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파 여행8 - 월호 고려사관 옛터에서 조선선비 최부의 표해록을 회상하고 천일각에!
10월 17일 닝보(영파) 지하철로 와이탄 대교 外滩大橋(외탄대교) 역에 내려 상해보다 앞서
서양 조계지인 라오와이탄 老外滩 (노외탄) 을 보고 걸어서 다리를 건너 천일광장 을
구경한 후에 다시 지하철을 타고 구러우(古樓) 역에 내려 걸어서 月湖(월호) 에 도착 합니다.
월호 입구에 홍수로 물이 불어나는걸 확인하던 水厠碑(수측비) 를 보고는 인근에 宝奎苗
(보규모)를 찾아 건물 마당에 선 ‘고려사관유지(高麗使館遺址)’ 표지석을 보는데 옛날
닝보(寧波 영파) 를 찾았던 고려 사신들과 상인 들이 묵었던 영빈관 이 서 있었던 곳입니다.
高丽使馆(고려사관) 내 고려와 교류 및 실크로드 관련 자료가 있으니 LG 에서 옛 유적지에
새로 만들었는데, 그 안에 명주청과 고려청 이 있다지만 어두운데다 호수 서쪽에 자리한
티엔이커 (天一阁 천일각) 의 입장시간 마감 이 가까운지라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나옵니다.
그러고는 내를 따라 걸어내려가니 바로 웨후콩위엔 月湖公园 (월호공원 : 문레이크
Moon Lake ) 인데.... 여긴 좀 고풍스러운데 비해 또 다른 곳에 日湖公园
(선 레이크 Sun Lake) 은 모던 하다는데.... 이 두 공원 이름 日(일) 과
月(월) 을 합치면 明(명) 이 되니 영파의 옛 이름인 明州(명주) 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다르게는 호수가 달처럼 생겨서 月湖公(월호공원) 으로 명명되었다고도 하는데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호수 서쪽에는 왕안스 王安石(왕안석) 가 현령 으로 재직중
세운 시팅 (西亭 서정) 등 여러 정자 들이 모두 명승고적 이라....... 한번 볼만하다고 합니다.
호수 건너편에 홍예교 를 보는데 주위에는 고층 선물들이 둘러싼게 눈에 거슬립니다만
눈을 아래로 뜨면 호숫가 길이 여러 무늬를 새긴 바닥돌로 인해.......
아기자기한데 홍예교를 지나니 정자에서 음악소리 와 어울려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좀 더 다가가서 보니...... 정자가 선 마당에서 전축 을 틀어놓고 스무쌍 쯤 되는 남녀가 블루스
춤을 추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러고는 호숫가를 따라 걷는데 조금전 宝奎苗(보규모)를 찾아 건물의 마당에 선 ‘고려사관
유지 (高麗使館遺址)’ 표지석을 보았던 때문인지.... 문득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 구법순례기 와 더불어 중국 3대 기행문 이라는 1488년 영파 남쪽인
태주부 임해현 우두외양에 표류한 조선 선비 최부(崔溥) 의 표해록 (漂海錄)을 떠올립니다.
세계는 양복을 입고 자동차를 타며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서구문명 하에 살지만
명나라 시대만 해도 4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종이, 인쇄술과 화약 을 발명한 중국 이
앞섰건만 서양은 대항해시대 신대륙을 발견 하고 산업혁명을 통해 아시아를 앞질렀습니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 이라...... 단 한번도 외국을 침략하여 정벌한 일도 없고 유교에서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身體髮膚受之父母)” 라고 해서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물론
몸을 상해 부모님께 걱정끼치는걸 불효 로 생각하니 해외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1895년 서울에 올라온 선비가 갑오개혁 단발령 으로 머키카락이 잘리자 불효라 목매죽기도
했으니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 하거나 무역 하러 가는일도 없었지만 조난사고를
당해 중국에 표류한 기록 은 있으니, 전에는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 있을 뿐입니다.
최부(崔溥) 는 조선 성종때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하였다가 1488년 정월 부친상 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오던중 태풍을 만나 표류 하게 되었으니 43명 일행들은 배를 띄운
최부를 원망하며.... 초조감과 절망으로 사색이 되어 기도 를 올려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야 한다면서 최부에게도 함께 기도할 것을 권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 합니다.
선비로서 유교 이치에 닿지 않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천신만고
끝에 왜구 를 방어하는 임무를 띈 중국 해안 관리(수군) 들에게 발견되니 이들도
여차하면 해적으로 돌변하는 자들이니... 뱃사람들이 최부에게 상복 대신 관복 으로
갈아입어 의젓한 자세를 보여주자는 요청을 하지만 그것도 예에 어긋난다고 거절 합니다.
그는 예교(禮敎) 을 지켰으니 오랜 시일 표류가 계속되면서 식수와 식량이 떨어져 허기와
갈증으로 시달리는 와중에도 빗물을 받아 목을 축이고, 남아 있는 약간의 청주와 제주
감귤을 한쪽씩 나누어 먹는등 질서를 잃지 않았으며 무인도에 도착하였을때 뱃사람
들로 하여금 묽은 죽을 쑤어먹도록 하면서..... 허기진 배에 과식하지 않도록 이끌었습니다.
14일간의 표류 끝에 영파 남쪽 해안 에 도달하여 왜구로 오인 받았을 때나 왜구의 혐의가
풀린뒤 관헌을 접하게 되었을 때도 최부는 관인으로서의 의연한 언행으로 일관했으니
중국 고전(古典) 에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관인들의 경탄을 이끌어 냈을뿐 아니라...
관헌의 행위가 법도에 어긋날 때는 그들을 상대로 논쟁 을 벌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44명이 탄 배가 표류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14일간의 표류 끝에 천신만고로 절강성 영파
연해에 표착하였는데 두차례나 해적 을 만나 짐을 뺏기고 모진 매질을 당하며 죽음 의
순간을 여러차레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탈출 하나 다시 왜구로 오인 되어 고초를 겪습니다.
2차례 해적 에게서 간신히 벗어나 왜구가 아니냐는 의심에서 풀려 북경으로 호송되는데
명나라 관인의 호송 을 받게되어 절강성 도저소에서 출발하여 영파부 에 이르자 강을
막아 축조된 성이 보이는데 2중 해자와 홍문과 쇠빗장 에 삼엄한 경계 태세 에 놀랍니다.
절동 지역은 천태산과 보타산을 비롯하여 불교 가 번성한 곳인데 상륙해 왕을원을 만났을때
"조선에도 불교가 있느냐" 는 질문을 받자 최부는 "우리나라에는 불법을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유학) 만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효제충신 으로서 업을 삼는다" 고 잘라 말합니다.
최부가 표착한 강남(江南) 지방에 신라와 고려의 사신과 상인, 승려 들의 족적이
있으니 항주 팔반령에 의천 대각국사 와 관련이 있는 고려사(高麗寺) 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은 고려인이 세운 것으로 지금 우리 조선과는 무관한
것" 이라고 하여 애써 외면하니..... "불교를 미신" 으로 보고 애써 배척한 것 입니다.
그러면서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친데 대해서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하여 죽은
까닭으로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오." 라고 자부심 을
보였으니 그럼..... "고려는 남의 나라" 이고 "고구려는 선조의 나라" 라는 뜻일러나?
영파 에서 소흥을 거쳐 운하를 따라 항주· 소주를 지나 양저우에 도착한후 계속 북상해
산동· 천진을 거쳐 북경 에 도착하여 명나라 황제 효종 (孝宗)을 알현하였으며....
서울에 도착한 최부 는 왕명에 6개월간의 중국 견문을 일기체 기행문 으로 저술해 바칩니다.
그런후에야 최부는 부의로 포 50필과 마필 을 지급받아 나주로 내려가 부친상 을 치르는중
상중에 다시 모친상 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니 "만 4년간 부모상" 을 치르게 됩니다.
마침내 1491년 서울로 상경해 성종 으로 부터 사헌부 지평 에 제수되었으나 사간원
에서 한달이 넘도록 동의해 주지 않아 부임하지 못하는데...... 중국에서
돌아와 상주된 몸 으로 견문기 를 쓴 것이 "명교(名敎) 에 어긋나는 행위" 였다나요?
몇년전에 최부가 표착했던 영파 남쪽 영해현 월계촌 에는 현지 행정당국과 최씨
문중의 협조로 “최부표류사적비 (崔溥漂流事迹碑)” 가 세워졌으며 영파시
박물관 에도 그 유적이 있다지만... 시간이 모자라 찾아보지 못하는게 아쉽습니다.
“표해록(漂海錄)” 은 기요다 군칸 이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주자학자 야먀자키 간사이
는 "지금 중국에서 공자와 맹자가 장수 가 되어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온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 가운데 공맹을 배우는 자 라도 마땅히 무장하고 나가 싸워서는 그들을
붙잡아 나라의 은혜에 보답 해야 한다. 이것이 공맹의 도" 라고 했다나요....
아마도 조선인 이라면 숭앙하는 성현 인지라 싸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서남해에서 동중국해 연해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해로 는 겨울에는 한국
에서 중국으로, 여름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계절풍이 불고 조류 가 흐르니...
신라와 고려가 이 해로로 무역 했거늘 유학자 최부 는 무역에는 전혀 관심이 없네요?
표해록 외에 1757년에 이지항 이 부산에서 표류하여 왜의 북해도- 대판- 대마도를
통해 부산으로 귀국한 후 표주록 을 남겼으며 또 1771년 장한철 도
제주에서 표류하여 유구- 청산도를 거쳐 제주로 귀한한후 표해록 을 저술하였습니다.
1797년 이방익 이 제주에서 표류하여 복건성- 북경- 요동을 거쳐 귀국한 후에는
표해가 를 남겼으며 그외에도 1805년 문순득 은 우이도에서 표류하여 유구-
여송- 마카오- 북경을 거치는 표해록 을 기록했으며 최두찬 은 승사록 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뜻하지 않게 바다에서 표류한 적은 많았지만 조선 500년간 무역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조선인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제 천일각 으로 가야 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털고 벤치에서
일어나 내려가니 호수를 떠다니는 유선부두 가 나오고 테이블에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계속 내려가다 보니 이쯤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야 천일각 이 나오지 싶어 물어
보니 한 블록만 더 내려 가랍니다. 드디어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호수를
벗어나 큰 대로 로 접어드는데 그러고도 좀 더 계속해서 걸으니 높은 담 이 나옵니다.
이게 바로 "천일각 天一阁" 이지만 입구는 계속 걸어서 반대편 모서리
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라.... 5분을 걸어서 드디어 입구 를 만납니다.
중국 저장성 浙江省(절강성) 영파시 宁波市 웨호 月湖(월호) 옆에 있는 장서각 (藏書閣) 인
티엔이커 (天一阁 천일각) 는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인 1561년 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명나라 병부우시랑 (兵部右侍郞) 을 지낸 범흠 (范欽 판친) 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소장한 책들을 보관 하기 위하여 지은 장서각 을 티엔이커 (天一阁 천일각) 라고 부릅니다.
장서각은 벽돌과 목조 구조의 2층 건물이며 경산식 지붕으로 천일각이라는 명칭 은 역경(易經)
의 '천일이 물을 낳고 지육이 그것을 이룬다 (天一生水, 地六成之)' 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장서각(藏書閣) 의 가장 큰 적은 화재 인지라..... 불과 상극인 "물의 힘" 을 빌려
화재 로 부터 귀한 "장서들을 보호하려는 바람" 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티엔이커 (天一阁 천일각) 는 "세계 3대 개인 서재" 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장서각 이라는데, 닝보(영파) 의 상징인 벽화 며 건물들이 참으로
고풍스러우며...... 내부의 벽과 문의 장식이며 세공 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첫댓글 영파의 월호공원 잘보앗습니다.
중국은 4대발명품 나침반,종이,인쇄술,화약은 서양보다 먼저 만들엇으나
신대륙발견,산업혁명으로 서양에 뒤졋군요.
최부표류기는 저도 예전에 라디오에선가 어디에서 한번들엇습니다.
제주도에서 출발해서 중국을 여기저기 거쳐서 고생고생해서 서울로 돌아오셧더군요.
영파 월호공원 볼만한 곳입니다!
언제 다시 갈 날이 있을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