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바로 이거야” 1935년 신가정 5월호를 읽고 있던 소설가 심훈(沈熏)은 무릎을 쳤다. ‘고(故) 최용신양이 밟아온 업적의 길’. 지난 1월 사망 소식을 접한 후 줄곧 관심을 가졌던 최용신(崔容信)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잘 정리한 기사였다.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하려 했는지 그저 ‘일기자’(一記者)라는 익명으로 시작된 기사는 최용신의 삶을 그 어떤 글보다 생생하게,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사망 소식을 접한 직후 현장을 찾아간 기자는 그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기억과 그의 손때 묻은 유품들을 직접 확인한 후 이 글을 썼다. 최용신의 고통과 업적이 감동적으로 와 닿는 기사였다.
어느새 심훈의 머리 속에는 잘 편집된 영화 한 편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장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한 젊은 여인의 구릿빛 얼굴,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맺고 끊음이 분명한 말투, 남자라도 흠잡기 어려운 당당함…. 영화는 시집도 안간 이 젊은 처녀가 농촌계몽운동에 온몸을 던졌다가 마침내 스러져간 장엄한 대(大)서사시였다. 심훈은 여기에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멋진 청년 한 명을 새롭게 편집해 삽입했다. 건장한 체격에 민중을 문맹에서 깨워 내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청년. 그런 ‘그’가 그런 ‘그녀’와 동지애 반, 사랑 반으로 서로 용기를 주며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그러다 청년은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게 되고, 그 사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만 하던 처녀는 결국 저 세상으로 간다…. 심훈은 청년의 오열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미친 듯 글을 써내려갔다.
일제 강점기 농촌사업과 민족주의를 고무했던 소설로 평가받는 심훈의 “상록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집필을 시작한 날짜는 1935년 5월4일, 탈고 날짜는 같은해 6월26일이었다. 200자 원고지 1,500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기껏 50여일만에 써냈으니 ‘미친듯 썼다’는 것 외에 달리 적당한 표현이 없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리나케 원고를 포장해 빠른 우편으로 보내야 했다. 그래야 일을 마무리지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무명작가 심훈을 최고의 인기작가로 만든 “상록수”
그는 애초부터 이 소설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을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이다. 마감일은 6월 말일. 소설 탈고후 4일의 기한 밖에는 남지 않았다. 겉봉에 “동아일보” 주소를 쓰고, 우체국에 다녀온 후에야 그는 비로소 긴 휴식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한달반 후. 심훈은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 2등도 없이 단 한편의 작품만 선정하는 장편소설 부문에서 그의 소설 “상록수”가 선정된 것이다. 상금은 무려 500원(圓). 황소 8∼9마리에 이르는 큰돈이었다. 50여편의 응모작 중 심훈의 소설은 그야말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아일보”측은 “조선의 독자적 색채를 드러낸 것은 물론 사건의 극적 전개 등 신문소설이 가져야 할 요소를 고루 갖췄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판단과 평가는 신문사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해 9월10일부터 다음해 2월15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연재된 “상록수”에 대한 반응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주요 독자층이던 도시인은 물론 신문과 거리를 뒀던 시골 독자들까지 열렬하게 환호했다. 소설을 보기 위해 신문을 새로 구독하는 독자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로써 35세의 무명작가 심훈은 성공했다. 소설 한 편으로 일약 조선 최고의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그가 1930년 “동방의 애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전까지 그는 그저 평범한 무명작가였을 뿐이다. “상록수”가 그에게 가져다 준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후세 평론가들은 심훈을 일제시대 농민계몽운동을 다룬 대표적 문학작품을 쓴 대표적 작가로, 또 한국 근대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취급한다. 또 “상록수”는 30년대 일제 강점기를 헤쳐나가는 민족지도자들의 전략과 함께 농촌지도자들의 헌신적 노력을 알게 해 주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상록수”는 지난 60여년간 80여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했고 이제 엄연한 ‘고전’의 지위를 차지했다. 심훈은 이로써 민족작가라는 명예까지 얻게 된 것이다.
“상록수”와 관련해 심훈은 또 하나의 야심을 갖고 있었다. 농촌의 토속적 색채를 한껏 품은 한편의 농촌영화를 구상했던 것이다. 좌익 사상으로 무장된 저항적 행동파 심훈에게, 핍박받던 무지몽매한 농민들이 젊은 엘리트들에 의해 교육받으며 점차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는다는 “상록수”의 내용은, 좌파의 사실주의적 성향에 꼭 맞는 좋은 영화 소재였을 것이다. 사실 심훈은 작가이기 이전에 영화인이었다. 스물 네 살의 청년기에 영화 “장한몽”(長恨夢)에서 이수일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연기자였으며, 스물여섯이었던 1927년에는 직접 집필, 각색과 감독까지 했던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개봉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기자로, 작가로 활동하기는 했어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모든 영화인의 꿈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야심작이었던 “상록수”를 영상으로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의욕을 앞세운 결과였다. 1936년 8월 무리를 해서 다시 손을 본 단행본 “상록수”를 첫 출간한 직후 다시 영화로 만들겠다며 쉬지 않고 일하다 그만 병사(病死)하고 만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때인 1936년 9월, 그는 한 대학병원에서 자신의 마지막 꿈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장티푸스였지만 신문 연재, 단행본 출간에 이어 영화 제작에 이르는 과정에서 쌓였던 과로가 커다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심훈은 따라서 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직 “상록수”를 쓴 작가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한국 초기 영화사를 개척한 영화인 심훈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재능으로 보아 한국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여지도 충분하다.
이렇게 보면 소설 “상록수”는 한국문학사적으로나 심훈 개인사로나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국내 문학계는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1930년대 농촌을 배경으로 한 브나르도 운동의 선구적 저작을 갖게 됐으며 작자 심훈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된다.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영상매체에 찌든 오늘의 젊은이들이 텍스트 위주의 고리타분한 옛날 문학작품을 읽을 리 없다. 그래도 심훈과 “상록수”의 이름만큼은 안다. 역사와 국어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가와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이미 일상생활에 용해되어 들어 있다.
상록수다방·상록수역·상록수학원 등 상호(商號)로도 쓰이는 상록수라는 이름에는 심훈과 심훈이 쓴 소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인 채영신·박동혁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상록수”가 작가 심훈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만은 아니었다. “상록수”는 작가 심훈을 무명의 고통에서 건져내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로 살려냈지만, 다른 한편 “상록수”는 자신이 만든 이 인기작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신(死神)이기도 했다. “상록수”에 대한 애정이 결과적으로 심훈을 요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심훈은 “상록수”로 인해 살고 “상록수”로 인해 죽었다. ‘행운은 불행을 수반한다’는 옛 속담을 일깨워 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상록수”가 살리고 죽인 인물은 심훈 하나였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상록수”가 영생(永生)의 생명수와 사약(死藥)을 동시에 내린 한 여인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분명 “상록수”로부터 영원한 삶을 부여받았지만 그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살아가야 했던 드라큘라 백작의 삶처럼 고통스러워 보인다. 또 곰팡이 낀 유물처럼 지독한 방부제를 뒤집어쓰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레닌의 영생처럼 공허하다. 과연 그는 영생을 준 “상록수”와 그 작가 심훈에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아니면 그 영생이 준 고통과 공허함 때문에 그를 비난하고 있을까? 그가 “상록수” 때문에 살아났고 “상록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상록수”로 되살아난 최용신, 심훈에게 감사해 할까
최용신. 분명 그는 죽은 지 5개월만에 심훈에 의해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으로 다시 태어났고 지금까지 영생을 누리고 있다. 심훈과 “상록수”가 없었어도 최용신이 오늘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은 받아들인다. “상록수” 출간 이후 최용신은 ‘소설 속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최용신에 대한 백과사전의 해설에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의 모델이었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최용신을 순수한 농촌운동가로만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최용신이 “상록수”에서 얻은 영생의 삶은 편치 않아 보인다. 최용신은 그저 채영신의 모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상록수”는 대중소설의 대표격인 신문소설이었다. 대중의 구미에 맞게 윤색과 각색이 이뤄졌을 것이 틀림없다. 연재 당시에도 지척에서 최용신을 봤던 사람들의 항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실제와 다르다는 항의였다. 하지만 그같은 항의는 예나 지금이나 의미가 없다. “소설은 실제가 아니니 혼동하지 말라”는 힘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항의한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이다. 연재 당시에도 많은 독자들은 최용신과 채영신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채영신의 “상록수”는 가까웠고, 최용신의 실제 자료는 구하기 어려웠다.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최용신을 채영신으로부터 구분해 내는 것, 그것이 실제 최용신을 이해하는 첩경이 아닐까? 그 작업은 또한 심훈과 “상록수”가 최용신에게 준 편치 않은 영생에서 구출해 내는 일이기도 하다. “상록수”와 최용신에 대한 실제 자료를 비교해 보면 아주 기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용신과 채영신은 발음만큼 가깝고 표기만큼 멀다’는 결론이다.
최용신을 모델로 한 것이니 채영신의 활동이나 이력, 사상, 삶과 죽음은 최용신을 꼭 빼닮았다. 하지만 채영신은 결코 최용신이 될 수 없다. 두 여성의 캐릭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제의 최용신은 채영신에 대한 독자들의 아련한 추억을 여지없이 망가뜨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최용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심훈이 만들어 놓은 채영신은 어떤 여인인가 보자.
서울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깨끼적삼(옷의 안팍 솔기를 곱솔로 박아 만든 겉옷)에 무늬가 혼란한 조세트나 근래 유행하는 수박색 코로나프레프 같은 박래품(舶來品)으로 치마를 정강마루까지 추켜 입고 다닐 때이건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수수하고 굵다란 광당포 적삼에 검정 해동치마를 입었고, 화장품과는 인연이 없는 듯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를 붙들어다 세워놓은 것 같다. 얼굴에 두드러진 특성은 없어도 두 눈동자는 인텔리 여성다운 이지(理智)가 샛별처럼 빛난다.
수수한 외모, 빛나는 눈동자, 남성에게도 전혀 굽힐 것 없다는 당당한 태도, 결연한 의지…. 심훈이 창조해낸 채영신의 첫 이미지는 이렇다. 농촌계몽운동 성과 발표회에서 첫눈에 채영신에게 빠진 남주인공 박동혁이 그를 사모하는 장면에서도 심훈은 동혁의 눈에 비친 채영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수수한 차림… 조금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그 체격… 그리고 혈색 좋은 얼굴에 샛별같이 빛나던 눈동자… 또 그리고 언권(言權,·발언권)을 주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딱 거절하던 그 맺고 끊는 듯하던 태도…. 어디 그뿐인가! 남학생들에게 정면으로 일장의 훈계를 하던 정열적이면서도 결곡한 목소리! 그 어느 한 가지가 머리 속에 사진 찍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말 한마디조차 귀 밖으로 사라진 것이 없다.
심훈은 이같은 이미지에 기독교적 경건함을 추가시켰다. 채영신은 ‘주’께 자신의 삶을 농촌의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또 그는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상사였으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기도와 주의 도움으로 힘을 얻는다. 일본인 관료가 정원을 초과했다며 50명의 학생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했을 때의 채영신이 겪은 고통을 심훈은 이렇게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신은 이슬이 축축이 내린 예배당 층계에 엎드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주여, 당신의 뜻으로 모여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양들이 오늘은 그 3분의 1이나 목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어둠 속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주여, 그 가엾은 무리가 낙심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다시금 새로운 광명을 받을 기회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루바삐 내려 주시옵소서! 오오 주여, 저의 가슴은 지금 미어질 듯 합니다!’ 영신은 햇발이 등뒤를 비추며 떠오를 때까지 그대로 엎드린 채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용신이는 제 고집대로만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심훈은 다른 한편 채영신에게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를 부여했다. 수수한 외모, 강건한 의지, 기독교적 경건함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여성적인 애교와 수줍음이 있고 심지어 성적 교태까지 드러난다. 엄연한 약혼자가 있으면서도 외간남자와 사랑놀음을 할 만큼 개방적이기도 하다. 대중을 겨냥한 소설이었기 때문일까? 채영신에 대한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표현이 많다. ‘영신과 동혁이 언제 잠자리를 함께할까’라는 불경한 상상을 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신이 동혁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동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영신을 놀려댔다는 대목에서, 심훈은 “영신은 대들어서 동혁의 넓적다리를 꼬집기라도 하려는 자세를 보였다”고 썼다. ‘영신은 성적(成赤, 신부가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는 일)한 색시처럼 눈을 꼭 내리감고는 입을 열려고 들지 않았다’는 비유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동혁은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푹 파묻었다’는 장면에 이른다. 이때 영신의 심리상황을 심훈은 이렇게 묘사했다. “영신은 생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도록 근지러운 육체의 감촉에 아찔하게 도취되는 순간 잠시 제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또 심훈은 ‘별안간 영신의 입술은 말끝을 맺을 자유를 잃었다’는, 지극히 문학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자극적인 키스신을 만들어 대중들의 ‘불경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가 심훈도 고심했을 것이다. 그가 만든 캐릭터에는 종교적 순수와 사회운동가가 갖는 열정, 여기에 성적 매력까지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종교성과 사회운동을 겸비한 여성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여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하지만 여기에 성적 매력이 첨가된다면 얘기는 크게 달라진다. 자칫 이도 저도 아닌 어설픈 캐릭터가 만들어질 테고, 그렇다면 작품은 실패일 수밖에 없다. “상록수”의 성공 요인은 채영신의, 바로 이 독특한 캐릭터에 있는 것이다. 퓨리티(purity)와 섹슈얼리티(sexuality)의 결합, 그것은 단순한 섹슈얼리티보다 더 강한 성적 자극을 일깨운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혹은 이를 소재로 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1990년작 영화 “헨리와 준”(국내 출시 비디오 제목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보라. 채영신 캐릭터의 강력한 상업성은 21세기에도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심훈은 이 대목에서 영상매체에 비해 문학이 갖는 장점을 적극 활용했다. ‘수수하다’ 혹은 ‘두드러진 특성이 없는 얼굴’의 수준에서 중단된 영신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실제로 얼굴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영상매체라면 결코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영상매체에 비해 더욱 강력한 ‘여백의 미학’을 자랑한다. 수수하다는 표현은 독자들의 상상의 폭을 넓혀준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을 영신의 얼굴로 대체할 것이다. 지금이라면 ‘꼭지’와 ‘황금시대’의 김혜수나 ‘좋은걸 어떡해’의 정선경 등 평범하고 수수하게 분장한 미녀 배우를 상상하게 된다. 심훈이 죽지 않고 “상록수”를 영화로 제작했다면 누구를 캐스팅했을까? 미녀 배우 한 명을 수수한 차림으로 등장시키지 않았을까? 왜? 그것이 대중들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비범함으로 평범한 길 거부했던 여인
최용신은 이같은 대중들의 요구에 찬물을 끼얹는다. 카메라가 어두운 화면에서 희끄무레한 대상을 줌인(Zoom-in)한다고 상상해 보자. 천천히 그 대상은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낮은 조도(照度)의 측면광선이 그의 얼굴을 때린다. 어두운 배경에 희미한 얼굴 윤곽이 드러난다. 계속 줌인, 그리고 클로즈 업-. 드디어 그의 얼굴이 드러난다.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에 꼭 다문 입술. 화면이 가까이 올수록 그의 얼굴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마침내 “상록수”의 독자, 대중들은 경악한다. 심하게 얽은 마마 자국이 거리낌없이 화면을 가득 메우기 때문이다. 최신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다면, 그래서 마마 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면, 관객들의 혐오감은 몇배 커질 것이다. 그리고 화면 속의 최용신이 이런 대사를 읊는다고 치자.
“여러분, 환상을 버리세요, 저는 어릴 적부터 곰보였답니다, 그것도 아주 심했지요.” 영상과 대사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최용신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커진다. 충격만큼이나 채영신에 대한 환상이 빨리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채영신에 대한 환상의 파괴, 그것이 최용신 이해의 첫걸음이다. 최용신은 곰보였다. 몇 살 때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어릴 때 천연두를 앓은 그는 얽은 얼굴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천연두를 앓은 곰보가, 그것도 외모가 갖는 중요성이 남자보다 큰 한 여인이 콤플렉스 없이 혹은 일찌감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살아갔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가 신적 경지의 성인(聖人)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생각하기 어려운 가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외모는 사회운동가로서의 그가 가졌던 열정적 활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 관계를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 외모 때문에? 외모에도 불구하고? 외모와 관계없이? 일단 그의 편에 선다면 ‘관계없이’라는 해석에 강조점을 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최용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럽의 맹렬 여성 로자 룩셈부르크를 생각하게 된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는 평생 발을 절며 살았지만 그야말로 그 외모와 ‘관계없이’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1870년 폴란드 태생인 로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혁명가로 활동하다 열아홉살 되던 해 망명객이 됐고 이후 여생을 망명객의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 이론가들과 격렬한 논쟁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쌓아 갔다.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직후 그는 베른슈타인과 그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을 벌이며 일약 최고의 이론가 반열에 올라섰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관료화된 당과 정부를 비판하며 당대 또 한 명의 최고 이론가이자 혁명동지 칼 카우츠키와 결별했다. 1913년 그가 썼던 “자본축적론”은 아직도 읽히는 사회주의 명저다. 1919년 독일혁명 당시 정부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될 때까지 그는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 간 철의 여인이었다. 물론 그의 신체적 핸디캡은 그의 이론이나 사회활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최용신으로부터 룩셈부르크를 연상한다거나 혹은 기대한다면 그 또한 잘못이다. 1930년대 한국은 1900년대 혹은 1910년대 유럽이 아니었다. 당시 적지않은 산업화가 진척됐던 유럽에서는 이미 상당한 여성노동자들이 산업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어느 정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권신장론자들의 숙원이었던 참정권도 이미 획득한 상태. 여성 사상가, 여성 이론가, 여성 활동가를 배출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완전히 달랐다. 아직 봉건적 구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관념이 남녀 간의 간격을 벌렸고 여성은 그저 남편을 잘 만나 남편을 잘 내조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1930년대면 조선이 일제 치하에서 신음한 지도 10여년이 지난 때였다. 당시 일제는 공황을 맞아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조선 민중들의 고혈을 빨았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집의 평범한 곰보 소녀가 갈 수 있는 길은 뻔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시집가 평생 고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도 버림받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최용신은 자신의 비범함으로 이 평범한 길을 거부했다.
최용신은 1909년 8월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경주 최씨로, 선조들은 대대로 경주에서 살다 12대 선조때 정변으로 귀양을 간 후 대대로 그곳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부는 막강한 지역 유지였다. 나라가 기울던 구한말에는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기도 했던 애국지사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출생할 무렵 가세는 눈에 띄게 기울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업에는 남달랐던 특징이 보인다. 1918년 두남리 학교에서 선교사가 운영하는 루시여자보통학교로 진학해 이후 10년 동안 끼니도 거르며 매일 10리 길을 걸어다녔다. 어려운 살림이었으니 학비를 대기도 벅찼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막노동으로 자신의 학비를 벌었다. 그러면서도 1928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니 누구도 칭찬을 아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종교에 심취해 있던 것은 이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끼니를 굶고 막노동을 해 학비를 대면서도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고집과 억척스러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종교가 필요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용신이는 제 고집대로만 살았다”는 오빠의 말에서나 루시고등학교에서 20년간 교사생활을 했던 전희균 목사가 그를 “유일하게 모든 성서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던 학생”으로 기억한다는 점에서도 그가 갖고 있던 개인적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어렵게 공부한 유능한 사람은 졸업후 대략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철저하게 성공 가치로 무장하거나 아니면 남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한다. 최용신은 후자였다. 가난과 고통은 사람을 일찍 깨우친다. 용신은 졸업후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일찌감치 고민한 흔적이 많다. 졸업에 즈음해 최용신이 남긴 글은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알게 해 준다. ‘여성철학도’ 또는 ‘사회철학도’라고 이름붙여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다.
용신의 나이 18세 때의 글이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는 새 일꾼을 요구한다. 더욱이 현대 중등교육을 받고 나오는 여성을 가장 요구하는 것으로 안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조선의 과거를 돌아보면 남성들의 노력과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를 남성들의 노력과 활동부족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 사회는 남녀 양성으로 이뤄진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선 여성들은 5,000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사회의 대세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개성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남녀 양성으로 이뤄진 사회가 남성들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용신은 또 이 글에서 자신의 진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고 썼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로 추론할 만한 내용도 있다. 자신이 ‘농촌에서 태어나고 농촌에서 생활해 막연하게나마 농촌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이며 ‘여성의 분투(奮鬪)가 요구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은 여성들 중 농촌을 위해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물다’며 유감을 나타내고 있다. 또 그는 이렇게 자문한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한 생활만 꿈꿔야 옳은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서로 손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는 것이다.
농촌운동가로서 최용신의 첫번째 좌절
그의 꿈은 상급학교 진학과 더불어 더욱 큰 힘을 얻었다.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저명한 여류 지식인이자 엘리트였던 황에스더를 만난 것이다. 도쿄여자의대에 유학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던 황에스더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할 여성 대표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 6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또 출소 직후에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다 3년형을 받았다. 1925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유학한 후 교육학 석사를 받고 28년 귀국해 최용신 입학 당시 협성신학교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황에스더의 적극적인 지도와 권유로 최용신은 점차 농촌계몽운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입학 직후 실전의 기회가 왔다. 황해도 수안으로 농촌실습을 가게 된 것이다. 말이 ‘실습’일 뿐 본인이 희망하면 영영 눌러앉아 농촌지도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시험무대였다. 그는 여기서 참패한다. 일본 관리들의 방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고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각오가 돼 있었다. 하지만 농민들의 소극성과 저항은 견뎌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1930년대만 해도 여성지도자들은 농촌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이전의 전통적인 농촌지도자들의 저항도 적지않았다. 최용신은 결국 포기했다. 같이 간 김노득(金路得)만 혼자 남겨둔 채 혼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최용신은 자신이 아직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인식해야 했다. 김노득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지방의 지도자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최용신이 김노득의 성공을 보며 몇번이고 다짐한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도 참아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3년이 지나자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수원 일대를 순회하던 선교사 밀러가 여자기독청년회(YWCA)에 샘골을 추천했고, YWCA는 최용신을 첫 교사로 파견했던 것이다. 그가 여생을 마감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泉谷)리는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으로 돼 있다.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 건너편에 자리잡은 샘골은 서울 사당동이나 독산동에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구리-안산 고속도로나 제2경인고속도로가 뚫려 승용차로도 그 정도 시간이면 갈 수 있다.
하지만 60여년 전에는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다. 수원역에서 수인선(水仁線)을 타고 인천 쪽으로 50리 가량 간 후 일리(一里)라는, 그야말로 작은 시골역에서 내려 또 한 5리 남짓 걸어 들어가야 지금의 “상록수”역 근처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은 신도시로 개발돼 아파트숲을 이루고 있지만 60여년 전 당시 이곳 가구수는 기껏 20호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30년 전부터 작은 교회가 들어서 있었다. 기독교에 입각한 농촌교육의 거점으로는 더할 수 없이 요긴한 곳이었다. 이 교회는 거대한 신도시 개발의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아직도 “상록수”역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감리교 ‘샘골교회’는 90년의 역사와 위용을 자랑한다.
“최용신과 채영신은 발음만큼 가깝고 표기만큼 멀다”
 일제하 여성농촌운동가 최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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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한 사람이 일군 샘골마을의 기적
최용신이 신화를 일군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그가 만든 ‘샘골신화’는 그가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과도 밀접하게 관계를 갖는다. 최용신은 스물두살 때인 1931년 10월 처음 부임했고 35년 1월 이곳에서 숨졌다. 기껏 3년3개월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거기에 일본유학 중이었던 6개월과 대부분 투병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기간 4∼5개월을 빼면 정작 그가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시간은 2년 몇개월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샘골 마을의 최고지도자였으며 마을 사람 모두의 스승이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그를 살리기 위한 샘골 마을의 지극정성은 눈물겨울 정도다. 샘골은 그가 사망하자 보기드물게 사회장으로 예를 다했고 그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유족들과 투쟁했다. 최용신에 대한 샘골 마을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죽고 수년 동안 샘골은 마치 죽은 마을과 같았다. 최용신의 친동생인 용경이 부임하고서야 샘골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샘골 마을에서의 그의 활동을 ‘기적’으로까지 부른다. 따라서 도대체 샘골 부임 이후 그가 어떻게 활동했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우선 당시 유지였던 염석주(廉錫株)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느날 얼굴 얽은 신여성 하나가 부인 몇사람과 같이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지금 샘골에 있으면서 이 지방을 위해 적은 힘이나마 바쳐보고자 하니 부디 잘 지도하고 협력해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 사회의 풍파를 많이 겪어 쓴맛 단맛 다 봤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무슨 사업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실망했었지요. 그런데 젊은 여자 하나가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한심했습니다. 그저 내가 사는 지역에 와서 일하겠다니 어물쩍 접대나 하고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어요. 날고기는 놈들도 농촌에 와서 실적을 못내는 이 시절에 너같은 계집애가 무엇을 하겠다고 그러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정말 경멸했지요.”
그런 염석주가 몇개월 사이 최용신의 최대 후원자가 된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거처를 마련한 샘골은 물론 이웃 마을을 가가호호(家家戶戶) 돌아다니며 어린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왜 중요하고 얼마나 필요한지를 설득했다. “이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를 찾고 또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모두가 배불리 먹고 잘살아 보자”는 그의 말에는 애원이 있었고 힘이 넘쳤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닌 노력은 수개월이 지나자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처음 강습을 시작할 때 마을 사람들은 40여명의 자녀를 강습소로 보내준 것이다. “농사를 지어야 한다”거나 “땔감을 해와야 한다”는 등 수없이 이유를 대던 농민들의 생각은 “아무리 어려워도…”로 바뀌었다. 모두 최용신의 정성어린 설득과 교육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학생이 모였다고, 또 농민들의 협조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학교를 인가받아야 했고 학생 수를 늘려야 했으며 늘어난 학생만큼 선생님을 모셔와야 했다. 또 이 모든 작업의 기초는 새 교사(校舍)의 건축이었다. 그가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것을 일궈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처음 강습소로 사용했던 교회 건물은 3개월만에 무용지물이 됐다. 급속하게 불어난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국에 학교 인가 요청을 내는 동시에 교사 축사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일제는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주시했던 데다 중·일(中日)전쟁을 앞두고 조선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가속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학교 인가를 얻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것은 교사 건축을 위한 재정적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최용신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1932년 5월 인가를 받아냈고 학생 수는 60명에 이르렀다. 그가 샘골에 온 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불가능한 것으로까지 보였던 교사 건립도 성공적이었다. 학교 인가를 받은 지 6개월만에 교사를 신축했던 것이다. 이 교사 신축 과정이야말로 최용신을 전설적 인물로 만든 바로 그것이었다. 돈도 부족한 상태에서 무작정 시작한 것이었지만 멋지게 성공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신의 가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유학 6개월만에 얻은 重病
그는 교사 건립을 위해 구우계(求牛契)를 조직했다. 계란 몇알로 시작해 병아리로, 닭으로, 송아지로 성장시켜 마침내 어른 소를 만들어 재산을 불린다는, 당시 농촌에서 유행하던 재테크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교사 건립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소값이 폭락하자 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된 것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최용신의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용신은 교사 건립을 강행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일단 구우계원들이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살펴봤다. 우선 300원(圓)의 경비가 마련된 셈이었다. 하지만 이는 턱없이 부족해서 건축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다. 게다가 부지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지 매입까지 생각하면 예산은 몇배를 넘어섰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최용신이 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을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한 지역 유지가 선뜻 1,500평이 넘는 부지를 기증하겠다고 나서니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1932년 10월 그는 무작정 착공에 들어갔다. 다음 학기에는 번듯한 교실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사실 무모했다. 경비도 부족했고 엄동설한 에 공사를 강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최용신의 의도대로 참여하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불안했다. 돈 없이 시작된 공사가 마무리될까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최용신은 밀어붙였다. 직접 돌과 나무를 나르고 진흙을 이겨 벽에 붙였다. 그러면서 또 돈을 모았다. 동네 유지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호소했다. 최용신의 격려와 직접 몸으로 뛰는 추진력에 힘입어 공사는 불과 2개월만에 끝났다. 하지만 낙성식 당일에도 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총 공사비는 657원. 지출경비는 450원이었으며 빚은 모두 207원에 이르렀다. 쌀 20가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학예회를 겸한 낙성식 당일 이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고 말았다. 경비 보고를 들은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낸 돈이 217원. 낙성식 경비를 빼면 단돈 1원도 남지 않는, 그야말로 꼭 맞는 액수였다. 푼돈을 낸 주민들도 그 정도 액수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한 일이었지만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후 그의 활동은 다소 안정된 모습이었다. 학생은 늘어났고 주민들이나 유지들도 큰 관심을 보이며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1년 남짓이었다. 낙성식이 끝난 다음해인 1934년 3월 그는 더 공부해야겠다며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반대도 그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이 땅을 농촌운동의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는 말로 그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학생활이 길지는 않았다. 그는 불과 6개월만에 다시 샘골로 돌아왔다. 이유는 하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중병을 얻은 것이다. 전신에 무기력증이 들고, 다리가 무겁고, 호흡이 가빠오고,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손가락 끝 감각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시작해 몸이 퉁퉁 부어오르고 갈증이 일어나다 심하면 발병 3일만에 사망하는 무서운 병, 각기병(脚氣病)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찌들어 먹지 못한 최용신이 성인이 돼서도 심한 노동에 시달리다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다. 비타민 B1 부족이 원인이지만, 영양실조로 통하기도 하니 일리있는 해석이었다.
놀란 것은 가족이었다. 농촌에서 고생만 하다 공부한다고 일본에 간 딸이 심한 병을 앓고 있다니 급히 귀국을 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일본으로 가든 샘골로 가든 일단 고향 원산에서 몸을 돌보라는 것이 가족들의 얘기였다. 하지만 최용신의 발길은 다시 샘골로 향했다. 자신이 떠난 후 샘골에 대한 좋지않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나자 주민들의 협조도, 학생 수도 줄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을이 을씨년스럽게 바뀌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궈 놓은 샘골과 학교가 유일한 안식처로 생각됐다. 또 병들고 나이도 어렸지만 최용신은 이미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마을도 그를 원했던 것이다. 샘골로 돌아온 직후 한 노인의 증언을 들어 보면 그의 ‘존재’가 갖고 있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었어요. 최선생은 원래 병환이 중해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셨지요. 그런데 동네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이 오시던 날부터 선생이 일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제자리를 잡게 되고 마을에는 불안이 맑게 개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돌아갔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힘이었어요.”
社會葬으로 치러진 어린 처녀의 장례식
샘골로 돌아오자 최용신은 점차 기력을 회복했다. 조금만 더 건강에 신경썼다면 다시 이전의 몸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몸이 나아지자 그는 다시 일에 몰입했다. 10리 길을 오가야 하는 이웃 마을 야학을 빠지지 않았다. 또 한푼이라도 아꼈다. 볼 일이 있어 수원을 가려 해도 40리 길을 꼭 걸어 다녔다. 지원금을 줄여 왔던 YWCA에서 마침내 후원의 손길을 완전히 끊을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으니 살 길이 막막했다. 잡지 기고를 통해 여론에 호소해 봤지만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중국과의 전쟁 준비로 혈안이 돼 있던 일제의 착취 아래서 모두 먹고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농대 전신인 수원고농(水原高農) 학생들의 미약한 도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사업은커녕 자신의 생계마저 잇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시 샘골을 찾아 일에 파묻힌 지 4개월,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다. 이번 병명은 장중첩증(腸重疊症). 창자가 창자 속으로 뒤집혀 들어가는 병으로 “창자가 꼬인다”는 표현은 이 병을 빗대 한 말이다. 4개월부터 두 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에게 가끔씩 발병하는 것으로 치료도 쉽지만, 어른의 발병은 흔하지 않았고 치료도 어렵다. 각기병의 후유증일 수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과로에 심적 고통이 더해진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발병후 두차례에 걸쳐 창자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1935년 1월23일 그는 많은 이들의 기원을 뒤로 한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25세. 한창 때였다.
짧은 기간 동안 기적같은 일을 해냈으니 그는 당연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나이 어린 처녀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으니 그 또한 화젯거리였다. 짧은 기사였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중앙일간지는 그의 사망과 장례식을 주요기사로 처리했다. 이 기사들이 문학도였던 심훈의 상상력을 자극해 “상록수”가 나온 것이다. 최소한 샘골에서의 역사(役事)만큼은 심훈이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단지 최용신을 채영신의 캐릭터로 바꿔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을 뿐이다.
이제 최용신을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그의 외모와 사회활동가로서의 관련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최용신을 채영신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일도 어려워진다. 최용신은 심한 곰보였다. 또 당시 사회는 남녀 모두에게 결혼과 가족, 그리고 혈통의 연장에 최고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최용신도 그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자, 총명하고 의지력이 강한 데다 조숙하기까지한 곰보 소녀가 이같은 사회적 가치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는 일찌감치 결혼을 포기함으로써 그 가치와 결별했다. 자신의 능력과 학력에 걸맞은 남성이 얼굴 얽은 여인과 해로(偕老)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0대의 나이에 평생을 농촌계몽에 바치겠다는 강한 의지도 어느 정도는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런 그의 가슴을 뒤흔드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1924년 한창 예민했던 열 다섯 살 때 청혼을 받은 것이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청년 김학준은, 별 특기할 만한 점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백마 탄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잃어버린, 결혼이라는 부푼 꿈을 되살려줬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왜 하필 가난한 집안의 얼굴 얽은 곰보 여인에게 청혼했을까? 그의 총명함과 굳센 의지에 매료됐음이 분명하다.
죽는 날까지 결혼의 꿈 포기하지 않았던 최용신
수원고농 시절 최용신에게 도움을 준 것을 계기로 1939년 그의 일대기 “최용신의 일생”을 썼던 전 서울대 농대 류달영 교수는 이때 최용신이 심한 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얼굴보다 성격과 마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으니 결혼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과 ‘남자의 마음은 알 수 없으니 결국 이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적잖이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결혼과 가족을 택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해 약혼을 강행했다. 류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청년은 뛰어난 재주도 재산도 문벌도 없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집안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던 최용신의 태도에 비춰보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진정 결혼을 원했다. 그러나 결혼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혼은 그의 일생에 큰 부담을 줬을 뿐이다. 최용신은 협신신학교 시절 약혼자를 일본으로 가게 했다. 더 많이 공부한 남편을 얻고 싶어서였다. 또 약혼 후에도 농촌계몽의 꿈을 잃지 않았다. 결혼과 사회운동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얻고 싶었다. 타협점은 하나였다. 일단 사회운동가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후 엘리트 약혼자와 결혼하고, 그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은 약혼자를 두고도 건장한 청년 박동혁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최용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얼굴이 얽은 여인으로 결혼까지 포기했던 그에게 약혼자는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돈 없고 집안도 별 볼 일 없던 약혼자는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했을까? 최용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약혼자의 생활비와 학비를 보조했다. 그가 얼마나 약혼자에게 돈을 보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아끼고 아껴 돈을 보낸 것은 확실하다. 그의 영양실조에는 어느 정도 약혼자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또 그의 농촌활동은 약혼자에 의해 파국을 맞기도 했다. 1934년 그가 일본유학길에 오른 이유는 오직 약혼자 때문이었다. 학교를 인가받고 교실도 지었다지만 아직 할 일이 태산이었다. 가까스로 돌려놓았던 농민들의 마음도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약혼자를 찾아 고베길에 오른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약혼자가 변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그로부터의 소식도 끊겼기 때문이다. 남자와 사랑과 결혼에 대한 그의 갈구는 자신의 본연의 일을 망각하게 만들고 말았다.
일본으로 간 그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어도 6개월만에 돌아왔을까? 그의 귀국 원인이 중병이었던 만큼 병이 아니었다면 귀국 일정은 훨씬 뒤로 늦춰졌을 가능성이 크다. 농촌운동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사랑하는 약혼자의 품에서 수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석사나 혹은 박사 학위증을 들고 돌아와 대학의 강단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신은, 혹은 그의 운명은 그 길을 용납하지 않았다. 심한 병을 줬고 샘골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고통스럽게 삶을 끝내도록 만들었다. 죽는 순간까지 약혼자와 결혼에 대한 꿈을 꾸며 삶에 집착했던 그의 유서에서 더욱 커다란 애절함을 느끼게 된다.
‘김군과 약혼한 후 10년이 되는 금년 4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그가 사망한 1935년은 실제로 그가 약혼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유서에 따르면 3개월후 약혼자가 돌아오고 그는 갈망했던 가정을 일궈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사업을 하기로 돼 있었다. 천연두를 앓아 평생 혐오감을 주는 얼굴로 살아야 했던 여인, 가난에 찌들어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밥먹듯 끼니를 걸러야 했던 여인, 온 몸을 바쳐 민중을 위해 헌신해야 했던 여인.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보상받을 만했다. 그런데 왜 운명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려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기까지 한 그의 꿈을 앗아간 것일까?
그의 일생은 어빙 래퍼 감독이 만든 오래 된 영화 “기적”(59년)을 연상시킨다. 청순한 이미지의 캐롤 베이커가 아름다운 수녀로, 젊고 멋진 로저 무어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장교 역을 맡았다. 전장에서 포탄을 맞아 죽어가는 한 장교와 사랑에 빠진 수녀는 그를 살려준다면 평생을 신께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청년이 살아나고, 함께 떠나자고 유혹하자 그는 수녀복을 벗어던진다. 신과의 약속보다 사랑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형벌은 집요하게 그를 물고늘어지고…. 결국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신의 품에 안긴다. 그가 떠난 후 가뭄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는 다시 비가 내린다.
최용신은 자신의 신과 어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샘골 마을에 기적이 일게 해 준다면 자신의 일생을 그 마을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사랑 때문에 그 마을을 떠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가 보여줬던 불가사의한 힘과 발병, 그리고 죽음의 타이밍은 이같은 종교적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은 최용신에게 억지로라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했는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최용신은 ‘지지리 복도 없는 여인’이 분명하다. 하지만 신은 약속을 지키게 하고 영광을 선물로 줬다. 심훈이라는 작가를 통해 그에게 영생을 부여했다. 이제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최용신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영생에서 고통과 허무를 없애주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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