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세계적인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이 책은 20세기 언어학 최고의 명저로 꼽힌다. 사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16년에 그의 제자들의 스승의 강의 노트를 편집, 재구성한 것이다. 소쉬르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외하면 생전에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강의 노트를 잘게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습관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이 소쉬르 자신의 언어학 이론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논란이 이어지기도 했다.
소쉬르가 활동한 19세기 언어학 연구의 흐름은 이른바 비교역사문법, 그러니까 언어의 기원, 성장, 변화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입으로 말하는 말, 즉 구어보다는 문헌에 적혀 있는 말, 즉 문어가 주요 연구 대상이었으며,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소쉬르는 본래 부모의 권유로 제네바 대학에 입학, 물리학, 화학을 전공으로 택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음을 발견하고 1년 만에, 비교역사언어학 연구로 이름이 높은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이 대학 재학 중이던 21세 때 '인도-유럽어의 원시 모음체계에 대한 연구'를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80년 이후 파리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24세 때인 1881년에 소쉬르는 소르본 대학에서 고트어, 고독일어 전임강사가 되었다. 1891년에 소쉬르는 여러 대학의 교수직 제의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07년부터 제네바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강의'를 시작했다. 1907년 1월부터 6개월, 1908년 11월부터 7개월, 1910년 10월부터 8개월,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반언어학 강의는 수강생이 6∼12명에 불과했지만, 그는 이 강의를 통해 현대언어학, 기호학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생각들을 발표했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 차원을 지닌다. 장기에 견주어 말하면, 장기의 규칙이 랑그이고 장기를 두는 행위가 빠롤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랑그는 언어 능력이고 빠롤은 실제의 음성 언어 행위, 즉 말을 하는 행위가 된다. 당연히 랑그, 즉 장기의 규칙은 빠롤, 즉 실제로 장기를 둠으로써만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빠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무척 다양하다. 예를 들어 경상도 사람과 충청도 사람, 서기 2000년을 사는 우리와 고려 시대 사람의 빠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장기의 규칙은 같지만 실제의 장기판, 장기말의 재질은 다르기 마련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쉬르는 따라서 빠롤은 언어학의 진정한 연구 영역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장기의 차, 포 등의 말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차, 포 등의 말이 어떤 규칙에 따라 다른 말들과 연관을 맺고 움직이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소쉬르는 또한 언어 기호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같은 대상을 놓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개라고 말하고 미국 사람들은 dog라고 말한다. 결국 개, dog 등의 언어 기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또는 말의 소리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을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한다. 언어란 결국 하나의 사회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이루는 자의적 음성기호의 체계이다.
이러한 소쉬르의 생각에 따르면, 언어 기호는 하나의 이름에 하나의 대상을 연결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음성을 결합하는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머리 속에 두 개의 사전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소리사전이고 하나는 개념사전이다.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두 사전을 결합시키게 된다. 이때 소리사전을 기표(시니피앙signifiant), 개념사전을 기의(시니피에signifie)라고 한다.
소쉬르는 언어연구의 방법론에서 공시적 연구와 통시적 연구를 구분했는데 전자는 일정 시점에서 언어의 상태와 구조를 연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언어의 발달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이 상호 보완적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연구 영역이라고 보았다. 소쉬르 이전의 언어학자들은 랑그보다는 빠롤, 공시적 연구보다는 통시적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 포함되어 있는 이런 생각들은 모든 언어 요소가 언어 기호의 큰 틀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즉 어떤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견해로 집약되었다. 개별적인 언어 요소나 현상을 단편적으로 연구하는데 그치고 있었던 언어학은 소쉬르로 인해 비로소 언어의 전체적인 구조, 언어의 본질 등을 문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의 언어학을 특히 구조언어학이라고도 부르며,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을 현대언어학이라는 말로 부를 정도로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지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