 현장으로 갔다. 지석묘군은 둥그런 삼층 제단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돌을 둘러 세운 무덤의 모양은 우리가 아조프나 알타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가 옥저룡이 나온 자립니다."
관리인이 가리킨 것은 제일 서쪽의 지석묘였다.
묘는 모두가 서관형으로 납작한 돌을 관의 모양으로 만들어 상판으로 덮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쓰고 있는 형식과 똑 같은 것이었다.
"이 작은 무덤은 애기 무덤입니까?"
"아닙니다. 머리만 묻은 것입니다."
왜 머리만 묻은 무덤이 있는 것일까? 간혹 머리를 적에게 빼앗거나 몸만 묻은 무덤은 있으나 몸이 없이 머리만 묻는 경우는 드문 것이었다. 아마도 짐승에게 몸을 먹히고 머리만 남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발굴자들은 묘 위의 돌을 쌓아 놓은 곳에서 곰의 턱뼈를 발견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하량유적지 탐사를 끝내고 심양을 향해 출발했다. 벌써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머리 위의 도로 표시판에는 '심양 450킬로'라고 적혀 있었다. 고속도로 같으면 다섯시간 쯤 달리면 되는 거리지만 중국인 운전사는 고개를 저으며 열 두시간도 빠듯할 것이라고 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서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밤을 뚫고 달리면서도 우하량에서 만난 여신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우하량, 그 곳은 결국 동쪽을 바라보고 온 고아시아 족과 동부로 넘어 들어간 동이족 그리고 몽골족과 하화족이 만나는 교착점이었다.
바로 그 곳에서 그들의 빈번한 만남과 교류 또는 충돌과 갈등이 일어났을 것이다. 단군이 나라를 열었다는 BC 2333년을 전후에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무리 직업적인 운전자라 할지라도 밤을 새워 운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우리 촬영대원 중에 대형면허를 가지고 있는 대원이 중국인 운전사를 쉬게 하고 대신 핸들을 잡았다. 여기 저기 파헤쳐 지고 막아 놓아 이리 저리 돌아서 가야하는 요동이 험한 길 그 것도 난생 처음 가보는 길을 밤을 뚫고 달리면서 우리는 그 동안 더듬어 온 한민족의 고대사가 송두리째 헝클어져 버리는 듯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그런 가운데 우리는 정말 중국인 운전사의 말대로 밤길을 열두 시간 달렸다.
"심양이다"
날이 뿌옇게 밝아 올 때 누군가 앞을 가리키며 그렇게 외쳤다. 우리는 결국 밤을 뚫고 열두 시간의 강행군을 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벤허 박사는 지쳐 있는 우리를 다시 잡아 일으켜서 우리 탐사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심양의 신락(新樂) 유적지로 끌고 갔다.
신락유적지는 원시사회의 취락이 있던 자리를 복원하고 그 곳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요녕대학 역사학과를 나온 조선족 출신의 김홍매(金紅梅 24)양이 안내를 맡았다.
"중국의 북방문화에서 이 곳 신락문화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 다음이 홍산문화, 부하구(富河溝)문화로 이어집니다."
신락유적지박물관에도 마반석, 돌도끼 등과 평저형토기, 사구기(斜口器)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특히 돌화살촉과 돌칼 등 세석기가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주로 가죽과 고기를 다루는 유목민 또는 수렵을 생업으로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 이 곳에는 우리가 아조프박물관에서 보았던 정례용 붉은 돌가루를 갈아내는 광석과 마반석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산동지역의 동이문화에서 흔히 보았던 삼족기와 취사용 대형 삼족기 등 각종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 또 이 곳에서 지도자의 상징으로 보이는 '새 모양'의 목조가 발견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모이는 회의 장소거나 제사 장소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그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유물들로 보아 신락유적지의 유물들은 거의 모둑 부계사회였던 고아시아족 또는 동이족의 유물임이 틀림이 없는데도 박물관 측은 여기서 발견된 고대 유적지 역시 모계사회의 유적인 것처럼 복원해 놓고 있었다.
신락유적지에는 그 새 모양의 목조(木雕)가 발견된 1백 평방미터의 집터가 있었다. 한 가운데 난방 취사용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구덩이가 있었고 집의 구조는 통나무와 초가 지붕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유적지 복원 가옥 17호 집터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이 있었고 4호 집터에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만드는 장면, 그리고 7호 집터에는 사냥한 짐승을 구워 먹는 장면이 있었고 18호 집터는 어부의 집으로 그물과 도자기 등이 있었으며 11호 집터에서는 마반석을 사용하여 취사 준비하는 장면이 있었고 16호 집터에서는 평저형토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들이 있어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8호 집터에서는 씨족회의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여성이 희의를 주관학 남자들은 선채로 경청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왜 신락유적지를 모계사회였다고 단정하십니까?"
우리는 나중에 만나게 된 부관장에게 물었다.
"방의 구조라든가 유물들을 가지고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취사용 화덕이 중앙에 있다고 해서 모계사회라는 근거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또 한가지는 이 유적이 가장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지요. 사회주의 사관에 의하면 모계사회가 먼저 있었고 중국에서 부계사회가 딘 것은 상당히 늦기 때문입니다."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여성의 나체상 같은 것이 여기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신락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요하의 서쪽에 있는 심양의 신락유적지까지 모계사회였던 하화족이 문화권으로 보려는 중국 사학계의 전래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량하의 여신상으로 보아 그 지역에 거의등신대의 여인상은 빚어서 만들 정도로 개방적인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일단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신락 유적지의 1호 집터를 기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남자와 여자의 '초야'(初夜)장면을 만들어 놓았는데 남성의 품에 안긴 여성이 적극적인 자세여서 우리는 미소짓게 했던 것이다.
심양을 떠나기 전 53일 간의 1차 장정을 끝낸 우리는 리정호텔에서 탐사결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그 동안 지나온 지역의 대학과 박물관에서 만난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익숙해 온 인본주의 사관 또는 사회주의적인 사관 그리고 민족 우월주의에 기인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탐사대가 병행발생설의 모순에 대해 끈질기게 캐 들어가면 그들의 대부분은 결국 '사적견해'를 전제로 하여 그럴 가능성도 있다며 문화이동설을 수궁하곤 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다시 한 번 탐사의 시작부터 확인해 온 자료들을 정리해 보았다. 대홍수가 끝나고 유브라데강을 따라 메소포타미아평원으로부터 내려간 노아의 자손들은 강변의 시날평지에서 일단 정착하기로 하고 바벨탑을 쌓았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심판으로 바벨탑은 무너지고 노아의 자손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셈의 일부는 동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가며 수메르문명을 건설했고 그들 중의 일부인 드라비다족은 폐르샤만을 지나 인도로 들어가 인더스 문명을 건설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유브라데강을 거슬러 올라가 밧단아람과 하란지역을 지나 다시 반호수 북방의 흑요석 산지를 거쳐 아라랏산으로 돌아갔고 야벳의 자손들은 터키의 아나톨리아지방을 비롯한 바닷가 땅에 흩어져 살기 시작했으며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 북부와 유대지역으로 물러났다.
또 셈의 일부인 앗수르족속들은 앗술과 니느웨가 있는 현 이라크 북부의 모슬지역에 정착했다가 수메르의 세력이 북상하기 시작하자 티그리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역시 아라랏산에 이르게 되었다가 시기가 같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라랏 주변 지역에 다시 모이게 된 셈과 야벳의 일부 자손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서 아라랏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을 계속하며 볼가강을 따라 북상했고 셈의 자손 중 일부는 핀랜드지역으로 또 고미족은 우랄산맥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야벳의 일부는 러시아평원과 유럽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셈과 야벳이 자손들은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그들 중 일부는 이르투쉬강을 끼고 중앙아시아쪽으로 내려갔으며 그들 중 아리안족은 힌두쿠쉬산맥을 넘어 인도로 들어가 인더스문명을 건설하고 있던 드라비다 족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인도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북방루트를 고집한 사람들이 시베리아를 거쳐 바이칼호수를 건너 야블로노비산맥을 지나 아무르강과 아리수 즉 송화강 지역에 정착할 때 다른 일부의 셈과 야벳자손은 알타이산맥과 타림분지등으로 들어가 정착할 자리를 찾았다. 그 때 이들 가운데 여성 파워가 강한 하화족 자손들이 동쪽으로 이동을 계속하여 황하 상류에 이르렀고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한 몽골인들은 몽골땅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홍수이후에 온 땅으로 펴져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한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7)
그렇다면 왜 고시아족은 그 어느 족속보다도 멀리 이동하여 아무르강까지 이르렀던 것일까? 우리는 탐사 중에도 계속 이 문제를 토론해 보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먼길을 걸어 아사이 대륙의 맨끝까지 오게 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그것은 '장자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장자의 속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우들에게 대한 양보이다. 결국 그들은 갈등이 생길 때 마다 아우들에게 땅을 양보하고 새 땅을 찾아 떠나다 보니 땅의 맨끝까지 오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쉽게 떠나 버리는 우리 선조들의 '나그네 정신'이 우리 정서에 늘 '간다'고 하는 이별의 개념으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사달 지역에 정착하고 있던 고아시아족의 일부인 소호(小昊)족이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산동반도 쪽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동쪽으로 이동할 장소가 없어서 그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는지 모른다. 또 여기까지 따라왔던 야벳족속은 그들과 함께 서쪽으로 가 하화족과 합류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동이의 문화는 하화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장자의 길
이제부터 우리가 정리해야 하는 것이 즉 적봉(赤峯), 능원(凌源)에서 나타난 하화족의 문화에 대한 문제이다. 서안의 반파와 황하상류의 임분을 통하여 들어온 하화의 문화가 어떻게 적봉과 능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며 동이족의 문화와의 만남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보면 서로 다른 종족과 종족이 접촉할 대 동물의 경우처럼 갈등과 충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전쟁'(戰爭)이라는 논리를 고정관념으로 사용해왔다. 그리고 그 증거로 돌도끼나 화살촉 또는 돌로 만든 칼이나 청동검을 제시해 왔다.
과연 인류는 서로 만나자 마자 전쟁으로 역사를 시작했을까? 성경에는 홍수 이후 인류가 서로 헤어지기를 싫어하여 바벨탑을 쌓았다고 되어 있는데 그 것은 살아 남은 사람들이 서로 헤러져 살기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우리 탐사대는 20세기에 살면서도 메소포타미아의 광야나 시베리아의 황막한 길을 달릴 때에 사람이 그립다는 것을 느꼈다. 하물며 어디를 가도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그 때에 서로 만나면 칼과 도끼로 싸움부터 했을까? 오히려 이 때부터 나그네를 반갑게 대접하는 아브라함 때의 습관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
이미 고고학자들은 당시 돌칼이나 청동검이 살상용이 아니라 제사용이며 돌도끼는 생활도구,화살촉은 수렵용, 이렇게 대부분의 무기들이 수렵용이거나 맹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였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증거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나타나는 조선의 국가 조직에는 군대를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던 것이다.
"주곡, 주명, 주병, 주형, 주선악의 부서를 두어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주관하게 했다.『삼국유사』고조선
여기서 보면 농사와 건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거의 모두가 신앙적 업무를 분담하는 부서로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단군이라는 제사장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들의 정부에 군대를 총괄하는 국방 조직을 두지 않았을 정도로 진실한 것이었다. 중국 쪽에서 잇달아 정변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도 조선은 2천년이상 국방부 없이 살아왔으나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은 포용력이 커 은의 소멸과 함께 도망 온 기자(箕子)에게 란하와 대릉하 사이의 땅을 주어 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이족의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공구의 제자들을 죽인 후 진시황제는 오히려 조선을 두려워하여 지레 겁을 먹고 산해관에서 시작하는 엄청난 규모의 만리장성을 쌓았다. 무엇이 이 천하의 진시황제를 두렵게 하고 그토록 미친 사람처럼 장성을 쌓게 하였던 것일까? 언제나 아우들에게 양보하며 땅끝까지 옮겨온 우리 선조들의 '장자정신'과 2천년이 넘도록 군대조직 없이 살아온 '평화정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결코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지 않았던 그들의 '나그네 정신'이 진시황제를 그렇게 두렵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은 또 한(漢)에서 도망온 위만이 기자조선을 점령했을 때에도 상관하지 않았고 나주에 또 한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위만 조선을 빼앗고 란하와 요하 사이에 한사군을 설치했을 때에도 그들과 아무런 충돌없이 침묵했다. 그러다 결국 조선은 외래인인 혁거세와 주몽을 영입하여 비로소 국방력을 갖춘 신라와 고구려로 변신하고 다시 고구려에서 남하한 세력을 중심으로 생긴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신라에 처음 왕이 생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잦은 이방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울을 왕으로 삼은 BC 1050년보다도 1천 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러므로 고대에 서쪽에서 들어온 하와족이 적봉이나 능원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더라도 조선은 그들을 포용했고 오히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을 터인데 그들의 문화 속에 섞여 있는 동이의 문화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봉과 능원일대에 퍼져 살았던 하화족과 몽골족의 홍산문화 특히 진취적인 여성들의 파워는 나중에 한국에도 적잖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포용력이 큰 우리 선조들은 다른 부족들에서라도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기꺼이 영입하여 지도자로 삼았는데 소위 알에서 태어났다는 주몽, 혁거세, 알지, 수로 등이 모두 그러한 외래인이었다. 그 중에도 특히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모친이며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유화(柳花)는 하백(河伯)의 딸이라 기록되어있고 주몽 자신도 그가 하백의 외손임을 밝혔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이 외손이라."『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이는 곧 주몽이 고아시아족이 천손사상을 계승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온 해양민족인 하화족 또는 진취적인 여성이 주도하던 몽골족과 기질을 주고 받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강길운 박사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에 몽골어가 들어와 있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역사 속에 녹아진 몽골 또는 하화의 진취적인 여성상은 한국이 나중에 끊임없는 외침을 당하며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이를 극복하고 민족의 역사를 끈질기게 이어 오게 만든 큰 저력이 되었다.
이렇게 볼 대 결국 우리는 스스로 가부장적인 권위를 지켜 온 특별한 민족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소유를 초월한 '장자정신'과 평화를 사랑한 '믿음'과 스스로를 낮추는 '나그네 정신'을 더 큰 자랑으로 삼아 온 민족이며 그 유산을 우리는 새로운 세기에 이어 가야 할 것이다. 대홍수가 끝났을 때에 하나님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무지개의 약속'을 선물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3)
하나님께서는 왜 빛을 무지개의 아름다운 일곱 빛깔로 분해하셨던 것일까? 모든 민족이 형제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하신 것은 아닐까?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며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믿음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도 아쉬운 이 시대에 한국인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음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제 7 부 요약
약속의 땅에 살다 요(堯)와 함께 새 땅을 찾아 서쪽으로 갔던 야벳의 형제들은 황하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 분하 유역 평양에 이르러 정착하게 된다. 이들에게서 하화(河華)족이 비롯되었고, 소호(小昊) 족은 산동반도 곡부(曲阜)를 중심으로 삼아 태산(泰山)이 그들이 성산(聖山)이 되었다.
하화(河華) 족은 늘 동방의 소호족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받으며 살았다.그러나 남쪽에서 올라온 음란한 문화의 영향으로 하화족이 타락하자, 소호족의 은(殷)은 신정시대였고, 화랑과 같은 정인(貞人) 그룹이 국정이 주체가 되었다.
하화(河華)의 창(昌)이 일어나 은(殷)을 멸하고, 주(周)를 세웠다. 남방이 영향을 받은 주의 왕궁에는 조상신을 섬기는 종묘(宗廟)와 지신(地神)과 농신(農神)을 섬기는 사직(社稷)을 세웠다. 주(周)가 망한 후, 1백여 국가가 난립하는 춘추시대에 곡부(曲阜)출신의 공구(孔丘)는 본격적으로 신앙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왕(秦王) 정(政)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공구의 신앙부운동은 다시 좌절되었다. 시황제에 오른 정은 공구가 기록한 춘추시대 이전의 사기인 서기를 비롯한 모든 경서를 다 불 태우고. 그의 제자들을 참살하고, 조선과의 경계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을 이어 일어난 한은 소호족을 포섭하기 위하여 유학을 인정했으나 소실된 경서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를 한의 통치이념에 맞도록 모구 왜곡, 변질시켰다. 이 때에 산동반도를 떠나 한반도로 돌아온 것이 금관국의 김수로 왕이다.
AD 67년 후한의 명제가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고구려는 AD 372년에 신라에서는 AD 527년에 불고를 공인하였다. 불교가 후한에서 고구려에 들어오는데 305년, 다시 신라에 들어오는데 155년 걸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야는 끝까지 불교를 거부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후한에서 불교를 들여온 후에도 305년이나 이를 막은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가 공인한 후에도 155년간이나 버틴 신라,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사수하다가 멸망 당한 가야, 규원사화를 쓴 저자는 이렇게 한탄한다.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드렸는데도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차차 이것을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일삼아 드디어 나라가 시들어졌다."
몽고에서는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 나라)라고 부른다. 한국의 나그네 정신을 무거운 신전을 다 헐어 내리고 모든 족속에 복음을 전하며, 신앙의 회복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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