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42장 1~10절
[서론] 폭풍 속에서 던지는 질문과 삶의 두 길
우리는 인생의 예고 없는 폭풍 속에서 늘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왜 하필 나입니까?” 테렌스 말릭 감독의 영화《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 앞에 무너진 한 가정의 절규로 시작합니다. 영화는 욥기 38장 4절,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오프닝으로 제시하며 인생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던집니다. 영화 속 어머니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자기 권리와 이성을 주장하며 세상을 통제하려는 ‘자연의 길(Way of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도 절대자를 신뢰하는 ‘은혜의 길(Way of Grace)’입니다.
욥 역시 오랜 고난 속에서 친구들과 대립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하는 ‘자연의 길’ 위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이르러 그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지평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욥이 도달한 영적 회복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에 주는 구속사적·철학적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관념적 지식을 넘어 전인격적 대면으로 나아가라
본문 5절에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합니다. 욥은 전반부의 ‘듣다(샤마, שָׁמַע)’에서 ‘눈으로 직접 보다’를 뜻하는 라아(רָאָה)로 전환합니다. ‘라아’는 단순히 시각적 관찰을 의미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경험하여 통찰하고 인격적으로 깊이 대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대상화된 관념적 관계인 ‘나-그것(I-It)’과, 전인격적 대면인 ‘나-너(I-Thou)’로 구분했습니다. 욥이 고난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친구들이 주장했던 교리적 하나님은 분석하고 규정하는 ‘나-그것’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폭풍우 속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을 직면했을 때, 욥의 하나님은 비로소 인격적 고백의 대상인 ‘나-너’로 바뀝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관념으로 존재하시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눈앞에 나타나신 성육신(Incarnation)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교리와 전통이라는 ‘귀로 듣는 신앙’에만 안주할 때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눈으로 목도하듯 대면하는 ‘라아(רָאָה)’의 예배와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 중심적 이성을 내려놓고 은혜 아래 거하라
본문 6절에서 욥은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합니다.마아스(מָאַס)는 '스스로 거두어들이다’, ‘취소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무죄함과 하나님을 향했던 불평을 스스로 철회함을 의미합니다. 나함(נָחַם)은 도덕적 죄에 대한 뉘우침을 넘어, ‘깊은 숨을 쉬다’, ‘생각과 마음의 방향을 돌이켜 평안을 얻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의 주권 아래 마음을 놓아맡기는 영적 돌이킴입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계 상황(Paradox)에 다다랐을 때, 이성적 판단을 넘어 하나님께 자신을 내던지는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주장했습니다.
욥이 티끌과 재 위에서 ‘나함’과 ‘마아스’를 선언한 것은 이성적 해답 찾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깊은 바다로 자신을 던진 거룩한 도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신 모습이 바로 완벽한 ‘나함’의 실천입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내 뜻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을 심판대에 올리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효율성과 인간의 이성만을 의지하는 ‘자연의 길’을 거두어들이고(마아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마음을 돌이킬 때(나함) 참된 영적 자유를 얻게 됩니다.
셋째, 율법적 정죄를 넘어 도고하라
본문 10절은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고 합니다. 앞선 7절에서 하나님은 욥의 고백을 네코나(נְכוֹនָה) 즉, ‘올바르고 신실하다’고 평가하십니다. 교리적 정죄를 일삼던 친구들이 틀렸고,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탄식했던 욥의 태도가 옳았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10절의 슈브 셰부트(שׁוּב שְׁבוּת) 즉, ‘곤경을 돌이키시다’는 ‘포로 상태에서의 완전한 해방과 원상복구’를 뜻하는 관용구입니다. 이 완벽한 회복의 시점은 욥이 자신을 정죄하던 '친구들을 위해 도고(בְּהִתְפַּלְלוֹ בְּעַד רֵעֵהוּ, 베히트팔렐로 베아드 레에후)'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윤리의 출발을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직면하고 그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욥은 자신을 아프게 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위한 도고자로 서는 윤리적·영적 승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욥의 도고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의 ‘유비적(analogical) 예표’입니다.
회복의 역사는 나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할 때가 아니라, 나에게 상처 준 타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을 정죄하는 율법적 재판관이 아니라, 아파하는 타자를 위해 번제를 드리고 기도하는 ‘도고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십자가의 빛 아래서 써 내려가는 회복의 서사
영화《트리 오브 라이프》의 결말에서, 아들을 잃고 절망하던 주인공 가족은 시공간을 초월한 환상 속에서 모든 이들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은혜의 길을 걷지 않는 한 삶은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기는 기복주의적 보상으로 끝나는 동화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지나는 고통의 터널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거룩한 자리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폭풍우입니다.
. 관념을 넘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라아(רָאָה)합시다.
. 인간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엎드립시다(나함(נָחַם).
ㆍ타자를 향한 용서와 도고를 통해 참된 해방(슈브 셰부트(שׁוּב שְׁבוּת)을 경험하는 은혜를 누립시다.
이 신앙의 도약을 통해, 정죄와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과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