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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미로 (울산바위산행후기)
4월을 며칠 남긴 주말 주택사 성남지부 단합대회에 참가하여 1박2일의 꿀맛 같은 일탈의 해방감과 함께 즐겁고 풍성한 시간을 보냈다. 내 기억으로는 설악산을 찾은 건 몇 번 있었다. 언제였는지 일일이 기억이 없지만 오색계곡, 비선대, 금강굴, 양폭산장은 기억나고 일행들과 함께 케이블카로 높은 권금성에 올라 외설악 풍경을 내려다보았고 이름도 모를 폭포나 소(沼)를 찾아 깊은 계곡으로 파고들다 되돌아 나온 기억도 있다. 이제 남긴 곳은 백담사 쪽으로 해서 봉정암 등을 살펴보고픈 생각이 간절한데 기회가 아직 없었다. 남들은 대청봉을 등정한 설악산 종주를 자랑삼아 얘기하지만 나로선 찌든 삶에 부대끼며 잠시 짬을 내서 그렇게라도 설악산의 일면을 본 추억이 이번 여정에 동참하게 한 강한 끌림이 된 것은 분명하였다.
설악동 계곡의 풍광은 나의 추억 속에 이미 간직되어 있었다. 실타래를 풀 듯 따라가면 되는 길이었다. 붉게 타는 단풍만이 설악의 이미지로 새겨온 터에 다시 보는 낮 익은 풍광에 연신 가쁜 숨을 헐떡이면서도 발랄한 봄의 생기에 취한 발길이 지칠 줄도 몰랐다. 온산에 봄기운이 터질듯 팽배하질 하였고 계곡의 물소리 까지도 옛 길손을 다시 반겨 주었다. 엊그제 이곳 고봉에는 눈이 왔던 모양이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잔설을 이고 있는 암 봉은 가히 이국적인 멋을 자아내고 있었고 아찔하게 좁은 협곡의 설악 곳곳에 진하게 봄기운이 부풀고 있었다. 양지 골에 활짝 핀 벚꽃이랑 진달래가 어쩌면 어여쁜 새색시 얼굴에 바른 분향기가 되어 싱그럽고 자극적으로 번지고 있어 전신이 도취되기에 충분 하였다.
산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그리 깊고 험한 길이 아니어서 그런지 가족들이 함께 온 일행이 많이 보였다. 넓은 계곡의 전체로 파랗게 싹트는 나무들의 여린 잎들이 짙은 노송의 드리운 가지와 조화를 이루니 봄 풍광은 갓 피어나는 생동감으로 물씬하였고 회색빛 구름이 산 정상을 휘감아 흐르고 있었다. 각처에서 무리 지어온 등산객들과 상춘객들이 설악 준봉들을 살펴보느라 연신 눈길을 좌우로 살펴보며 길을 걸으면서도 뒤 돌아 보기에 바빴다. 뒤돌아보니 암 봉 위에 엷게 쌓인 잔설에는 구름사이로 칼날같이 내려 꽂이는 빛 내림의 비경이 한줄기 프리즘이 되어 쏟아지고 있었고 까마득히 외줄을 타고 협곡중간에 걸린 케이블카는 거미가 기어오르는 것 같았고 거미줄이 끝나는 정상의 암 봉이 더욱 높아 보이는데 협곡 양편으로 산등성이가 파도처럼 여울지며 겹겹이 밀려와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흔들바위가 있는 계조암이 이르니 낭낭히 염불 외는 소리가 계곡에 울려 펴지는데 석굴 불상 앞에서 새어나오는 향 내 음이 봄기운에 함께 묻어났다. 암자의 명물인 흔들바위가 있는 주위 바위들에는 가족들과 상춘객들이 한때를 즐기며 쉬고 있었고 흔들바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용을 쓰며 바위를 밀어 보지만 바위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풍화로 빚어진 무심한 돌덩이를 다들 손으로 만져 보고 밀어보는 자세로 세월 속에 촌음의 순간을 추억으로 사진 담기에 바빴다. 미국에서 레슬링 선수들이 관광차 왔다가 흔들바위를 보고 힘자랑한다고 밀어보다가 그만 아래로 꽝!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못내 아쉬워했는데 이날 다시 확인해보니 역시 꽝! 소리는 크게 났던 모양이나 워낙 단단한 핵석이라 깨지지는 않고 멀쩡하였다.
운무에 가린 고봉준령의 산세가 아랫도리부터 물드는 녹색의 치맛자락을 허리춤까지 두르고서 펄럭이듯 봄바람을 타고 있었다. 나는 춘풍에 취한 작은 산짐승이 되어 산이 죄어오는 싱그러움을 따라 계곡을 파고드는 외골수 집념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길옆에 아름드리 해묵은 노송이 넘어져 죽어있었다. 뿌리에 흙 한 톨 없이 바위틈사이에 끼여 말라가고 있었으니 아마도 지난 태풍에 넘어진 것 같아 주위를 유심히 살피니 길 따라 계곡물이 많이 흘러간 흔적이 있었고 등산로 주변 바위틈에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지탱하고 있었던 나무들이 바람에 기울고 유난히 화강암들이 많은 골산이라 빗물에 흙이 쓸려가고 보니 곧 넘어질 것 같이 위태로운 나무들이 여럿 보였다. 운명이 다가오는 순간인데도 가지에는 새순을 가득 피우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거대한 암 봉이 솟구쳐 올라 구름 속으로 두둥실 떠가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한 무리의 짙은 운무가 암 봉을 떠받들고 산봉을 막 넘어가고 있는 풍광이 나뭇가지 사이로 확연히 보였다. 장관이었고 기막힌 절경이었다. 소나무 숲의 짙은 녹음을 헤치고 눈앞에 펼쳐진 바위산은 자칫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롭게 산 정상에 걸려 병풍을 펼친 듯하였다. 주변 상록수 군락지와 침엽수 무리가 위대한 암 봉의 출연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들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파란 새 순의 이파리 사이로 퍼덕이는 눈치 없는 산새가 둥지를 잃을까봐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 계곡물소리 조차 소리높이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다.
휘어진 산길을 굽어 돌자 나뭇가지사이로 울산바위의 거대한 위용이 완전히 솟아올라 보였고 하늘에 걸린 정상에는 먼 하늘에 엷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울산바위를 가린 앞자락은 이제 막 봄이 무르익고 있어 녹엽들로 푸른 띠를 두르고 있었지만 짙은 소나무 푸른 숲 위로 거대한 싸리버섯이 돋아난 듯 하얀 바위산이 산 정상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운 경관에 넋을 빼앗기에 충분하였다. 구름을 타고 둥실 떠서 산등성이 너머로 가볍게 넘어가듯이 부양된 장쾌한 울산바위의 위용에 감히 눈길을 떼지 못하였고 그 신비스런 아름다운 자태에 홀린 나머지 마음이 급한 발길은 순식간에 암 봉 턱밑에 다 달았다.
산길은 철책계단 앞에서 끝나 앞길이 막혔다. 까마득히 바위 틈새로 비좁은 사다리가 되어 가파르게 세운 808계단은 아찔할 정도로 흥분을 자아냈다. 손잡이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지옥문이 따로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파르고 험악한 모습이었다. 주변 바위 틈새로는 음침하게도 빗물이 질질 새어나고 있었고 머리위로는 곧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거대한 침니처럼 마주선 암벽에 걸려 박혔고 가느다란 사다리 철 계단은 그 밑으로 꼬부라지며 이어지고 있었다. 철봉으로 짜 맞춘 손잡이가 뭇 사람들의 손길에 닳아 반들거리며 햇빛에 반사되어 날카로운 빛줄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지난해 늦은 가을 이곳에 왔을 때는 산바람이 차갑고 날씨마저 너무 추워 풍광을 살필 겨흘도 없이 그저 난간만 잡고 계단을 세며 오르기 바빴었는데 이번에는 계단참 마다 서서 뒤돌아보며 산세와 풍광을 살피니 명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그저 여러 갈래로 북받쳐 오르는 벅찬 감회를 가슴속에 간직한 추억더미 보자기로 감싸 안을 수 있었다.
철 계단 따라 외줄로 오르고 내리는 등산객들이 서로 몸을 비켜가기조차 비좁을 정도니 험준하기 이를 데 없었고 앞으로 올라가려니 다리가 후들거렸고 내려다보니 깊은 산 속에 돌아갈 길도 까마득하니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커다란 두 노송이 버티고 선 산 계곡을 내려다보니 엷은 연두 빛을 띠는 작은 산등성이가 낮게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앙상한 낙엽수 참나무 잔가지가 하늘을 향해 어지럽게 뻗어 엉긴 산세를 이루었고 다시 그 너머로는 푸른 솔밭과 작은 암 능이 어우러진 높은 골산 능선이 이어져 물결같이 파도치듯 꿈틀대고 있었는데 푸른 하늘에 경계를 이루듯 하얀 잔설을 정상에 살짝 덮은 설악 준봉이 장관을 이루며 구름과 함께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의 비경에 실로 멈출 수 없었던 감탄을 질렀고 사계절이 한꺼번에 펼쳐진 풍광을 보는 듯한 재미에 도취되었다. 목초지 너머로 하얀 백설 모자를 쓴 정상을 자랑하는 유럽 알프스 전경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난간을 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상을 한 아가씨가 발길을 떼지 못하고 난감해 하고 있었지만 개구쟁이 꼬마 녀석을 잘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이 끝나나 싶더니 다시 가파른 철 계단에 어찔하기까지 했었다. 다시 돌길이 이어지고 돌길이 잠시 끝나니 또 가파른 계단이 놓여있었다. 진퇴양난이었고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돌 틈 사이로 난 외길이었다. 한번 들어서면 되돌아 갈 수 없는 고난의 인생길을 체험하는 곳이었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반대편 바위산 자태에 눈길이 한데 모아졌다. 아래에서 마냥 올려쳐다보기만 하던 바위산을 한눈에 담아 내려다보는 즐거움에 으-악 !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더군다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산이 가려졌던 뒷모습까지 한눈에 모아보는 경치는 실로 장관이었다. 장쾌한 명물이었다. 우-와.. ! 하고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갑자기 외줄기 돌풍이 바위산 정상을 몰아치니 중심을 잃을 정도로 사람들이 휘청거렸고 넓은 창 등산모가 일그러지고 외피가 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바람을 피해 고개를 돌리니 눈에 들어온 비경을 놓치는 순간이었다. 빈손으로 갈수가 없다는 절박감에 서둘러 전망대 난간에 기대고 정상 정복의 기념사진 한 장을 담느라 허둥거렸다. 여유롭게 넉넉히 울산바위의 비경을 즐길 여유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 한 몸 바위에 새겨 넣느라 애써 멋을 낸 포즈가 멋은 없었지만 눈가에 비치는 즐거움은 입가에 번진 미소와 함께 간신히 찍었다. 무심하게 아무 말 없는 돌덩이 암 봉이었지만 내 몸을 받아주어 함께 어울린 장면이 일품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감회가 일었다. 주변풍광을 모두 한 폭에 넣지는 못해서도 큰 바위 산 하나를 어깨에 등짐지고 가져왔으니 두고두고 힘자랑 할 만 한 감회를 사진에 담아왔던 것이다.
울산바위를 보는 순간 감탄인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등정기분이 너무 상쾌하였다. 무엇이 그리 무겁게 가슴속에 막혀 있었던지 모르지만 갑자기 전신에 찬 기운 같은 바람이 관통하는 듯 시원스레 뚫리는 기분이 흘렀고 감전되듯 전신에 흐르는 짜릿한 즐거움이 찌르르 전해왔다. 비록 울산바위의 반쪽을 보는 순간이었지만 그 장엄하고 멋있고 내 작은 눈에 가득차오는 빼어난 자태에 넋을 빼앗겨 두 평 남짓한 정상에 섰던 잠시 동안이었지만 내가 보았던 숫한 산 정상의 풍광이 일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저 무생물의 바위 덩치가 왜 이리도 감상에 젖게 하였는가 싶었다. 두 동공 속으로 당겨온 바위산이 뇌리에 박히며 영상으로 각인되는 순간 무언의 충격을 받은 것 같은 감동과 감탄으로 혼미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 걸린 눈부실 정도로 하얀 화강암 거봉의 빼어난 자태는 무생물이 아니라 한없는 유정(有情)을 품고 있었다. 말이 없는 울산바위의 침묵이 던지는 무심한 정이 질박한 정감으로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산세와 산바람, 봄기운과 풀 내 음, 멀리 계곡 물소리의 정겨움, 웅얼거리는 등산객들의 즐거운 비명 같은 살아있는 풍광은 도저히 사진으로는 담아오지는 못했어도 정상에 서서 풍광을 관조하는 순간 아이맥스의 영상이 되어 눈앞에 닥아 오는 광활한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 모든 정취와 풍광과 정겨움이 내 동공의 블랙홀에 빨려들듯이 회오리가 되어 토네이도 돌풍과도 같이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던 순간을 난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울산바위에 오른 이번산행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의 생동감에서 오는 정취와 무생물의 유정함에서 느끼는 정감이 함께 버물어진 즐거움이 부풀어 내 몸은 풍만한 감회에 감전되듯 멍들고 말았다.
이곳 정상에서 실 눈 같은 눈으로 풍광을 감상할 기회가 또 언제일가 싶어 머뭇거리는데 한 가닥 혹한 찬바람이 안면을 질타하며 바위산을 넘어갔다. 기우뚱 휘청거리면서도 즐거운 비명을 삼키며 싱그러운 봄 이파리들의 녹 향에 취해 흥얼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레 간신히 난간을 잡고 반대편 계곡을 내려다보니 멀리는 푸른 동해바다와 속초마을 그리고 다듬은 새 길로 차량들이 달리고 있었는데 바로 발아래는 한 발짝도 더 나설 수 없는 높은 암반의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눈앞이 아찔하여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명소답게 꾸역꾸역 올라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정상 풍광을 한가로이 살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돌아서는 발길이 왠지 무거웠고 바짝 마른입술에 내려가려니 덩달아 마음까지 빈껍데기가 되어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공허감이 스쳤다.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울산바위에 전해져 오는 전설이 생각났다. 옛날에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잘 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에 모이도록 각처에 동원령을 내렸다.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설악산에서 하룻밤을 쉬었더니 이미 금강산은 모두 일만이천봉이 빚어지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울산바위는 그 한스런 사연을 간직한 채 고향 울산으로 돌아갈 체면이 없어 그냥 설악산에 눌러앉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울산바위라 하였단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설악산 유람 길에 나셨던 울산 고을원님이 울산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고 울산바위가 명물이 된 것에 시샘도 생기고 신흥사 주지를 골려줄 심산으로 스님에게 “울산 바위는 울산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그 울산바위를 돌려주든가 차지한 대가로 셋돈을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를 받아 가는 바람에 신흥사는 매우 궁핍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신흥사의 한 동자승이 앞으로 세금을 받으러 오면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그 다음해에 울산고을 유생들이 셋돈을 받으러오니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울산바위가 차지한 자릿세를 내던지 울산으로 도로 가져가라”고 되받아쳤다.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주면 옮겨 가겠다”고 하였단다. 그러자 동자승은 산 아래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고 있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송진을 엷게 발라 울산바위를 동여매고 새끼줄을 불에 태웠더니 그 새끼줄이 불길에 거슬리어 마치 불에 탄 재로 바위를 묶은 형상이었다. 그러자 울산 고을원님은 이 바위를 가져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릿세를 줄 수도 없는 터라 더 이상 신흥사에 셋돈을 내라는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있는 산 아래 마을을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써서 속초(束草)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짓은 옛날 울산 고을원님 흉내를 내는 꼴이구나 싶어 신흥사 동자승과 같은 지혜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터벅터벅 하산 길에서 문득 울산바위전설을 내 멋대로 재구성해 보면서 그랬으면 오죽 좋겠나 싶어 씨-익 웃고 말았다.
독도에 얽힌 전설 이야기(1)
아득한 옛날 지각변동이 일어 화산으로 큰 열도가 생겨 생물이 살게 되었을 때 바다갈매기가 많이 살았다. 그 열도는 태평양과 접하고 있어 여름이 되면 태풍이 심하게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해 큰 태풍이 불어와 갈매기들이 모두 길을 잃고 북쪽으로 날아갔다가 단지 몇 마리만 구사일생으로 바다가운데 있는 조그만 돌섬에 내려앉았다. 그 뒤 수많은 새끼들을 번식시켜 그 조그만 돌섬은 온통 갈매기 천국이 되었다.
한편 그 열도는 어느 날 사상초유의 대지진이 났고 집채보다 높은 파도가 밀려와 많은 마을이 수장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열도 사람들이 “우리 열도는 사람 살 데가 못되므니다” 하면서 그 때부터 이웃나라를 넘보고 전쟁과 노략질을 일삼았다가 울산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고 또 갈매기 섬을 보고 간 일이 있었다. 얼마 후 “저 갈매기는 우리열도에서 건너왔다. 내가 저 갈매기들 주인이다. 그러니 이 갈매기 돌섬은 우리 땅이다 ” 하면서 우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 망언을 하는 자에게 갈매기들이 똥 세례를 퍼 부었단다. 갈매기 배설물에 그 주인이란 작자는 질식하여 굳어지는 바람에 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그 섬에는 갈매기 똥으로 하얗게 변한 바위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독도에 얽힌 전설 이야기(2)
아득한 옛날 21세기 무렵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 ” 라는 노래가 있었다. 이 노래는 조선국 울산바위전설을 들은 왜 나라가 “독도는 일본 땅이다”라고 농간을 부리자 이에 조선국 어린이들이 동요로 부른 노래였다. 독도는 순전히 돌섬이라 당시 신흥사 같은 절이 없어 동자승은 없었지만 독도 지킴이 ‘김일’이 있었다. 김일이가 이마를 문지르며 왜 나라에 한 마디 소리쳤다.
“대마도는 탐라국 어민이 먼저 발견하고 정착해서 살았다. 독도가 니네 땅이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하고 박치기 식으로 되받아쳤다. 그러자 왜 나라는 다시는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하지 않고 꽁지를 내리고 말았다. 그 뒤로 왜 나라에서는「김일박치기」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백두대간은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소백산 지리산으로 흐르는 주간이 있고 , 동으로 주흘산, 팔공산, 금정산으로 이어지는 지간과 동해바다 속으로 울릉도와 독도로 이어지는 지간이 뻗어갔다. 독도는 고래 등의 지느러미 같이 바다위로 들 난 산맥의 암 봉 일뿐이다. 이는 동해물이 마르지 않아도 대륙과 이어진 산맥의 흐름임을 동해로 흐르는 해류를 보면 알 수 있다.
명산 설악산의 봄은 정말 화사하였다. 싱그러운 산 공기가 향기롭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도 삶에 찌든 가슴 밑바닥까지 맑고 청명하게 파고들며 찌든 속내가 맑아져 왔다. 되돌아가면 다시 뒤적거려야 하는 삶의 찌꺼기들 속에 묻힐 자신을 잠시 잃고 있었다. 어느새 말초신경이 뻗어있는 발끝까지 맑고 푸른 생기가 돌아 땀구멍으로 스며드는 계곡의 서늘한 기운에 생기가 되살아나듯 흥분이 삭을 줄을 몰랐다. 되돌아보기를 여럿차례하며 못내 떠나야 하는 아쉬움에 발길이 흐느적거렸다. 왜 그리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는지 한발 한발 더듬듯이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노송이 넘어져 있던 곳까지 내려왔다.
오르는 길에 아름드리 노송이 벌렁 넘어져 죽어가는 아픔이 전해져 왔을 때 숙연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기도 했었지만 내려오며 다시 보니 세상살이 허무감에 허탈해했다. 아마도 머리 결이 거의 빠진 몰골로 시들어가는 자신의 노구를 보는 듯 했음이리라. 저 노송의 삶이 언제 어디에서 시작하여 여기서 이제 끝나는 걸까. 시작의 순간을 누가 지켜보았고 이 순간은 누가 지켜보는가. 하얀 송이 꽃가루로 홀씨가 날아와 지금 뿌리가 들 난 저 자리에 뿌리 내릴 때 누군가 작은 소나무의 생의 시작을 보았겠지. 그 때가 저 죽어가는 소나무의 시작이었을까. 저 소나무의 홀씨를 남긴 모체는 그럼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나 자신의 이 발길은 설악산 탐방의 끝일까? 다시 온다면 그 날이 끝이 될까? 빛바랜 사진 속에 남아있는 추억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계조암 경내 돌담사이에서 누더기 껍질을 뱀의 허물같이 남은 나무 등걸이 바위틈새에 끼여 삭아드는 잔골을 보았고 산길 옆에는 옹이만 남아 앙상한 뼈대만이 살 점 없이 간신히 서 있는 나무 등걸에 새파란 이끼가 모질게 붙어 더부살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도 보았다. 초파일을 앞두고 계조암 석굴 앞에서 부터 길게 산 아래로 연등 줄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무수한 이름들도 보았다. 모든 것들이 덧없는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하니 이제부터 또 다른 윤회의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존재에서 끝나고 그 끝은 다시 유정한 것으로 살아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한 떨기 추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성남항구에 닺을 내리고 정박한지 3개월째다. 삶의 풍랑에 밀려 이 항구나 저 포구에 닺을 내리고 주막에 들렸다가 회포를 풀고 우정과 사랑을 나무며 또 다음 항해를 그리워해왔다. 어쩌면 싫어도 항해를 계속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인연의 끈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어디부터가 시작이었고 어디가 끝일까.
올라갈 때 808계단의 아찔함이 있었고 내려올 때 808계단의 어질함이 있었다. 중간 계단참에서 풍광을 살피니 만경창파 같이 숲과 암 봉의 산맥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저 멀리 까마득히 하얀 설봉이 하늘과 경계를 이루었었다. 흐르는 구름은 거무튀튀하였지만 가끔씩 파란 하늘이 어쩌면 그리 싱그럽게 펼쳐지는지 풍광에 시린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주변 노송들은 짙은 가지를 드리우고 진한 송진 내 음을 풍기고 있었는데 넘어져 죽은 노송은 엉성하게 문어발처럼 들 난 뿌리가 자세히 보니 커다란 암반에 틈새에 오랜 세월 압착되어 짓눌린 탓으로 납작한 뿌리가 삶의 고난을 이겨온 긴 세월을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들이 고스란히 추억 속에 쌓였다.
길가에 세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안내문에 눈길도 머물었었다. 화강암의 단단한 바위도 결국은 풍화작용으로 흙이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고 했다. 화강암 절리현상으로 남은 ‘핵석’ 흔들바위와 풍화작용으로 울산바위에서 한 조각씩 벗겨져나갈 암 봉 덩어리를 실제로 보았다. 그 떨어져 나간 자리에 피어날 또 다른 숨겨진 풍광을 상상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과연 그렇다. 클라크케이블과 비비안리가 열연한 영화에서 스칼렛이 저녁노을이 붉게 불타는 농장에 서서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독백으로 외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한 때를 풍미한 비옥했던 농장, 사랑과 부귀도 인간의 탐욕으로 멍들어 갔고 전쟁과 자존심으로 얽혀 결국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그린 영화였다.
아무리 거대한 암 봉이라도 지금은 눈길을 모으는 자태를 뽐내지만 결국은 양파껍질처럼 벗겨져 썩은 바위 (석비레)가 되어 흙이 되어 무너져 내릴 것이 아닌가. 저 울산바위가 박리현상이 진행 중인 것이 떨어지는 목련 꽃 잎이고 지금껏 숫한 세월 속에서 절리와 풍화로 알갱이 핵 석 만 남아 흔들거리는 흔들바위가 한 송이 석류였다. 그 뿐이 아닌 것을 나는 보았다. 산길 따라 널 부러 넘어진 나무들의 잔해 속으로 뿌리를 새로 내리는 이끼들의 모습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진화 속으로 자신도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지 않는가. 손아귀로 움켜진 모든 것들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언젠가는 바람처럼 사라질 이 풍광과 정취가 얼마나 오래 동안 기억될까 마는 바라는 바는 생생한 추억 속에 오래 동안 남아 내 삶을 충만하고 풍성하게 엮어갔으면 좋겠다. 신흥사 대불 앞을 지나며 빈손을 펼친 부처님의 모습에서 또 한 번 인생무상을 느끼며 발길이 무겁게 느껴왔다. 발길에 묻어나는 오늘의 감동이 마음속 깊이 묵직하게 앙금같이 고여 그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홀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반달곰이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이번 산행에서 또 하나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나만의 추억을 새겨 왔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추억의 미로였다.
2011. 4. 설악산 울산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