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대 갯바위에 파래와 진주담치들이 어우러져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말은 바로 진주담치에 밀려난 홍합의 처지를 빗댄 듯 하다. 원래 홍합은 토산종 담치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비슷하게 생긴 담치들이 우리 연안으로 들어오면서 토산종과 외래종을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토산종을 담치 중에 진짜 담치라 해서 참담치로, 외래종을 진주담치로 부르게 되었다. 기름 중에 진짜 기름이라 하여 ‘참기름’이란 이름이 생긴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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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산종 홍합류이다. 주먹을 쥐어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2 이매패류에 속하는 홍합류가 조개 입을 벌린 채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홍합은 패각에 부착생물들이 많이 붙어 있다 |
진주담치에 밀려난 참담치
진주담치는 지중해가 고향이다. 이들의 유생이 외국을 왕래하는 화물선의 밸러스트(Ballast, 배에 실은 화물의 양이 적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 안전을 위하여 배의 바닥에 싣는 중량물. 주로 물이나 자갈 따위를 싣는다.)에 섞여 우리 연안에 상륙하면서 홍합의 서식지를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우리 연안의 대부분을 장악해 버렸다.
진주담치들이 그물을 고정시키기 위해 드리워진 밧줄에 부착해있다. 진주담치들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다.
따개비들 사이에 진주담치들이 무리를 이룬채 서식지 경쟁을 하고 있다.
진주담치는 번식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편이다. 아무튼 참담치, 진주담치 모두 홍합류라 부르며 우리나라에는 이들 외에 비단담치 털담치 등 모두 13 종 정도의 홍합류가 서식한다. 이들 홍합류는 조개 굴 가리비 등과 같이 패각이 두 개여서 연체동물 중에서도 이매패류, 다리가 도끼 모양이라 도끼‘부(斧)’자를 써서 부족류로 분류 된다. 이들은 몸에서 ‘족사’라고 불리는 수십 개의 수염에 접착성이 강한 물질을 분비해 갯바위 등에 몸을 고정시키고는 바닷물을 빨아들여 물속에 들어 있는 영양분을 걸러먹는다. 여름철 어패류를 즐겨먹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비브리오패혈증의 지표생물로 홍합류가 등장하는 것도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데다 이들이 한군데 고착하여 바닷물을 걸러먹는 특성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오염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홍합류는 몸에서 ‘족사’라고 불리는 수십 개의 수염에 접착성이 강한 단백질을 분비해 갯바위 등에 몸을 고정시키는데 한번 부착하고 나면 어지간한 힘으로는 떼어내기 힘들다.
그런데 홍합류는 고착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불가사리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불가사리가 다가오면 가리비, 전복 등 다른 조개류는 도망가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홍합류는 스스로 몸을 고정시켜 버린 탓에 움직일 수가 없다. 단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만이 최선의 방어수단이다. 하지만 불가사리가 다섯 개의 팔로 압박을 가하면 작은 틈이 생긴다. 불가사리는 이 벌어진 틈 사이로 위장을 밀어 넣어 조갯살을 소화한다. 연안 암초지대에서 홍합류의 서식지가 완전 황폐화되어 빈껍데기만 남은 것을 보곤 하는데 그 주위에는 늘 살찐 불가사리들이 서성이고 있다.
아무르불가사리들이 진주담치 서식지를 훑고 지나가고 있다. 이들이 공격을 받은 진주담치들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홍합(紅蛤)은 조갯살이 붉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규합총서(1809년 빙허각 이씨가 부녀자를 위해 엮은 일종의 여성 생활 백과. 여성들에게 교양 지식이 될 만한 내용들을 한글로 수록했다. 빙허각 이씨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에는 “바다에서 나는 것은 다 짜지만 유독 홍합만 싱거워 담채(淡菜)라 하고 동해 부인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른 봄이 제철인 홍합의 속살을 말리면 해산물이면서도 짜지 않고 채소처럼 담백하다 해서 담치가 되었고, 동해바다에서 많이 나는 데다 그 모양새 때문에 동해 부인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홍합은 많이 먹으면 살결이 예뻐지는 등 여성적 매력이 더해진다고 믿어지면서 여성을 상징하는 해산물이 되긴 했지만, 사실 홍합은 암수가 구별된다. 조갯살을 놓고 볼 때 암컷은 붉은색을 띠고 수컷은 흰색을 띤다. 일반적으로 암컷이 맛이 좋아 식용으로 우대 받는다.
조갯살을 놓고 볼 때 수컷(왼쪽)은 흰색을 띠고 암컷은 붉은색을 띤다.
홍합은 길이 140mm에 높이 70mm 정도이며 진주담치는 길이 70mm에 높이가 40mm 정도이다. 홍합은 껍데기가 두껍고 안쪽에 진주광택이 강한데 비해, 진주담치는 껍데기가 얇고 광택이 없다. 홍합은 껍데기의 뒷 가장자리 부분이 구부러져 있는데 진주담치는 곧고 날씬한 편이다. 홍합은 껍데기에 다른 부착생물 등이 붙었던 흔적이 많아 다소 지저분하게 보이는데 비해 대량양식이 이루어지는 진주담치는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한 편이며 배쪽으로 자줏빛이 강하다. 홍합은 진주담치에 비해 육질이 크며 맛이 담백하다.
홍합(위)과 진주담치를 한자리에 놓고 비교해봤다.
홍합은 연안 갯바위 등에 서식하는 습성으로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조개류이다. 번식력이 강한 진주담치가 우리나라 연안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하면서 홍합을 발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를 비롯한 남해안 도서지역에서는 아직 홍합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울릉도 사람들은 이 홍합을 이용, 홍합밥이라는 특산물을 만들어냈다.
홍합밥은 청정해역에서 자라는 홍합을 잘게 썰어 밥을 지은 후 양념에 비벼먹는 것으로 갯내음과 함께 쫄깃한 육질의 담백함이 어우러져 오랫동안 울릉도를 추억하게 만든다.
홍합을 이용한 토속 음식 중 강원도 북부지역 사람들이 즐겨먹는 ‘섭죽’이라는 것이 있다(‘섭’은 홍합의 이 지역 사투리). 물에 불린 쌀과 홍합, 감자에 고추장을 풀고 1시간 정도 푹 끓이면 쌀과 감자는 퍼져서 걸쭉해지는데 이때 풋고추와 양파를 넣고 다시 끓여내면 맵싸한 맛에 쫄깃하게 씹히는 홍합의 살이 어우러져 향토색 짙은 일품요리가 탄생한다. 2~5월의 춘궁기가 제철인 홍합은 남해안 사람들의 따개비죽처럼 동해 북부지방 사람들에겐‘섭죽’이라는 향토색 짙은 음식이 되어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달래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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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릉도등 청정해역에서 자라는 홍합을 잘게 썰어 만들어내는 홍합밥은 지역의 특산물로 대접 받고 있다.
2 진주담치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끓여내면 겨울철 낭만을 추억하게 하는 훌륭한 먹거리가 된다. |
홍합에 비해 흔하고 값이 싼 진주담치를 이용한 음식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겨울철 포장마차 솥단지 속에서 뽀얀 국물을 우려내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각종 해물 요리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진주담치이다.
- 글∙사진
- 박수현 / <국제신문> 사진부 기자
- 호칭·직책
-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공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중잠수과학기술을 전공했다. 남극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1,500회 이상의 스쿠버다이빙을 통해 보고 경험한 바다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저서로는 [바다동물의 위기탈출], [수중사진교본],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바다이야기], 제 24회 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한 [재미있는 바다생물이야기], 2008년 환경부 우수도서로 선정된 [바다생물 이름풀이사전],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 우수도서로 선정된 [북극곰과 남극펭귄의 지구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