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025.11.4.(화)
1). 가을 대학 동기회 날이다. 추워진 날씨 걱정을 했지만, 다행 쾌청한 전형적인 멋진 가을 날씨이다. 힘들게 준비한 L 교장의 마음을 하늘도 감동한 모양이다. 지난 8월, 뜬금없이 P 전 회장의 사퇴로 L 교장이 일을 맡게 되었다. 돌아보면 졸업 50주년이 내년 봄이 아닌가. 그간 어렵게 돈독히 쌓아온 우정을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날려 보내면 안 된다는 그의 마음이 진심으로 고맙다. 11:30. 집결지인 수성못 ‘상화동산’에 서울, 영주, 원주, 경주, 포항. 창원에서 10여 명이 날아왔다.
12:00. 수성호텔 별관 5층. 식당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열기가 확 밀려온다. 패밀리 레스토랑 ‘포시즌’ 안은 재래시장 사람 무리 속에 던져진 듯 시끌시끌하다. 평일 점심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대다니,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자 손님이 대부분이다. 점심 특선 29,000원. 깔끔하게 차려진 음식은 마음에 들지만, 식당 안이 너무 시끄럽다. 단체로 온 객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난봄에 방문한 아래쪽 입구의 ‘쿠우쿠우’와 비슷한 가격대다. 그곳에는 주로 가족이 많이 온 듯하나, 여긴 단체 모임으로 많이 찾은 듯 느껴진다. 예약된 자리에 앉아 식당 안을 둘러보니 빈자리가 별로 없다. 이런 곳에 올 때마다 소식하려고 다짐하지만, 실천이 어렵다. 적지 않은 식대를 생각해 열심히 먹다 보니 또 과식이다. 쉬운 말로 본전 생각하다가 망하는 경우다. 언제까지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까? 후회할 줄 알면서도 되풀이하는 자신이 좀 한심하다. 내 잘못을 인간의 속성이라고 둘러대면 비겁한 변명이 아닐까.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은 되풀이에 빠진 어설픈 삶이다.
수성못 ‘둥지섬’ 앞의 데크길 산책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멋지게 익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와 갈대숲은 발걸음 옮길 때마다 감성을 자극한다. 예전 파동에 살 때 자주 오던 곳이지만 대학 동기들과 걷는 오늘은 새롭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먼 지역에 살고 있기에 아득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오늘 함께 걷는다. 버스킹 장소 난간에서 내려다본 연못 안의 잉어가 징그럽다. 아이 다리보다 굵은 놈들이 한데 모여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내 눈에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작고 아담한 크기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리아나 호텔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했다.
16:00. 예정대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서문시장역에 내렸다. ‘대구 근대골목 투어’에 나섰다. 먼저 동산동 동산의료원 안으로 들어갔다. ‘청라언덕’ 탐방길이다. 위로 죽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지은 선교사 챔니스 고택이 나온다. 대구 최초라고 알려진 사과나무도 있고(지금은 새로 심은 나무다), 옆으로 돌아가면 작곡가 박태준의 ‘동무생각’ 시비도 만난다. 그 노래 속에 ‘청라언덕’이란 가사가 나오기에, 한때 작사가 이은상의 고향인 마산과 청라언덕을 가지고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던 이야기가 생각나 미소 짓는다. 고장을 발전시키려면 멋진 소재를 누가 먼저 스토리텔링 하여 부각하느냐가 참 중요하다. 부근의 계성학교에 근무한 나, 신명여고를 나온 H 선생님은 이곳이 익숙하고 정이 든 곳이다. 내가 근무하던 계성중학교 교무실 아담스관 창으로 보면 이곳이 바로 보였다. 지금은 새 아파트가 들어서서 시야가 완전히 가려 안타깝다. 당시의 추억도 도란도란 얘기하며 청라언덕 아래 만세운동 계단을 천천히 걸었다. 계산 성당 옆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에 들어선다. 한국전쟁 후 대구 중구를 배경으로 쓴 소설 ‘마당깊은 집’의 이야기와 등장인물, 당시 피난민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놓은 곳이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주인공 소년 길남이를 떠올린다. 나는 여러 번 와 본 곳이나 다른 지역의 친구들은 초행이다. 잠시 돌아가면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을 만난다. 입구에 들어서니 이상화 시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등의 시비가 환영한다. 유복한 집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참 지식인이 걸어야 할 길을 걸은 민족시인 이상화가 아닌가. 경건한 마음으로 시를 눈으로 읽는다. ‘걸림 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이라는 ‘역천’ 시 한 구절이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는 날이다. 마당 한쪽의 석류나무에 잘 익은 대여섯 개의 붉은 석류가 먹음직스럽다. 이상정, 이상화, 이상백, 이상오 이 사형제를 용봉린학(龍鳳麟鶴) 이라 일컬은 것 같다. 맞은 편 국채보상운동의 발의자인 독립운동가 서상돈 고택도 들렀다. 오랜만에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무척 아프다. 협착이 심해 제대로 다니기가 힘이 든다. 서글프다. 많은 생각이 난다. 그래도 나보다 더 불편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이 있지 않은가? 이만하면 다행이라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살아가자. 친구들은 향촌동의 ‘대구문학관’ ‘향촌문학관’ 으로 향하고 나는 저녁이 예약된 ‘남송횟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성못 밤마실에 나섰다. 두산 오거리 ‘동성로 왕찹쌀 꽈배기’ 가게 앞 벤치에 옹기종기 앉았다. Y 교장이 갑자기 가게 앞에서 호떡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혼자 먹기가 뭐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 찬성이었다. 호떡 10개와 꽈배기 한 상자를 자기가 샀다. Y 교장은 “이 나이에 길에서 무슨 호떡이냐?”라는 핀잔이 올 줄 알았는데 모두 대찬성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았단다.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 정겹고 호떡 턱을 낸 친구도 고맙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감정과 사랑을 공유하면서 아름답게 익어가는가보다. 소소하고 별것 아니지만 참되고 따뜻한 우정을 느낀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분수 쇼도 끝났고, 그냥 둑길을 걸었다. 머리 위에는 음력 9월 보름의 휘영청 밝은 달이 우리를 축복해 준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린 아무 말도 없이 자연 속에 한 장의 그림이 되어 2025년의 가을에 빠지고 있었다.
아리아나 호텔 4011호실. 반백 년 우정을 이어온 동기들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잠시 뒤 올해 ‘사랑의 저편’ 소설집을 출간한 L 교장, 시조집 ‘피자를 주문하는 저녁’을 발간하고 ‘이호우 이영도 시조문학상’을 수상한 S 교육장에게 감사와 격려금을 전달하는 조촐한 식도 있었다. 그리고 레스토랑 ‘포시즌’의 점심 식대를 낸 S 교육장, 호텔 숙박비를 찬조한 L 교장의 마음도 곱고 아름답다. 이제 늘 하던 내 하모니카 연주 시간이다. 전에는 다음 날 아침 간식 시간에 주로 연주했지만, 오늘은 늦은 밤에 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야 했기 때문이다. 준비해 온 하모니카를 풀었다. 올봄에 새것으로 다 바꿔서 유난히 반짝거린다. 작은 MI 스피커를 블루투스로 연결하고 가을을 노래하는 이정옥의 ‘숨어우는 바람소리’를 첫 곡으로 연주에 들어갔다. 분위기 있는 곡은 사람을 따뜻한 감성의 바다로 밀어넣는다. ‘비내리는 고모령’ ‘석양’ ‘장녹수’ ‘바람’ ‘동백 아가씨’ 등 메들리로 연주했다. 썩 잘 하지는 않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주는 고운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고, 연주할 수 있는 내가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저렇게 또 삶의 절정이 지나간다. 내일 아침 내 간식으로 인절미와 기지떡, 과일을 챙겨준 H 선생님이 고맙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다.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기도하며 모두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