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의 조언처럼 우리를 ‘반성’(reflection)에까지 이르게 할 ‘수준 높은 주관성’을 배우려면, 근현대교회사에 나타난 개신교회의 양식에 대해서 ‘노’와 ‘예스’ 중 어떤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인가? 키에르케고르는 “긍정은 부정에 의해 알려진다.”는 전제를 갖고 “무관심과 비겁과 죄악, 노골적인 불신이라는 화재가 일어난 속을 소방수처럼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다녔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가 되고 인간들 속에서 고독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도 교회의 삶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아니다’라고 외쳤다. 개신교회를 향해서 ‘부정’을 외친다는 것은 문제를 우선 ‘개신교회 안에서’ 찾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다. 근대에 새로움을 갈망하여 개신교회 자체의 문제를 시대 문제로 인식하고 ‘노’를 외쳤던 사람들은 합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 신앙 밖의 사람들이거나 sola scriptura에 근거하지 않고 ‘이성’으로 ‘노’를 외쳤기에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크 엘룰’은 「뒤틀린 기독교」에서 “어설프고 쓸모없는 경멸적인 변증을 하기 보다는 그들이 공격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기독교의 실천과 계시 사이의 괴리 현상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면 그들의 ‘노’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소망과 추구는 근대인의 꿈이었지만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현실 부정을 통해 가져온 꿈이었다. 엘룰의 말대로 우리는 “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거꾸로 만들어 버렸을까?”를 고민해 보면서,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노’를 외친 합리적 지성들의 비판을 살펴 보려고 한다.
2. 근대 합리주의의 태동 배경
2.1.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정신 속에 배태
인문주의(humanism)는 인간중심적 경향을, 종교개혁은 ‘sola fide’로 ‘나’의 신앙을 강조하여 ‘자율적 인간’ 형성에 기여했다.
2.2. 자연과학의 발달: 인간을 재발견
“자연과학의 발달”은 중세적인 신율적 이성에서 근대적인 자율적 이성으로 변화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근대인은 관용의 정신과 함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 스스로 진보, 향상, 발전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지리적 발견과 함께 자연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인간의 공동선을 위해 합리적으로 살고자 노력이 시작되었다.
2.3. 생명력을 잃어버린 개신교 정통신학: 자유와 해방을 추구
종교개혁 신학을 보수하려고 애쓴 17세기 개신교(루터파/개혁파) 정통신학에서 루터파는 ‘이신칭의’를 끝까지 붙잡고, 개혁파는 ‘예정론’을 끝까지 붙잡기 위해 지루하게 논쟁했다. 삶과 교리가 괴리된 정통신학의 시대에 대한 반발로 경건주의와 합리주의가 일어났다.
2.4. 교회의 분열과 종교전쟁/종교 박해에 대한 반동: 관용의 정신으로 유럽은 백년 이상의 기간 동안 종교적인 전쟁에 의해서 황폐해졌다. 36년 간에 걸친 위그노 전쟁(1562-98), 20년에 걸친 영국 혁명(1620-40), 30년에 걸친 종교전쟁(1618-48)을 겪었다. 프랑스에서는 무력으로 카톨릭 신앙을 요구했다. 전쟁을 통해서 근대 유럽 기독교인들은 공존, 공생, 관용을 깨달으면서 근대민주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3. 합리주의 정신의 특징
3.1. 전통인가 혁신인가?
데카르트는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을 유지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적 태도를 확립해 보려 했다. 홉스와 스피노자는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삶과 세계를 해석하고자 했고 18세기의 로크, 흄, 칸트 역시 더 이상 전통을 기준으로 잡지 않았다. 그러나 혁신의 교과서는 전통에서 발견되었다.
3.2. 지식인가, 신앙인가?
근대 문화의 특징은 지식, 종교, 정치, 경제,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옛 전통과 구별되는 새로움을 추구한 것이다. 예술과 종교와 도덕에서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점점 개인의 판단과 주관적 체험이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과학과 정치와 경제는 개인적 차원을 떠나 점점 강하게 공적 영역으로 흡수된 반면 도덕과 종교와 예술은 점점 사적 영역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데카르트는 스스로 검토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을 참된 것으로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을 피하라고 강하게 권한다. ‘계몽 철학자’들은 편견을 강하게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성적 판단 없이는 어떠한 것도 참된 것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3. 자유인가, 자연인가?
근대 철학을 움직인 근본적인 추동력은 “자연에 대한 지배와 인간의 자유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한편으로 자연의 체계를 근대의 과학적 토대 위에 구성하고 했고 다른 한편 기독교와 르네상스를 통해 강조되어 온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4. 유럽과 미국의 근대교회사에 끼친 합리주의의 영향
유럽의 30년 종교전쟁이 끝나고 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유럽은 종교적 관용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후 유럽은 이성과 자율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종교적 관용, 교황의 영향력 상실, 자연과학의 발달, 새로운 합리주의를 경험했다.
4.1. 화란
계몽주의는 17세기에 영국과 화란의 개혁파 교회에서 발생했다. 그후 로마 카톨릭의 프랑스, 루터파 독일,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로 파급되었다. 화란은 개혁주의에 근거한 개신교 국가이면서도 다른 교파나 학문에 대해서 관용적이어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베일 등이 활동할 수 있었다. 화란은 개혁교회가 국가의 교회 모습을 보였지만 이미 아르미니우스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공존을 택한다. 국가이익(이성)을 위해서 그들의 신앙과 관계없이 실용적 관용을 베풀어 선한 시민으로서 잘 살 수 있도록 한다.
4.2. 영국
화란의 영향을 받아 17세기 말엽부터 영국에서도 계몽주의가 진행된다. 17세기 말이 지나면서 영국에는 관용주의가 발흥하여 계시는 이성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허버트(1583-1648)는 자연신론을 발전시켰고 17세기 합리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존 로크(1632-1704)는 「기독교의 합리성」(1693)에서 계몽된 기독교의 모습을 그려 이신론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종교적 영역에서, 합리주의는 영국에서 ‘이신론’이라는 첫 열매를 맺게 된다. 조셉 버틀러(1692-1752)은 자연신론자들과 달리 창조주를 믿는 믿음을 전제로 출발하여 이성을 강조했으며 웨슬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쳤다. 데이빗 흄(1711-1776)은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경험세계를 초월한 것은 학문적으로 인정될 수 없고 신과 영혼 불멸은 인식론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불가지론적인 것이라고 본다.
4.3. 독일
30년 전쟁 이후 독일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심한 침체에 빠졌다.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될 무렵, 계몽주의 사도가 발흥했다. 영국의 이신론이나 프랑스의 반기독교 사조와는 달리 독일의 계몽주의는 온건한 성향이었다. 라이프치히는 1700년 베를린에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독일의 계몽주의 운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계몽주의가 선풍을 일으킨 것은 토마시우스에 와서이다. 그리고 1618년에 종교전쟁이 일어난 30년 후, 유럽 전체의 분위기처럼 독일도 종교적 관용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독일 교회는 루터파와 개혁파 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화란보다는 더 적게 관용을 베풀었다.
4.4. 프랑스
프랑스의 합리주의는 영국의 계몽주의와 달리 “반교회적이고 반종교적인 색체”가 강했다. 카톨릭의 맹신적 박해에 대해서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카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계몽주의 운동은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모습을 광신적 종교행위로 정죄했다. 그리하여 1787년 11월 ‘관용에 대한 칙령’이 선언되어 비카톨릭 신자들에게도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런데 당시 개신교도들은 관용을 이끌어낸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간 존엄성’에 관심을 갖게 된다. 국민 의회가 종교 예배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1793년에는 개혁파 교회가 문을 닫아야 했지만 개신교 목사들은 합리주의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더 충실했다.
4.5. 미국
미국의 탄생 배경을 보면 선민 사상과 계몽주의 정신이 조화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경건주의, 복음주의 신앙이 흘러 들어가 미국에서 1, 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지만 미국 기독교 역시 18세기 말부터 이성과 자율의 시대를 초월해 존재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식민지 자율 문제로 고민하면서, 이성과 자율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칼뱅주의의 선민 사상에 영향을 받게 된다. 삼위일체와 같은 전통적인 교리가 거부되고 소시니안주의나 유니테리안들이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이성과 자율이 지배하던 유럽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과 달리 청교도 전통에 기초한 복음주의 신앙이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
5. 19세기 개신교의 특징
5.1.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
(1) 고백주의/각성운동
합리주의가 개신교 스콜라주의처럼 신앙의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19세기에는 ‘각성운동’과 ‘고백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했다. 마치 경건주의 운동처럼 일어난 ‘각성 운동’ 주도자들은 합리주의자들과 달리 sola scriptura와 sola gratia,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여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영국에서 시작된 각성운동은 미국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경건주의가 연합적이고 합리주의가 고백적 문제에 소홀하자 ‘고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2) 자유주의
유럽의 19세기는 자유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은총의 ‘주권성’을 강조하면서 당시의 영적 필요와 종교를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자유주의는 칸트에서 나온 관념론 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고유 종교적 가치들을 재발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들과 달리, 슐라이허막허 때부터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중심으로 신학을 세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실제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신학의 규범으로 삼고 신학했기에 ‘이성’을 계시보다 우선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와 연결된다.
5.2. 개혁과 결별: 키에르케고르 / 아브라함 카이퍼
19세기에 자유주의로 가는 개신교를 보고, ‘결별의 신학’이 나오게 된다. 유럽에서는 바르트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 실존주의적 신학이 나오게 되고, 미국에서는 근본주의 신학이 나오게 된다(메이천). 19세기에는 개신교 안의 개혁 세력으로 고백주의, 각성운동과 함께 키에르케고르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는 루터가 카톨릭 교회 앞에 서서 고독하게 외쳤던 것처럼 제도화된 기독교와 결별하고 편이성에 빠진 교회를 질타했다. 그는 기성교회의 혜택을 받으면서 개혁을 하려는 아들러에 대해서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비판했다. 결국 그는 진지함 때문에 목회의 길을 거부했다. 평범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는 유별나게 외쳤다. 문제가 있는 현실 교회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큰 죄라고 그는 인식하고 외로운 고독자로서 외쳤으나, 그는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단호히 외칠 수 있었다.
5.3. 칼뱅주의 속의 합리주의
경제적 합리주의는 칼뱅의 사상에 배태한 것으로서 퓨리턴 사회에서는 부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다. 칼뱅의 사상에서 금욕적 정신을 강조했지만,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방식을 택했다. 합리적 생활과 노동에 대한 열성은 금욕주의적 훈련에서 나온 것이었다. 금욕적 생활로 축적된 자본은 청교도들에게 유혹이 되기도 했지만 근대 경제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러나 공리주의적인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 합리주의는 이윤 추구 자체가 목적이 된다.
6. 맺으며: 근대 개신교회 개혁자들과 합리주의 그리고 오늘의 개신교회
근세의 합리주의자들은 어떤 외적 판단이나 주장을 따르기 보다 사유할 수 있는 주체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과 행동해야 할 것을 따라 주체적으로 살려고 했다(데카르트의 명제). 그들은 건조하고 종교 전쟁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전통과의 불화, 현실과의 불화를 통해 새로움을 갈망했다. 이러한 근대정신은 사회학적 개신교회에 새롭게 요청되는 부분이다. 개신교도들은 개신교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내면성, 권위(성경의 권위), 자유, 겸손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개신교도들이 참된 믿음과 참된 삶에 대한 열망을 상실하여 ‘인간’을 잃어버리고 ‘제도’에 관심을 가질 때 ‘부정’의 대상이 된다. 엘룰은 개신교회가 뒤틀리게 된 이유는 “인간이 자기의 힘을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근대 개신교의 개혁자들도 교회의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하면서 성직자의 권력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다. 보수적 개신교회일수록 진리 앞에서 단독자로서 서기 보다 제도에 안주하기 쉽다.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동조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힘이 된 연후에야 진리에 동조한다.”고 했다. 다수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처럼 삶이 결여되어 건조해지고 근대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투명성, 객관성, 공정성”을 잃어버린다면 개신교도들이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설 수 있는 “합리주의적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개신교도들에게 요청되는 합리적 태도란, 근세의 합리주의자들이 개신교회의 삶을 분리시킨 것에 대해서 ‘노’라고 한 것처럼, ‘노’를 외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적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 …말없는 배교자들”(키에르케고르)임을 기억해야 한다. 개신교회가 “고독을 거치는 길”(via solitaria)을 외면하고 불안을 포기한다면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부정’이 일어나야 한다. 근대 합리주의자들이 외친 ‘노’는 기독교 공동체를 살아 있게 한 것은 참된 믿음과 참된 삶에 대한 열망에서 개신교회가 멀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 외침은 “주체의 탄생”(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 기반이 되었다)에 기초한 외침이 아니라 sola scriptura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긍정은 부정에 의해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