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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심연Abyss’촬영 첫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제 악몽 속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심연‘의 촬영은 하루 15시간에서 16시간씩 진행되었다. 수중촬영을 할 때 스태프들은 보통 수심 9미터 아래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염소의 양이 너무 많아서 스태프들의 머리카락이 빠지고 색이 변하는가 하면 피부도 화끈거렸다. 휴식 시간에 물 밖으로 나온 배우와 스태프들은 비틀거리면서 불안정하게 걸었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배우와 스태프들은 점점 지쳤고 짜증이 늘었으며 귓병과 축농증에 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세트장 칠판에 쓰여 있는 ’심연 Abyss’이란 영화의 제목을 ‘학대The Abuse’로 바꿔 놓았다.
‘심연’은 제임스 카메론(‘터미네이터 1, 2’, ‘에일리언 2’, ‘아바타’)에게 무자비하게 촬영을 감행하는 감독이라는 오명을 처음으로 안겨준 영화이며 ‘abyss’의 다른 의미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한 영화다.
-21세기 북스<The Futurist 제임스 카메론 더 퓨쳐리스트> 레베카 키건 지음/오정아 옮김-
어제 일산 동국대병원에 갔었다. 내가 조감독이던 시절 막내 연출부로 들어와 나의 데뷔작 ‘개그맨’ 부터 세 번째 작품 ‘첫사랑’까지 조감독을 했던 K의 아버님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소풍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찾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K의 아버님 부음 소식 때문이 아니었다. 오지랖시고 제 앞가림하기 바빠 힘도 못 되어주고, 단 두 편만의 영화를 만들고 10년 동안 다음 영화만을 ‘준비하고’ 있는 K의 모습을, 그것도 오랜만에 본다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K의 아버지는 생전에 바람 부는 날이면 K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바람에 날아갈까 봐. 그런 K의 작은 체구가 아버지 병간호로 4kg이나 빠졌다. 애써 얼굴은 마주하고 웃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야지-부자지간 허물없이 쓰는 아버지란 일본어, 20세기까지 영화계에서는 조수들이 감독이나 각 부서의 장들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영화하는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논다거나 쉰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항상 ‘준비한다’고 말한다)
병원을 나와 인근에 있는 E가 낸 술집으로 갔다. E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막내 연출부로 들어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까지 조감독으로서 일을 했었다. 2년 전이었던가? E의 부인이 한 밤중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반가운 인사로 시작해서 나에 대한 원망이 이어졌다. 지난 세월 E를 나한테 뺏긴 것에 대해서, 아직도 영화 만들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E에 대해서……처음에는 무슨 말이라도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으나 그냥 들었다. 아마 두 시간 이상의 통화였을 것이다.
E의 가게에 들어서자 E의 부인이 강펀치를 날렸다. 적어도 몇 라운드의 탐색전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십여 년 가까이 남편을 감독님한테 뺏겼을 때는 영화도 미웠고, 감독님도 미워 부부싸움도 많이 했었단다. 그러나 또 10년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E가 단 한 번이라도 칼집에서 칼을 뽑는 걸 보고 싶다고 했다. E역시 정말 단 한 두개의 작품만이라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E의 나이가 낼 모레면 50이다. 창작에 나이는 상관없지만. “마약과 영화는 똑같다.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헤어날 수가 없다.”고 E와 E의 부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동행했던 또 다른 연출부였던 O의 말이다.
내가 이야기 했었지. ‘개그맨’은 시나리오 나오고 거의 일주일 만에 촬영 들어가 한 달 만에 촬영을 끝냈다고. 아니 끝냈어야만 했지. 그때는 울 틈도 외로울 틈도 없었다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때는 촬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면 매일 울었지. 사람들이 무서웠다고. 무엇이 그리 무서웠을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뒤로 딱 눈물을 멈췄는데-‘지독한 사랑’에서 다시 울음보가 터졌지. 거의 매일을 울었던 것 같다. 촬영 중엔 단 한 방울의 술도 먹지 않겠다고 맹서까지 했었는데. 술도 마셨다. 촬영 내내 외로웠었고, 지독하게 이를 악물고 찍었던 영화가 ‘지독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정말 영화계의 속설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영화는 제목대로 간다고.
‘지독한 사랑’이 지독하게 찍을 수밖에 없었던 발단은 영화의 배경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바꿨던 데에 있었다. 촬영 몇 달 전 나는 자갈치 시장에서 연출부였던 오석근 감독(제작자,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과 그의 친구 김지석(현 부산영화제 아시아 프로그래머)과 소주에 고래 고기를 곁들여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준비하는데 형님 같은 분이 이곳에 와서 촬영을 한다면 영화제를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다음 영화를 부산에 와서 찍으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95년은 막 대한민국에 지자체가 도입된 해였다. 부산시가 영화 만들기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면 제작비도 절감될 것이고, 오래 전 부산의 영화로 소문났던 김호선 감독의 ‘열애’처럼 흥행에도 도움이 될 듯싶었다. 마음속으로는 반신반의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후배들이 만든다는 영화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독한 사랑’은 지난 내 영화를 두고 일부 평론가들이 운운했던 ‘인공적인 공간’을 벗어나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야심도 있었다.
부산에 프로덕션 사무실이 차려졌고, 부산의 영화로써 일부 스태프들도 부산에 있는 영화과 출신의 사람들로 꾸려졌다. 다대포에는 주인공들이 사는 작은 마을과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의례 지방촬영을 하면 스태프들은 여인숙이나 여관에 머물렀지만 오석근 감독이 발로 뛰어 호텔에 묵을 수 있게 되었다. 시작은 좋았다. 촬영은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서울과 부산이라는 거리(distance)에서 발생했다. 지금은 서울과 부산이 일일생활권에 들어왔지만 그때 서울과 부산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끝에서 끝이었다. 핸드폰이나 인터넷도 작동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부산 촬영현장을 듣기만 하고 볼 수 없었던 서울사무실에서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스태프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비효과가 되어 부산촬영장에 폭풍을 몰고 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감독님이 예쁜 내 얼굴은 찍지 않고 달, 유리창, 김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만 하루 종일 찍어요.” “영화는 광고 촬영이 아닌데 어떻게 한 샷, 한 샷을 힘주어 찍어-이렇게 찍으면 영화 못 끝나……”까지는 애교 정도였다. 막 대기업들이 영화계에 진출할 때지만 나는 촬영 때마다 ‘남의 돈이니 아껴 써야 한다’고 스태프들에게 한 말들이 감독이 음식도 제대로 못 먹게 한다. 스태프들이 매일 사용하는 장갑까지도 빨아 쓰라고 간섭한다. 스태프들을 편애한다.는 식으로 소문들은 쌓여갔고, 거기에 한 두 개의 팩트들이 소문을 증폭시켰다. 촬영감독의 촬영 보이콧, 연출부의 집단 이탈 등.
나는 촬영 틈틈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과 부산을 오갔지만 결론은 부산의 촬영을 중단하고 서울에서 찍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 순간, 내가 처음에 잡았던 영화의 컨셉과 이미지들은 다대포의 모래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영화 만들기, 지독한 사랑의 순간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의 기획 의도처럼.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은 환상이지만 사랑은 실재상황이라는.
프랑소와 트뤼포가 말했지. 영화감독이란 폭풍 속에서 난파선을 이끄는 선장과 같은 것이라고. 그러나 ‘지독한 사랑’의 영화 만들기는 폭풍 앞에 선 ‘케인호의 반란’이었다. 다대포의 바람은 거셌고, 따뜻하리라 생각했던 시월의 남쪽 날씨는 차가웠다. 촬영을 한 번 하면 깔아놓은 이동차의 레일은 매번 모래바람에 파묻혔고, 거센 파도에 휩쓸렸다. 바람이 불 때는 조명이고 사람이고 서 있기도 힘들었다. 촬영을 마치고나면 소금 끼에 절은 몸에서는 모래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고, 나도 모래처럼 무너져 내렸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촬영 중간 중간 마주치는 스태프들의 눈이 물 먹은 소금처럼 온몸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은 마치 이런 환경으로 몰아넣은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주문처럼 ‘영화란 무엇인가?’를 외곤 했다.
‘타이타닉’ 촬영 중 케이트 윈슬렛은 “영화배우가 된 이후 처음으로 세트장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는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죠. ‘하나님, 제발 영원히 잠에서 깨지 않게 해주세요!” 촬영 막바지에는 제임스 카메론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164일째 되던 날에도 그는 밤새 촬영을 강행했다. [The Futurist중에서]
사랑이 정말로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이 아닌 실제 상황처럼, 영화 만들기도 머릿속이나 영화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닌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안 영화가 바로 ‘지독한 사랑’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해저탐사 촬영을 하면서 리더십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고,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을 때 잠수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문제는 목숨이 걸린 문제기도 했다. 카메론 역시 다그치고 비판하는 운영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듯이, 나 역시 지금까지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이 아닌 처음 만난 스태프들과 일할 때는 더 많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내가 갖고 있는 영화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일로써의 영화로 사람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 만들기-그 지독한 사랑을 통해 나는 사랑이 뭔지, 영화 만들기가 뭔지를 좀 더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성장한 것이다. 그래서 오래 전 주인석과 이야기 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할 때, 산이 있어서라고 답한 산악인처럼, 영화 만들기가 너무 지독한 사랑과 닮아 있지만, 영화가 있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라고 나도 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지독한 사랑을 [미스터 케이]로 또 한 번 하고 있다. 그러나 웃으면서. 왜냐 내가 선택한 사랑이니까. 실제 상황일지라도.
이태원 아래 보광동 종점에서 친구 명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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