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신대학원 심 상법 교수(신약학)가 도올 김 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교수)의
교육방송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 “철저한 근대주의자의
경전 해석에 다름 아니다”고 비평했습니다.
-
심 교수는 29일 인터뷰에서 도올이 쓴 동양학 저서인 ‘동양학 어떻게 할 것
인가’를 예로 들고, “도올은 그간 철저히 근대주의적 시각에서 책을 써왔다”
고 지적합니다. 심 교수는 도올이 자신의 저서에서 ‘칸트, 헤겔, 로크 등은
다 철저한 근대주의자들이 아니었고 니체만 최대의 근대주의자요 마지막 근대
-
주의자’라고 말하는 등 근대주의에 심취해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과거 도올
의 지도교수까지 도올에 대해 근대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며 “그런 도올이
갑자기 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는데, 과연 그가 중생했는
지 의문이다”고 했습니다.
-
심 교수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 “도덕경을 경전으로 보고 해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경전 비평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어요. 종교 철학자
의 눈으로 경전을 해석하기 때문에 기독교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
하는 것과는 시각 자체부터 다르다는 것 같습니다.
-
심 교수는 또 “도올이 젊을 때 한신대에서 잠시 신학을 했고, 하바드에서도
신학을 왔다갔다 공부한 것 같은데, 신학자들이 보기에는 신학의 초보자에
불과하다”며 신학 해석의 미흡 성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
심 교수는 이어 “도올의 강의로 인해 기독교가 아주 저급하고 미신적이며,
맹목적이고 몽매주의적인 것으로 각인될 가능성이 많다”고 우려하고, “기독교
에서 무 대응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어요.
-
한편, 심 교수는 교육방송에 대해서도 “공영방송에서 종교 경전 해석을
아무런 여과 없이 내보내는 일은 이해 못할 일이다”고 비판하고, “도올을
불렀다면 그 분야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를 불러 전국방송을 내보내야 공정한
것이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
심 상법 교수가 2000년 도올의 동양학 강의에 대해 비평한 글입니다.
동양학 ‘도올’풍에 대한 평가
최근 얼마 동안 김용옥 신드롬과 함께 일어난 동양학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열풍은 tv방송(10-15%)뿐만 아니라 서점 가(인문분야 best seller)를 통해서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70-90년대 초반까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한 것에 비하여 교회(신자)가 사회에 소금과 빛으로서
-
의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도리어 지탄의 대상(?)이 되어오면서 성장이 지체
되거나 둔화되어왔다. 여기에 동양학에 대한 열풍은 한국교회에게 자기성찰과
도전의 기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본 강의는 도올에 의해 던져진 동양학
에 대한 열풍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그의 논평을 중심으로 우리의 젊은이
-
선교가 어떻게 준비되어져야 하고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하는 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동양학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열풍의 이유를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서 몇 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동양학 돌풍의 시대적 배경과 이유
무엇보다도 imf 이후 ‘buy korea'의 기치를 내 걸고 외국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구조조정의 맹렬한 바람이 일고있는 이 시점. 특히 구조조정과 함께
이미 세계화의 돌풍 속에서 민족적 자존심과 자긍심이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
에 우리 것에 대한 신토불이 식 사고로의 회귀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
여겨진다. 외국 것에 의해 우리 것이 점령당하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 것 특히 우리의 민족문화와 종교에 대한 회복과
추구는 한 마디로 민족적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사물놀이며, 판소리, 우리
음식(김치)과 문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동양학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시대적
-
부응이고 요청이기도 하다. 물론 동양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시작은 그 이전
에도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대중문화시대
의 스타들을 찾는 미디어의 세계에 ebs를 통해 소개된 김용옥의 동양학 강의
(56회)는 한편의 tv 드라마처럼 그 동안 우리 것에 대하여 일종의 패배의식에
-
사로잡힌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일순간에 세워준 카타르시스적인 역할(`
정신세계의 공허감 충족 욕구`)을 충분히 하였다고 본다. 특히 우리의 정치와
교육과 경제, 그리고 종교마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시점에
그가 거침없이 뿜어내는 독설(욕설)과 비판과 해학은 그 특유의 카리스마 -
-
박박 깍은 머리와 검은 한복(때론 흰 한복), 그리고 그가 자주 언급하는 학벌
[대만대, 동경대, 하바드대 출신]과 영어, 중국어의 사용 등과 함께 - 를 지닌
연출(기인인 이탁오의 행장을 모방[?])이었다. 이점을 어떤 사람은 그가 “무당
과 같은 신기를 내뿜는다”고 까지 표현하였고 또한 그는 “강단을 무대로
-
전환시키는 ‘확실한 그 무엇’(어떤 사람은 메시지를 강렬하고 극적으로 전달
하는 엔터테이너의 기질로 봄)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아무튼 김용옥 바람
과 더불어 불어 닥친 동양학의 열풍은 21세기 한국기독교에 대한 도전과 자기
성찰의 기회였으며, 복음전파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여야 할 사건임이
-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좁은 지면을 통하여 ‘도올’로 인한 동양학의
열풍에 대하여 몇 가지로 간략하게 답변 또는 제안하고자 한다.
2. 고전에 대한 강해 시대를 열었다: 해석학의 시대
먼저 그의 동양학 강해는 ‘철학의 빈곤화’(이진우)나 ‘철학의 세속화’(이상수),
혹은 ‘철학의 광신적 대중화’(김진석)를 초래하였다는 비평 - 철학자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로서의 그의 모습 때문에 - 을 받지만 김용옥 자신의 주장처럼
‘세속의 철학 화’나 ‘철학의 인간화’로도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대인
-
들에게 어려운 동양(철)학의 고전들을 21세기의 쉬운 언어로 풀어서 강해
하였다는 점은 어려운 고전을 보다 현대적 의미로 번역하고 주석하려는 그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미 그는 동양학에 대한 어문학적 훈련과 서양의
해석학적 안목들을 잘 접목시켜서 그 특유의 파격적 언변(구어체 문장과 직설
-
적/독설 적 표현)과 오늘날의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가미하여 어려운 고전을
보다 대중들이 잘 이해하도록 설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번역 및 강해 기법은
그가 서양의 고전인 ‘성경’에 대한 해석기법들(특히 비평적 해석들)을 잘 활용
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절차탁마 대기만성, 15-25쪽 참조). 또한 그는
-
동양학의 고전을 현대인들에게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문화(영화, 음악, 시, 소설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을 - 비록 천박할 정도
로 거칠고 자화·자찬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 여과 없이 다루고 있는 그의
-
전투적인 진지한(?) 노력은 많은 비평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독교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한 마디로 그의 이러한 작업은 “동양철학을 동시대인들을 향한
메시지와 세계관이 담긴 언어로 재구성[재해석]”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그의 동양학 강해는 우리의 참된 경전(canon)인 성경을 어떻게 21
세기의 한국인의 삶에 보다 의미 있는 책이 되도록 강해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큰 도전이 된다. 정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주신 유일한
계시이기에, 우리는 이 경전을 올바르게 번역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삶의
-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의미 있고 이해하기 쉽게 강해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단지 불상이나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그러한 종교적 열심이나 맹목적인
열광주의나 현세의 축복에만 매달려있는 교회성장 지상주의나 몽매주의적인
영적 은사운동으로 우리의 기독교의 정체성을 표현하거나 구현하기보다는
-
우리의 성경을 궁극적인 인간 구원의 문제와 더불어 역사와 문화와 환경,
그리고 정치와 사회의 문제들까지 실제적이고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마당을
더 많이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경전인
성경을 보다 건전한 해석학적인 틀 위에서 잘 풀어 설명하는 평신도 성경공부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해 본다.
3. 교외에서의 인문학의 부흥
그의 동양학 강해는 동양학 또는 더 크게는 우리의 삶에서 철학적 사유와
사색의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철학의 대중화’
에 기여하였다고 본다. 그 동안 우리사회는 철학적 사유나 분별력 없이 서구의
과학지상주의와 기술자본주의 산업 체제를 수입·활용하는 과정에서 가진 수
-
많은 역기능적인 문제들(경쟁주의/물질주의[비인간화]/환경파괴)에 대한 해결
책으로 그가 제시한 동양학에 대한 관심의 촉구는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잠재력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정신)과 사회와 우주
(환경)에 대한 총체적 사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공부’(쿵푸)에 대한 도올의 정의는 사뭇 흥미롭다.
-
이런 점에서 그의 동양학 강해는 동양학의 고전 자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보다
는 오히려 21세기의 ‘우리’(인간[몸]과 사회와 우주)를 말하려고 한다. 비록
그가 서구철학의 체계나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지나치게 도식화하거나 단순
화시키는 작업(비평)을 하지만 그의 논제는 일상생활에서 철학적/인문학적
-
사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일이었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산업
화의 굴레 속에 살아오면서 너무도 비인간화되고 물질화 되어왔다. 산업화된
고도의 경쟁사회 속에서 살면서 우리의 기독교까지도 지나치게 비인간화, 산업
화, 물질화, 제도화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
들에 대한 치열한 사색(자기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사색 없는 신앙과 헌신의 강요, 사색 없는 찬양과 기도로 어우러진 기독교의
예배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내용 없는 빈 강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 마치 사색과 자기성찰 없이 달려온 우리 사회의 산업화의 병폐처럼
우리의 기독교도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영적 공허와 방황과 좌절을
-
던져주지 않을지 사뭇 염려된다. 특히 그는 동양학 강해를 통하여 - 비록
피상적이거나 깊이가 없긴 하여도 -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화해, 종교 간의
화해, 지식과 삶과의 화해를 기치로 내걸고 동양철학의 고전들(금강경과 노자)
을 풀이하여왔다. 이처럼 그는 21세기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동양(철)학에서
-
찾고 있다(노자와 21세기[1]:21-84). 한 마디로 그는 ‘동양학으로부터 우리
사회와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도올의 이러한
시도는 동양철학만이 우리가 처한 미래의 문제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지나친 자기 확신(일종의 그의 ‘신앙’이기도 함)의 발로이다. 마치 서양문화와
-
서양철학체계 자체가 우리의 문제들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주지 못한다(무용
론?)는 그의 결론은 서양철학에 대한 비평을 너무나 단순화·도식화, 아니 더
나아가 개인화·내면화시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동양철학을 21세기의 모든
문제의 해결사로 제시하는 그의 강해에서 그가 서양철학의 비평적 방법론을
-
철저히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이러한 논증의 허약성을 잘 반증해 준다.
특히 그가 6년(77-82년) 동안 공부하였던 하바드 대학의 철학부와 신학 부는
이미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많은 논의들을 하고 있었다. 이점은 최근
포스터모더니즘을 통해 더욱 강화된 논증으로서 동양철학이 근대문명의
-
안티테제라기보다는 이제는 동·서양의 철학이 서로 보충·보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기술 산업
사회의 병폐(병과 비인간화와 환경파괴)로 인하여 지쳐있는 21세기의 현대인
에게 몸과 공동체와 자연(환경)에 관심을 가진 동양학은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
충분하였다. 아무튼 이 문제는 앞으로 한국의 철학자들 간에도 많은 논의가
있어져야 할 것이다(이점에 대해서는 신동아 2000년 3월호의 박 현의 글을
보라).
4. 근대성과 후기-현대주의의 도전 앞에서 서 있는 우리의 신앙
끝으로 필자는 도올의 동양학 강해에 나타난 종교 - 특히 기독교 - 에 대한
그의 비평이 사랑 어린 훈수(?)의 수준을 넘어서 불신과 적대감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진다. 물론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전반의 역기능
적인 요소에 대한 그의 비평에 대하여 필자 역시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
종교를 한 마디로 악(惡)이라고 규정한 그의 논지(노자와 21세기[1]:47-49)가
단지 수사적 의도나 수사적 과정 법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모난 돌(‘도올’)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소리 지른다(cf. 눅 19:4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자성할 수 있지만 그의 논지 배면에 깔려
있는 무신론적인 주장과 그에 따른 파급효과를 결코 간과 할 수 없다.
비록 그가 자신의 종교성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나는 기독교를 철저히 비판
하는 사람이며 소신 있는 무신론자이다”(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34),
-
“나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우상도 없다”(35)라는 그의 이러한 선언은 자신을
철저히 자연주의자, 인본주의자로 주장하여 소위 하나님을 믿는 것을 우상을
가진 것과 동일시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저히 인간(이성)을 절대화시키는
무신론적 ‘르네상스 맨’(‘인문주의자’로서의 도올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
함재봉의 글[2001]을 보라)이다. 그는 자신의 책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증보판)’에서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 그리고 로크까지도 그들의 사유세계에서
하나님(신의 존재)을 철저히 없애버릴 수 있는 용기 있는 급진주의자들은
아니다(‘불철저한 미신 론 자들’ 혹은 ‘중세철학의 아류’로 표현)라고 피력
-
한다(51-64쪽, 특히 63쪽을 보라). 결국 그는 자신의 기 철학(氣哲學)을 통
하여 서양의 근대주의자들(modernists)보다도 더 근대정신에 충실하려고 한다
(64쪽). 이런 까닭에 그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이 진정한 근대정신
의 양심선언이라고 주장한다(노자와 21세기[1]:50).
-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비평은 철저히 서구의 근대적(비평적) 사고로
부터 - 어쩌면 그는 서구의 근대주의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 피력한다.
결국 그의 눈에는 동양철학이야말로 인간을 ‘우주의 주체’(만물의 주체로서의
개인의 절대성을 주장: 도올은 “신적 질서에 함몰되어버리는 나가 아니라
-
신을 향하여 정정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개체적 나”[55쪽]를 주장한다)로 놓고
사유하는 가장 근대적인 철학체계로 여긴다. 이것이 그의 동양철학강의의 배면
에 깔려있는 논지의 핵심이다. 이점에 있어서 그의 동양철학(특히 기 철학)은
일종의 그의 유신론(종교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그에 따르면
‘예수쟁이 신학자’인)는 그의 동양학 강의를 명백한 무신론적 사고의 표출로
이해한다.
5. 나가면서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적 도전 앞에 직면하고
있다. ‘도올’을 통하여 불고 있는 동양학에 대한 ‘돌풍’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여야 할까? 단순히 피켓을 들고 kbs홀로 찾아가서 국가 공영방송에
대한 그의 강의중단을 요청하는 행동을 하는 일로 우리의 기독교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수립하는 것에 그쳐야 할까?
-
아니면 보다 깊은 사색과 자기반성 속에서 우리의 교회가 참다운 성경적
진리를 추구하고 증거하고 실천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선교 2세기에 접어들은 우리는 지난 1세기의 우리 기독교가
초기의 엄청난 수난(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선진들이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
신앙의 모습들(행동들)을 반추하며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인도 하에서 사색
(자기반성)할 줄 아는 기독교,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기독교의 모습으로 재
무장하여 빛과 소금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능력과 권위를 가진 교회로
변화되어야 함을 다짐해 본다.
-
특히 선교 2세기의 주역들이 되어야 할 젊은이들이 단순히 구호만 외치고
노래만 부르며 몸만 흔드는 맹목적인 열광주의나 현세의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교회성장 지상주의나 몽매주의적인 영적 은사운동으로 기독교의 정체
성을 표현하거나 구현하기보다는 보다 깊은 자성과 사색과 행동을 지닌 기
독교 지도자로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