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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영교수]김교신: 성서와 조선을 위해 바친 일생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펴내는 월간잡지 <들숨날숨> 2003년 5월호에 기고한 임세영 교수(한국기술교육대학교)의 글.
베네딕도 수도회는 서기 6세기에 세워진 카톨릭 최초의 수도원이다. 가톨릭에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에게 무슨 관심이 있을까 궁금하겠지만, 이 잡지는 초교파를 표방하는 잡지라고 한다.
김교신: 성서와 조선을 위해 바친 일생
스스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가르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말이 있다. 글쓰기가 쉽다는 뜻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보다, 그 글에 담긴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어렵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스스로 그렇게 사는 일이 어렵다는 말이다. 김교신은 일생 가르치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을 주업으로 하였지만, 무엇보다 쓰고 가르친 것을 그대로 살려고 힘쓴 사람이었다. 그는 글쓰기의 취지를 “나라는 죄인을 재료로 취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신 실험록을 기재하여 이것을 형제에게 간증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성서조선』제25호(1931. 2), 전집 제1권: 320).
나날의 삶을 영생으로
그는 교리에 관한 논쟁을 즐겨하지 않았다. 한번은 ‘만인 구원론’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도 어떤 시기에는 자신의 구원 여부가 염두의 최대 문제였지만, 이제는 다른 더 절박한 문제 때문에 그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오늘을 여하히 싸울까, 이 순간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내가 순간 순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고 그 결과로 매일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생을 생활하여 죄와 세상을 이기고 개선할 때에 그 보응으로서 주께서 나를 지옥에 넣어 영원히 멸망케 하신다면 그것도 또한 소원이다. 원컨데 오늘의 전투, 지금 발사하는 탄환을 적중시키려는 조준에 나의 심신은 집결되고자 한다.”(『성서조선』제42호(1932. 7), 전집 제5권: 88)
성서조선에 공개된 그의 일기를 보면 자주 하루하루를 날수로 계산한 것을 볼 수 있다. 『12,000일의 감(感)』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무감각한 생활, 관례에 의하여 ‘어제 같은’ 생활, 경이를 느낄 수 없는 둔탁한 생활을 타기한다”고 하였다.
“내가 11,999회의 패배에 머리 숙여질 때에 다시 하루를 허하여 주시니 이는 전만고 후만고에 다시 만날 수 없는 찬스로다. 이날 하루만을 전력을 다하여 싸워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인간답게 즉 하나님답게 그리스도답게 인색할 것도 없고 공포(恐怖)할 것도 없고 옹졸할 것이 없고 비굴할 것이 없고 부지런하여 사랑을 라듐 광(鑛)처럼 발산하면서 의롭게 믿음으로 살았다 할진대 후에 무슨 미련이 남을까?”(『성서조선』제62호(1934. 3), 전집 제1권: 347)
민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
제국주의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 전쟁과 침략이 난무하던 시대에 태어난 청년으로 자신이 피압박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자각한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그것은 당사자의 삶에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김교신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 갑판위에서 “아무래도 너는 조선인이다” 라는 각성에 이르러 발을 굴렀다. “조선은 불쌍하다”고 소리쳤다. 학문, 신앙에는 국경이 없는 것 같았고, 사해가 형제동포라는 말이 귀에 솔깃했으나 정작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발견함에 이르러 목표와 대상이 확실해졌다고 그는 말한다.
“과연 학적(學的)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애적(愛的) 충동에는 사해가 흉중의 것이었다. 이상의 실현에 이르러는 전도에 다만 양양할 뿐이었다. 때에 들리는 일성(一聲)은 무엇인고? ‘아무리 한대도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무량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는 구(句)가 달리 있으랴. 이를 해(解)하여 만사휴(萬事休)요, 이를 해하여 만사성(萬事成)이로다. 이에 시선은 초점의 합함을 얻었고 대상은 하나임이 명확하여지도다.”(『성서조선』제1권(1927. 7), 전집 제1권: 20)
조선 사람은 그에게 한없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다. 그는 불쌍한 조선을 전력을 다하여 사랑하였다. 조선의 무능과 불의와 가난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였다. 조선에 대한 그의 연민은 그의 주된 정서를 이루었던 슬픔과 어우러져 그로 하여금 자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교사 강습회의 연장으로 황해도 옹진 금광에 견학갔을 때 갱 속에서 만난 한 소년에 대한 그의 소감은 그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갱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 암암(暗暗)한 중에 착암기를 잡고 섰는 15-16세의 소년 하나가 나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였다. 광맥보다 이 소년이 나의 전(全)주의를 끌어버렸다. 저가 꼭 내 동생, 내 아들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갱내 컴컴한 것을 기화로 광벽을 향하여 무량(無量)의 눈물을 뿌리지 아니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박물교사의 광산 견학의 총수확이었다. ( ... ) 저들도 보통교육을 받고 바울을 읽으며, 예수의 복음 듣는 날 오기까지 우리가 어찌 안연(晏然)히 명목(暝目)해 내랴.”(『성서조선』제116호(1938. 9), 전집 제6권: 414)
조선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교육에도 잘 드러났다. 양정고보의 박물과, 즉 지리와 생물 교사였던 그는 교과서 대부분이 일본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겨우 두서너 시간으로 편성되어 있었지만, 일년내내 거의 우리나라 지리만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제자였던 유달영은 김교신 선생에게서 고구려,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배웠고, 우리 국토가 넓지 못한 것을, 우리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을, 백두산이 높지 못하고 한강이 깊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스스로 멸시하기 쉬웠던 우리 조국을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전집 별권: 131).
조선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장 집약적으로 발휘된 것은 월간지『성서조선』의 간행이었다. 동인지로 발간된 이 잡지의 창간호에 실린 그의 창간사에는 간행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다소의 경험과 확신으로써 오늘의 조선에 줄 바 최진최절(最珍最切)의 선물은 신기치도 않은 구신약성서 한 권이 있는 줄 알뿐이로다. (...) 다만 우리 염두의 전폭(全幅)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두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진(最珍)의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다. 이를 통하여 열애의 순정을 전하려 하고 지성(至誠)의 선물을 그녀에게 드려야 함이로다.”(전집 제1권: 20)
그의 일생은 이 말이 단순히 낭만적 수사가 아님을 넉넉히 보여주었다. 6인의 동인지로 시작된 이 잡지의 편집과 발행의 책임을 김교신은 1930년 3월 제15호가 발간된 다음부터 떠맡는다. 당시 고교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성서조선을 매달 집필, 편집, 교정하고 다시 총독부의 검열을 받은 다음 발간하고 또 배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마라톤 선수였으며 정구, 농구, 스케이팅 등 여러 운동을 잘하였던 그의 체력은 보통 사람을 능가하였지만, 매일 서너 시간씩밖에 잠을 자지 않고 집필과 교정에 몰두하여 눈은 충혈되었고 감기몸살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1938년 7월 28일(목) 청. 신열은 불퇴하고 소화는 불량하고 우안에 충혈은 심하나 교정이 급하매 종일 인쇄소에 나가 교정, 오후 5시에 공장 닫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오반(午飯, 점심식사) 시간을 놓쳤던 줄 깨닫다. ...”(전집 제6권: 415). 그의 이러한 활동이 주변의 지지와 환영보다는 멸시와 조롱을 받기 일수였지만 그는 그것을 또한 감사하였다. 1931년 4월 6일자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7호 나오다. 부업으로 하는 일이라 학년말 신학년을 당하여 부득이 늦게 되었다. 잡지를 시내 서점에 배달할 때마다 ‘이것도 잡지라고’ ‘팔리지 않는 잡지...’ 등등의 말이 귀에 거친다. 때로는 모욕에 가까운 광경도 당한다. 물론 조선 사람들이요 예수 혹은 기독(基督)이란 것을 그 간판에 관계한 서점들이다. 저편에서는 사실을 말할 뿐이겠지만, 이편은 부흥회에나 참석하는 셈으로 매삭(每朔) 이 경멸을 당하기를 향락하니 감사(感謝). 가장 유효한 신앙 부흥은 예수의 이름 연고로 모욕 받는 때에 온다.”
그러나 『성서조선』발간의 더 큰 어려움은 일제의 검열이었다. 특히 1937년부터 강화된 검열로 몇일 밤을 새워 집필, 교정하여 발간 날짜에 맞추어 준비한 글들을 통째로 삭제하거나 수정해야만 할 때 김교신은 자주 한계를 느꼈다.
산 제물로 바친 생애
몇번의 정간고비를 넘겨가면서 간행되던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에 실린 “조와(弔蛙) 라는 글로 급기야 폐간이 되고 주필 등 13인의 필진 및 독자들이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 글은 1941년 가을 송도고보로 자리를 옮긴 김교신이 새벽 기도터로 사용하던 송악산 기슭의 넓은 바위 곁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살던 개구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 매일 아침 기도와 찬송을 듣고 호응하는 듯하던 개구리들이 얼음이 얼면서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혹한을 지나 얼음이 풀리고 난 다음에 웅덩이 위에 동사한 개구리 시체가 떠올랐다.
그것들을 땅에 묻어주고 구부려 물속을 자세히 보니 개구리 몇 마리가 아직 기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로 이 글은 끝난다. 개구리는 일제의 탄압에 혹은 변절하고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리라. 뒤늦게 이 은유의 의미를 알아낸 일경은 전국적으로 독자들을 검거하고 창간호부터 모든 잡지를 압수해갔다. 이것으로 일제치하에서 시골로, 산촌으로, 소록도나 병상에 가서 나무꾼과 조선혼을 가진 사람을 찾아 위로하기를 사명으로 삼고 창간되어 ‘조선산 기독교’의 그루터기 만들던 『성서조선』은 16년간 158호를 발간하고 끝을 맺었다.
성서조선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년만에 출소한 김교신은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1944년 7월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하여 5,000 조선인 노동자의 복리, 주택, 후생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전국의 제자와 독자들을 모아 질소비료공장에서 전화(戰禍)를 피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노동자들과 함께 구보하고 냉수마찰을 하고, 훈화도 하며 철저하게 일을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을 불과 4개월 정도 남겨둔 1945년 4월 25일, 당시 함흥지역을 강타하였던 치명적 전염병인 발진티푸스 퇴치를 위해 힘쓰던 중 스스로 감염되어 급서(急逝)하였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의 성취나 혹은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참패로써 세상을 마친다 할지라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노력하는 자면 우리의 희망은 전혀 그에게 달렸다.”
라고 썼던 그는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