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 초에는 중국문명의 방식으로 우리나라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업이 완성되었다. 한글의 창제, 법전, 역사, 지리, 농업, 의학, 문학, 음악 등에서 민족문화가 정리되었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은 예학(禮學)의 측면을 강조하여 禮의 질서를 강요함으로써 전쟁 후 격심해진 사회변동을 저지 억제하려 했이며, 禮의 실천을 통해 身分질서의 유지, 동족집단의 결속, 가부장적 폐쇄성을 강화하여 양반층의 지배권을 옹호하고 민중세계를 중세적 지배질서 속에 묶어두려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강조된 禮論은 지배계급 자체를 심한 당쟁(黨爭) 속으로 몰아넣었고 반면 민중세계는 차츰 성리학적 문화의 굴레를 벗어나 문화영역을 넓혀 가면서 양반문화와 兩立되는 민중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실학은 조선왕조 후기의 이와 같은 문화적 분위기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125년만인 1485년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고려조에서 여러 가지 정치 문제를 일으켰던 지리 도참사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 와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태조는 하륜 등의 학자들에게 풍수를 연구하여 새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나라 이름으로 쓰이는 조선(朝鮮)의 조(朝)가 아침, 태양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이 반영된 조천의 의미가 있다.
도학주의형의 독서관과 입신양명형의 독서관이 섞여 있던 조선 전기의 독서에 있어 가장 강조된 책은 소학이었다.
무당에게 세금을 물리고, 질병퇴치를 위해 국가가 무당을 동원하고, 재난을 만났을 때 무당에게 굿을 하도록 허락한 기록 등은 조선조의 유교문화가 무속과의 양립을 전면 거부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서의 공존을 원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윤리적 실천 강령을 행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실행에 옮긴 것은 주로 양반의 상류계층이고, 평민인 일반 민중들은 오랜 전통의 관행에 따라 천신을 비롯하여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고 무속을 행했다.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활발해져서,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동몽들의 유학도장으로 중요시되었다.
서양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대체로 광해군때부터 이며, 부연사 사신들에 의해 유입된 천주교 서적들에 대해 국내의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데 대략 숙종까지 서학 접촉시대를 갖게 된다. 이때에 천주교와 관계있는 인물로는 허균과 이수광이 유명하다.
서학 연구가 성행해지자 국가에서는 당시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받들고 있었으므로 정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서학이 탄압을 받게 된다.
서학에 관심을 표명하고 비판을 가한 유학자들은 당대에 저명한 인사들로서, 이수광(1563-1627)을 비롯하여, 이익(1682-1763)과 그의 제자 안정복(1712-1791), 이가환 등을 들 수 있는데, 학파로 보아선 당시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구하던 남인계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성리학에서는 우주 자연과 인간이 합일(合一)할 수 있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물아 일체관(物我一體觀)을 주장한다.
우리말과 일치되는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조선 초기, 곧 15세기 중엽은 한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제반요건이 완비되는 시기였다.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이 고조되었던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현실생활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정감록(鄭鑑錄)과 십승지(十勝地) 기타 후천개벽사상들이 민간에 침투하여 여러 계통의 신흥종교 교단들이 형성되었다.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근본가치관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유교적 근본가치에 바탕한 충(忠)과 효(孝)가 중심에 있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중인계급의 출현은 상하층의 간격을 좁혀 식생활 습관의 통일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식생활의 가장 큰 특징은 궁중음식을 중심으로 한 의례음식의 발달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한식(韓食)의 기초가 된 것으로서, 지위에 따라 상차림이 달랐고 같은 사람이라 해도 생일·명절·향연에 따라 그 차림이 달랐다. 궁중의 경우 평일의 수라상에는 12첩을 차렸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왕이 받는 상에는 각종 음식을 높이 괴었는데,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 진연도감(進宴都監)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각 전각(殿閣)마다 올리는 상의 이름, 상의 수, 음식의 가짓수, 분량 등이 모두 달랐다. 이러한 진연·진작(進酌)·진찬(進饌) 음식은 봉송(封送)이라 하여 양반 가정에 전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에 이어 권농정책이 추진되고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제도가 확립된 시기로서, 조상에 대한 봉제사와 가족제도에 따른 식생활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식품의 저장·가공법, 조리기술이 한층 발달하고, 궁중음식 위주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상차림의 규범이 정착되었다. 주식은 역시 곡류로서 품종이 다양화하여 쌀의 경우만 해도 30종에 이르렀으며, 기장이 5종, 조가 15종에 달했다. 그밖에 수수·보리·밀·팥·콩·옥수수 등이 경작되었으며, 18세기 중반에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 전래된 고구마와 감자는 구황식품으로 추가되었다. 육류는 교통수단으로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소와 말의 도살이 방지되어 돼지·닭·개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수산물도 종류가 다양해져서 어류가 50여 종, 해조류가 10여 종에 이르렀는데, 명태가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밖에 조개·오징어·어란·대합·꼴뚜기 등의 젓갈류가 만들어졌고, 새우젓·멸치젓 등이 전국적으로 소비되었다. 한편 채소류는 무·배추·송이버섯·시금치·미나리 등에 호박과 토마토가 외국에서 들어왔다. 특기할 것은 고추의 도입인데, 이는 일본에서 유입된 이래 젓갈류와 함께 김치에 쓰여 우리 식탁에 가히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밖에 과실류에는 전시대의 것 외에 사과·포도 등이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말에 단군교의 교전을 전수한 백봉이 도천(禱天)에서 찾아낸 바 있는 태백산 보본단 석실은 발해 문왕이 봉장한 수많은 전적이 감추어져 있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는 종묘는 정전(국보 제227호)·영녕전(보물 제821호) 등이 위치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조물로, 절제된 건축미와 엄숙한 제례의식, 유현한 분위기가 감도는 영원의 공간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교적 흐름은 수련도교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저술은 한무외의 해동전도록이다. 한무외는 이 저술에서 조선의 도맥이 태상노군(太上老君), 위백양, 종리권, 최승우, 자혜, 최치원, 이청, 명오, 김시습, 서경덕, 홍유손, 곽치허를 거쳐 자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중 태상노군은 노자를 가리키며, 위백양은 후한 사람으로 연단 중심의 당 도교에 주역과 황노, 즉 황제와 노자의 도를 배합하여 그 이론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도교의 양생법을 강조한 참동계의 저자이다. 이 참동계는 주자도 관심을 갖고 참동계주석을 펴냈다. 종리권은 금대(金代)에 성립된 전진교의 종조(宗祖)인 여동빈에게 도를 전한 인물로 금단도, 이른바 본성적 단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처럼 조선 중엽의 저술에서 주장되고 있는 도맥은 실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도가적 수련에 심취한 지식인들의 가탁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들 도맥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신라 하대와 조선시대 사이의 실존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즉 조의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는 보다 합리적이고 수련지향적인 전진교 계통의 도교를 받아들인 이 시기 지식인들이 유교적 도통론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계통을 밝힐 필요성을 느낀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조선에서 수련도교나 도교적 은둔생활의 기풍이 형성되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저술이나 의식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조선에서의 단학의 도맥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도교와 연관된 인물 등의 각종 이적을 기술한 홍만종의 해동이적이나 도교 관계의 각종 변증설을 수록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도교 관계 저술들이 연이은 것으로 보아 지식층의 관심이 지대했고, 그러한 생활양식이나 수련법이 꾸준히 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함께 모신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국조가 되었다. 또, 구월산에 삼성사(환인·환웅·단군을 배향)가 있고 강동(江東)에는 단군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의 목표는 인륜을 밝히는 것(明人倫)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삼국과 고려에 이어 마리산 제천단을 수축, 제사지낸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1472년(성종 3), 1639년(인조 17), 1700년(숙종 26), 1765년(영조 41), 1777년(정조 1), 1781년 등의 기록을 볼 수 있으며, 1429년(세종 11) 평양에 단군 사당을 세우고 동명왕과 같이 제사지냈으며, 1455년(세조 1) 조선시조단군지위라고 위판을 고쳤고, 1459년 왕세자를 거느리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1679년과 1697년에 신하를 보내어 제사지내고, 1729년 숭령전이라는 액판을 하사했으며, 1749년 승지를 보내 제사지냈다.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은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로부터 시작된다. 솟을대문은 가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붕이 행랑채보다 높이 솟아오른 대문을 말한다. 행랑채는 여러 노비들이 기거하는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불을 때는 부엌이 곁달려 있다. 행랑마당에는 한 곁으로 곳간과 가마고와 마굿간을 두어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기 위한 전이공간의 구성을 보여준다.
조선에서는 고려의 뒤를 이어 도교의 재초를 행하되 도관(道觀)의 이름을 쓰지 않고 경복궁의 북쪽에 소격서(昭格署)를 두어 거기에 태일전(太一殿)·삼청전(三淸殿) 등을 세우고 천존(天尊)·성군(星君)·신장(神將) 등 수백위를 모셔 놓고 때때로 치재하였다. 지금의 삼청동·성제정(星祭井)·소격동(昭格洞) 등이 다 그 유적이다. 그러나 국가적 시설을 떠나서 단학과 선풍(仙風) 및 도교에서 나온 습속은 전대에 비하여 민간에 많이 행해지고 임진왜란 이후에 명군에게서 배운 관우의 숭배 등이 유행하였다.
조선왕조에서도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카스트제가 성립되었다. 이는 고려의 카스트제(귀족, 중류, 양민, 천민)을 계승한 것이다. 양반계층의 하인(노비)의 일을 하거나 도축업을 하는 자들은 천민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조선왕조의 궁궐로 태종이 1404년 경복궁 동쪽에 이궁(離宮)으로 조성한 창덕궁은 한국의 대표적인 궁정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창덕궁에는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호)·대조전(大造殿, 보물 제816호)·선정전(宣政殿, 보물 제814호) 등이 있으며 왕가의 정원인 후원, 즉 비원(秘苑)은 한국의 전통정원의 조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며, 노예(奴隸)의 특색이다.
클레망세는 대한제국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1888.12.)에 임명되어 한국체신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1900년 7월에는 우표· 우편엽서를 프랑스에 의뢰하여 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 프랑스우편협정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