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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에서 고려시대까지 역사를 체계화하다. - 『동국통감』 서문 |
조선은 건국 후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선 역사서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태조대에 정도전이 『고려국사』(37권)를 편찬하였고, 태종대에 권근이 『동국사략』(6권)을 편찬한 데 이어, 세종대에는 본격적으로 전대의 역사인 고려사의 편찬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기획하였다. 세종의 명을 받은 정인지 등에 의해 작업에 들어간 고려사 편찬 사업은 결국 문종대인 1451년 기전체 형식의 『고려사』 139권의 완성으로 결실을 보았다.
경서에는 도를 기재하고 역사서에는 일을 기록하니, 경서는 공자가 깎아서 정하고 지어서 만들어 이미 만세에 가르침을 드러냈습니다. 역사서는 사마천과 반고 이하 작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대대로 각각 책이 있어 넓고 넉넉하며 어지럽게 기록되었습니다. 학자들이 비록 10년 동안 공력을 다하여도 오히려 두루 읽지 못하는데, 하물며 人主는 날마다 만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어느 겨를에 두루 볼 수 있겠습니까? 선정 사마광이 역대의 역사서를 모으고 두루 여러 책에서 채택하여 그 요긴한 것을 모아서, 위로는 쇠한 주나라에서 시작해서 아래로는 오계1) 에 이르기까지 장편을 지어 『자치통감』이라고 부르니, 진실로 사가의 나침반입니다. 자양의 주부자가 그것을 이용하여 『강목』을 지었는데,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기사가 더욱 갖추어져서 경계함이 밝아지고 기미가 드러났으니 『춘추』의 근엄한 뜻을 깊이 얻었습니다. 후에 작자가 있었지만 모두 두 사람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서 편찬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려시대까지의 역사가 소략한데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진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기자를 지나 삼한에 이르기까지 고증할 만한 문적이 없었으며, 아래로 삼국에 이르러 겨우 역사책이 있었지만 대강 간략함이 매우 심하였고, 게다가 근거도 없고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들을 더하였습니다. 후에 작자들이 서로 이어서 모으고 지으니 全史가 있고, 史略이 있고, 節要가 있었지만, 그러나 本史의 소략하고 빠진 부분을 또 다시 답습하였습니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시켜 33세대를 전하면서 거의 5백 년을 지났는데, 비록 國史가 있었지만 중간에 기재한 것이 너무 번잡하거나 간략하여 자못 사실과 같지 않은 것이 있었고, 또한 빠뜨리고 누락시키는 실수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강헌대왕은 運에 응하여 나라를 연 뒤 옛날의 圖籍을 거두어 들여 秘府에 간직하도록 하였습니다. 三宗이 서로 이어서 문치가 더욱 높아지자 官을 설치하고 局을 열어 『고려사』를 편찬하니, 이른바 ‘전사’라는 것이 있고, 이른바 ‘절요’란 것이 있어서 사가의 제작이 이에 점차 갖추어졌습니다. 세조 혜장대왕은 하늘이 내리신 성학으로 경사(經史)에 마음을 집중하여 일찍이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비록 여러 역사책이 있지만 가히 『자치』에 비길 만한 장편 통감은 없다고 하면서, 사신에게 명하여 장차 교정하고 바로잡으려 했으나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대통을 이어받고 선왕의 계책을 뒤따라서 달성군 신 서거정ㆍ행호군 신 정효항ㆍ참의 신 손비장ㆍ행호군 신 이숙감ㆍ전 도사 신 김화ㆍ교리 신 이승녕ㆍ사의 신 표연말ㆍ전적 신 최부ㆍ박사 신 유인홍 및 신 이극돈 등에게 『동국통감』을 찬수해 올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용졸하여 재주가 삼장에 모자라는데, 삼가 綸命을 받들게 되니 떨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삼국 이하 여러 사책에서 뽑아내고 겸하여 중국 역사에서 가려내서 편년체를 취하여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범례는 한결같이 『자치통감』에 의거하였고 『강목』의 필삭한 취지에 붙여, 번다하고 쓸모없는 것은 삭제해서 요령만 남겨두려고 힘썼습니다. 삼국이 함께 대치하였을 때는 삼국기라 칭하였고, 신라가 통합하였을 때는 신라기라 칭하였으며, 고려 시대는 고려기라 칭하였고, 삼한 이상은 外紀라 칭하였습니다. 상하 1천4백 년 동안 국세의 나누어지고 합친 것과 국운의 길고 짧은 것과 임금이 거행한 일의 잘잘못과 정치의 쇠퇴ㆍ융성하였던 것을 솔직하게 쓰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명교를 소중히 하고, 절의를 높이며, 亂賊을 토벌하고, 간신과 아첨하는 이를 誅殺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근엄함을 더하여 거의 권장과 경계를 드리워서 후세에 교훈이 되게 하였습니다. 선유가 논단한 것이 있으면 모두 취하여 써 넣었고, 간혹 또한 신등이 억측으로 논변한 것을 첨부하였으나 극히 경망하고 참람하여 작자의 반열에 나란히 놓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1) 오계 :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시기인 오대(五代). 당나라 말기의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가 있었던 시대이다.
『동국통감』은 서거정, 이극돈 등이 왕명을 받고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1458년(세조 4)에 편찬 사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1476년(성종 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성종 15)에 고려시대의 역사를 합하여 『(구편)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인 1485년(성종 16)에는 전년에 완성된 책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신편)동국통감』이 56권 28책으로 편찬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를 三國紀,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新羅紀,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高麗紀로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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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선왕조실록에는 表沿沫과 유호인이 등장하는 기사가 여럿인데, 유호인이 표연말로 부터 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표연말은 유호인의 고향인 함양출신에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동질성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