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경 해체, 국가안전처 신설, 세월호 특별법
박근혜 대통령은 5월 19일 ‘해경 해체’를 발표했다. 대신 국가안전처를 신설해 국가적 대형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별도의 조직을 꾸리겠다고 했다. 해체되는 해경의 해상 구조•구난 업무는 국가안전처로, 해경의 수사•정보 부문은 경찰청으로 이관하도록 했다. 관련 법안은 8월 국회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와 피해 보상과 관련한 ‘세월호 특별법’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명확히 밝히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희생자 전원을 의사자로 지정하는 등의 내용이다. 현재 특별법은 여야의 의견이 엇갈리며 7월 임시국회로 넘어갔다.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생 고 김시연양의 아버지 김중열(44)씨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고 돌봐야 할 사람들이 직무유기를 했을 때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며 “특별법을 통해 사고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와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아버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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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98일째인 7월 22일 충격적인 긴급뉴스가 떴다. ‘유병언 시신 발견’. 검찰과 경찰이 이번 세월호 참사의 총체적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추적해온 유병언(73)전 세모그룹 회장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는 경찰 발표가 나왔다. 유 전 회장이 은신했던 전남 순천의 별장 인근 매실밭에서 6월 12일 심하게 부패된 시신이 발견됐는데 DNA 검사를 한 결과 40일만에 유씨로 확인됐다는 내용이다. 평소의 삶 자체가 베일에 싸여있던 유씨는 죽음도 예사롭지 않게 확인된 셈이다. 유씨가 세월호 부실의 주범으로 부각되면서 그의 굴곡 많던 삶이 새삼 주목을 받았다.
유병언씨는 무역업체인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해 운영하다 1979년 세모그룹을 설립했다.
건강식품, 선박제조, 자동차부품제조, 건설 등 9개 계열사를 세모그룹이라는 이름으로 키웠다.
그는 1986년 한강유람선 운영권을 따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와의 친분 덕택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당시 정권의 밀어주기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7년 희대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이름이 거론된다. 공예품 제조회사 오대양의 경기도 용인 공장에서 직원 등 32명이 숨진 채 발견된 것.
이른바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기독교복음침례회(세칭 구원파)라는 종교가 세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오대양그룹 대표 박순자씨와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해 숨진 32명이 모두 구원파 신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박씨와 신도들이 89억원의 사채를 끌어 썼고 이 돈이 유 전 회장의 세모그룹으로 흘러 들어간 의혹도 불거졌다. 당시 ‘구원파 교주’로 지목된 사람이 유병언씨다. 구원파를 창시(1962년)한 권신찬 목사의 사위인 유씨는 직접 목사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그 이상 밝혀낸 게 없었다. 유씨가 사건과 직접 연관돼 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신도들의 돈을 갖다 쓰고 갚지 않은(상습 사기) 사실이 인정돼 1992년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정권이 바뀐 이후 구원파 신도 여러 명의 제보 등을 통해 두 차례 더 수사가 진행됐지만 유씨의 추가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설교 영상
세모그룹은 계속해서 몸집을 불렸다. 1990년 한강에서 세모 유람선 침몰로 직원 1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터졌다. 하지만 1995년 세모해운을 설립해 27척의 여객선과 화물선을 운영하는 국내 최대 연안 여객선업체가 됐다. 그러나 세모그룹은 유씨가 출소한 이듬해인 1997년 2200억원의 빚을 진 상태에서 부도가 났다.
하지만 유씨는 드러나지 않게 기업 활동을 계속했고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가 유씨와 자식들이라는 의혹이 터졌다. 실제로 김한식 대표를 포함한 청해진해운 임원 대부분이 구원파인 것으로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고 원인부터 다시 따져야 했다. 한 선사(청해진해운)가 최근 4년간 적자에 시달리다 부실한 안전관리로 사고를 낸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유씨는 부도 후 어떻게 재기한 걸까, 청해진해운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던 걸까. 세간의 관심은 사고의 배후에도 쏠렸다.
‘세모 왕국’의 재건(再建)
유씨는 부도와 함께 침몰하는 여느 기업인들과는 달랐다. 그에겐 10만 신도가 있었다. 현대종교 등 종교 연구단체에서는 구원파가 신도들을 사원으로 뽑고 헌금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면서 종교와 회사 경영을 일체화했다고 주장한다. 세모그룹의 법정관리(회생관리절차)가 딱 이런 식이라는 거다. 1999년 세모그룹의 법정관리가 결정된 이후 10년간 세모그룹의 법정관리인은 유 전 회장 일가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도맡았다.
인천지법은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 임모씨를 관리인으로 선임했고 2004년 새 관리인이 된 권모씨는 후에 유씨의 장남 대균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건설 계열사 ‘트라이곤코리아’ 등에서 임원을 지냈다. 트라이곤코리아는 구원파에서 258억원을 빌려 쓰기도 했다.
세모그룹을 되찾는 데도 신도나 측근이 대표로 있는 ‘천해지’와 ‘청해진해운’, ‘세무리 컨소시엄’ 등의 계열사가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우선 세모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린 뒤 이를 다시 세모 인수 비용으로 썼다. 부채 2200억여 원 중 1900억여 원은 출자전환 등으로 탕감받았다.
유 전 회장은 ‘세모 왕국’을 재건하려 했던 것 같다. 흩어져 있는 계열사들을 하나의 지배그룹 아래 관리하기 위해 장남 대균(44)씨와 차남 혁기(42)씨가 최대주주로 있는 아이원아이홀딩스를 이용했다. 아이원아이홀딩스는 (주)세모의 조선사업부문을 인수한 천해지의 지분(70.1%)을 60억원, 세모케미칼 후신인 아해 지분(44.8%)을 19억원, 청해진해운 지분(9.4%)을 4억여원에 인수했다. 국내 계열사는 12곳, 해외법인은 13곳으로 불어났다. 회사 총 자산은 5600억원대, 가족 개인 자산은 2400억원대로 추정된다. 세모그룹 부도 후 10년만이었다.
검찰은 유 전 회장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유씨 일가와 측근들이 횡령ㆍ배임ㆍ내부거래ㆍ회계조작 등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2005년 인천지법에서 채무 600억원을 탕감받으면서 재산 규모를 적게 신고해 법원을 속인 혐의(통합도산법 위반)도 적용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유씨와 청해진해운 등 계열사가 해외 자산을 취득하고 투자하는 과정에서는 사전 신고 의무 위반 여부를 들여다 보고 있다. 또, 유씨가 두 아들에게 불법 증여를 통해 경영권 승계를 하려 한 것은 아닌지도 조사 대상이다. 청해진해운을 포함한 12개 계열사는 순환 출자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으며 그 위에는 지주회사 격인 아이원아이홀딩스가 있다. 계열사 지배구조가 일부 대기업이 썼던 방식과 비슷하다. 유씨 일가가 상당 기간 경영권 승계를 준비해왔을 거란 관측이다.
- 유병언(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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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모그룹 회장
- 1390억원대 횡령·배임·조세포탈 등 혐의
- 공개수배(신고 보상금 5억원)
- 6월 12일 사망 확인..'공소권' 없음 처리
- 유대균(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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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원아이홀딩스 지분 19.44% 보유
- 다판다 최대주주(32% 보유)
- 횡령·배임·조세포탈 등 혐의
- 공개수배(신고 보상금 1억원)
- 유혁기(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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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원아이홀딩스 지분 19.44% 보유
- 문진미디어, 아해프레스프랑스 대표
- 온지구 3대주주
- 횡령·배임·조세포탈 등 혐의
- 현재 프랑스 체류 중(소환 불응)
- 유섬나(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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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레알디자인 대표
- 80억원대 횡령 등 혐의
- 현재 프랑스 '프렌교도소' 수감 중
(국내 송환 예정)
- 유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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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령 등 혐의
- 현재 미국 체류 중(소환 불응)
- 고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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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모 대표(다판다 전 부사장)
- 배임 등 혐의로 구속
- 권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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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이곤코리아 대표, 한평신협부이사장
- 배임 등 혐의로 구속
- 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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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영상·노른자쇼핑 대표(금수원 이사)
- 탤런트 전양자로 활동
- 5월10일 소환조사
- 김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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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진미디어, 아이원아이, 클리앙 전 대표
- 미국 체류 중·소환 통보
- 김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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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진해운 대표(세모 전 감사)
- 업무상 과살치사·과실선박매몰 등으로 구속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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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제약 대표
- 아이원아이홀딩스 3대 주주
- 미국 체류 중·소환 통보
- 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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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원아이홀딩스·천해지 대표
- 한국제약·금수원 이사
- 배임 등 혐의로 구속
- 송국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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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판다 대표(세모신협 이사장)
- 횡령·배임 등 혐의로 구속
- 이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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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진미디어 최대주주
(1993년부터 문진미디어 대표) - 미국 체류 중·미소환
- 문진미디어 최대주주
- 황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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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무리 대표(세모 대표)
- 검찰, 자택 및 사무실 압수수색
땅, 땅, 땅…유병언의 집착
유씨는 부동산에 유달리 집착을 보였다. 신도들을 이용해 차명으로 땅을 구입하는 방식 등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부동산까지 손을 댔다. 서울 강남 한복판의 ‘유씨 타운’이 대표적이다. 유씨 일가는 건강식품 방문판매업을 하는 계열사 ‘다판다’ 등을 통해 서울 역삼동 798-1부터 798-5번지 일대에 6개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부동산의 공시 지가만 210억원이다. 시가는 최소 5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초구 염곡동에도 이른바 ‘유병언 타운’이 있다. 본채를 에워싼 토지 11필지 8608㎡(약 2440평)의 현 소유자는 하나둘셋영농조합이다. 그런데 이 땅 대부분이 유 전 회장 가족이나 측근들이 소유하다가 최근 조합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나둘셋영농조합은 구원파의 총 본산인 경기 안성의 금수원 주변에도 44만㎡(약 13만평) 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북 청송군ㆍ울릉군ㆍ의성군ㆍ군위군 일대 945만㎡(보현산영농조합법인ㆍ옥청영농조합법인), 제주 서귀포 일대 990만㎡(청초밭영농조합법인), 전남 완도군 일대 50만㎡(하나둘셋영농조합법인), 전남 보성군 일대 15만㎡(몽중산다원영농조합법인) 등 2121만여㎡(2000억원대 추산)도 마찬가지다. 서류상 소유자는 영농조합이지만, 유씨 일가의 차명재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유씨 일가는 해외에도 고가의 부동산을 소유한 정황이 잇따른다. 유씨의 차남 혁기씨는 뉴욕 인근의 저택과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 등 수백만 달러어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LA 근처 팜스프링스에 있는 100만달러 주택도 유씨 일가 소유로 전해졌다. 안성 금수원에서 만난 신도들은 “유 전 회장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땅”이라며 “투기 목적이 아니라 (본인이) 뜻하는 농작물을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위해 땅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을 확보하겠다며 유씨 일가 재산을 이 잡듯 뒤지고 있다. 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해운의 재무상태로는 보상금 지급이 어렵다. 하지만 보상금 확보 과정은 만만치 않다. 검찰이 유씨 일가가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이자 실질적인 경영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유 전 회장은 청해진해운과 아이원아이홀딩스 등 어느 회사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다. 유씨가 실제 경영상 지시를 했음에도 문서상 기록을 남기지 않는 ‘그림자 경영’을 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검찰 수사는 청해진해운 전체 직원의 이름과 직책, 사원번호가 적힌 ‘인원 현황 조직도’가 발견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조직도에는 ‘이름 유병언, 사번 A99001’이 적혀 있었다. A는 사무직 직군을, 99는 입사년도 뒤 두자리를 각각 의미했다. ‘001’은 유 전회장이 이 해 첫 번째 입사자라는 뜻이라고 검찰은 해석한다. 청해진해운이 1999년 설립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씨가 이 회사의 ‘1호’입사자라는 분석도 가능했다. 유 전 회장이 청해진해운으로부터 급여를 받아 온 사실도 드러났다. 유 전 회장의 2011~2012년도 근로소득 지급명세표에는 지난해 3월부터 지난 2월까지 청해진해운에서 들어온 월 급여 1000만원(연봉 1억 2000만원)과 상여금 4000만원이 찍혀 있었다. 또 청해진해운의 2011년 7월1일자 비상연락망과 2014년 4월14일자 직원 현황표에는 유씨가 ‘회장’으로 명시돼 있었다. 유 전 회장이 지주사 격인 아이원아이홀딩스 설립 전까지 계열사 사장단 모임인 ‘높낮이회’를 운영한 사실도 포착했다. 검찰은 세월호 참사 1달 만인 지난 5월 16일 1390억원대 횡령ㆍ배임 및 조세포탈 혐의로 유 전 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유 전 회장은 5월 20일로 예정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지 않았다. 장남 대균씨 역시 소환에 불응하고 자취를 감췄다. 검찰과 경찰은 이들을 긴급체포하기 위해 경기도 안성 금수원에 5월 21일과 6월 11일 두 차례 강제진입을 했다. 검거 작전이 번번이 실패하자 검찰과 경찰은 5월 22일 유씨 부자에 대한 수배 전단을 전국에 뿌렸다. 외국어 전단도 등장했다. 7월 15일엔 이들의 도피를 도운 혐의로 신도 3명을 공개 수배했다. 유씨에게는 역대 최고인 5억원의 신고 보상금이 걸렸다. 장남 대균씨의 현상금은 1억원이다. 유씨 부자가 ‘로또’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사진작가•작명가 ‘아해’ 유병언
유씨는 해외에선 ‘아해’라는 아호를 사용하며 사진 작가로 활동했다. 안성 금수원 내엔 집무실 겸 사진 스튜디오가 있다. 세월호를 증축하면서 5층 일부를 이벤트 및 사진 전시 공간으로 개조했다. 주로 자연 풍경과 동물을 찍었다.
유씨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에서 별도의 사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아해’가 유씨라는 걸 처음으로 밝힌 한 프랑스 미술전문기자는 “전시회는 35억원 기부가 있어 가능했다”고 폭로했다. 돈으로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유씨의 작품 가치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이경률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순수예술로서 작품 가치가 있다기 보다는 아마추어 사진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계열사 핵심 측근들은 ‘아해’의 사진들을 500억여원에 사들였다. 유 전 회장이 찍은 사진이 실린 달력 1개가 500만원, 사진 작품 한 점당 3500~5000만원 정도에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치 없는 사진을 비싼 값에 사들여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 배임이다. 유씨 일가가 이런 내부 거래로 비자금 조성 및 탈세를 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유씨는 작명으로도 계열사에서 수백억원 이상의 돈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세월호’의 ‘세월’, ‘오하마나호’의 ‘오하마나’, ‘힘쎄지’, ‘아이원아이’, ‘모래알’, ‘노다지’ 등이 유씨 일가 명의로 등록된 상표권이다. 청해진해운이 지난해 세월호의 이름을 쓴 대가와 디자인ㆍ특허사용료 등으로 차남 혁기씨 등에게 지급한 돈은 10억 6000만원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왔다. 검찰은 유씨 일가가 이런 식으로 지난 15년간 계열사에서 500억원 넘게 챙긴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이런 식으로 불어난 유씨의 재산을 확보해 세월호 참사로 인한 막대한 비용을 물릴 계획을 세웠다. 유씨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원은 유씨 일가의 재산을 일부 동결했다. 유씨 일가의 이름으로 된 실명 예금 및 벤틀리 자동차, 부동산 등 161억원에 대해서다. 수배자 신분이었던 유씨 일가가 도주 중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국세청도 계열사 보유 부동산을 비롯해 1100억원 상당의 재산을 별도로 압류했다. 검찰이 횡령 및 배임 등 범죄 액수를 토대로 자체 집계한 추징보전 대상 금액은 유 전 회장 1291억원, 장녀 유섬나(48)씨 492억원, 장남 유대균(44)씨 56억원, 차남 유혁기(42)씨 559억원 등 2398억원이다.
그러나 참사 100일을 이틀 앞두고 커다란 변수가 돌출했다. 유씨의 시신이 발견된 지 40일만에야 신원이 확인되면서 검ㆍ경의 추적 활동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바로 전날 유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새로 발부받은 검찰은 또 한번 체면을 구겼다. 검찰의 순천 별장 수색 당시 유씨가 통나무 벽 안에 숨어있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제 유씨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유씨의 재산을 찾아내 구상권을 청구하겠다는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유씨는 마지막까지 검ㆍ경을 곤경으로 내 몬 셈이다. 유씨는 도피생활 중 메모를 남겼다. ‘눈 감고 팔 벌려 요리조리 찾는다. 나 여기 선 줄 모르고 요리조리 찾는다. 기나긴 여름 향한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유씨는 매실밭에서 술병과 스쿠알렌 빈병, 직사각형 돋보기 등을 옆에 두고 하늘을 향해 누운 채 발견됐다. 그의 행적과 사망에 이르는 과정은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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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통, 사람들
세월호 참사 이후 진도 팽목항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체념이 뒤덮은 공간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거듭 찾아왔고 장관이 멱살을 잡혔다. 체육관을 가득 채웠던 실종자 가족들은 유가족이 되어 하나 둘 떠났다. 참사 다음날 팽목항에 내려가 7월 13일까지 현장을 지키며 취재한 JTBC 서복현 기자는 팽목항의 90일을 “무력감으로 채워진 시간”이라고 말한다.
294명의 희생자가 건져올려지는 것을 석 달동안 보도해야 했던 그는 안산 합동분향소에 모아진 앳된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삶이 이렇게 사진 한장으로 남았다.
아이들의 꿈
아이들은 꿈이 많았다. 고 이다운군은 음악가를 꿈꿨다. 독학으로 통기타를 익혔고, 안산단원고의 밴드 보컬을 맡았다.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기도 했다. 인터넷엔 이군의 미완성 곡이 남아 있다. 지난해 가을 여자친구를 위해 만든 노래였다. 동영상 속의 이군은 나지막히 떨리는 목소리로 2분 남짓 노래했다. “내가 만든 이 노래, 그댈 위해 불러봐요.” 까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통기타를 치는 모습이 제법 가수 같았다.
생전 자작곡
고 박예슬양은 패션디자이너를 꿈꿨다.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마음이 끌렸다. 예슬양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유치원 때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다른 사람의 작품도 섬세하게 관찰하고 따라했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뒷굽 높은 검은 구두(디자인 스케치), 푸른 언덕 위 구름이 흩날린 하늘 아래 하얀 주택(풍경화), 구겨진 2장의 종이 위에 동그란 구슬이 앉아있는 그림(추상화)까지. 예슬양은 따로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다. 열심히 마음에 드는 작품을 연구하고 자신만의 창작을 시도하면서 꿈을 색칠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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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예슬양은 구두·옷 디자인 뿐 아니라 수채화, 사진 등에도 소질을 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장래희망’을 신문기사로 표현해보라는 적성검사에서 예슬양은 이렇게 적었다.
“요즘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유명한 박예슬이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집, 대통령 집,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의 집까지 인테리어를 해줬기 때문에 더 대세다. 세련된 가구 배치와 색상 선택에 따른 리모델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배우 공유와 특별한 친구가 되어서 더욱 유명하다. 내년 5월쯤 결혼에 골인한다는데, 많지 않은 나이에 돈과 명예, 행복과 사랑까지 쟁취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예슬을 본받자.”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지적 호기심이 많고 비판적이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잘 타지만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리고 남에게 잘 해준다’고 적었다.
동그란 뿔테 안경에 귀여운 바가지 머리. 앳된 모습의 김시연양은 영화음악감독을 꿈꿨다. 자작곡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싱어 송 라이터’도 준비했다. 시연양은 기타만 잡으면 허스키한 보이스에 원숙한 가창력을 뽐냈다. 기타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박수현군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자신의 수첩에 ‘하고 싶은 거’라는 제목 아래 25가지 꿈과 계획을 한줄 한줄 적어놨었다. 그걸 아버지 박종대씨가 아들이 숨진 뒤에 발견했다. 살아서 이룰 꿈이 ‘죽기 전 해야 할 일’인 ‘버킷 리스트’가 된 셈이다. 수현군은 ‘재즈피아노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CEO 되기’, ‘세계여행 나 혼자서’, ‘일본어 독학으로 프리토킹’ 같은 미래 계획을 연필로 흐릿하게 적어 놨다. ‘애인 만들기’, ‘몸 만들기’, ‘연예인이랑 결혼하기’, ‘유명한 뮤지션들 싸인받기’ 같은 대목에선 사춘기 남학생 티가 난다. 효심이 깊은 아들은 ‘아빠 수제 기타 만들어 드리기’, ‘부모님 효도 여행 보내드리기’도 빼놓지 않았다. 수현군은 일본 문학을 좋아해 돈을 모아 일본행 비행기 티켓도 살 계획이었다. 아버지 박씨는 “아이의 버킷리스트를 처음 보게 됐을 땐 참 슬펐지만 ‘꽤나 의젓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세르코프 빌라체슬라브는 단원고 친구들 사이에선 ‘슬라바’로 불렸다. 이름이 길어서였다. 빌라체슬라브는 어린 시절 러시아에 살다가 8세 때인 2005년 한국에 들어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국가대표 수영선수를 꿈꿨다. 하지만 이중국적자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중학교 때 수영을 포기했다. 아버지 어모(43)씨는 “선장이 선실에 대기하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수영 잘 하는 아들이 충분히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꿈, 죽어서 현실이 되다
이런 예쁜 꿈들이 세월호에 갇혀 물속에 잠겼다. 하지만 아이들의 꿈은 스러지지 않았다. 이다운군의 미완성 곡은 평소 다운군이 좋아하던 가수 포맨의 신용재씨가 빈 자리에 음표를 그려넣고 가사를 붙여 완성했다. 이군을 기억하기 위해 원곡을 유지하면서 편곡을 했다. 제목은 ‘사랑하는 그대여’. 작곡자는 ‘고 이다운, 신용재’가 됐다. 노랫말은 이렇다. “사랑하는 그대, 오늘 하루도 참 고생했어요..(중략)..힘이 든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만든 내 노래 들어봐요. 오늘도 수고했어요. 사랑하는 그대여.” 신용재씨는 “녹음을 하면서 고 이다운군의 진심이 담겨 있는 노래라고 느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 80일째였던 7월 4일 서울 효자동 서촌갤러리. ‘단원고 2학년 3반 17번 박예슬 전시회’가 열렸다. 패션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꿨던 박양이 유치원생 때부터 참사 이틀 전까지 그려 온 채색화와 드로잉, 일기 등 30여 점이 전시됐다. 박양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전문가가 제작한 구두 2점과 옷, 3D 작품 ‘살고 싶은 집’ 등도 함께다. 이겸비 디자이너는 예슬양이 그린 구두 스케치를 실제 구두로 만들었다. 전시는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가 “나중에 전시회라도 열어주려고 그림을 모아놨다”는 박예슬양 아버지의 인터뷰를 접하면서 먼저 연락해 기획됐다.
가수들도 나섰다. 영화음악감독이 꿈이었던 김시연양이 만들고 부른 노래들은 8월 디지털 음원으로 출시된다. 작곡가 윤일상이 시연양이 30기가 용량의 저장장치에 담아둔 곡을 선별해 디지털 작업에 들어갔다.
박수현군의 25개 버킷리스트(bucket list)에선 ‘작곡하기’와 ‘유명 뮤지션들 사인받기’가 실현됐다. 아버지 박종대씨는 6월 9일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고 박수현이 체험했던 세상’에 아들의 버킷리스트를 올렸다. 그리곤 아들이 좋아하던 가수들을 찾아갔다. 밴드 시나위 리더인 기타리스트 신대철씨가 수현군 노트북 속 자작곡들을 복원하고 있다. 가수 김종서, 김장훈, 봄여름가을겨울, 윤도현, 뮤지컬 배우 조승우씨 등 80여명의 가수들이 수현군에게 친필 사인과 따뜻한 인사를 남겼다.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선생님들은 달랐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자들을 향해 세월호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끝까지 학생들을 구하다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살아 남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했다.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엔 14명의 교사가 동행했다. 이 중 2명만 구조됐다. 12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교사들의 시신은 유달리 발견하기 어려웠다. 사고 한 달여가 지난 5월 20일에 실종자가 단 20명 남아 있을 때 이 중 4명이 단원고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선체 가장 깊은 곳에서 끝까지 버텼기 때문인 듯 했다. 선생님들의 객실은 탈출이 쉬운 5층이었다. 하지만 사고 직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4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대부분 그곳에서 발견됐다.
17일 오전 9시 20분 단원고 2학년 6반 담임선생님 남윤철(35) 교사가 세월호 후미 쪽에서 숨진 채 인양됐다. 남 교사는 사고 순간 선실 비상구 근처에 있었다. 한 걸음만 옆으로 틀면 바깥이었다. 하지만 비상구로 탈출하지 않고 학생들 구조에 나섰다. 배 안에 물이 차오르자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서둘러 갑판으로 올려 보냈다.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걱정마라, 침착해라, 그래야 산다”며 독려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살아서 뭍을 밟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그 순간 119에 최초 신고를 하고 숨진 최덕하군도 그의 제자였다. 남 교사의 도움으로 6반 학생들은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남 교사의 좌우명은 ‘학생들을 사랑하자’였다.
17일 숨진 채 발견된 9반 담임 최혜정(25) 교사는 올해 처음 교편을 잡은 새내기 교사였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것조차 아직 어색하고,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엔 학생들만큼이나 두려웠을 나이지만 그는 천생 선생님이었다. 아이들 10여명을 탈출시키고 끝까지 침몰하는 배에 남았다. 4월 15일 세월호 출항 전 “안개 때문에 출발이 늦어진다”고 메시지를 보낸 게 가족에게 전한 마지막 안부였다.
인성생활부를 담당했던 고창석(40) 교사도 목이 터져라 “먼저 입고 배를 빠져나가라”고 외치며 학생들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건넸다. 5반 담임 이해봉(32) 교사는 난간에 매달린 아이들의 탈출을 돕고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다시 배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했다. 제자들과 함께 실종된 3반 담임 김초원(26) 교사는 사고 당일인 16일이 생일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담임을 맡아 수학여행을 인솔했다. 생일을 맞은 선생님을 위해 반 학생들은 손 편지와 깜짝파티를 준비했었다. 편지에는 “선생님 생신이 수학여행과 같은 건 우연의 일치? 배 위에서 생일을 보내는 건 참 특별한 경험일 거라 기대돼요”라고 적혀 있었다.
교사들의 희생은 또다른 기적으로 이어졌다.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생존한 박호진군은 5살 권모양을 품에 안고 세월호를 빠져나왔다. 권양은 아버지ㆍ어머니ㆍ오빠와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고 있었다. 하지만 침몰 상황에서 4층 어린이방에 홀로 남겨져 쓰러진 자판기에 몸이 깔려 있었다. 호진군은 권양을 다른 승객으로부터 건네 받아 배에서 탈출하며 “받아요. 아기요. 아기”라고 외쳤다.
'아기 구조' 영상
수영선수가 꿈이었던 러시아 다문화가정 친구 ‘슬라브’의 절친이었던 정차웅군은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차웅군은 검도 3단의 유단자로 체육학도를 꿈꾸고 있었다.
세월호 직원 중 박지영(22ㆍ여)ㆍ양대홍(45)ㆍ김기웅(28)ㆍ정현선(28ㆍ여)씨는 이준석 선장과는 달랐다. 끝까지 아이들을 지켰다. 비정규직 사무원이었던 박씨는 세월호 침몰 당시 혼란에 빠진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구조선에 오를 수 있도록 돕다 숨졌다. 구조된 안산 단원고 김모군은 “배가 기울면서 3층 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승무원 누나가 뛰어내리라고 해 바다로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당시 박씨는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한 학생에게 건넸다. 그 학생이 “언니는요?”라고 묻자 “선원은 제일 마지막이야. 나는 너희 다 구하고 나갈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씨는 오전 10시 3분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라고 말했다. “상황이 어떠냐”고 묻는 아내에게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라고 했다. 그게 아내에게 들려준 마지막 목소리였다. 양씨는 세월호 아르바이트생 송모씨와 조리 담당 김모씨를 3층 선원칸에서 구하고 다른 곳으로 승객을 구하러 갔다. 양씨가 돌아온 것은 사고 한달 만인 5월 16일이었다. 그리고 나흘 뒤 침몰 지점에서 18km 떨어진 해상에서 양씨의 사무장 임명장이 그물에 걸려 발견됐다. 임명장에는 “귀하를 본선 세월호 보안담당자로 임명합니다”라는 글씨와 함께 청해진해운 김한식 사장의 직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내 아이 같다” 달려온 민간 잠수부…자원 봉사자들
사고 이후 팽목항에는 “내 아이 같다.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민간잠수사들이 몰렸다. 세월호 실종자 구조 작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이광욱(53)씨도 그랬다. 둘째 아들이 숨진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다. 어머니 장춘자(72)씨는 “사고 현장이 물살이 유난히 센 지역이라는 뉴스를 보고 말렸지만 ‘나 같은 사람이 가야 한다’며 현장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5월 6일 오전 6시 5분쯤 실종자 수색 작업에 첫 투입된 후 의식을 잃었다. 헬기로 목포 한국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5월 30일에도 민간잠수사 1명이 더 숨졌다. 민간잠수사이자 폭파전문가인 이민섭(44)씨였다. 4층 선미 외측 부분 절단 작업 도중 폭발로 인해 변을 당했다. 충격음과 함께 신음소리가 들리자 같이 잠수했던 잠수사와 바지선에서 대기하던 잠수사가 바로 입수해 2시 40분쯤 이씨를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이씨는 당시 코와 눈 등에 출혈이 있었고 의식이 없었다.
잠수사들은 구조ㆍ수색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포항해양경찰서 122구조대 소속 정기태(39) 경사는 “30㎝ 앞도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매트리스 등 장애물을 격실 밖으로 꺼내고 물 위로 올라오면 완전 녹초가 된다. 한 번 잠수하면 24시간을 쉬어야 하지만 12시간 정도 쉬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날마다 죽음과 싸우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빨간 잠수복을 입고 자맥질을 되풀이하는 민간 잠수사 조정현(37)씨는 사고 당일인 4월 16일 한국해양구조협회의 요청을 받고 바로 현장으로 갔다. 이튿날부터 수색작업에 투입돼 5월 25일까지 희생자 30명을 가족들 품에 돌려줬다. 공기호스가 장애물에 걸려 잠깐 숨이 막힌 적도 있다고 했다. 물 속에 들어가면 찾아낸 희생자 얼굴이 환영처럼 나타나는 느낌이 들어 흠칫 놀랄
때도 있었다. 조씨는 빨간 잠수복을 입는 이유에 대해 “딸이 생긴 뒤부터 입었다”며 “만일 잠수했다가 사고를 당하면 발견되기 쉽게 하려고 잠수복에 이름과 전화번호도 적어놨다”고 했다. 아직도 가족들 품에 안기지 못한 희생자들이 남아있다. 이들을 어떻게든 찾아내려는 고된 수색작업이 100일째 이어지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그들을 기억하라
세월호엔 안타까운 죽음, 의로운 죽음, 극적인 생존, 그리고 비겁한 생존이 뒤섞여 있었다. 7월 17일엔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강원119 소속 헬기가 광주 아파트 단지로 떨어져 소방관 5명이 모두 숨졌다.
소방 헬기 도심 추락
세월호 승무원 박지영씨, 김기웅(28ㆍ아르바이트생)씨, 정현선(28ㆍ여ㆍ승무원)씨는 의사자로 인정됐다. 박지영씨의 모교 수원과학대에는 도서관 2층에 ‘박지영 추모홀’이 생겼다. 서울대 미술대학 동아리 ‘미크모(미대 크리스천 모임)’ 회원 30여명은 세월호 사고의 한 피해자에게 박지영씨의 이름으로 성금 200여만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희망편지’를 전달했다.
실종자를 수색하다 사망한 잠수사 이민섭씨,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씨 등은 의사자 심사를 앞두고 있다. 의사자는 보건복지부의 의사상자심사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의사자에 대해서는 보상금, 유족의 의료급여, 자녀의 교육급여 및 취업보호 등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예우를 한다.
아이들을 구하다 숨진 12명의 단원고 교사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추진 중이다. 국가유공자는 의사자 예우에 더해 요양지원, 연수교육, 생업지원, 낮은 이율의 대출 등 지원 범위가 더 넓다.
단원고 학생들은 사고 순간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밝은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들이 생전에 품었던 꿈은 남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남겨진 사람들은 아픔을 치유 중이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단원고 2학년 생존 학생들은 정신과 전문의의 1대1 집중상담과 함께 미술심리치료 등을 받고 있다. 희생자 유족들과 숨진 선후배의 휑한 빈자리를 지켜봐야 하는 단원고 1, 3학년 학생들도 비슷한 치료를 받고 있다. 생존 학생들은 심리치료에서 ‘바다 위로 떨어지는 국화’, ‘앞머리가 잘린 배’, ‘손을 주머니에 감춘 남자’ 등 대부분 부정적이고 우울한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그림은 더 직접적이고 생생했다. 이번 사고로 언니를 잃은 유족 이모양은 “사고 이후 꿈 속에서 성폭행을 반복적으로 당하거나, 저승사자, 낯선 남자가 나타난다”며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누나를 잃은 유족 김모군은 침몰하는 세월호 위에 누나의 우는 얼굴을 그렸다. 미술심리치료 전문가인 김선현 차의과대 미술치료대학원장은 “검은 하늘빛과 사선으로 그어진 연필선이 불안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직접 사고를 겪지 않은 단원고 1학년생도 ‘검은 바다 위에 푸른 눈’을 그려 넣어 슬프고 불안한 감정을 표현했다.
김 원장은 “숨진 가족의 빈 자리를 매일 마주해야 하는 유족들은 물론 단원고 학생과 교사들은 불안감과 우울함에 감정 통로가 막힌 상태”라며 “이들의 상실감을 덜어 줄 지속적인 치료와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거위의 꿈(가제)’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 예정이다. ‘거위의 꿈’은 가수 지망생이던 이보미 학생이 학교 행사에서 부른 노래 제목이다. 사고 1년 뒤인 2015년 4월 16일 전에 개봉하는 것이 목표다.
탐욕으로 얼룩진 세월호에서 선장과 선원들의 파렴치한 이기심, 해경과 관련 당국의 총체적 무능을 뚫고 생존한 아이들은 이제 학교로 돌아왔다.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할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착하고 밝게 살다 너무 일찍 소중한 사람들 곁을 떠나야 했던 친구들. 그 아이들이 하늘나라에서 함께 떠난 선생님들과 근사한 교실을 꾸며 더 이상 아픔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남겨진 사람들의 바람이다.
너를 보낸다 / 권순자
아름다운 목숨들이 꽃처럼 스러져갔구나
기울어져가던 뱃속
차가운 물속에서
간절하던 소원이 신기루처럼 사라져갔구나
사납고 무서운 돈의
노예들이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바다는
양심을 저버린 손들이 넘실대는 바다는
입을 다물었구나
슬픔으로 날마다 철썩대며
바닷가에서 너를 기다린다
한심하고 무력하여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겠구나
네가 웃으며 떠나가야 하는데
울면서 이 땅을 떠날까봐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겠구나
두려움을 떨치고
그리움을 떨치고
아이야, 새로운 세상으로 훨훨 떠나거라
괴롭던 일 잊어버리고
따스하고 편안한 곳에서
즐겁게 지내거라
그리운 아이야
네 아름다운 웃음을 기억하마
너도 나의 밝은 웃음을 기억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