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뭘까?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은 아이의 성장과정 중에 어른들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에 대해 혼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회의 룰을 하나씩 배워가게 되면서, 거짓말은 나쁜 것이고 너의 변명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눈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듣게 되는 것 같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인지, 아니면 알고 있으니 진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모호한 것 같다. 왜 어른들은 직접 꾸짖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잘못한 것을 바로잡길 바라는 걸까?
지금도 이러한 상(賞)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착한 어린이 상’이라는 것이 필자가 국민학생일 때 있었다. 선의를 베푼 행동에 대해 댓가를 주는 형태였던 것 같다. 착한일의 범주는 상당했지만, 그때는 그래도 명확하게 공식처럼 여겨지는 행동들이 있었다. 상을 받는 아이의 행동은 뻔한 것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옮긴 아이이기에 상을 받게 되는 것으로, 정말 타의 귀감이 되는 상징적인 아이가 되었다. 이처럼 필자가 어렸을 때 배운 것은 “선의”를 갖고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많아지도록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늘 교육받았던 것 같다. 그때의 모범생은 정말 모범이 되는 아이들로, 소수의 모범생이 학교의 분위기를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던 때였다.
자신이 행하는 수많은 행동 중에, 무의미한 행동은 적을 것이다. 특히 관계 속에서 행하는 행동에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뜻이 포함된 즉, 의도된 행동이 대부분일 것이다. 근래에 필자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서 새로운 하나의 기준을 갖게 되었다. 타인들의 행동에 대해 의도된 행동과 의도조차 없는 행동으로 구분하게 되면서, 결국 악의가 없다지만 선의가 없는 행동에 대해서 꽤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선의가 없는 행동은 악의 없는 행동보다도 더욱 나쁜 것 같다. 말그대로 폭력적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애초에 배려하려는 것 자체가 선의 있는 행동이라면, 배려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수용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행동이 바로 악의없는 행동이다. 악의를 갖고 행하는 것은 상대들이 충분히 바로 인지하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악의적인 행동에 대해 우리는 참고 참아주다가 결국 ‘이유’를 묻는다. “왜 그러냐”고 말이다. 그런데 악의도 없지만 결코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아무런 의도도 없는 행동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혹여 이유를 물어도 들을 수 있는 답변이 없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너무나 예쁘다. 햇살 또한 좋다. 이 길을 운전하며 가고 있다. 그런데 제한속도 80인 도로에서 차 속도가 60이 안 되고 있다. ‘길이 밀리나, 사고가 났나’ 여러 생각이 오고가는데 커브길에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앞에서 차 한 대가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차를 세우고 달려가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할까? 80으로 가고 싶은 나를 괴롭히려고 느릿느릿 운전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뒤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다른 운전자에 대해 아무런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두 번째 예로, 차간 거리 유지하며 운전을 잘하고 있다. 혹 꼬리물기가 될까 염려하며 신호를 잘 따라가고 있는데 옆에서 깜빡이를 켜곤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결국 브레이크를 아예 밟고 서게 되었다. 깜빡이 켜고 들어온 차는 유유히 신호를 받고 갔다. 그 차만 아니었다면 브레이크 밟을 일 없이 그대로 통과했을 텐데 말이다. 그 깜빡이를 켠 차는 주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없이 깜빡이를 켰다며 당당히 들어와선 재빠르게 그 차선의 흐름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양보해준 차가 브레이크를 밟게 만들더니 결국 얌체같이 보이게 자신만이 신호를 따라 유유히 가버린 상황인 것이다. 일부러 그랬겠냐 만은, 그 양보해준 운전자는 약이 올랐을까? 그냥 덤덤했을까? 바로 이것이다. 악의가 없지만 선의조차 없는 행동은 타인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선의를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악의 없는 행동을 골라서 하는 사람은 있다. 악의만 빼면 되기 때문이다. ‘널 괴롭히려고 그런게 아냐. 상황이 그런 거야. 네가 이해해주렴.’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성교육 현장에서 사람 보는 연습을 한 때는 시켰다. 바로 관계 정리를 통해서 말이다. 아는 사람의 범주, 낯선 사람의 범주를 정열하며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은 ‘악의’있는 사람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하지만 재차 이야기 하지만, 우린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의도를 가지고 만든’ 상황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상황. 이를 위기로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함을 우리는 가르치고 있다. 악의를 드러내면 우린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악의는 없는’ 그렇지만 ‘선의’가 빠진 행동은 쉽게 알아채기가 어렵다. 악의 없는 행동이지만 선의가 빠진 행동을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 입에서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를 듣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 같다. 어른들 입에서도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하며 악의 없는 행동을 정당화 하는데, 무책임한 발언이 된다고 본다. 서로의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 ‘선의’를 갖추어 서로에게 모범이 되어야 겠다.<행가래로 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