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예술인들- 화실주변 제6회.
自殺 해프닝
장윤우(시인,미술가, 성신여대 교수 월간문학발행인)
“아무개(가명)교수님을 찾는데요”
말쑥한 20대 숙녀가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런 분은 여기에 안계십니다”
“아니, 이 연구실에 꼭 계시다던데요”
모습까지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출강 강사가운데서도 그런 분은 안계시다. <아하! 또 당한 케이스로구나>
어디 이런 일들이 한두번 뿐인가
염치도 모르고 흐느껴우는 아릿다운 여인의 딱한 그 모습을 츠근히 바라다 보면서 문듯 교수를 사칭했다가 쇠고랑을 찬 어는 월부 책장수를 생각했다. 교수직도 유명대열에 끼이는가. 멋모르고 당해버린 경우가 적지 않을 것같다.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모대학 야간강사로 출강하는 날에는 공연히 마음이 들뜬다. 염불보다도 잿밥에 마음이 있다는게 바로 우리의 또하나의 일과라고나 할까.
미술과 외래강사 4인방-임영방(전서울대교수),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 안상철화백, 장발인 백발에 어울리게 흰 넥타이만을 고집하던 정린 서양화가, 나- 한결같이 사랑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술” 술이다.
같은 날 저녁에 강의를 넣고 끝나기가 바쁘게 성북동 삼선교 대폿집으로 달려간다. 거기에는 나이든 여학생들도 간혹 합석하게 된다, 이미 초등학교선생이거나 은행같은 곳의 어였한 직장인, 성인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7교시 강의가 더 유익하며 재미있다고 깔깔거린다. 당시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기에 집에 갈 시간을 잘 ??춰야 된다.
자유분방한 방담(放談)에 허겁지겁 술잔을 돌리고 입안에 퍼 넣다싶히 마셔대고는 각자 집 방향으로 튄다. 어쩌다 통금에 걸려 여관방 신세를 지는 경우도 있었다만-.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임박사와는 지금은 소원(疎遠)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안화백, 정린화백은 지금도 간간히 떠오른다 여관방에서 함께 통금해제시간을 기다리던 기억까지-
아직도 나는 술잔을 입에서 떼지 못한체 살아가고 있다.
일본 동경시내의 어느 전람회장. 일본 동경 신주꾸 어느 화랑(畵廊)에서 개인전시를 갖는 어느 젊은 화가는 오픈(개막 Open)시간대에 ??춰 부근 고층빌딩 지붕 옥상(屋上)으로 올라갔다. 축하객들이 궁굼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주인공은 아래로 몸을 날렸다. 일순( 一瞬),
밑에서는 동료들이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서 그의 자살을 받쳐준다.
주인공은 즉사하고 주인공의 몸에서 터져 낭자하게 퍼진 핏자국- 자신의 몸을 바쳐 영원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짓-즉 자살회화 해프닝이었다. 그래서 자살회화(自殺繪畵)란 용어가 나왔다.
일본전문미술잡지 <미술수첩>의 영향이 화단 일각에 막강하여 한국 젊은 추상회화 작가들치고 모른 이가 없었다. 자살은 유명예술인사의 특권인가 일본의 노오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川瑞康成)는 엄청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개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한다. 젊음의 우상(偶像)이었던 미시마유끼오(三島由紀夫)도 군중앞에서 활복자살(自殺)하였다. 아구다가와(芥川)문학상 제정의 장본인도 천재적 재능을 폭포속으로 던져 버렸다. <태양은 또다시 떠 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벨문학상 수상작 <바다와 노인>을 집필한 미국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쿠바의 호텔에서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물론 육체파 여배우 마리린 몬로도 수면제복용으로 조용히 이승을 하직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많은 작가들이 아깝게도 자살을 택함으로 인생의 막을 내렸으니- 한일 왕복여객선인 관부연락선에서 현해탄으로 몸을 던진 여류화가 나혜석,
피난지 부산의 다방안에서 페노발비탈을 입에 털어넣고 객사(客死)하는 전봉래는 바로 현대시학 주간인 전봉건 시인과 형제지간이다. 자기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광주의 서양화가 오승윤, 조각가 권진규는 고독감에 못이겨 자신의 작품전체를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한 뒤에 성북동 아뜨리에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다. 천재는 그렇게 가야하는가.
정강자 무체전(無體展)이라는 전람회초대장을 받았다. 나와 꼭같은 중앙공보관 전시 옆방에서 연다는 것이다, 실내 불을 끈체 벌거벗고 어둠속에서 여주인공과 엉키는 전시개막장에서의 해프닝이 빚어졌다. 문을 닫고 도대체 무얼하기에 이리도 고요할까 의아하여 문을 밀치고 들어선 직원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다. 벌거벗은 이들을 당장에 걷어치우라고 소리지르며 전시허가를 취소 시켜버렸다. 지금같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실로 대단한 이벤트요 해프닝이었다.
그녀는 유명가수 남일해의 여동생으로 홍익대 미술과를 나온 화제의 인물이다,
또 한가지, 홍대 졸업장에서의 해프닝-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 입시(入試)장에서의 끔찍한 현장, 대구에서 올라온 응시생의 끔찍한 행위- 대구지방대 출신이라서 합격자신이 없었던지 엉뚱한 해프닝을 벌린다, 자해(自害)행위미술을 보여주었다. 실기수험장 안에서 자신의 왼손가락 매디를 잘라서 캔바스에 붙였다. 갑자기 피가 튀기고 여수험생들은 기겁한체 밖으로 뛰쳐 나갔다. 당시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이두식 성신여대 강사(현 홍익대 미술대학장)가 우리에게 들려준 해프닝이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관(棺)을 메고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간다. 그들은 곧 근처 파출소로 연행되고 즉결심판(卽審)으로 넘겨졌다.
역시 엄숙한 홍대 졸업장에서 돌연 한 졸업생이 졸업까운을 입은체 쓸어진다.
“죽었다~” 웅성거리는 속에서 그를 들쳐업고 나가는 사이에, 어느 지점에선가 이를 망원렌즈로 열심히 촬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졸업생과 축하객들은 모두 엑스트라가 되버렸다.
어느날,
신문사 데스크의 전화 벨이 울린다, 모월 모시(某時) 한강 어디에서 일이 벌어진다는 전갈이다. 카메라를 들쳐맨 기자들이 부산히 뛰어간 현장에는 백사장위에 목만 내놓고 온몸을 파묻은 젊은 하가가 이를 에워싼 체 춤을 추며 돌아가는 무언가 주문(呪文)소리에 묻혀간다. 이러한 일련의 군상(群像)과 미술의 이단적 행위- 이게 바로 70년대 우리 미술계의 단편(斷片)이었다.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허기야 백남준은 뉴욕에서 피아노를 파괴하고 전신을 묶고 객석으로 뛰여나가서 관객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며 와이샤츠를 찢는다. 망가진 텔레비전 12대로 세계뉴스의 초점을 받는 때이다. 싸이키델릭 아트, 키네틱 아트, 아트, 보디 페인팅, 反음악등에서 광적(狂的?)으로 전진(前進)하는 것이 대마초, 마리화나, LSD, 환각상태에서 구릅섹스 파티까지.........
<抽象은 예술이 아니다>
동아일보에 동양화가 이열모씨가 그무렵 쓴 글이 한국전위화단과 비구상(非具象) 계열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널판자를 나란히 벽에 세워 놓고 <작품***>이라 한다던지, 큰 그릇에 물을 가득히 부어놓고 그위로 신문지 한 장을 띄워 놓은 것이나 사랑방의 묵은 장지문짝을 한 개 걸어놓고 전시장안 바닥에 큰 유리를 깔아놓아 지나가는 관객들의 발에 치여 부서지는 그것이 바로 작품(안상철作)이며 엄숙히 감상하는 이런 것들이 진정한 미술의 모습이며 이들이 진정한 美의 사제(司祭)들인가, 미술대학에 첫 입학한 학생들이 기본적인 뎃상이나 기초이론은 무시하고 입은 의상부터가 울긋불굿 요상스럽다. 하여튼 당시 쟁쟁한 전위(前衛), 박서보사단(師團)은 난리가 났다. 일제히 포문(砲門)을 열었다. 정통산수화의 중견인 이화백은 바로 나와 같은 대광중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하였는데 한동안 대단히 홍역을 치렀다. 한국의 피카소라는 박서보,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재임중인 하종현,서승현,최명영같은 홍익계 교수와 문하생들이 압도하는 당시 화단풍토였었다.
덕수궁안에 자릴잡았던 중앙공보관에 내 개인전시장에 이른 아침부터 나타난 천상병시인의 한마디-경복궁 미술관에서 지금 오는 길인데 도대체 작품같은 출품작들이 없어 실망하였다면서 “침을 칵 배앝아주었다”면서 시익, 식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이승조의 서양화 파이프(Pipe)만이 눈에 가장 띄였다는 천시인과는 내가 부산에서 개인시화전을 열었던 시절부터 인연이 깊었다.
그가 말년에 인사동에서 죽음의 병색(病色)이 짙어 걷지도 못하는 모습을 본 안쓰러움이 되살아난다.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천당가는 길에 무슨 노자돈이 필요하냐- 자주 들리는 인사동 어귀에 새겨진 그의 시구절이 새롭다.
나의 음주운전면허(飮酒免許)획득에 얽힌 사연을 듣고자하는 동료들이 많다는데 놀랐다.(월간 현대시학 연재 100회기념특집 자료/ 장윤우시인)
늦깎기로 면허증을 얻거나 따야할텐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피해(?)다녔다. 그런데 같은 대학 조소과 노재승교수가 느닷없이 정문앞으로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나가자고 재촉한다. 무슨 일인가 나가보니 험상궂은 어느 청년인데 아주 낡고 헌 포니차를 몰고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노재승교수가 이청년에게 차운전 개인교습을 받아왔고 연수까지 끝낸 후에는 나에게 무조건 인계해버리는 일이었다. 별수없이 그에게 강제로끌려 인공폭포 뒤의 한강백사장으로 갔다. 소위 나까마운전사의 개인교습이 비롯된 것이다. 이론도 체계도 없이 백사장등으로 무작정으로 끌려다니며 망신도 당하면서 결국 면허시험장까지 진행되었다.
당시 한남동에 유일한 작은 운전시험장에서는 컴퓨터작동은 전혀 들도 보지도 못하고 운전 보조석에는 정복의 순경이 호랑이처럼 버티고 겁을 잔뜩 주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오죽하면 판,검사들조차 호랑이 순경의 불호령에 오금을 못쓰며 벌써 열몇번째나 실기시험에서 떨어져 불만을 터뜨리는 기사가 자주 신문에 오르고 있던 터였다. 두번이나 실기시험에서 떨어진 나는 누가 그런 조언을 했는지 모르지만 묘한 꾀를 내었다.
술- 술을 한잔 들고 취기에 수험장에 나간다는 기막힌 계획이었다.
그날 아침에는 마침 날씨가 궂고 빗방울도 약간 뿌리는 것이 호기(豪氣)를 북돋아주었다 한두어잔 술에 비까지 뿌려주는 터인지라 옆에 순경이 버티고 앉거나 말거나 간(肝)땡이가 부어 내 기분대로 낡은 시험장차를 몰았다. 이게 왠일이니?
합격! 드디여 합격을 하였다!
이런 해프닝이 있은 뒤에 나또한 다음 주자(走者)를 바로 구하여 인계하고 말았다, 지긋지긋한 추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가 출강하던 대학 강국진(작고 서양화가, 한성대교수)에게 짐을 벗어 던지고만 그 음주운전 면허증도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기나 보다.
(*자료 월간 현대시학 76,6월호 필자가 그린 안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