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17일 낮 12시25분, 소흑산도 分校 교사 鄭善萬(정선만), 서울예고 孫美廷(손미정)양, 마라톤 국가대표 金元卓(김원탁)씨 등 3명의 聖火(성화) 點火(점화)주자가 서울 잠실 주경기장의 성화대 승강판을 타고 올라가 화로에 성화봉을 댔다.
성화의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 공군 제18전투비행단 소속 A-37연습機 다섯 대가 창공에 5色 줄을 그리면서 주경기장 위를 지나갔다. 성화 점화와 동시에 경기장 통과라는 절묘한 타이밍은 서울올림픽의 역사적인 성공을 알리는 序幕(서막)이었다.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보름간 치러진 서울올림픽은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를 포함해 160개국 1만3304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의 대회였다. 서울올림픽의 성화가 꺼진 지 15년. 서울올림픽은 단지 성공개최라는 사연만 남긴 것이 아니다. 그 이후 한국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큰 사건이 서울올림픽이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살리며 국제무대에서의 발언권을 높인 것도, 국제적 신인도를 높이며 선진국으로 도약의 기치를 올린 것도 서울올림픽이 가져다 준 효과였다. 그리고 그 성공의 뒤안길에는 미국과 일본 등 우방국 정보기관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연도 묻혀 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개최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대회 유치도 그랬고 대회 준비, 대회 진행도 모두 힘들었다. 그 어려운 과정의 출발점은 1979년이었다.
당시 朴正熙 대통령은 ▲경제 高度 성장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고 ▲북한의 제3세계 외교 攻勢에서 우위를 점해 南北 대결의 실질적인 해결의 계기를 마련하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1988년도 하계올림픽을 유치할 것을 지시했다.
1979년 10월, 鄭相千(정상천) 당시 서울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88올림픽의 서울유치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朴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는 대한체육회의 올림픽 유치활동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올림픽 유치의 주역이던 朴鐘圭(박종규) 회장이 사실상 체육회의 일상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政局이 혼란스럽게 되자, 올림픽 유치사업은 「冬眠(동면)」에 들어갔다.
1980년 8월27일 全斗煥 대통령이 제9代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88올림픽 유치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는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事案을 특별한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88올림픽 유치신청서를 기일內에 제출토록 지시했다.
서울市는 그해 12월2일자로 88올림픽 유치 후보국이 될 뜻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공식통보했다. 1981년 2월26일,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人便(인편)으로 한 트럭분에 달하는 유치신청 서류를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에 제출했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88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79명의 IOC 위원들이 나고야와 서울을 놓고 표대결을 펼쳤다. 드디어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수백 명의 보도진과 유치위원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봉투 깊숙이 있던 서류를 꺼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울(Seoul)』 한국인들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한 마디였다.
朴英秀(박영수) 서울시장, 曺相鎬(조상호) 대한체육회장,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우리 측 관계자들은 일제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52대 27로 한국勝.
「南朝鮮 인민들이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반대하고 있다」
북한은 88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된 지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올림픽 개최에 대해 언급했다. 다음은 1981년 12월3일자 로동신문 내용.
<최근 南朝鮮의 군사 파쑈 분자들은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된다고 한 것과 관련하여 괴뢰 당국의 고위층과 관계 요원들, 그리고 어용 나팔수들을 내세워 매일 같이 괴이한 소란을 피우고 있다. 이번 기회에 사회주의 나라들과 쁠럭 불가담 나라들에 접근하여 국교 및 공식관계를 맺어 보려는 괴뢰들의 책동은 南朝鮮을 그 무슨 「국가」로 인정받아 보자는 것이다.>
북한은 그 후로도 「南朝鮮 인민들이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반대하고 있다」는 등으로 宣傳을 계속했다.
북한은 이때부터 서울올림픽이 南北의 역학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로 판단하고 그 대응책으로 테러를 준비하게 된다. 우리 측 정보기관에 따르면, 북한은 1981년 7월 全斗煥 대통령이 아시아 5개국 巡訪(순방)길에 올랐을 때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살해를 계획했고, 1982년 2월 아프리카 및 캐나다 순방길에 올랐을 때도 그랬다.
1983년 10월8일, 북한은 北京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 정부에 미국ㆍ남북한이 참석하는 이른바 「3者회담」을 제의했다. 바로 다음날, 북한은 버마(現 미얀마)의 랑군에서 이곳의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한 우리 사절단에게 폭탄테러를 가했다. 徐錫俊(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정부 요인들이 피살되고 14명이 부상했다. 테러의 표적이었던 全斗煥 대통령은 도착이 늦어 무사했다.
당시 安企部 해외담당 차장이었고 나중에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이 된 朴世直(박세직ㆍ70ㆍ現 한국청소년마을 총재)씨는 사건 당일 미국 CIA 서울지부장과 朴俊炳(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을 초청해 安企部 청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1시경 悲報(비보)를 접했다고 한다.
朴씨는 일단 북한의 폭탄테러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安企部, 경찰, 軍에서 對共 및 폭발물 처리 전문 요원 13명을 선발해 이튿날 버마로 떠났다. 버마 당국의 엄정한 수사와 우리 조사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건발생 25일 만에 범행의 진상이 규명됐다.
체포된 강민철, 진모가 북한 공작원으로 드러남에 따라 버마 정부에서는 북한에 대해 정부 승인을 취소하는 한편, 11월4일 對北 斷交(단교) 조치를 발표하고 48시간 내에 全공관원이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북한이 그 시기에 테러를 자행한 1차적 목표는 국가원수를 살해함으로써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서울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의 서울올림픽 「물타기」 전략, 「공동개최」
아웅산 사건 半年 후인 1984년 3월30일, 북한은 LA올림픽 참가 선수 명단 제출 마감일을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서 단일팀을 구성하자는 제의를 해 왔다. 북한은 LA올림픽 개막에 임박해 宣傳 목적의 회담을 제의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4~5월에 걸쳐 판문점에서 세 차례의 南北체육회담을 가졌다. 북측은 회담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4월9일 첫 회담에서 북측은 아웅산 사건과 崔銀姬·申相玉 납치사건을 완강히 부인하고 도리어 우리 내부 문제에 대한 중상과 비방을 계속하다 급기야 일방적으로 퇴장했다.
제2차 회담에서는 우리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 성냥갑을 던지고, 북한 기자들까지 합세해 기물로 책상을 두드리며 욕설을 퍼붓는 등 행패를 부렸다. 5월25일 열린 제3차 회담에서는 이미 전날 공산권에 동조해 LA올림픽에 불참하기로 결정해 놓고도 회담장에 나와서는 우리 측에게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방해한 사실을 시인, 사과할 것을 요구하며 회담을 깨버렸다.
1984년 末 북한은 본격적으로 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쿠바의 카스트로를 前面에 내세웠다. 카스트로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카스트로는 미국에서 개최키로 한 汎미주대회와 서울올림픽 대회의 장소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IOC 측에 올림픽 운동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1984년 12월16일, 북한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 김유순은 사마란치에게 편지를 보내 88올림픽 개최지 변경을 요구하고 나섰다. 金위원장은 『군사분계선 上에서 交戰(교전)상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는 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경기대회할 도시가 교전 상태에 있으면 통지문으로써 그를 취소할 수 있다고 지적한 憲章(헌장)의 요구를 하루 속히 실행할 것을 절박한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서울올림픽경기대회가 우리나라의 남쪽에서 열리는 것도 반대하며 북쪽에서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올림픽의 안전문제로 들먹였던 「개최지 변경론」은 1984년 12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89차 국가올림픽위원회(IOC)특별총회에서 서울대회에 세계의 모든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참가할 것을 다짐하는 「로잔 결의안」이 채택됨으로써 수그러들었다.
金正日의 대한항공機 폭파 親筆 지령
북한의 金日成ㆍ金正日 父子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를 결심하게 된 것은 국제적 고립으로 초조해졌기 때문이었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로써 서울올림픽을 저지하려고 기도한 지 4년 만에 그들은 다시 폭력적 수단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金正日은 19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편 보잉707기가 버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 폭발, 추락하는 사건이 터지기 전인 10월7일 金賢姬(김현희)와 金勝一(김승일)에게 『88서울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親筆(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 두 공작원은 11월10일 『11월28일 23시30분 바그다드發 서울行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라』는 최종 지령을 받고 이 비행기를 폭파한 것이다.
1987년 11월29일,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의 범인 金賢姬가 바레인에서 체포됨으로써(主犯 김승일은 자살) 북한의 야만적인 행위가 白日下에 드러났다. 국제사회도 북한에 대해 강력한 제재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反테러법 및 무기수출 통제법에 의거, 다음해인 1988년 1월2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미국은 지난해 4월30일 발표한 연례 세계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비롯한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 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함으로써, 북한을 1988년 1월 이후 14년째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다.
朴世直씨는 『북한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등으로 인해 제3의 테러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88서울올림픽을 무사히 치른 한 요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서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진 것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115명의 陰德(음덕)이었다』면서 『이 사건은 異域萬里에서 귀국길에 오른 中東근로자들을 죽인 金日成을 어떤 논리로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좌경세력에도 타격을 입힌 셈』이라고 했다.
在野의 공동주최 주장
곤경에 처한 북한을 도와준 것은 뜻밖에도 남한의 在野(재야), 학생 그리고 일부 야당 세력이었다. 1988년 봄부터 재야, 학생세력들은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주장을 들고 나왔다. 5월11일, 35명의 在野 인사들은 남북한 양측 정부에 서울올림픽 공동개최 협상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5월28일에는 이른바 「전국 67개 민주 사회단체」가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범민주단체선언」을 발표하는 가운데, 서울올림픽의 공동개최를 요구하였다. 일부 운동권 대학생들은 북한의 공동주최 주장에 동조하는 시위를 벌였다. 운동권 지하서클인 소위 「무등산 결사대」는 1988년 8월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남북한 공동 올림픽 개최를 선언하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朴世直 당시 올림픽조직委 위원장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동개최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在野 세력들의 攻勢(공세)에 대응해 나갔다. 정치권을 설득하는 일에 사마란치 위원장도 나섰다. 사마란치는 1988년 6월 서울을 방문, 尹吉重(윤길중) 민정당 대표, 金大中(김대중) 평민당 총재, 金泳三(김영삼) 민주당 총재,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초청해 IOC와 남북한 간의 협상과정을 브리핑하기도 했다.
국회는 7월9일 임시국회에서 북한선수단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全斗煥 대통령 시절, 『독재체제 아래서 서울올림픽이 강행되면 이는 나치下의 베를린올림픽과 같게 될 것이다』고 연설했던 金泳三 총재도 서울올림픽 적극 지지로 돌아섰다. 在野ㆍ학생 세력의 공동주최 주장은 이때부터 급속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내 북한은 서울올림픽 최종 엔트리 마감일인 9월2일 북한 NOC 성명을 통해 不參(불참)을 선언했다.
뮌헨 올림픽의 교훈, 親切보다 安全이 우선
북한과의 줄다리기와 함께 정부는 대회의 성공개최의 관건이 안전문제라고 보고 이에 대한 준비에 만전을 기해 나갔다.
우선 1987년 3월 안전대책위원회를 정점으로 13개 정부 관계부처 170명 합동으로 안전통제본부를 구성했다. 1988년 2월3일 安企部 주도의 안전통제본부는 출입국 관리ㆍ對테러 대책 등 20개 분야별 대책을 확정하고, 요인 신변 보호대ㆍ경기장 경비대ㆍ선수촌 경비대 등 16개 기능별 전담 조직을 편성 운영하게 됐다. 아울러 264개 대회 관련 시설에 현장 안전본부를 설치했다.
安全분야의 사령탑은 陸完植(육완식) 당시 안전통제본부장이었고, 서울올림픽의 안전 업무에 대한 총체적 기획과 책임을 담당했던 이는 黃圭雄(황규웅ㆍ60) 당시 안전국장이었다. 黃圭雄씨는 『서울올림픽 준비 및 대회기간은 살얼음을 딛고 발길을 떼는 것 같은 초조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1972년 뮌헨올림픽 대회 도중 터진 테러사건은 통제본부의 머리를 짓눌렀다. 서울올림픽을 두 달 앞둔 1988년 7월초에 조직委는 1974년 뮌헨올림픽 때의 안전관리 책임자였던 슈라이버(당시 뮌헨 경찰국장)씨를 초청했다. 슈라이버씨는 안전관계자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의 안전관리가 어려운 것은 최대의 안전과 최소의 불편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뮌헨올림픽에선 高位 정책수립가들이 최소의 통제로 최대한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면서 경비원 수를 줄이고, 安全시설을 축소하는 등 친절에 주력하다가 流血(유혈)의 올림픽을 自招(자초)했다. 安全이 친절이나 불편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슈라이버씨는 뮌헨올림픽 때의 특별법 제정 사례를 소개했다. 조직委에서는 이것에 착안, 1988년 8월5일에 공포된 「올림픽 평화를 지키기 위한 법률」의 제정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黃圭雄씨는 1986년 1월8일 조직委 안전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부 안전 유관기관과 협조해 호텔과 경기장, 식당 등의 요원들에게 「부드러운 안전」을 요구했다. 딱딱한 규율이 몸에 밴 軍과 경찰은 한걸음 뒤로 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창구에 내세워 친절하게 선수단과 관광객들을 대하게 했고, 軍·警은 뒤에서 이들을 뒷받침하게 했다.
그는 올림픽 기간 중에는 매일 일과시작 전 IOC 본부가 있던 신라호텔에서 IOC안전대책반의 코마르씨와 조찬을 겸한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이 회의는 주로 우리 측이 안전에 대해 설명해 참가국의 이해를 돕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협조를 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이듬해인 1981년 하반기부터 「올림픽 방해 무장 특공조」에 대한 장기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5년부터는 「제3국에서 한국인을 가장, 침투하고 테러를 가해 세계 각국이 올림픽 참가를 포기토록 한다」는 기본전략을 수립하고 88서울올림픽 저지를 위한 특수부대를 조직한 것이다.
우리가 얻은 첩보에 의하면, 1988년 2월11일,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 정영진은 평양 공관장 회의를 다녀온 뒤 대한항공 858편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재발될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그는 『88올림픽 이전에 지난번 대한항공기 사건과 비슷한 일이 北朝鮮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서방국가에 의해 또 자행될 것』이라고 했다.
赤軍派 2인자 마루오카 오사무 체포
朝總聯(조총련)과 일본 赤軍派(적군파)의 서울올림픽 방해 공작에 대한 첩보도 입수됐다. 朝總聯 중앙본부는 1988년 5월 말 對韓 공작을 독려하기 위해 중앙본부 사무총국장 권순희 등 간부 4명을 나고야에 파견했다. 권순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올림픽을 저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승리』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朝總聯이 올림픽 南北 공동개최를 지원하기 위해 全大協(전대협)의 8ㆍ15궐기대회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입수됐다고 한다.
1988년 5월24일, 미국 워싱턴 토론회에 미국 측 대표로 참석한 美 국무성 차관 더윈스키는 『제24회 서울올림픽은 북한의 테러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우려했다. 수집된 첩보에 의하면 일본 赤軍派는 일련의 테러를 준비 중이며, 이들의 목표에는 서울올림픽 시설 파괴, 한국 要人(요인) 및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기타 인사 납치, 해외 한국공관 및 국내 외국공관 占據(점거), 무장봉기 지원 등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일본 赤軍派는 韓·美·日 3國이 연대해 올림픽 협력하는 것에 대해 대항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레바논에 거점을 둔 일본 적군파는 「Political Review」誌 1988년판에서 「韓·美·日 3者 동맹은 아시아 인민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변했다」고 지적하고 「모든 인민들은 韓美日의 올림픽 협력체제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88년 4월 일본 외무성은 북한에 체류중인 요도號 납치범이 수시로 북한을 출국, 제3국에서 일본 赤軍派 요원과 접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첩보를 제공받았다. 우리 정보기관은 赤軍派의 이와 같은 동향이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테러사건의 사전 준비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에 들어가기도 했다.
1988년 4월 일본 警視廳(경시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赤軍派 간부인 마루오카 오사무(丸岡修ㆍ53)는 일본 赤軍派 2인자로서 외국에서 활동하던 중 1987년 11월 일본에 잠입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한국 요인을 암살하려던 메모를 소지하고 있었다. 체포 당시 그가 삼키려다 실패한 메모용지의 암호를 분석한 결과, 암살 대상 한국 정부 요인들의 이름과 「피바다로 물들이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암살대상 명단에 적힌 이름에는 全斗煥 대통령, 盧泰愚 민정당 총재의 이름 등 정부 요인의 이름이 있었다.
1970년 요도號 납치사건 당시 16세로 가장 어렸던 시바다 야스히로(紫田泰弘)는 1985년 몰래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돼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그는 체포 당시 북송교포 이황(일본명 나카오 아키다)이란 이름의 위조여권을 갖고 있었다. 시바다 야스히로의 체포와 관련, 북한에 생존해 있는 요도號 납치범들은 아사히 텔레비전과의 위성중계를 통해 『시바다의 체포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일본 赤軍派들이 북한의 사주 및 배후지원을 받아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포착되기도 했다.
朴世直 당시 위원장의 회고다.
『IOC에서 개최지를 뮌헨으로 하자는 등 서울올림픽의 안전에 대해 의구심을 갖던 상황에서 북한의 테러 한방이면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할 나라는 없습니다. 對人테러도 문제지만, 개막식 의상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의 對物테러도 간단히 올림픽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어요. 오히려 북한의 테러 위협이 반사작용을 일으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다고 생각됩니다』
「위조·변조 여권 식별 전산망」 설치 운영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韓·美·日 3국 정보기관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韓·美·日 3국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각종 테러 관련 危害(위해) 첩보를 입수해 유관기관에 전파하고 처리하는 데 긴밀하게 협조했다.
朴世直씨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에서 일본과 CIA가 협조를 한 덕분에 金賢姬를 체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물론 서울올림픽의 안전을 위해 서독ㆍ영국ㆍ프랑스ㆍ이스라엘 등 26개국 35개 우방국의 정보기관과 협력체제를 구축했으며, 특히 미국과 일본 정보기관의 협조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울올림픽 조직委 안전국장을 맡았던 黃圭雄씨는 당시 미국과 일본에 대한 共助요청은 『당연히 대회를 치르는 우리가 한 것』이라며 『각국에서는 대회에 참가하는 자국 선수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안전에 관한 정보를 우리 측에 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세계 테러에 대한 자료나 해결능력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라면서 『돌발적인 테러가 발생했을 때 그 처방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고, 평화와 안전, 그리고 사회질서를 존중하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온 결과』라고 말했다.
朴世直 당시 조직委 위원장은 『그동안 미국, 일본 등 우방국과의 정보교류는 계속돼 왔지만 서울올림픽 유치 이후 1983년 아웅산 사건이 발생하는 등 서울올림픽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가 계속되자 미국은 CIA의 人力을 보강하고 그들의 북한 정보를 우리 측에 100%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과는 요도號 사건 때부터 일본 경찰청과 총리실 산하 정보기관인 「內閣調査室(내각조사실)」과 共助를 해 왔다』면서 『최근 美 CIA(중앙정보국)와의 정보교류가 서울올림픽 당시만 못한 것 아니냐』면서 안타까워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 등 정보기관에서 전달된 첩보는 총 141건으로 국제테러분자 관련 첩보 68건, 僞造(위조)ㆍ變造(변조)여권 첩보 22건, 망명 企圖(기도) 첩보 2건, 기타 30건 등이다.
일본의 경찰 및 공안 당국이 취한 엄격한 출입국 관리 업무와 통제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특히 일본을 통한 테러범의 침투에 대비해 1988년 4월부터 두 달간 韓日 간 「올림픽안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해 국제테러에 공동 대처하기로 하는 등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했다.
黃奎雄씨는 『일본 측에서 야쿠자 등 기피인물 명단을 우리 측에 제공했고, 김포공항에서 이들의 입국을 취소하는 등 상호 협력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우방국 정보기관과 美 FBI(연방수사국), CIA 등 관계기관이 갖고 있는 세계의 테러리스트 자료를 우리 쪽 안전관리 컴퓨터 터미널과 연결시켜 위험 인물의 入國(입국)을 예방하도록 했다.
국제테러 관련 정보 수집에 따라 확보된 자료는 즉각 법무부로 보내 전산관리 했다. 安企部 및 미국 정보기관ㆍ美8군ㆍ일본 경찰청ㆍ이탈리아 정보기관ㆍ대만 안전국ㆍ인터폴(국제경찰) 등 국내외 각종 정보기관에서 제공한 국제 테러용의자 첩보에 따라, 1988년 1월1일부터 10월2일까지 법무부에 신규 입국금지 및 전산 관리토록 조치한 자료는 64개국 5274명에 달한다.
1988년 2월1일 미국 측은 정보협력차원에서 韓美 간 보유하고 있는 각종 위조ㆍ변조 여권 관련 정보자료를 상호교환하기 위해 법무부 및 김포공항에 「위조ㆍ변조 여권 식별전산망」(Red Net)을 설치ㆍ운영했다.
이렇게 입력된 전산망을 바탕으로 1988년 1월부터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한국 입국을 시도하던 국제테러 용의자 또는 여권 위조 혐의자 33명(12개국)을 입국심사 과정에서 적발해 퇴거조치했다. 이 중 국제테러 용의자는 7개국 20명이었으며, 여권 위조 혐의자는 7개국 13명이었다.
적발해 낸 국제테러 용의자는 일본 赤軍派 소속인 니시 텐페이(西天平), 시노하라 사토시(原敏), 세오 미케오(妹尾美喜夫)등 세 명이다. 안전통제본부는, 입국심사 과정에서 적발된 국제테러 용의자를 포함, 올림픽 패밀리 1만6315명의 신원사항을 전산테이프에 입력해 법무부 및 美 FBI에 신원조회를 의뢰했다. 이 중 7개국 9명의 테러 관련 신원 특이자가 드러나 이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향을 감시하기도 했다.
레바논 보도진의 일원으로 입국한 기술자인 사라라 왈리드는 프랑스에서 테러범을 소탕할 때 추방된 西베이루트 거주 좌익계 시아派(파) 테러범인 것으로 확인됐고, 서독의 카메라맨인 볼프강 그람스는 서독 赤軍派(RAF) 소속으로 경찰이 수배중인 자와 이름이 같았다. 모로코의 복싱연맹 배심원인 모하메드 벤키란(Benkirane)은 이슬람 정통 테러범과 이름이 비슷해 추적대상 리스트에 오르는 등 7명이 대상에 올랐다.
올림픽을 불과 보름 앞두고 赤軍派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입국 시도가 이어졌다. 9월2일 북한 및 일본 적군파와 연계된 국제 테러리스트 가네코 에이코 등 4명이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국내 입국을 시도했으나 적발되었다. 9월4일에는 방콕에 체류하는 동안 배터리, 전선 등을 구입하고 수하물 검색에 불응하는 등 거동이 수상한 이란 외교관 여권 소지자 스마지 등 3명의 국내 입국 기도를 적발하였다.
9월27일에는 일본 적군파 테러리스트 20여 명이 조당 2~3명씩 편성해 레바논 비밀기지를 출발했다는 정보와 함께, 이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미국과 이스라엘 선수단에게 테러 공격을 준비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안전통제본부를 비롯한 관계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美 FBI와 CIA의 對테러 교육
특히 美 FBI(연방수사국) 「폭발물 자료센터」 등 전문기구에서는 한국 측에 폭발물 탐지ㆍ폭발물 탐지犬(견) 훈련 요령 등을 제공했고, 美 CIA에서는 테러사건 분석자료ㆍ테러사건 진압 지휘 요령 등 對테러 「노하우」를 전수했다.
조직委에선 美 CIA전문 교관단을 초청해 安企部·내무부ㆍ국방부 등에서 선발된 요원들을 대상으로 1987년 중 경호와 對저격훈련 등의 교육을 실시했고, 1988년에는 위조여권 식별ㆍ외사감시ㆍ공항보안ㆍ人質犯(인질범)의 심리연구 및 협상기법 등의 교육을 받았다.
1988년 올림픽 직전까지 13차례에 걸쳐 미국 對테러 전문 요원 42명이 訪韓해 對테러 전문교육을 하고 돌아갔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閔丙敦(민병돈) 前 육사교장은 1987년 10월 당시 美 특수부대인 델타포스(Delta Force) 부대원들과 함께 한 對테러 훈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특전사 對테러 실내훈련장에서 우리 대원들이 서로 마주보고 實彈(실탄) 사격을 실시했다. 특전사 707특수임무 대대원들과 함께 훈련하려고 內韓한 미국 델타 부대원들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가 국제 테러리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올림픽경기를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한 1981년부터이고 對테러 대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86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둔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때 安企部의 노력으로 이 분야 선진국인 미국과 프랑스 등의 관계기관 내지 對테러부대의 지원을 받아 교육·훈련과 신형 장비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사실 對테러작전에서의 첫번째 어려움은 이 싸움이 프로 살인범들과의 대결이라는 데 있다. 즉 국제테러범들은 여러 번 항공기 납치, 폭파, 살인 등을 자행한 歷戰(역전)의 흉악범들임에 비하여 우리 대원들은 정신력과 체력, 전술과 戰技(전기)는 뛰어나지만 「살인」 경험이 없는 선량한 젊은이들이다. 선량한 인간은 부득이 살인을 해야 하는 순간에 주저하게 된다.
선량한 우리 대원들이 테러범들과 맞닥뜨려 그들을 죽여야 할 때 과연 주저없이 그들에게 실탄을 발사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캄캄한 실내 전투사격장에서 고글(goggle, 夜視장비)을 쓰고 상대방의 왼쪽 가슴(심장)에 실탄을 사격하는, 극히 위험한 훈련을 반복했다.
왼쪽 가슴 위에 방탄복의 천을 오려서 두껍게 여러 겹을 덧씌운 「私製(사제)방탄복」을 입히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전우)의 심장에 실탄을 발사하는 쌍방사격훈련을 하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었다』
올림픽이 가까워짐에 따라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등 각국 정보기관 요원, 올림픽 관계자, 주한 외교사절 등 16개국 28개 기관의 236명이 안전통제본부를 찾기도 했다.
안전통제본부는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이 제공한 정보자료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對테러 기본 정보자료집으로 만들어 43종 8265부를 발간했다. 이 책자들은 대통령 경호실 등 유관기관에 배포해 88서울올림픽의 안전활동 업무수행에 큰 보탬이 됐다고 한다.
航母 엔터프라이즈號와 미드웨이號 한반도 배치
美 에너지省은 1984년 LA올림픽 당시 核사고 조사팀(NEST: Nuclear Emergency Search Team)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1987년 8월 안전통제본부에 88올림픽 기간 중 核사고 조사업무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안전통제본부는 이 제의를 과학기술처에 의뢰했고, 과학기술처 간부가 미국에 출장해 核사고 조사팀의 현황을 청취하고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韓美 간 협의에 따라 한국 核사고 조사팀을 안전본부內에 설치했다.
조사팀의 임무는 核을 이용한 테러에 대한 정보분석, 국내 주요 방사선 시설의 동향파악은 물론, 주요 올림픽 시설 및 김포공항에 대한 방사능 감시와 核 및 방사능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1988년 9월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소련 선수단의 반입 물품을 검사한 결과, 微量(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확인되었으나 사소한 것으로 밝혀져 반입물품을 보세창고 보관하다 반출토록 조치했다고 한다.
88서울올림픽 대회 기간 중 북한의 무력 도발 기도를 억제하기 위해 우리 軍은 韓美연합 작전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美 국무부는 더윈스키 차관을 두 차례 한국에 보내 안전에 관한 韓美 양국의 협조체제를 만들도록 했다. 黃圭雄 당시 안전국장의 말처럼, 서울올림픽 安全의 제1선은 韓美동맹체제, 제2선은 軍警의 경계, 제3선은 경기장 진행요원들의 안전관리, 제4선은 조직위 관계자들이었다.
올림픽 기간 중 美軍의 「무력시위」도 이어졌다. 美軍은 美 7함대 항모인 미드웨이항모전투단과 엔터프라이즈 航母(항모) 전투단과 뉴저지 전함 전투단 등 막강 해상전력을 한반도 근해지역에 展開(전개)하고 극동지역 주둔 美軍의 훈련을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실시했다.
주한미군은 공격헬기, 스팅어미사일 등을 수도권 주요 지점에 배치했다. 美軍은 對北 감시활동도 한층 강화했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와 SR-71기, 전술위성 등의 항공정찰을 통한 정보수집 활동을 늘리는 등 조기경보 및 전장 감시 체제를 강화했다고 한다. 주한 美 공군의 제8 및 15 비행단을 최대한 운용, 24시간 공중 초계 임무와 대기 태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우리 軍도 1988년 8월부터 데프콘3 수준을 유지하면서 단계적으로 對北경계 수위를 높여 대회 직전에는 「진도개 하나」에 준하는 고도의 대비태세를 유지했다.
「平祝」에 50억 달러 투입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을 즈음, 북한은 고립을 만회하기 위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했다. 마치 가난한 집에서 빚을 내 분수에 맞지 않은 화려한 잔치를 치른 뒤 고스란히 빚더미에 올라앉는 형국이었다. 국토통일원이 밝힌 1989년 북한 경제 종합평가에 따르면, 당시 북한이 청년학생축전에 쏟아 부은 여파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1989년 북한은 제3차 7개년 계획(1987~1993년)의 3차 연도를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3차계획의 成敗(성패)를 가름할 수 있는 3차 연도에서 계획된 경제건설 사업보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에 역량을 총결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1987년부터 3년간 「平祝」 개최와 관련해 총 50억 달러(약 6조원)를 지출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기간 중 5ㆍ1경기장(능라도 경기장), 능라도 「물놀이場(수영장)」, 능라도경기장과 문수거리를 연결하는 현수교 등을 건설했다. 만경대 안골에는 10여 개에 이르는 체육경기장과 체육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 밖에 청년학생축전 참가자들의 민박시설로 만든 광복거리와 청춘거리 건설 등 총 120여 개 단위 건설공사를 벌였다.
북한은 1989년 원유도입량이 1988년도의 316만4000t보다 18% 이상 줄어든 260만t을 기록했고, 이에 따라 정유공장을 74%밖에 가동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정치적 宣傳(선전) 목적에 따라 개최한 「平祝」의 과다한 재정 지출 때문에 1980년엔 2차 7개년 계획의 조정기인 1986년(2.1%) 이후 가장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1995∼2000년)를 재촉하게 됐다.
1988년 10월2일 오후 7시 세계의 이목은 다시 잠실 주경기장으로 쏠렸다. 아직 기울지 않은 한가위 보름달이 淸明(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성화대 위로 불끈 솟아올랐다. 대회에 참가한 공산권 국가를 포함한 모든 선수단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로 惜別(석별)의 情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무고한 人命을 살상해 가며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던 金日成ㆍ金正日 父子는 그순간 50억 인류가 하나가 된 잔치의 이방인으로서,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전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