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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글을 올린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바람(김태경)’ 님과 ‘가을꽃(장동찬)’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두 분의 글을 다시 보고 싶은 희망이 간절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2005년 5월, 제2회 개인전 때 아버지 사진 (인사동 경인미술관 뜰에서)
저희 아버지는 올해 여든 일곱 살입니다. 전립선비대증을 제외하고는 육신은 아주 건강합니다. 지금도 함께 걸으면 저보다 훨씬 빠릅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일본체전’에 홀로 수영, 육상 100m 달리기, 연식정구 세 종목에 출전하기도 했답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5.16 쿠데타 때까지)는 여수에서 가장 크게 사업도 하였습니다. 이후 조개와 새우, 우렁이 등의 양식업에 손을 댔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사람을 너무 믿는 성격이라 숱하게 사기를 당하고, 무엇을 키우는 일이라 인력으로 안 되는 어떤 이치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아버지 작품 "황화주실" (추사 김정희 글씨)
환갑 되던 해(1982년)부터 40여 년을 태우던 담배도 끊고 ‘서각(書刻)’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서각가로 이름을 날린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 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숨어있던 재능을 맘껏 갈고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차례의 개인전과 여러 차례의 단체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몇 년 만에 제자들도 여럿 두었습니다. 대부분 젊고 예쁜 여자들이라 어머니(일흔 여덟 살)가 그 꼴 보기 싫다고 옥상으로 작업장을 옮기기도 했답니다. (父傳子傳?)
▲ 아버지 작품 "불역기지" (아버지 스승 청사 안광석 글씨) … 그랬던 그 분이 … 6~7년 전부터 치매 증상이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조금 전에 한 말(주로 질문)을 뒤돌아서기 무섭게 되풀이하는 증상이었습니다. 길을 잃거나 사람을 못 알아보는 일, 대소변을 못 가리는 일 등은 전혀 없는 가벼운 증상이어서 별 문제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부쩍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에 예를 든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낮과 밤이 조금씩 바뀌더니, 밤이 되면 자꾸 나가려고 하는 증상(‘배회증상’이라고 하네요)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달포 전쯤에는 급기야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서 나빠져도 시나브로 그리 되겠지 생각하였으나, 이 지경에 이르자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주변에 있는 여러분들과 상의해서 부모님이 사는 신사동에서 가까운 논현동의 “논골 노인복지관”이라는 곳에 단기보호를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한 달이 돼갑니다.
정원 16명(여자 14명, 남자 2명)이 생활하는, 제가 보기에는 쾌적하고 안온한 시설입니다. 사회복지사, 요양복지사, 자원봉사자들도 좋아보였습니다. 집에서 어머니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활보다는 나은 삶의 질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배회증상이 더 심해지고, 잠도 잘 안 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토요일(12월 13일)에 처음으로 외출을 했습니다. 인천에 사는 둘째 누이 집에 모시고 가서 점심을 함께 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치동에 들려 안경도 맞췄습니다. 귀소 했을 때는 기분이 좋아보여서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잘 주무셨는데 다음 날 오후부터는 배회증상에다, 가족에게 전화를 계속하고, 심지어는 식사를 거부하기까지 했답니다.
그래서 12월 16일(화)에 셋째 누이와 의논하여 외박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신사동 집으로 모셨는데, 식사도 잘하고 농담도 많이 하셔서 마음이 좋았습니다. 다음 날 용인에 있는 박홍수내과에 어머니랑 모시고 가서 건강검진도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매우 상태가 좋았고 저녁 때 누이가 시설에 모셔다 드렸을 때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마침 저녁 식사 때였는데 제일 먼저 식탁에 앉아 밥을 청하기도 했답니다. 입소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잘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금요일(19일)에 사회복지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음 날부터 다시 배회증상과 식사 거부 증상(하루에 한 끼 반 정도만 드신다고 함)이 나타났답니다. 복지사 이야기로는 이번 주말은 외박을 하지 말고 주초에 병원에 가서 약 처방을 조금 조절해보라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경과였습니다. 두 주 전쯤에 가을꽃 님이 “똥꽃”이라는 책을 보라고 줬습니다. 아버지와 동갑인 여든 일곱의 노모를 자연으로 치유해보려고 전북 장수로 귀농한 쉰 한 살의 농부 전희식 선생이 쓴 책입니다. 처음에는 겁이 나서 다섯 쪽 이상 읽지를 못했습니다. 보면 괜스레 눈가에 소금이 잡히고, 가슴만 답답해져서 그랬답니다. 며칠을 뜸들이다 엊그제 다 읽었습니다.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 "똥꽃" 표지 사진
결론은 “치매 노인이 보살피는 가족보다 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게 하려면 그 삶을 존엄하게 대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할지라도 정상인과 똑같이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인데,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5년 전부터 귀농 혹은 귀어(歸漁)를 꿈꿨습니다. 그런데 전희식 선생처럼 아버지와 함께 귀농한 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만 자연을 구실삼아 신선이나 한량처럼 편하게 살고 싶어 귀농을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보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당장 귀농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삶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그 정신적 고통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보입니다. 제 스스로를 자책만 하기 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래서 글 올릴 용기가 생겼습니다. 여울 식구 여러분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데 왜 자꾸 눈가에 소금이 잡히지요?
▲ 2005년 5월 제2회 개인전(경인미술관) 때의 가족사진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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