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가 주는 진정한 축복
2007년 2월 최영수 소장
따뜻한 경칩을 맞으며 이제 봄이 왔구나 방심하는 허를 찌르듯이, 매서운 북풍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더니 제법 눈이 쌓였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았음을 얘기하듯 그 쌓인 눈은 씩 웃는 듯이 보였다. 흰 눈이 쌓인 것을 바라 보느라니 올해 초에 내린 서설(瑞雪)을 보고 느꼈던 진한 감동이 문득 되살아난다.
내게는 순수를 옷 삼아 입고 사는 친구가 하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말하며 실천하는 그녀를 언제나 놀라워하며 부러운 마음에 나는 일 년에 한 두 번은 그녀 집에 들러 그녀만의 알뜰하고 멋스런 소품 하나하나를 시샘하며 비아냥스런 소리를 해대도 그녀는 내게 수줍음을 타는 18세 소녀 같은 마음을 보인다. 그조차 마냥 부러워 나의 이죽거림을 이어가게 하는 그런 친구다.
그런데 정말 부럽고도 고마운 일이 일어났다. 그 친구 아들이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 결혼식 내용은 신랑 신부 예단은 생략하고… 그 자식을 그만큼 키운 값만 해도 엄청난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바리바리 실어 보내야만 안심이 되고 부모역할을 다 한 듯 여기는 세상인데---. 신랑엄마 한복은 언니네 잔치 때 입은 옷을 잠시 빌려 입고 신랑아버지도 제일 깨끗한 양복을 입고…알뜰함의 극치다. 사실 한복은 입으면 예쁜 줄은 알지만 하루입자고 돈을 쓰기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카톨릭 신자답게 성당에서 하는데, 그것도 아들며느리 편한 성당에서 한다며 부모들이 먼 길을 이동하고…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여겨진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자식들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결혼식들이 부모의 부와 권위를 표하는데 아낌없음을 익히 보아왔기에,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신선한 발상에 상쾌한 느낌도 일었다. 그 날 희끗희끗한 머리도 염색을 안하고프다며 내 의견을 묻기에 나도 너랑 같다며 동의를 하였다. 더욱 따뜻한 것은, 성당에 다니지 않는 나를 배려하여 너를 아는 사람은 큰 언니 뿐인데 길도 먼데 되도록 오지 말라는 부탁의 말이었다. 결혼식이 토요일이었고 성교육이 있는 날이어서 혹시 참석이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혼식 전날 그녀 집을 방문하여 미리 축하하였다. 역시나 그 날 결혼식에 못 갔고 아침에 못 간다는 연락도 못하였다. 결혼식 준비로 바쁜 그녀에게 아침부터 못 간다는 말부터 듣게 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온 천지가 하얗게 눈이 왔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oo야! 하늘도 엄청 축복을 주는구나. 너네 부부 닮은꼴로 네 자식들도 똑같이 정말 행복하겠다. 정말 축하한다. 이 눈을 봐” 라는 소리를 외쳐대었다. 그 친구는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자녀에게 주었다는 기쁨에 그리고 마치 나는 그 축복을 만져본 사람인양 들뜬 하루였다. 지금 이 순간도 그날의 감동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친구는 그 아들을,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며 공고를 보냈다. 직업도 여전히 손으로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단다. 자신들은 일류대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딸은 학원을 안 보내어도 공부를 잘 하여 일류대를 나온 재원임) 아들이 원하는 대로 보내는 자존감 있는 부모와 자녀이기에, 자식의 출세가 부모의 훈장이 되는 세상의 평균적 잣대도 비켜가는 당연함이 내게는 고마움으로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이마만큼이나 나는 세상의 때가 묻어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를 떠올리기만 해도 순수의 세상에 갈 수 있는 복을 누린다. 그 복으로 나도 내 자녀들을 그렇게 결혼시키고 싶다. 자랑이 아닌, 허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만남과 축복으로- <행가래로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