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누리와 시어머니 /조현숙/주부/
시어머님 산소를 찾았다. 추석 날까지 계속된 큰 비로 당일에는 성묘를 못하고 다가오는 어머니 기일에 찾아뵙기로 했는데 남편은 그때까지 기다리기가 퍽이나 어려운 모양이다. 담배 한대를 태워 어머님 앞에 놓자 할머니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작은 애가 쫑알거렸다.
“아빠는, 할머니 담배 땜에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살아 생전 무척이나 즐기시던 담배, 날 사랑하셨던 생전 모습이 그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추억하면 그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만, 같이 한 세월이 짧았던 아쉬움 탓일까, 연애시절부터 무시로 드나들 때에도 마다 한번 안하시고 기꺼이 내밀어 주시던 따뜻한 손길 때문일까. 좋았던 모습이 기억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너무나 부지런하고 정간해서 일에 서툴고 천성이 게으른 나는 시어머니 그런 점이 버겁고 싫은 적이 많았다. 또 손이 너무 커서 때때마다 남는 음식, 식은 밥이 며느리들 차지가 되는 것도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입을 삐죽인 적도 많았다.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신 지 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먹는 것에 포원이 졌냐는 소릴 들어가면서도 넘치도록 밥을 해 하루가 멀다하고 식은 밥을 만들기 일쑤고 어머니처럼 젓가락에 행주를 말아 홈 속의 먼지를 파내느라 무릎이 시리다.
그런 것보다도 내가 정말 시어머니를 추억할 때 미소가 떠오르고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자식에 대한 더없는 관대함이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 눈에는 잘하는 것보다 허물이 더 먼저 보이고 그때마다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그러다 문득 시어머니가 떠오르면 부끄러운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식들이 실없는 소리나 앞뒤가 맞지않는 소리를 할 때 우리 어머니처럼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하고 그렇게 열심히 자식말에 맞장구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 생각으로는 너무나 비논리적인 말을 해대서 `최고학부를 나왔다는 사람들이 어쩌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일까' 속으로 한심해 할 때에도 우리 어머니는 손뼉까지 치면서 자식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다.
어머니의 그런 너그럽고 낙천적인 관대함이 자식들 다섯명을 누구하나 모나지 않고 바른 품성으로 자라게 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배움의 길고 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도리를 다 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법을 체득 하는것, 건강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지식이나 학문의 깊이가 아닌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난 시어머니처럼은 하질 못한다. 그저 아름다운 어머니가 되기보다는 따뜻한 어머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볼 뿐이다. 그래서 먼훗날 내 아들들이, 또 그 아내들과 자식들이 나를 추억할 때면 따뜻한 그리움이 목젖까지 차오르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늙고 싶다. - 99/10/5/동아 -
* 부부의 갈등
- 무능한 남편 VS 유능한 아내, 그들의‘마지막 전쟁’
지난달 초 종영된 MBC 미니시리즈 ‘마지막 전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
부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30대 주부층으로부터 폭발적
인 인기를 얻었다. 다소 과장은 됐지만 이 드라마에 나타난 부부의 유형과
비슷한 사례를 실제 우리 주위에서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직 막을
내리지 않은 그들만의 전쟁 이야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전쟁’ 커플들
지난달 막을 내린 MBC TV의 미니시리즈 ‘마지막 전쟁’을 보며 주부들은 통
쾌했다. ‘잘 나가는’ 변호사 아내 한지수(심혜진 분)와 ‘빌빌거리는’ 남
편 김태경(강남길 분)의 티격태격 부부싸움이 주내용을 이루는 이 드라마가
주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유는 다름 아닌 유능하고 당찬 아내의
모습이었다.
대기업 임원의 딸인데다가 당당하게 사법고시에 합격, 변호사를 하고 있는
아내 한지수는 어디에 내놔도 빠질 것이 없는 유능한 여자다. 이런 여자가
남편이라고 해서, 시어머니라고 해서 주눅들어 살겠는가? 어디서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고 불만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따지고 싸움을 건다.
다소 과장은 됐지만, ‘마지막 전쟁’에서 보여준 부부의 모습은 실제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IMF 한파는 이러한 상
황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의 실제 ‘마지막 전
쟁’ 커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실은 물론 드라마와 많은 차이가 있지만 드라마 속의 심혜진처럼 돈 잘 벌
고 유능해도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당당하도록 허락지 않는다. 그리고 당당
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시댁과의 갈등과 남편과의 싸움 등 많은 어
려움을 겪어야 한다. 오늘도 이렇게 우리 주위에서 ‘마지막 전쟁’을 치르
며 살아가는 부부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봤다.
누구나 결혼을 할 땐 장밋빛 꿈을 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4년 전 결혼을 준비하던 당시, 나는 경력 4년차의 중견 직장인이었고, 남편
은 고시를 준비하는 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공무원인 내
가(내년이면 국장급으로 승진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학생과 결혼한다고 했
을 때, 친정 부모님은 ‘남편 될 사람이 시험에 합격한 다음, 취직하고 결혼
해도 늦지 않는다’며 당연한 듯이 걱정의 빛을 내보이셨다.
그러나 나이도 찰 만큼 차고, 결혼이라는 꿈에 도취되어 있던 나는 부모님의
걱정이 한낱 기우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남편은 당연히 성공할 것이고, 그
때까지 조금 고생은 되겠지만 내 능력으로 충분히 생활을 꾸릴 수 있다는 생
각에서였다. 이 또한 남편이 성공하고 나면 이후의 행복한 생활로 보상받으
리라 생각하면서.
외아들이라 혼자 계신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지만, 시어머니도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터라 ‘시집살이’의 걱정은 애초에 계산
에 넣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결혼의 ‘현실’은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시
험에 합격할 것 같았던 남편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부만 하고 있다. 그
나마 고시촌에 들어가 있어 한 달에 몇 번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었다. 1년만에 생긴 아이도 혼자
낳아야 할 처지였으니….
게다가 시집살이도 혹독했다. 결혼 전 그렇게 상냥하시던 시어머니는 알고보
니 대단히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이었다. 당연히 집안 일은 며느리 몫.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퇴근해 돌아오면 산더미처럼 쌓인 청소며 설거지,
빨래 등 집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깔끔하게 단장하고 신문이
나 TV를 보신다. 임신을 해 만삭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얼마 후 시어머니가 보증선 일이 잘못
되면서 일은 더욱 꼬이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던 살림이 단번에 기울어 버렸
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던 내가 살림의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은 당연
한 일. 생활비부터 남편의 학비 뒷바라지까지 모두 내 손으로 해결해야 했
다.
힘에 부쳤던 내가 생각 끝에 ‘형편이 좋지 않으니 우선 취직을 하는 게 어
떻겠느냐’고 제안하자 남편과 시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시어머니는 ‘돈 좀
번다고 이제 곧 잘 나갈 남편의 앞길을 막는다’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직장 경험이 전혀 없는 남편은 취직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
다. 만약 고시에 영영 합격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남편은 그때도 취직을 고
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과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캠퍼스 커플이었다. 무척이나 서로 사랑했
고, 그래서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정 아버지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비교적 풍족한 가정에서 자란 나와 전라
도 시골 농사꾼의 아들인 남편이 한집에서 어울려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
이 아니었다.
신혼 초 남편은 중견기업의 성실한 직장인으로, 나는 전공을 살리라며 친정
에서 마련해준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살림을 꾸렸다. 안 그래도 친정집에서
마련해준 30평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리며 양쪽 집안의 경제적 차이가 내
내 불편했던 남편은 내 수입이 자신의 월급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에 더욱 부
담스러워 했다. 시댁에서는 없는 형편에 대학까지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지만, 내게는 그리 듬직한 남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남편은 슬슬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해보겠다는 뜻을 비쳤을 때, ‘그래 당
신도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해봐라’하는 생각에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을 모
두 털고 부족한 부분은 친정에서 변통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
나 경험도 부족하고 능력보다는 의욕이 앞섰던 남편의 사업은 몇 달 가지 못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실패한 사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편이
‘한번만, 이번 한번만’을 외치며 희망없는 일에 매달리고, 그러다 좌절하
기를 반복하더니 급기야는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 것
이다.
그동안 우리는 친정에서 마련해준 아파트도 처분하고, 사업을 다시 시작할
때마다 친정에서 끌어다 쓴 돈의 액수도 불어나 빚더미에 앉아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동안의 생활은 내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서 나오는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학원이 잘돼 생활비가 모자라 친정에 가서 손을 벌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는 의욕조차 상실한 남편이다. 아무 일 없이 집에만 웅크
리고 있은 지도 벌써 3년째. 거듭되는 실패로 삶의 의지를 상실한 남편이 측
은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젊은 나이에 그만한 일로 코 빠뜨리고 있는 모
습은 너무 보기 싫다. 나뿐만이 아니라 9살 된 아들에게도 아빠의 그런 모습
이 보기 싫었던지 친구라도 데려올 때면 꼭 밖에서 전화를 해 아빠가 없는지
확인한다. 언제나 집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담배만 피워대는 아빠가 친구들에
게 창피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싸움을 한다. 나는 ‘뭐라도 할 생각을 하라’
며 남편을 채근하고, 남편은 ‘나는 원래 그런 놈’이라며 ‘이혼하자’고
맞서다 큰소리로 번지는 것이다. 조용하던 시댁에서도 갑자기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마누라가 너무 기가 세 남편이 출세를 못한다’며 은근히
남편을 부추기는 모양이다. 친정 엄마는 엄마대로 드러내놓고 무능한 사위라
며 남편의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우리는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 옛날에 정말 사랑했었는지도 궁금해진다.-10/23/99/h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