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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의 건강법
자세한 내용, 장동민 한의사와
살펴보겠습니다.
(전화연결 - 인사 나누기)
Q1. 오늘은 조선 시대 3대 임금인 태종에 대해 살펴보죠.
태종은 어떤 임금이었나요?
조선이라는 나라를 연 임금은 태조였지만, 조선을 제대로 자리 잡게 한 임금은 역시 태종 이방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를 세운 창업 군주에게는 ‘태조’라는 시호가 주어지고, 기반과 틀을 다진 왕에게는 ‘태종’이라는 시호가 주어진 건데요.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결국 왕위를 차지한 불굴의 집념을 가진 임금이었죠. 절대 권력에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다음 왕위를 맏아들인 양녕대군에게 넘기지 않고 세종에게 넘긴 이유도 이러한 권력의지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버지도 여러 여자를 취하면서, 왜 나는 여러 여자를 취하면 안 되느냐?’고 항의한 문건이 제일 강력하게 작용했었기 때문인지라, 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또한 태종은 실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에도 4년간이나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는데,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여 계속 권력을 행사하는데도, 세종은 이에 군소리 않고 순순히 따라서 태종의 뜻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Q2. 그렇다면 혹시 태종이 의학적으로도
기반을 다진 것들이 있나요?
네, 태종의 왕권다지기는 정말 가차 없었는데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방해될 형제들을 제거시킨 것뿐만 아니라, 왕위에 오르자 그러한 자신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해준 공신과 부하들마저 구실을 대서 모두 숙청합니다. 심지어 처가와 외가 그리고 나아가 며느리 집안까지 몰살시켜서 왕권에 위해가 될 소지를 모두 다 잘라버립니다.
반면에 의학적으로는 이바지한 바가 있습니다. 태종 6년 3월 16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어린 여자아이에게 의약(醫藥)을 가르치게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는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 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장금이’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비롯된 건데요. 소위 ‘의녀’ 제도가 여기서부터 비롯된 겁니다.
Q3. 태종이 다져놓은 의학적 기반으로 또, 어떤 게 있나요?
네, 그 당시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태종이 의료 인력을 늘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태종 9년 2월 7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의원 수가 부족하다 보니, 대소 병인(大小病人)을 일일이 치료할 수 없어서, 병이 깊어져 치료하기 어렵게 되어 일찍 죽는 자가 많아서 대책을 강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의사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도 실력에 따라 환자를 치료하게끔 배려하여 벼슬을 주게끔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함부로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은 위험하죠. 정식 시험을 거치지 않고 진료를 하게 하는 것은, 자칫 소위 돌팔이를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당시에도 무조건 의사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낮은 직책을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시험을 통해 정식 관리가 되게끔 했습니다.
태종은 또, 실제 특정 의서를 공부하게끔 하거나 중국에서 동인을 들여와 국내 한의사들에게 공부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Q4. 그런데 태종이 이렇게 의료 인력이나 실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사실 태종은 어의가 잘못 침을 놓거나 약을 써서 부작용을 일으켰던 적이 몇 번 있어, 의사들의 학문과 실력을 증진시키는 것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 임금이 병이 있어 약을 먹게 되면 신하가 먼저 이를 맛보고, 아비가 병이 있어 약을 먹으면 아들이 이를 맛보는 것은, 임금과 아비를 중히 여겨서 의약을 삼가는 까닭”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다시 말해 임금이 약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신하가 그 약을 사전 점검한다는 뜻입니다. 밥을 먹는 수라상에서도 기미상궁이 음식을 먼저 맛보았다고 하니, 옛날에는 당연히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종 6년 1월 5일에, 이러한 절차를 위반해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제 기록을 보면, 태종이 어의들이 조제한 상표초원(桑螵蛸元)이라는 한약을 먹고 구토하고 정신이 황홀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당연히 약물에 중독된 현상이었습니다. 태종이 바로 당직한 신하들로 하여금 먹어 보게 하였더니, 마찬가지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Q5. 상표초원이 어떤 약이죠?
태종이 복용했던 상표초원은 ‘소변이 뜨물과 같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누며, 심신이 어지럽고 초췌함’을 치료하는 처방인데, 원인은 과도한 성생활 때문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처방에 구성된 약재들은 거의 대부분 포구하는 수치법제가 적용되어 있는데요. 소금물로 찌는 것도 있으며, 생강즙을 물들게 해서 찌고 말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이나 식초로 굽거나 볶는 약재들도 있는데, 모두 각각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표초는 뽕나무에 붙어 있는 사마귀의 알집을 이야기하는데, 비뇨생식 계통을 강화시키는 효능이 있어, 소변을 너무 자주 보거나 정액이나 소변 등이 저절로 새는 증상에 응용되는 약재입니다. 하지만 불에 구워 쓰지 않으면 설사 등의 부작용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요. 상표초가 상표초원에 구성될 때는 소금물로 쪄서 사용하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어의들이 이러한 수치법제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부작용이 생긴 것 같습니다.
Q6. 태종이 약을 먹고 이렇게 부작용이 컸으니..
신하들이 어의를 가만 두지 않았겠는데요?
당연히 사헌부에서 관련 어의들과 신하들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어의들이 어약(御藥)을 조제하면서 포구(炮灸)하는 절차를 잃어서 드디어 성체(聖體)를 평안치 못하게 하였으니, 불경하고 불충한 죄가 큽니다. 특히 먼저 맛보는 도리를 잃었으니, 또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포구’라 함은, 한약을 조제하기 전에, 한약재를 수치법제 가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일반적으로 한약 처방은 적게는 한 가지부터 많게는 수십 가지의 한약재들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이 때 사용되는 한약재들은 그냥 날것으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몇 가지의 가공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러한 가공을 ‘수치 법제’라고 하는데, 한약재들은 이를 통해 독성이 줄어들기도 하고 약효가 증폭되기도 합니다.
Q7. 그런가하면, 태종은 왕비가 출산할 때 겪는 난산을 막기 위해
특별한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고요?
네 맞습니다. 태종 12년 6월 23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왕비가 해산(解産)을 하자 왕이 신하들에게 포상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임금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중궁(中宮)이 매양 난산(難産)하는 병이 있어서 내가 걱정하였더니, 이제 경 등이 성의 있게 약을 공급함에 힘입어서 근심이 없으니, 내가 심히 기뻐한다.”라고 얘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는 왕비가 임신하여 출산할 때 마다 각종 질병으로 어렵게 출산하여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미리 한약을 먹어 무사히 순산(順産)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Q8. 아무래도 임신과 출산이 왕의 후사를 잇는 일이라,
왕실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것 같아요?
옛날 왕실에 있어 임신과 출산은, 왕의 후사를 잇는 아주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매우 철저하게 관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동의보감>을 보면, 임신 중에 나타나는 각종 증상에 맞춰 치료하는 처방이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임신 개월 수에 맞춰 몸을 관리하는 처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위험한 난산을 방지하고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처방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요. 대한민국의 현대 여성들은 정부가 지급하는 ‘행복카드’를 통해, 집 주변 가까운 한의원에서 옛날 왕비가 받던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행복한 일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Q9. 그럼, 정작 태종 스스로의 건강상태는 어땠나요?
이렇게 의료 기술이나 인력에 관심이 많으면..
본인 건강도 잘 관리했을 것 같은데요?
네, 사실 태종은 그렇게 건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왕조실록>에 나타나는 태종의 질병 기록을 보면, 종기, 풍질, 안질, 이질, 견비통, 상지냉통, 역절풍, 항강증 등의 수많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직접적인 사망의 원인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태종이 56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아들인 세종과 며칠 간 사냥 갔다 오던 날 밤에 열이 몹시 올라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이후 8일간 앓다가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그 때의 상황을 추측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Q10. 왕조실록에 기록된
그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일단 태종 사망 당시의 모습을 잠깐 보겠습니다. 세종 4년 4월 22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태종이 세종과 더불어 매사냥을 하고 돌아온 후에, 태종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세종이 급히 찾아와 간호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사실 태종은 책만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는 아들 세종의 건강을 걱정해서 수시로 함께 사냥을 다닙니다. 실제 정종이 살아 있을 때는 세 명의 전 현직 임금이 함께 나란히 사냥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태종의 병세가 워낙 심해서 24일에는 세종이 태종의 병을 간호하느라 외교행사에 참석치 못했고, 25일부터는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습니다. 26일에는 죄인을 석방하고 추방했던 양녕대군을 불러 간호하게 합니다. 급기야 5월 1일에는 점을 치고, 2일에는 전국의 사형수 이하 죄인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지만, 결국 5월 10일에 태종은 사망합니다.
Q11. 태종이 평소 지병을 앓고 있었나요?
원래 태종이 평소에 풍질(風疾)을 앓았었다고 하는데요. 일반적으로 풍질은 가벼운 감기를 의미할 때도 있고, 심각한 중풍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아들과 사냥을 나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설령 중풍이었다 하더라도 후유장애가 심하지 않거나, 아예 중풍이 아닌 다른 풍질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냥을 갔다 온 이후에 갑자기 고열이 나타나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급성 감염성 질환이 사망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실제 편도선염과 같은 상기도 감염이나 인플루엔자나 등의 바이러스감염은 고열을 일으키므로, 사인이 감염성 열병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고 하겠지요.
몇 년 전에 ‘사스’나 ‘신종 플루’ 그리고 작년부터 유행한 코로나19와 같은 감염성 질환으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보다 설득력이 높아진다고 하겠습니다.
Q12. 바이러스감염이 고열을 일으킨다고 하셨는데요.
보통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올려놓거나
심할 경우엔 얼음 욕조에 몸을 담그기도 하는데요.
혹시 한의약적으로 열을 떨어뜨리는 다른 방법이 있나요?
네 물론 열이 심할 때는, 열을 내리는 한약 치료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차가운 성질의 것으로 열을 식히는 치료만 하지는 않습니다. 일례로 경락에 침치료를 하거나 자락 출혈을 시켜서 열을 내리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따뜻한 성질의 약이나 치료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요, 목이 붓고 열이 날 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어 식히기도 하지만, 따뜻한 차나 물을 머금어 완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체질과 증상에 따라 열을 내리는 치료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장동민 한의사와 함께
태종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