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한국사-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 / 여기서 그들이란 = 친일 역사 학자(이병도 등 그 후학)를 말함.
자 지금부터는 위 책에 나와있는, 1910년 한일합방 시에, 일본에 적극 협조해서 , 그 공로로 일본에게서 귀족으로 인정받고 금은보화를 챙긴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ㅋㅋ
근데, 아래의 76명 중에, 그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인물은 모두 64명인데, 그중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이고,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고 남인은 한 명도 없다.
즉, 한일 합방의 주역 = 나라 팔아 먹은 놈/년들 = 조선의 300년 집당 여당이었던 바로 노론이었다. ㅋㅋ
후작 이재완(사망, 본관 전주, 왕족, 승계 이달용)
후작 이재각(왕족)
후작 이해창(왕족)
후작 윤택영(순종의 장인, 노론)
후작 박영효(노론, 철종의 사위)
백작 이지용(노론)
백작 민영린( 민비(명성황후) 오빠)
백작 송병준( 자칭 노론, 승계 송종헌)
백작 고희경( 중인)
자작 이완용( 노론)
자작 이기용(노론)
자작 박제순(노론, 승계 박부양)
자작 조중응(소론, 승계 조대호)
자작 민병석(노론)
자작 이용식( 노론, 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김윤식(노론, 3.1운동 가담 작위 박탈)
자작 권중현(본관 안동, 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하영(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근택(노론, 승계 이창훈)
자작 임선준(노론, 승계 임선재)
자작 이재곤(노론)
자작 윤덕영(노론, 순종의 처숙부)
자작 조민희(노론)
자작 이병무(한미한 가문 출신)
자작 이근명(노론, 승계 이충세)
자작 민영규(노론, 승계 민병삼)
자작 민영소(노론, 승계 민충식)
자작 민영휘(본관 여흥, 노론)
자작 김성근(본관 안동, 노론, 승계 김호규)
남작 윤용구(노론, 작위 거부)
남작 홍순형(노론, 작위 거부)
남작 김석진(본관 안동, 노론, 작위 거부)
남작 한창수(노론)
남작 이근상(본관 전주, 노론, 승계 이장훈)
남작 조희연(노론, 작위 반납했으나 곧 중추원 고문이 됨)
남작 박제빈(소론, 승계 박서양)
남작 성기운(노론, 승계 성주경)
남작 김춘희(본관 경주, 소론, 승계 김교산)
남작 조동희(노론, 예우 정지)
남작 박기양(소론)
남작 김사준(노론, 의친왕의 장인, 독립운동 가담으로 작위 박탈)
남작 장석주(평민, 승계 장인원)
남작 민상호(노론)
남작 조동윤(본관 풍양, 노론, 승게 조중구)
남작 최석민(중인, 승계 최정원)
남작 한규설(노론, 작위 거부)
남작 유길준(노론, 작위 거부)
남작 남연철(노론, 승계 남장희)
남작 이건하(본관 전주, 노론, 승계 이완종)
남작 이용태(노론, 승계 이중환)
남작 민영달(노론, 작위 거부)
남작 민영기( 노론)
남작 이종건(노론)
남작 이봉의(소론, 승계 이기원)
남작 윤웅렬(노론, 아들 윤치오가 치안법에 관련되어 작위 박탈)
남작 이근호( 노론, 승계 이동훈)
남작 김가진(노론, 임시정부로 망명)
남작 정낙용(노론, 승게 정두화)
남작 민종묵(본관 여흥,북인, 승게 민규현)
남작 이재극( 노론)
남작 이윤용(노론)
남작 이정로(노론, 승계 이능세)
남작 김영철(본관 광산, 노론, 승계 김영수)
남작 이용원(노론, 승계 이원호)
남작 김종한(노론)
남작 조정구(본관 풍양, 노론, 작위 거부)
남작 김학진( 노론, 승계 김덕한)
남작 박용대(북인)
남작 조경호(노론, 작위 거부)
남작 김사철(노론)
남작 김병익(노론, 손자 김홍진이 사상범으로 작위 박탈)
남작 정한조(본관 동래, 소론, 승계 정천모)
남작 이주영(본관 경주, 소론, 승게 이규환)
남작 민형식( 노론)
남작 이항구(노론)
위 명단의 특징
1. 왕실에서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 섰다는 것이다.
후작에 선임된 이재완,이재각,이해창, 이해승 등은 모두 왕족 출신이며, 역시 후작에 선임된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아버지였다. 윤덕영은 윤택영의 형이고, 후작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2.노론 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론이 다수라는 점이다.
p.s.
노론이란 ?
노론은 1623년 광해군을 쿠테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숙종 초에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 서인은 재집권 이후 노론(남인을 다 죽이자 파)과 소론(남인을 쓸어버리지는 말자파)은 분당되었는데,
경종(장희빈(사약받고 사망)의 아들, 최무술이의 아들인 영조와 노론의 의해 독살되었다고 알려짐 by 조선왕 독살사건 1~2 / 이덕일 저)때 잠시 소론(경종 지지파)에게 잠시 동안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 멸망 때까지 300여년을 집권했다.
노론은
1. 극단적 친명 사대주의와 성리학(주자학) 유일사상 주의였다.
2. 대외적으로 모든 개방을 거부하며
3. 사회적 신분제의 완화 내지 폐지를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애 신분제를 강고히 했으며
4. 적서차별(본부인과 세컨드 부인사이에서 난 자식들 차이)과 남녀차별을 극대화했다.
5. 주자학과 다르면 같은 유학이라도 사문난적으로 공격했으며
6. 천주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을 극단적으로 억압했으며
7. 모든 사회 변화를 거부했다.
8. 한마디로 시대 흐름을 역행한 반시대적 정당이었다.
노론이 친명 사대주의를 주창한 이유는, 성리학(주자학)을 무기로 국왕과 권력투쟁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즉, 그들은 유일한 임금은 명나라 황제이고 조선 국왕은 제후로서 명나라 황제의 신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조선 국왕이나 자신들이나 같은 사대부로 신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상으로 노론은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국왕이 노론과 반대되는 행보를 걸을 때는 독살(,문종 독살, 예종 독살,경종 독살, 정조 독살 등, 조선왕의 1/3은 독살 당했다 by 조선왕 독살사건 / 이덕일 저)도 서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노론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부족한 반면 개인과 집안, 당파의 이익에는 민감했다. 그러니 왕조 국가에서 나라가 망할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가에 충성하기보다는 개인과 집안의 이익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일제 수작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객관적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 위 수작자의 대부분이 노론이다~ ㅋㅋ
그런데, 이병도(노론 후손, 친일 인명 사전에 등재)가 일제 역사 학자 쓰다의 애제자이고, 그가 해방후 한국 학문 권력을 쥐었고, 그의 후학들이 현재도 한국 학문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다~ ㅋㅋ ==> 결국 우리가 중,고교에서 매 맞아 가며 아무런 의미 없이 무조건 외었던 그 역사가 일제 식민사관과 노론 사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란 말입니다~ ㅋㅋ
노론 ==> 친일파 ==> 친미/숭미파 ==> 서울 광장에서 미국을 외치며 가스통 켜고 기도드리는 개.독교 종자들~ ㅋㅋ ==> 사대의 대상이 명나라 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지금은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ㅋㅋ
이덕일 KBS 방송 강좌 보기 : http://blog.daum.net/dream6838/3128?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dream6838%2F3128
첫댓글 박씨가 4명이네요, 을사오적 중 저 유명한 박제순을 비롯하여 박제빈, 박기양이 일본 귀족으로 훈작을 받았네요. 모두 반남박씨네요. 반남은 조선 중후기 명벌이었지요. 역시 친일에도 명문반열에 올라왔네요. 후에 죽을 때 까지 중추원 부의장으로 영화를 누렸던 박영효도 있고요. 그리고 여기는 없지만 박중양 등등.....
박제빈-박남박씨
1907년 승녕부의 부총관에 임명되었고 친일 활동에 적극 나섰다.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을 때 민병석, 김윤식 등과 함께 장례식에 참가하여 조문한 것이 한 예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찬의로도 임명되었다. 1911년에는 경학원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에도 가담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박제빈의 작위는 박서양에게 습작되었는데, 박서양의 양자인 박승방이 습작을 거부하고 독립 운동에 나서 광복 당시에는 습작 받은 후손이 없었다.[1]
박기양 -반남박씨 박제억의 아들이나 박제만에게 입적되었고, 1888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올랐다.
대한제국 관리를 지내면서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적극 반대하였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때는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기도 했으며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지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일제의 통치에 협조했다. 1918년 서화협회 고문, 1921년 친일 유림들이 모인 경학원의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부인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이 가운데 차남이 연극인으로 유명한 박진이다.[1]
우리 시조왕의 얼굴에 똥칠을 한 반납박은 우암 송시열에 대적했던 박세체,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를 목숨바쳐 반대했던 최대의 충절 박태보, 실학의 태두 박지원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 등 훌륭한 인물의 산실었는데, 역시 권력의 달콤함에 빠지니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