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벗어난다는 건 내 맘처럼 되는게 아니었다.
난 여전히 과거의 나에게 원망이 있다.
과거의 부모님에게도 원망이 있으며, 이 찌꺼기같은 감정들은 내 머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틈만 나면 나를 괴롭힌다.
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떨어질 때까지 떨어져서 가망도 없고,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도 무섭고, 이렇게 작아진 내 모습이 미련하고 한편으로는 사라질까봐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나는 세상에 나서 이십대까지는 큰 변동 없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누렸다.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그게 뭔지조차 몰랐지만.
태어나서 아주 어릴때조차 난 찌질해본 적이 없었고, 발달도 빠르고 말도 빠르고 또 재간도 있어서 그냥 온 동네 온 식구들의 애정을 듬뿍듬뿍 받았다. 또 자기 인생을 바꿔줄 한줄기 빛이라 믿은 아버지 덕에 그 파동은 더더욱 커졌고..결국 난 객관적으로 나를 보기보다 세상에 의해 부풀려진 나를 나로 믿고 그렇게 기본 프로그래밍이 된 것이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영특하지라도 않았다면, 그런 환상이 덜 생겼든 생기지 않았든 했을까? 내가 방황하기 딱 좋은 이런저런 환경들이 맞물려 지금의 내가 생성됐다.
난 내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다. 적어도 대단한 일을 해낼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에헴~하고 다녔다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믿음이 생긴 것 같다. 자아가 만들어지는 어린 시기에 너무나도 떠받들어지듯 컸으니까..나의 적절한 세상속 위치도 모르고. 그것들이 가족들 사이에선 별 문제가 되지 않으나ㅡ왜냐면 가족 내에선 그렇게 떠받들어졌으니ㅡ사회에 나가게 되면 큰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대해주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난 왜인지를 알 수 없어서 내 잘못이라 생각해 과하게 자기비난을 하거나 혹은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격이 막 모나지는 않아서 가만히 있어도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어주었고, 사회적인면은 떨어져도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알아서, 또 나름대로 공부머리는 있어서 무난히 대학도 가고, 취업은 또 남들보다 빠르게 대기업에서 첫 스타트를 했다.
실패라는것이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유지가 되질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를 전혀 모른 채 사내에서 내부적으로 계속 부딪혔으며,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은채로 자진 퇴사했고, 한 2년을 방황했다. 그러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같은 직종에 대기업계열사로 다시 재입사했다. 이번엔 전에 배운게 있어서 그 전보단 훨씬 나았다. 하던일인데 신입으로 재입사했으니 난 단박에 능력좋은 경력신입의 타이틀이 있었고, 회사에서도 기회를 주려고 이런저런 제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2년정도 되자 새로운 업무를 해야 되는 시기가 왔고, 또 제안들도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 기대 이하로 해내지 못하는걸 보면서 회사의 애정도 점점 멀어졌다. 입사할땐 나보다 업무능력이 훨씬 떨어졌던 동기가 나보다 진급이 빨라졌다.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노력하지 않았다. 노력까지 했는데도 안된다고 하면 자존심이 견디질 못할 것 같았겠지..ㅎㅎ
난 결국 또다시 퇴사했다.
명목으로는 더 나이들기 전에 내가 하고싶던 일을 하겠다는 야망스러운 것을 걸고.
그리고 결국엔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내지 못했던것이고, 나의 크고 작은 실패라든가 내가 불리해진다거나 약점이 드러난다거나 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튕겨져 나온거구나 하고 인정하기까지 대략 5년이 걸렸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 후 그런 과거의 나에 대해 엄청난 내부비난을 벗삼아 하루하루를 연명해왔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연명이었다.
내가 좀 더 유연했더라면, 내가 좀 더 스스로를 잘 알았다면, 혹은 현실을 좀 알았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렇게 뻣뻣하며 또 그렇게 바보같은 선택들을 한 걸까, 그 모든것들을 겪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왜 못한걸까,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걸까 등등...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과 자책으로 하루하루를 살찌웠다.
이전에 벌어놓은 돈마저 다 쓰고 이제 진짜 땡전한푼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고 비난한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해, 왜 그랬을까, 나는 진짜 멍청하고 순진하구나...
장애물 하나 없이 승승장구하던 내가 저 하늘 구름 위에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너무 작아짐을 느끼고, 위축감이 심했다. 그에 반동으로 자존심은 더 강해졌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무시하지 마라! 하는 극악의 발악일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거에 내가 성취했던 그것들은, 성취했다고 믿었던 그것들은 원래도 내것이 아니었던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를 원래의 나보다 훨씬 부풀려서 만들어낸 허상속에서 있었던 일들이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지반이 약해지는 순간 무너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시절 내가 조금이라도 더 깨달았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수도 있지만 이미 손 쓸 수 없는 과거이다.
분명 좋은 기회들을 날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로써 겪은 것들이 아니고, 약간 꿈을 꾼 것 같으니.
사실 진짜 나는 시작도 안했다.
서른 다섯에 이런 말이 난 아직도 좀 부끄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사실이다.
남들이 봤을땐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안다. 내가 내부적으로 어떤것들을 겪어왔는지..그 혼란..그 두려움..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 어떤것도 성장과정에서 건너 뛸 수 있는 과정은 없다는 걸.
빠르게 훅 차고 올라가는것, 그게 결코 좋은 게 아니란 걸.
모든 일에는 숙성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난 여전히 호시탐탐 다시 차고 올라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올라가게 되는 날, 나를 무시한 모두에게 복수하리라! 싶은 마음?
그런데 이건..아직도 내가 진정으로 뭐가 나에게 필요한건지를 모르는 태도같다.
다시 올라간다고 한다면 이전의,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말인데. 이것은 결코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외부를 의식한 복수극에 불과하며, 그렇다면 그 이후 난 또 목표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되겠지.
그게 아니고..
그냥 누가 뭐라든 묵묵히 해보면 안될까?
사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을거다 아마. 혼자 머릿속에서 세상과 싸우는거지..
이 '작아진' 나를 경험하는게 나에게는 그다지도 어렵고 피하고싶고 있을수 없는 일인가보다. 하지만 알지 않나, 이 작아진 나로부터 모든것이 비롯되어야 한다.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과정을 스킵하려 하면 안된다. 조급증은 내 인생을 파멸시킬거다.
지난번 시간에 상담선생님이 과거의 상황을 원망하는 나를 보고, 자기가 볼 땐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러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것같다. 난 아직도 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작은 나에 대해서..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나의 상황에 대하여..
난 늘 유능하고 빛나야 했으니까.
솔직히 좋을건 없다. 힘들고, 정신이 이제 포화상태다. 혼자서 견뎌내는것도 너무 벅차다. 하지만 이제는 이 '작은 나'를 받아들여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전의 것들이 다 내가 누리다 추락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쌓은 것들이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 것들을 쌓아가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는 이런저런 풍파(?)같은 것들이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이 거대하고 진하게 느껴지는 감정들도 되풀이 될수록 옅어질것임을 안다.
나는 이제 작은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나의 삶을 안정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