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19장 1~29절
요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5~26)
서론: 벼랑 끝에서 묻는 인간의 실존과 영원의 노래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가장 깊은 고통은 무엇일까요? 몸의 질병이나 경제적 파탄도 아프지만, 진정한 비극은 ‘나라는 존재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실존적 고립감입니다. 내가 신뢰했던 정황과 이웃,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마저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인간은 자신이 우주 한복판에 덩그러니 던져진 외로운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오늘 본문의 욥이 딱 그러한 실존적 절망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형제와 친척이 떠나고, 종들마저 그를 이방인 취급하며, 아내조차 그를 거부합니다. 세상 모두가 그를 죄인이라 낙인찍고 타자화(Othering)할 때, 욥은 자신의 탄식이 돌에 영원히 기록되기를 갈망하며 울부짖습니다.
이러한 욥의 고난은 6세기 로마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니키우스 보에티우스(Boethius)의 삶과 온전히 맞닿아 있습니다. 모든 권력과 명예를 누리던 보에티우스는 모함을 받아 하루아침에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적 소외의 극단에서 그는 저작 『철학의 위안』을 쓰며 "왜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승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보에티우스는 감옥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부조리(Absurdity)'를 직면했습니다.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Fortuna)에 의해 지배당하는 덧없는 현상계에서 소외당할 때, 인간은 깊은 허무에 빠집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감옥 바닥에서 눈을 들어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원성(Aeternitas)과 최고선(Summum Bonum)을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상계의 불의함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본질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의 실존은 비극을 넘어섭니다.
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의 왜곡된 인과응보론이라는 몰이해 속에서, 욥은 현상적 고난의 껍질을 뚫고 세상을 뒤흔드는 위대한 고백을 터뜨립니다. 오늘 본문 속에 담긴 깊은 철학적 사유와 신약적 소망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타자화된 실존을 구원하는 본질적 존재의 보증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은 선언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גֹּאֲלִי, 고엘리)가 살아 계신다!" 개역개정 성경은 대속자로 번역했지만 구약인 욥기를 감안하면 '구속자'도 적합하게 여겨집니다. '고엘(גֹּאֵל)'은 구약 법률 구조에서 빚진 친족의 땅을 대신 사주고, 종으로 팔린 친족을 속량하며, 억울하게 죽은 친족의 피를 보수해 주는 '가장 가까운 친족'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욥은 친구들과 세상으로부터 '타자화(Othering)'되어 완벽하게 주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타인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욥은 죄인이자 버림받은 자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타인이 규정한 가짜 자아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변호해 줄 이 하나 없는 현상계 너머에,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억울함을 보증해 줄 실존적 관계성, 즉 하늘의 ‘고엘’이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보에티우스 역시 감옥에서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 타인의 평가는 변덕스러운 안개에 불과하며, 인간의 참된 가치는 유한한 인간의 재판정이 아니라 오직 최고선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확립된다는 사실을 사유해 낸 것입니다. 타인이 내린 판결문은 감옥의 벽에 매여 있지만, 신의 법정에 계신 하나님만이 인간 존재의 절대적 의미를 보증하십니다.
구약의 '고엘'은 우리의 참된 친족이 되기 위해 인성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히 2:14-15). 세상이 우리를 비난하고 사탄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존재 가치를 폄하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라는 속전(贖錢)을 치르시고 우리 존재를 완전한 자녀로 구속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평가나 인간적 배신 앞에서 존재의 흔들림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판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참된 고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변호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멸할 허무를 뚫고 일어서는 영원성
이어지는 25절 후반절에서 욥은 대속자가 "마침내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파르(עָפָר)’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기름진 흙이 아니라 창세기 2장 7절의 '티끌, 먼지, 잿더미'를 뜻합니다. 인간은 결국 '아파르'(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입니다(창 3:19).
이 '아파르'는 철학적으로 인간의 유재성(Finite Existence)과 사멸성, 그리고 허무주의(Nihilism)를 상징합니다. 욥은 병들어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보며 인간 존재의 한계 상황(Grenzsituation)에 직면했습니다. "인간이란 결국 한 움큼의 먼지에 불과한가?"라는 허무가 엄습할 때, 욥은 믿음의 대전환을 이루어 냅니다. "나의 고엘이 마침내 그 티끌(아파르) 위에 일어서실(קָם, 캄) 것이다!"
보에티우스 역시 처형을 앞두고 사멸할 육신의 한계를 사유했습니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티끌처럼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은 철학적 절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시간을 넘어선 하나님의 영원성(Aeternitas)을 사유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이 하나님의 영원성 속으로 포섭될 때, 티끌 같은 인간의 고통과 삶은 결코 허무로 끝나지 않고 찬란한 영원적 가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파르' 위에 서신다는 환상은 부활 사건으로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먼지와 무덤의 티끌을 밟으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며 일어서셨습니다(고전 15:20). 부활은 사멸할 티끌(아파르)에 불과했던 인간의 육신이 썩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의 몸으로 변모되는 궁극적 존재의 역전입니다.
우리의 건강, 사업, 인간관계 등 땅 위에서 쌓은 모든 것은 순간에 티끌(아파르)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무너진 잿더미를 보며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그 잿더미 위에 마침내 일어서시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실패와 한계의 현장 위에 서 계신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3. 현상적 고난의 껍질을 뚫는 신적 관조
26절과 2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욥은 여기서 "내가 하나님을 보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보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하자(חָזָה)’입니다.
'하자'는 단순한 시각적 감각(Seeing)이 아닙니다. 감각적 현상계를 넘어 영적 실재를 일대일로 관조(Contemplation)하고 대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이 감각의 세계인 '아니마(Anima)'를 넘어 영원한 이데아를 바라보는 관조(Theoria)를 말했듯, 욥의 '하자'는 현상적 통증과 비극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 신적 실재(Divine Reality)를 직관하는 영적 관조입니다.
욥은 피부 가죽이 벗겨지는 극심한 육체적 해체 속에서도 영안을 엽니다. "내 가죽이 부패하여 사라질지라도, 나는 내 영혼의 눈으로 내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자'할 것이다!"
사형을 앞둔 보에티우스 역시 "내 육신의 눈은 갇혀 있으나, 영혼의 시선은 하늘의 신성한 지혜를 직관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감옥이라는 좁은 공간, 사형이라는 현상적 절망 속에서 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의 왜곡된 프레임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을 '하자'하는 관조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하자'는 신약 성도가 누릴 하나님과의 영원한 대면과 교통으로 성취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라고 하였으며, 요한 사도는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요일 3:2)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눈앞의 환경과 세상이 만드는 프레임에 시선을 빼앗겨 실존적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현상 너머 계신 하나님을 '하자'하는 거룩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껍질에 눈이 가리우지 마시고, 나를 대면하여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관조하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결론: 잿더미 감옥에서 드리는 영광의 예배
보에티우스는 어두운 감옥에서 육체의 생명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깊은 철학적 사유와 신앙의 고백은 지난 1,500년 동안 고난당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절망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세상은 그의 삶을 비극이라 칭했으나, 그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위안을 얻고 승리했습니다.
욥 역시 삶의 모든 터전이 깨어지고, 가죽이 벗겨지는 실존적 고립 속에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고엘(대속자)이 살아계신다!", "그분이 나의 티끌(아파르) 위에 마침내 서실 것이다!", "내가 이 눈으로 나의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리라(하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욥의 잿더미 같습니까? 보에티우스의 차가운 감옥과 같습니까? 세상의 평가나 환경의 한계라는 감옥에 자신을 가두지 마십시오.
ㆍ우리의 참된 대속자(גֹּאֵל, 고엘) 되신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셔서 변호하고 계십니다.
ㆍ우리가 겪는 허무와 티끌(עָפָר, 아파르) 같은 현장에 그 분이 일어서셔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ㆍ육신의 눈을 넘어 이제 영의 눈을 들어(חָזָה, 하자)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대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는 참된 위안과 승리가 성도 여러분과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