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전라북도 여행
나는 실상사의 양안을 조사하자는 박노욱 박사의 청에 의해 2010년 5월 19일 집식구와 출발하고 박 박사는 광주를 들려 전주에서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10시 경에 공주로 향했다. 점심은 차안에서 준비해온 쑥덕을 먹었다. 11시 30분 변호사 사무실을 잠간 들려 중형 집에 가서 곧장 납다리 처가에 가서 머위를 셋이서 베어 가지고 와서 2시 경에 부안으로 출발했다. 부안의 김종덕씨가 사망했다고 해서 문상을 가려고 했다. 나는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전부 써 검색을 했더니 검색을 못했다, 검색이란 두 글자 세글자의 단어라는 것을 알아채리지 못했다. 논산길을 접어들었는데 자꾸 방향을 거꾸로 일어주면서 이렇게 가면 굉장히 우회한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이는 지난번 연산을 갈 때와 같았다.
주유소에 들러 검색방법을 다시 확인하고 떠났으나 국도로 부안까지 갔다. 그러나 나는 연무대 인터체인지를 들어간다는 것이 실패하여 국도로 전주까지 가다가 삼례인터체인지를 찾아가다가 추럭운전수가 김제까지 간다고 해서 따라갔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대단히 고생을 할 뻔 했다. 편리한 네비게이션을 달고도 이를 잘못 운영하면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김제에서 부안가는 길은 잘 찾아가 4시경에 부안 보안면 우동리 김종덕 씨 댁에 도착하여 김종규 씨를 찾아 인사했다. 김종규씨는 78세로 나보다 十年之長이고 아호가 창전(蒼田)인데 글씨를 잘 썼다. 나는 그로부터 금강반야바라밀경 12폭을 옛날에 기증받았다. 이에 걸 맞는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끝내 미안스럽다.
그리고 함께 김종덕씨 묘소에 가서 절을 했다. 김종덕씨는 나와 동갑인데 40년 지기였다. 이웃에 있는 김생철씨 묘소에 가서 인사를 했다, 내가 써 준 비문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김생철씨는 내가 부안 우반동 첫 답사에서 만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깊은 관계를 가져왔던 분이다. 부안김씨 고문서를 소장하고 계신 분이다. 우반동은 나의 고향보다도 더 친근감을 주는 곳이다.
우리는 전주에 오는 길은 전북대를 검색하여 왔다. 저녁은 추어탕 집에 가서 먹었다. 박박사가 전주로 8시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아 고속터미날에서 만나 뉘동생집으로 모시고 와서 여장을 풀었다.
20일 아침 나는 6시에 일어나 전북대 교정을 통해 덕진호수를 돌아 왔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앞에 가서 내가 35년 전에 완주군 신기면 봉림사지에서 옮긴 불상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불상의 머리부분은 없지만 광배까지 완전히 갖춘 멋진 불상이었다.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갖추고 있는 삼존불상은 비록 머리가 없으나 섬세한 조각를 깊이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부처님 세계로 빠져 들어감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 앞을 지나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덕진호수로 갔다. 덕진호수에는 연화교라는 나무다리와 중앙부분을 관통하는 철제다리가 잘 놓여져 있었다. 관망대 3층건물도 있고, 분수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다리의 남쪽에는 연꽃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북쪽에는 보트장이 있어 연꽃이 없었다. 덕진호수의 아침 광경은 지극히 평화로웠고 전주의 참으로 귀중한 자연환경이었다. 단오는 이곳은 전주시민의 축제가 열리는 것을 생각하면 그 때 한번 더 와보고 싶은 곳이다. 연꽃잎 사이에는 잉어와 물고기들이 유유하게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 투척이었다. 한국은 쓰레기 천국인가 싶은 생각도 했다. 시민의 휴식 공간인 이 호수에 각종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안타갑기만했고, 시청이나 군청에서 왜 이처럼 더러운 쓰레기를 방치하면 이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노력이 없는가가 나의 머리를 감돌았다. 집에 가서 매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실상사를 갔다. 전주로부터 약 2시간이 소요됐다. 남원까지 가는 절벽 사이를 지나면서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이곳을 그대로 통과하게 한 생각을 하면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지혜가 없었던 것이 참으로 안쓰럽다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했다.
실상사는 지리산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우리를 정겹게 맞아주었다. 실상사 백장암에 있었던 토지대장(量案)의 사진이 있었지만 이를 다시 확인하러 간 것이다. 이들 양안자료는 내가 35년 전에 남원군 지표조사 때에 찾아낸 것이다. 복사본에는 나의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일제시대의 소작자료도 있었고 약사계문서도 있었다. 우선 사진찰영을 하고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오기로 했다. 이는 초파일 행사로 주관자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뺏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공양을 들고 우리는 연등을 신청했다. 나는 사회와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연등을 신청했다.
돌아오는 길은 대전까지 고속도로를 통해 오는 길을 통해 올라왔다. 참으로 오랜 만에 찾은 회포를 다시 실감하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