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미산(鳳尾山) 신륵사(神勒寺)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신륵사 창건 및 연혁
신륵사는 많은 유물와 유적을 간직하고 있지만, 절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이 없다. 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조형물도 모두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성보다.
미륵보살 또는 나옹스님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기에 ‘신륵’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는 고려 고종(1213∼1259)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다. 이때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절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다.
나옹스님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고 입적(入寂)하면서 대찰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스님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1469년(예종 1)] 광주 대모산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되면서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가 있었다.
신륵사 돌아보기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있다. 뒤로는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흐른다.
강변의 너른 마당을 지나면 왼쪽에 구룡루가 있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이다. 구룡루 맞은편에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구름과 용무늬가 아름다운 다층석탑, 양옆으로 선방인 선각당(禪覺堂), 고려 시대 이후 시인 묵객들이 묵어가며 자연을 노래했던 적묵당(寂黙堂)이 있다. 극락보전 왼쪽으로 조사당이 있고,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옹선사 석종부도와 부도비, 석등이 있다.
구룡루 앞 오른쪽 언덕에는 다층전탑과 대장각비가 있다. 그리고 강가에는 나옹선사의 다비장에 세운 삼층석탑, 나옹선사의 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이 있다.
1. 극락보전
고려 말 우왕 5년(1379)에 중창되었고, 세종 22년(1440)에 중수되었던 극락보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극락보전은 정조 21년(1797)부터 3년에 걸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고,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스님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다르게 보인다.
2. 다층석탑(보물)
이 탑은 영릉(세종대왕릉)의 이장과 함께 원찰로 삼고 중창하였던 성종 3년(1472)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본다. 대리석으로 된 높이 3m의 다층석탑이다. 상층 기단 면석에는 신라나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비룡문, 연화문, 물결무늬, 구름무늬 등의 조각되었다. 석탑에 비룡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예다.
3. 조사당(보물)
금당 왼편 뒤쪽에 있다.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스님, 좌우에 지공(指空)스님과 무학(無學)스님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대들보가 없는 팔작지붕으로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다. 조사당 바로 앞에는 늘 푸른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며 심었다고 한다.
4.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조사당 뒤 북쪽의 낮은 언덕에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있다. 그리고 석등과 석종비도 함께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만들었다.
종을 닮았으므로 석종부도라 불린다.
-나옹스님에 대하여-
고려시대 스님으로 이름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 법명은 혜근(慧勤), 당호는 강월헌(江月軒), 속성은 아(牙)다. 고려 공민왕 때 왕사였다.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어른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곡덕산 묘적암에 가서 요연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요연스님이 나옹스님에게 물었다.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 나옹스님이 말하였다.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요연스님이 말하였다.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 스님은 그곳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원나라 북경에서 지공선사를 뵙고 깨달은 바가 있었고, 2년 동안 공부하였다. 다시 사방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찾은 뒤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스님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전해 받았다. 지공스님, 무학스님과 함께 3대 화상이라 한다. 공민왕이 청하여 내전에서 법요를 듣고, 신광사에 있게 하였다. 1371년 왕사가 되고, 대조계선교도총섭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뒤에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2년) 왕명을 받아 밀양의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57세로 법랍 38년이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5.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보제존자 석종부도 바로 뒤편에 서 있다. 석종부도를 조성하고 묘역을 가꾼 무렵인 고려 우왕 5년(1379)에 건립하였다.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로 시작되는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서예가로 이름 높은 한수(韓脩)가 썼다.
보제존자비는 양주 회암사터에도 있다.
6. 부도 앞 석등(보물)
보제존자 부도 앞에 놓여 있다. 부도의 주인에게 등불 공양을 올리는 공양구이며, 부도를 장엄하게 하기 위한 장식이기도 하다. 재료는 역시 화강석인데 유독 화사석만은 납석을 사용하였다. 화사석에는 하늘을 나는 용을 새겨 매우 이채롭고 화려하다.
7. 대장각기비(보물)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가늠하는 중요한 사료 중 하나가 금석문이다. 보제존자 석종비와 대장각기비가 그것이다. 이곡(李穀)이 대장각 짓기를 발원하였고, 이곡의 아들 이색이 그 원을 성취하였다. 나옹선사 석종비보다 4년 늦은 1383년에 세워진 대장각기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썼다.
대장각비는 현재 동쪽 언덕에 위치한다. 원래 신륵사에는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지금의 명부전 부근이 아닐까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서 있는 이곳의 비도 원위치가 아닐 수 있다.
8. 다층전탑(보물)
신륵사는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경내 동남쪽에 위치한 다층전탑에서 연유한다. 이 탑은 강가에 솟은 넓은 바위 위에 있다.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전탑이다. 우뚝 솟은 이 전탑을 보고 절을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탑 북쪽에 수리비(修理碑)가 있는데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입(崇禎紀元之再丙午中秋日立)’이라는 기록이 조선 영조 2년(1726)에 세워졌음을 일러준다. 이때 탑을 수리하고 비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