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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예수님!
2010년 새해를 맞아 주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더욱 복된 나날되시길 빕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11월 월례강좌, 특별강좌를 실시한지 꽤 되었는데 나눔이 늦어졌네요.
개인적으로 바뻤었고, ... 고난회 홈피 공사중이라 이 쪽 방으로 들리질 못 하고^^...
방학기간에 천천히 올려볼까 합니다.
강의들으신 분들도 다시한번 기억을 되살려 함께 했던 하느님 안의 시간들을
일상 안에서 퍼올리시면서 주님과 행복한 나날되세요~~~
11월 월례강좌를 처음 맡기로 하셨던 수사님은 로마 부총장으로 임명되어 떠나시고 새로
갈멜 수도회 원장님으로 부임하신 이 돈희 보니파시오신부님께서 강의를 맡아 수고해 주셨습니다.
단정하면서도 다소 예민? 부끄러운 듯한? 모습으로 강의시간 내내 고개들어 학생들도
잘 보시지 않으시면서 차분하게 강의를 해 주시더니 휴식시간에는 여러분들의 질문에 따뜻하게
응답해 주시기도 하시더군요.
강사님과 참석하신 여러분들 주님의 사랑 듬뿍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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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갈멜수도회의 역사에 대해서, 다음에 갈멜수도회 회원이셨던 성인, 성녀들의 삶과 영성을 통하여
갈멜의 영성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갈멜수도회의 역사
갈멜수도회의 갈멜이란 이름은 이스라엘 성지에 있는 갈멜산,
즉 처음으로 수도회가 시작한 곳이 갈멜산이란 점에서 비롯되었으며,
다른 수도회와 다른 점은 수도회의 창설자가 따로 없다는 점과
수도회의 규칙서 또한 그 당시 대부분의 수도회가 베네딕도회 규칙서를 지켰던 것에 비해
갈멜회는 예루살렘 주교였던 알베르또주교님께 요청하여 수도회의 규칙서를 제정하였던 것이다.
갈멜수도회는 중세 십자군전쟁을 위해 모였던 이들이 전쟁이 끝난 후 갈멜산에 모여 기도하고
운집생활을 한 것이 그 기원으로, 당시에는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아 대부분의 시간을 행정업무에
시달렸기 때문에 단순․ 가난 ․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모여 은수생활(고독․ 침묵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1191년부터 갈멜산에서 살게 되었으며 (창립시기는 1200년부터로 간주),
알베르또주교님의 규칙서는 편지형태의 3~4장으로 된 성서의 100여군데를 인용한 것으로
수도회의 카리스마가 성서적이다.
몇 명이 모여 은수생활을 하다가, 성지 갈멜산에서 사는게 위태로워져 고위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으로 어렵게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수도회의 영성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오로지 기도와 노동만 하던 은수자, 순례자적 삶에 탁발수도회의 정신이 함께 녹아있게 되며
지금도 갈멜수도회는 사업을 하지 않는 탁발수도회이다.
▪ 어떻게 은수자들이 갈멜산에서 살았는가?
...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야의 정신을 살려고 했으며, 자신들을 엘리야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정신을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누가 참된 하느님이냐? 당시 바알신을 섬기게 된 민족들에게
바알예언자와 대결하여 야훼께 대한 믿음을 되찾게 해준 엘리야 선지자를 스승으로 모신
갈멜수도회는 면저 야훼께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열정을 품고 홀로 침묵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한 엘리야처럼
관상기도 안에서 시대 표징을 알아보고 고민하고 외치는 수도회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불타있노라’가 갈멜회의 모토이다.
▪성모님 ...
갈멜회의 특징 중 하나는 삶 안에서 성모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친교 를 나누는 영성을 산다.
수도회의 명칭이 <갈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가장 큰 축일로 여김>의 형제들 또는 형제회로
이름처럼 성모님과 긴밀한 연관이 있 는, 성모님께 의탁 ․ 보호받는 수도회로 알려졌으며,
성모신심을 부흥시킴.
모든 크리스찬처럼 사랑의 완성,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를 목표로
성모님은 가까이서 사랑의 일치를 도와주는 어머니로 공경함.
초기 은수자들은 경당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주보성인으로 성모님을 모셨던 , 가장 오래된 성모신심,
수도회에서 비중이 크며, ‘동정마리아의 형제들’이란 이름으로
성모님을 자매라는 말로 가깝게 친밀하게 느끼며 사용하여 신학적으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수도회의 위기가 있을 때 마다 성모님께 기도하여 살아남게 되어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공동체라 여김.
성모님께 보호해달라는 기도는 중세 때의 경우는 기도의 의미가 다르다.
그 당시는 장원제도로 영주가 땅 주인으로 군대를 가져 백성을 보호한 것처럼 수도원의 참주인이신
예수님을 섬기고 여주인인 성모님을 보호자로 모시면서 봉사할 의무도 함께 갖고 있었으므로
이에 맞갖게 성모님께 충실히 일하는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 성모님을 내적인 마음자세
가족적인 일치감
그 안에서 친밀함(어머니 ․ 누나로 모심)
성모님 - 관상생활의 모범(주님 말씀새기며, 주님 뜻을 이루시는 믿음의 삶),
성모님이 갖었던 마음과 덕행(이웃을 돕고 내어주는 삶)을 본받고자하는 열망으로
독특한 마리아적 성모님 신심이었다.
▪ 갈색 스카풀라
갈멜수도회에서 처음 생겨남.
1251년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교회 고위층에서 교황님께 수도회 해체를 요구하는 심한 박해가
일어나자 총장이셨던 성 시몬께서 성모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보증을 주시도록 간청하자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내 사랑하는 양자 결혼의 징표로 스카풀라를 주셨으며,
" 열심히 스카풀라을 찬 사람은 영원한 불의 고통을 면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서
스카풀라신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스카풀라는 성모님의 옷이라는 외적 표시로 마침내 교황님께서도 인정하셔서
전 세계적으로 성모님께 대한 공경과 그 신심이 함께 퍼져나갔으며,
1917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때에 성모님께서는 로사리오와 스카풀라을 들고 발현하셨다.
2. 갈멜수도회의 영성
수도회 성인 성녀의 삶을 대표적으로 나타내신 성인으로
아빌라의 데레사(예수의 데레사, 교회박사, 신비가)와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 갈멜 영성의 기반을 세우심.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수도회의 개혁을 주도하셨으며,
가톨릭 영성에 큰 기여를 하신 분으로 1515년 스페인 작은 아빌라에서 출생,
20살 강생수녀원에 입회하심. 180명이 넘는 공동체라 규칙이 느슨하고 침묵이 잘 지켜지지 않자
보다 더 엄격한 규칙의 작은 수도회 창립 원의를 느낌.
1562년 철저히 예수님만을 위한 성 요셉 수녀원(처음으로 개혁된 수도회로 13명으로 한정)을 세웠으며,
20년간 14개의 수도원을 창립하셨음.
1582년 10. 15일 돌아가셨으며(축일), 기도의 스승으로 공경.
‘자서전’, ‘영혼의 성’, ‘완덕의 길’ 등이 있다.
기도의 삶을 가르쳐 준 책으로 ‘영혼의 성’은 성녀의 영적인 이야기인데
여러 가지 상징과 상상력을 사용함으로써 그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도와 주고 있습니다.
성녀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의 성에 비유를 하시면서
이 성의 가장 중심에는 임금님이신 하느님이 거처하신다고 말합니다.
성의 한 가운데 계신 임금님을 찾기 위해 영혼은 여러 궁방들을 거쳐가야 하는데
기도가 바로 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하느님을 만나려는 열망은 있으나 1 궁방 밖에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 1 궁방에 들어간 사람: 깊은 기도로 하느님과 관계 맺기 사작한 사람.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하느님께 좀 더 다가간 사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기 도생활을 좀
더 규 칙적으로, 특히 묵상기도 혹은 능동적 기도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첫 번째 궁방에 들어선 사람은 하느님 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하느님 부르심을 듣게 되고
이제 막 기도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 2 궁방에 들어간 사람: 묵상기도를 깊이한 사람으로
조금 더 중심에 들어간 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더욱 개인적인 방법으로 듣는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크심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된다.
즉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강론을 들을 때나 좋은 책을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의 고생과 고난을 보고
병을 앓거나 고생을 당할 때 또는 주의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어 하느님을 더욱더 그리워하고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3 궁방에 들어간 사람: 보다 더 큰 내적 평화를 얻음.
하느님과 돈독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일상적인 일이 되며, 기도를 저절로 하게 된다.
이 궁방 에 든 사람들의 변화로는 더욱 기도를 열심히 하며, 고해성사를 많이 보고 기쁘 게 봉사하며
내적 평화를 느낀다. 주님의 자비로 이 궁방까지 온 이들이 다음 단 계로 가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 이것이 모자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의 힘은 아직 깊은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때문으로 악마가 큰 바람을 일으키면 도로 쓰러질지 모른다.
◈ 4 궁방에 들어간 사람: 영혼이 변화하는 때로 묵상할 때 재미가 있고 기쁨을 느끼며,
초자연스런 은혜로 이전의 기도는 의지적 ․ 능동적으로 했는데 여기서 는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며
기도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저절로 하느님이 이 영혼들을 이끌어 주시며, 위로와 김미로움,
향내를 맛보게 하는 은총을 부어주심.
네 번째 궁방에 들어간 사람은 능동적인 기도에서 수동적인 형태의 기도로 불림을 받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것을 고요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첫 세 궁방에서 하게 되는 능동적인 묵상과 네 번째
궁방의 고요의 기도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녀 데레사는 두개의 물통에 물을 채우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즉 첫번 째 능동적인 묵상은 수도관을 통해서 많은 노력을 통해서 물을 채우는 것이고 고요의 기도를
하기 시작한 사람은 샘물에서 보다 쉽고 빨리 물을 채우게 됩니다. 고요의 기도, 잠심의 기도로
분심이 들지 않음. 이 궁방은 자연과 초자연이 함께 하는 자리인 만큼 이런 영혼을 악마는 더욱 노리고
있어 악마가 가장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이상의 궁방에서 할 일은 겸손, 오직 겸손으로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맡겨드리며 세상 것을 멀리하노라면
모든 덕에 진보가 따르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 없는 한 그 덕은 커가기만 할 것이며,
하느님을 거스르면 제아무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해도 영혼은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임.
◈ 5 궁방에 들어간 사람: 짧은 순간이지만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의 체험을 한다.
이 궁방의 은혜를 얻기 위해 주의할 점은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뜻으로
많건 적건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전부 바치라고 하심.
기도 중에 감미로 운 죽음 - 해탈한 영혼의 상태를 체험함.
우리 힘으로 얻을 도리가 없으며 마치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 하시던 때와 같이
주님은 아무런 문이 없어도 영혼의 가장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임.
자애와 자기 의지와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행과 기도, 극기와 순종, 온갖 선행을
하면서 세속에 아주 죽어버리면 고치에서 하얀 나비가 되어 나오게 됨.
이 합일이란 우리의 뜻이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주님 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두 가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인 것임.
가짜로 꾸며진 덕은 어느 것이나 제 자랑에서 비롯하는 법이고 그 뿌리 에서 오는 것.
슬퍼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슬퍼하고, 남의 칭찬을 기뻐하며, 누구의 잘못을 보고 자신의 잘못처럼
슬퍼하고 덮어주며, 자기가 하지 않은 잘못을 덮어쓰더라 도 다만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자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것.
다섯 번째 궁방을 일치의 기도라고 부르는 수동적 일치의 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항상 너무나 짧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기도를
알아차리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 6 궁방에 들어간 사람: 하느님이 보다 큰 은혜를 주시려 할 때 보다 큰 시련이 따른다는 것-
주위 악마들의 유혹으로 내적 시련도 많다. 결혼을 앞 둔 약혼의 시간과 같으며
설레임과 두려움이 생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을런지?
역경 속에선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릴 수 밖에 없으며, 천만 뜻밖에도 하느님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씻은 듯이 가시게 하시고 더할 나위없는 위로가 찾아 들게 됨.
극심한 고통이 휘몰아치는 데도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 은총을 청하며, 이웃 사랑하는 일과
하느님 자비를 청할 것. 기도 중 하느님은 탈혼, 황홀, 탈거 로써 영혼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하심.
때로 주님께서 커다란 기쁨, 이상한 기도를 영혼에게 내리신다.
◈ 7 궁방에 들어간 사람: 비로소 하느님과의 영적 혼인라고 부른 일치의 상태에 이르는 데
삼위일체의 신비에 온전히 잠기게 된다.
성녀는 이 합일의 상태를 빗물과 강물이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말하면서 강에 내리는 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궁방에서는 다른 궁방들에서 이따금 있던 마음의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이
거의 없고 영혼은 거의 항상 고요 잔잔하다는 것입니다.
이 결혼에서 실행, 실천이 뒤따라 나오게 됩니다.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인간이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도록 불림을 받으셨고,
주님과 일치하는 삶 ・ 체험하신 삶을 보여주고 제시하여 줌으로써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신 분이셨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출생으로 데레사 성인보다 27살 더 어림.
출생시부터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엄마 혼자서 세 아들을 키우심.
수도회가 개혁되기 전에 성마티아요한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데레사성녀를 만나게 되고
함께 수도회의 개혁을 시도하게 됨. 1568년 개혁된 남자수도회의 첫 공동체 회원은 3명으로
시작하였으나 개혁에 반대하는 수사들에게 납치를 당하여 9개월간 지하에 감금되어 갖은 모욕을 당함.
- 이때 중요한 체험을 하게 되고, 큰 은총을 을 통하여 감옥에서 ‘영혼의 노래 ’, ‘어두운 밤’ 등
시 몇 편을 쓰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침을 “영적 찬가”라는 시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내 사랑을 찾으며
이 산들과 물가들을 나는 가리라,
길에서 꽃들을 꺾지도 않고
들짐승을 무서워함도 없이
나는 힘센 이들 경계선을 넘어 가리라. (영혼의 노래 3)”
이 시는 바로 모든 힘과 정력을 기울여 하느님과 합일하려고 길을 떠나기로 굳게 결심한
영혼들의 노래입니다.
그 결의는 단호하고 철저하여 ‘길에서 꽃들을 꺾지도 않는다.’고 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세상 것에서 만족을 찾지도 않고 거기에다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어떤 절대적이고 영웅적인 영혼의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영혼은 아무런 위로가 없는 험난한 장애가 있고, 고뇌로 가득 찬 길이 있을지언정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결코 겁먹거나 주춤하지 않습니다. 편한 길로 돌아가지 않고
목적지에 오르는 곧은 길을 통해서 가며 ‘길에서 꽃들을 꺾지도 않는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완전한 포기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의 또 다른 저서인 ‘가르멜의 산길’을 보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전한 이탈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성 요한의 가르침을 보면 이러한 이탈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면서 실천해야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야기 할 때 너무 추상적으로 듣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 요한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과의 합일 상태란 영혼이 의지로서
하느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변화되는 데에 있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하나도 없이
매사에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일 따름이다”(가르멜 산길 1, 11.2).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과의 합일 상태의 본질을
의지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에는 서로 밀접히 붙어있는 두 가지, 버릴 것과 취할 것 두 가지가 생기게 됩니다.
버릴 것이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온갖 경향,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도록 고집하는 마음의 경향을 자기 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버릴 것이 있다면 한편으로 가져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모두 버렸다면 당연히 우리의 의지는 모든 일에서 항상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마음에는 하느님의 의지에 어긋나는 경향은 조금도 없으며,
오직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두 의지가 하나의 의지가 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니,
그 의지는 곧 하느님의 의지이고, 이 하느님의 의지는 영혼의 의지이기도 한 것입니다.”(가르멜 산길 1. 11.3)
이와 같이 영혼의 변화라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가 되는 것이며,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 안으로 사라져,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론 상으로는 그럴 듯 한데, 과연 실제로 이것이 가능할까?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기 사랑을 안 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아마 다 사랑을 해보셨을 것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다 알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애정과 의지는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만큼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아 마음에는 다른 것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를 극진히 사랑할 때는 우리의 마음은 오직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만 해주려는
마음뿐이어서 자기의 유익이나 즐거움은 도무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님들도 자녀를 사랑하는 힘에 이끌려서 매양 자녀만을 염려하고 자녀의 행복을 지켜보면서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며 온갖 희생을 감수 인내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대상이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마음을 몽땅 기울인 영혼이 있다면
하느님의 의지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이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조금도 없으며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만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지가 하느님 안에 변화된 영혼이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그 마음 안에서 딴 마음의 움직임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완전한 이탈, 즉 하느님 안에서의 변화에 가장 장해를 주는
온갖 집착을 끊고 버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가늘거나 굵거나 간에 묶인 줄이 끊어지지 않아
새가 날지 못한다면 줄이 가늘다 해도 굵은 줄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가는 줄은 끊기기가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 해도, 안 끊으면 못 나는 법이다”(가르멜 산길 1, 11. 4 ).
영혼도 이와 같습니다. 가령 그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그런 집착을 철저히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 안에 변화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영혼이 온전한 이탈을 통해서만 하느님과의 변화의 합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다 알고 있는 이 온전한 이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가리도록 힘써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 13, 6)
완전한 이탈, 오로지 무(無)를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는 지름길을 제시한 십자가의 성 요한을
무(無)의 박사, 사랑의 박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육의 인간은 육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영의 인간은 영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영의 합일을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잡다한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무질서한 애착이 그 영혼을 주관하게 되므로
신앙에 맛들이면서 좋지않은 습관을 고쳐 하나씩 정화되어가도록 한다.
때로 내 노력도 필요하나 결국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온전히 일하시도록 내맡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 온전히 하느님과 합일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정화의 밤에 들어가야 한다.
① 매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한다.
( 그 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② 감성에서 오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 사랑 때문에 끊고 비운다.
하느님의 영광 을 위하는게 아니라면 좋아하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③ 내 자신, 영혼, 마음을 걷어들이고 하느님께 대한 갈망으로 내어맡기도록 노력 한다.
이 길을 가는데 대담한 결심이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들을 뛰어넘고 꿋꿋이 가겠노라는... 위의 시에서 처럼.)
갈멜의 영성도 풍요로운 영성으로 교회의 자산이며,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성령이며,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깊이있게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위원장님께 보내주신 자료 참조)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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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잊지 않으시고 챙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귀중한 선물입니다. 금년에는 1궁방에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늘 건강하고 평화로운 날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