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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근현대사 160년 톺아보기
☞시작하는 말
거창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주(龍洲) 조경(趙絅, 조경은 7살 때 임진왜란을 만나 서울에서 거창으로 피난 와서 장팔리에 오랫(50년)동안 살았다. 모계 문위의 제자로 대제학, 형조판서, 회양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미수 허목과 더불어 근기 남인의 간판스타였다.)의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침류정에서 읊은 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림의 솔숲 [娥林松林]
교외의 긴 언덕에 나타난 무지개 / 長陂虹偃見郊坰
위에 솔숲 있어 만 그루 나무 푸르구나 / 上有松林萬樹靑
짙푸른 색 승상의 잣나무와 겨룰 만하고 / 黛色可爭丞相柏
구불구불 엉켜있으니 신선의 복령이 나겠구나 / 盤踞宜產赤仙苓
회오리바람 밤에 부니 여윈 교룡이 말하는 듯 / 回風夜颭瘦蛟語
달 밝고 안개 이니 지나던 학이 머문 듯 / 明月煙生過鶴停
홀로 창문 향하여 보아도 싫증나지 않으니 / 獨向軒窓看不足
삼동이라 초목은 모두 시들고 떨어졌다네 / 三冬草木盡凋零
출처 : 娥林松林(龍洲先生遺稿 卷之二 / 七言律詩)
번역 : 1992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장유승 (공역) | 2015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 거창읍 전체가 솔숲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침류정(枕流亭)은 조선시대 거창 관아의 공청(公廳)이었습니다. 병자년(1936) 물난리 때 떠내려가 흔적조차 없었는데, 1992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입니다. 중건기(重建記)를 보면 전 정무장관 김동영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국비 보조를 받아 지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무렵 일본 답사를 할 때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과 술을 한잔하였습니다. 이 양반 왈 “ 돈(예산)대로 지었다”고 해서 내가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침류정 마당에 파리장서비와 이주환의사사적비가 서 있습니다. 파리장서비의 비문을 살펴보면 대표 137명의 명단이 나오는데, 이경균(李景均)이 이명균(李明均)으로 바꿔치기 된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답사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1. 1862년 거창농민항쟁 (거창읍 가지리 개화마을 인민사) - 부패한 봉건왕조와 지방 토호세력의 수탈과 억압에 맞선 거창 농민들의 자발적인 항쟁
1862년 거창 관리들의 부정과 가혹한 수탈에 맞선 거창농민항쟁의 시작은 보릿고개가 한창 심할 때인 3월 21일(2023년 양력 기준으로 5월 10일) 영천장시(瀯川場市)날로 추정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61년 전 이 무렵(5월 14일) 거창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트로트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여러분들께서는 이 노래의 의미를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까지 봄이 되면 춘궁기(春窮期)·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하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배고픈 시기를 보내는 것이 고개를 힘겹게 넘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빗대어 부른 말입니다.
우리가 5월과 6월에는 아직 보리가 제대로 여물지 않아 보리를 수확할 수 없었습니다. 쌀도 보리도 없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허기를 채울 작물을 찾기 위해 들로 산으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칡뿌리나 풀뿌리를 캐서 죽을 쒀서 먹거나, 나무껍질 가운데에서도 주로 소나무 껍질을 많이 먹었습니다. 게다가 진흙까지도 보릿고개의 먹거리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한 변비로 보릿고개 때 항문이 찢어지던 것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시작부터 불결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ㅎㅎ 그렇지만 그때 거창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이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인용하였습니다.
‘거창 160년의 역사’를 둘로 나누어 보면 1862~1945(83년간)과 1945~2023(78년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역사교과서에서 앞의 시기를 근대라 부르고 뒤의 시기를 현대라고 부릅니다.
국어사전에 ‘마실’(근처에 사는 이웃에 놀러 가는 일)이라는 정겨운 우리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4차에 걸쳐서 거창 근현대사의 현장을 ‘마실돌기’하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듯이 우리 거창의 역사를 풀어볼 작정입니다. 거창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배층이 아니라 당연히 ‘민중(民衆)’의 편에 설 것입니다.
거창여고 미술반 학생들이 많이 참여한다고 하는데 격하게 환영합니다. 이번 기회에 거창의 숨은 명소(名所)를 여러분께 소개할까 합니다. 거창에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많아 조선시대 진경산수화가들이 남긴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사선대의 풍경을 그린 ‘송대(松臺)’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김희겸의 안음 송대(일본 동경박물관 소장)
그러나 이곳에도 거창 현대사의 아픈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거창의 역사를 이번 기회에 톺아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역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교과서 속의 거창역사’도 함께 진행하려고 합니다. 거창 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 교과서 내용도 함께 소개할 예정인데, 반응이 좋지 않으면 뺄 수도 있습니다. (공부라는 괴물은 항상 머리 아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ㅎㅎ. 교재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비상교육출판사 발행)입니다.
1번에 관한 교과서 내용을 우선 시범적으로 실어 보았습니다. 참가하는 학생들의 반응을 보아가면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임술 농민 봉기 (교과서 80쪽)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관리들의 부정과 수탈이 계속되면서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가혹한 수탈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소청 운동을 주도하고 몰락한 양반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농민들이 수령이나 지주, 고리대금업자들을 공격하면서 전국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1862년에는 진주에서 몰락 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관아를습격하여 조세 대장을 없애고, 아전과 양반 지주의 집을 불태웠다. 이후 삼남 지방의 70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곧이어 북쪽의 함흥 지역에서부터 남쪽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임술 농민 봉기 이후에도 사회 문제는 여전하였고, 농민들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농민 봉기를 계기로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한층 성장하였고 양반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는 점차 무너져 갔다
2. 19세기 후반 농민봉기의 서막을 알린 변혁 운동- 1870년 이필제의 난(신원면 양지리 율원주막) : 이 내용은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원면지’를 집필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것입니다. 거창 주위의 사람들이 율원주막에서 ‘소고기국밥’ 한 그릇 얻어먹고 진주에 있는 경상우병영으로 끌려가 4차례나 심문을 당하면서 볼기를 맞았던 사건입니다. 일부는 서울까지 끌려가 국문(鞫問)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답사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3. 반봉건 반외세 근대화 운동의 기치를 내건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가조면 석강리 동학의사 전주이공사적비(이익우 일명 이은우), 동학농민군 처형장소인 거창읍 영천 강변 : 지금으로부터 42년 전(1982) 우연히 동학 교도들의 경전인 필사본 『동경대전』을 남하 다리실(月谷) 마을에 사는 학생에게 기증받아 역사수업 부교재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거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교인 신상권이라는 분의 이름이 책 끝에 적혀있었습니다. 이로 보아 거창에도 동학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팔령치를 넘어 안의까지 진출하였다가 관군에게 격퇴된 기록이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 상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무렵 거창의 동학농민군은 거창부사 정관섭이 지휘하는 관군(官軍)과 민보군(民堡軍)에게 체포되어 거창 1교(거창교) 부근에서 처형된 사실이 역사기록에 나옵니다.
4. 일제의 침략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민족적 저항운동, 한말 항일의병
1) 을미 의병(1895년) : 거창 출신 의병장 노응규 의사 사적지(고제면 괘암리)
2) 을사·정미의병(1905년 이후) : 고제면 궁항리 오진사 의병, 북상면 월성·황점 항일의병 사적지 등
3) 1906년 오적암살단원에 참여한 윤충하 의사 묘소 (남하면 양항마을)
: 1907부터 1910년 사이 일제측이 작성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 의하면 거창지역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히 의병투쟁을 벌인 곳이었습니다.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일본 군경과 의병들간의 전투가 40여 차례로 파악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거창에는 1908년 1월 1일자로 경찰분서가 설치되고, 같은 해 7월 20일 경찰서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이 무렵 경상남도에는 부산·울산·마산·진주·진남(통영)·거창 등 6개 지역에 경찰서를 설치하여 항일 의병운동을 탄압하였다고 합니다. 그 현장을 찾아 가북면, 고제면, 북상면 등지를 찾을 예정입니다.
을사오적 암살단에 참여하는 등 한말 주권수호운동에 앞장서다 1924년에 사망한 윤충하 의사의 직계 후손들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에 만주로 이주해 지금은 조선족이 되어 중국에 살고 있습니다.
을미의병의 의병장 노응규의사는 고제면 괘암리에서 태어나 안의로 이주했지만, 한때 거창에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안의에서는 2008년 19억 2천만 원을 들여 노응규 의사의 생가를 복원하여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창에는 노응규 의사가 지은 비석 하나가 고제댐 부근에 외로이 남아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익현이 쓴 ‘개항기 항일의병장 신암 노응규(愼菴 盧應奎)’를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5. 거창의 근대시설
1) 거창 최초의 신식 교육 기관 창남의숙(남하면 양항마을 심소정)
2) 근대의료박물관(거창읍 구 자생의원)
3) 거창 정장리 서양식 가옥(거창읍 정장리 최남식 가옥)
이동항(李東沆)이 지은 『방장유록(方丈遊錄)』에 나오는 남하 살목 심소정(心穌亭)의 풍경입니다. 심소정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찾던 명소입니다.
“경술년(1790년, 정조 15년) 4월 초6일.
살피현(薩皮峴)을 넘어 석간정(石澗亭)에 이르렀다. 햇살이 뜨거워 땀이 나서 옷이 젖고, 정신과 기운이 노곤하여졌다. 사원(士源)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잠시 잠을 잔 뒤에 실항의 사직(士直) 윤억(尹檍)의 집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심소정(心穌亭)으로 가니, 정자는 영계(瀯溪)의 북쪽 언덕의 비탈진 낭떠러지 위에 있었다.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널찍한 큰 들판이 있었고, 부성(府城)의 많은 마을들과 흐릿한 안개 속 나무숲, 수많은 먼 푸르스름한 산봉우리들이 각각 기묘한 경치를 뽐내고 있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거창 읍내를 내려다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거창의 근대시설에 대한 해설은 거창박물관 학예사님들이 상세히 해 주실 것입니다.
6. 일제 식민지 무단통치에 항거한 거창 3·1운동
1) 1919년 1월 이주환, 윤봉의 의사 자결(거창읍 상림리 침류정, 주상면 연교리 성암사, 남하면 둔마리 안흥 흥의재)
2) 가조·가북· 위천 지역 3·1운동의 현장(가조면 장기리·석강리, 남하면 둔마리, 위천면 장기리)
이곳 침류정은 연호(連湖) 이주환(李柱煥) 순국열사가 일제의 국권 침탈에 결연히 항거하여 목숨을 바친 곳입니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보편적 인간 정서이다. 그러나 연호는 보편적 인간 정서에 정면으로 대항하듯 도끼(자귀)로 자신의 목을 수차례나 찍고 입안의 핏줄을 손으로 더듬어 끊으며 자기 죽음을 재촉하였다. 그가 이토록 충격적이고 처절한 죽음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00년대 초부터 국권 상실과 일본에 저항하는 수십 명의 애국 열사들의 순국과 희생이 있었지만, 여전히 현실 문제에 무지한 민중과 이기적인 관료들은 각성하지 않았다. 이들을 각성시키고 격동시키기 위해 재야의 사인(士人)으로 연호가 할 수 있는 처절한 노력이 이와 같은 핏빛 가득한 자기희생으로 나타났다.···· 金英珠(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국역 『연호유고(連湖遺稿)』 해제(解題)에서 인용.
앞으로 거창 3·1운동의 현장을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7. 한국 독립을 청원한 1919년 파리장서 운동
- 거창읍 상림리 파리장서비, 유림의 독립운동을 이끈 곽종석의 집터(가북면 다전마을), 면우 곽종석 전시관(옛 가북 중촌초등학교 터)
이 부분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가북 다전마을에서 면우 곽종석과 파리장서운동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8. 일제강점기 항일 의사들의 활동
1) 군정서 의용병 및 자금모금사건 주남고·주남수 의사 묘소(거창읍 개봉마을)
2) 항일 학생운동을 주동한 전사옥 지사 가묘(가북면 해평리 달밭마을)
3) 의열단 단원 신병항 의사의 집터, 묘소터 (거창읍 정장리 국농소)
4) 1927년 신간회 거창 지회 창립에 참여한 사람들(거창전통시장 주차장)
어제 사전 답사차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의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신병항 의사의 집을 찾아갔는데 새로 길이 나서 집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쉬운 대로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내하는 소개 글은 조익현이 지어보도록 하겠습니다.ㅎㅎ
9.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강제 징용의 흔적들
- 거창읍 신사터(충혼탑 일원),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의 집터(고제면 농산리)
· 일제는 지금의 충혼탑 부근에 신사를 세워 거창의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1940년경 위천공립심상소학교(현재 위천초등학교) 학생들이 거창읍 신사에 참배하고 계단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0. 1942년 신원초등 항일동맹휴교사건
- 신원면 과정리 신원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항일동맹휴학의거비’
1942년 10월 10일 신원초등학교 5·6학년 학생(57명)들이 일제의 식민지 민족 말살 교육에 항의하여 동맹 휴교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당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비상전시체제를 가동하던 일제(日帝)에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주동자 5명을 거창경찰서로 연행하여 11일 동안 미결수 감방에 구금까지 시켰던 것으로 보아 일제는 이 사건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위의 글은 조익현이 집필한 『신원면지』의 한 부분입니다. 이 사건에도 한국현대사의 아픈 사연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1. 민족의 비극, 6·25 전쟁 전후
1) 1948년 5·8사건, 10월 위천·북상지서 피습사건, 1949년 8·23 사건
- 거창읍, 위천·북상면, 거창읍 거창군청
2) 국민보도연맹 사건
- 거창경찰서 유치장(현 적십자병원), 상업은행 창고(현 국민은행 거창지점), 양조장 창고(현 농합중앙회 거창군지회 맞은 편), 학살현장(합천군 봉산면 권빈재)
3) 6·25 전쟁 전적지
- 신원면, 북상면 일원
4)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 신원면 일원(청연마을, 신원초등학교, 박산골, 탄량골, 합동묘소, 거창사건 추모공원)
전쟁이 남긴 상처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일어난 6·25전쟁은 거창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습니다. 미군 폭격기의 공중포격으로 거창읍 전체가 잿더미가 된 아래의 사진은 그때의 참상을 한 마디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 읍사무소(1950년경) 전쟁으로 부서진 읍사무소와 그 주변
『사진으로 보는 거창의 옛 모습』에서 퍼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