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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에 달 뜨면 서 상 은
한때 중원을 누비던 초 패왕 항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성공을 하고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는 무사요 영웅이요 제왕이었다. 결코 무식하지 않았기에 한(漢)나라와 일흔두 번의 싸움에서 한 번 지고 모두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자였다. 결국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살로써 장부답게 최후를 장식했다.
그는 왜 성공하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했을까? 그 말이 어느 필부들이 흘린 의미 없는 말이었다면 오늘까지 고전 속의 명언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부귀공명 출세와 귀향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그 무덤에 찾아가 물어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고향, 고향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랐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꿈을 꾸고 나래를 폈던 곳, 황토 속에 태를 묻은 곳이다.
출발에는 항상 과정이 있고 종점이라는 끝이 있다.
종점, 인생의 종점은 어디가 가장 좋을까?
나는 생각한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종결의 완성이라고.
등산가들의 모임에 명칭이 하산회(下山會)라는 산악인들의 모임이 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들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재미요, 목표요, 보람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산이라는 말은 등산의 반대어다.
등산가는 반드시 하산해야 한다. 하산하지 못한 사람은 사고를 당했거나 길을 잃은 조난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돌아와야 한다. 그가 떠났던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모든 일정이 끝난다.
돌아왔다.
나는 돌아왔다. 내 어린 시절을 뛰고 자라게 해 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지 오래다. 그래서 평온과 행복을 누리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밖에 나가서 성공을 했든, 평탄한 시절을 보냈든, 한판의 승부를 겨루고 다시 돌아와야 할 시기가 되어 모든 일손 다 놓고 호미곶으로 돌아왔었다.
고향 발전을 위해서라면 눈뜨면 천지가 할 일들이지만 부족한 힘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오직 걱정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올해는 60년 만에 돌아오는 백호(白虎)의 해라고 한다.
호미곶에서 백호의 해 벽두에 나는 귀향 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런 직분을 선사 받았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2010년 1월 1일부터 내 고향 면의 호칭을 대보면에서 호미곶면으로 개칭하면서 포항시장이 수여한 명예면장 위촉장을 받았다.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임기 후 고향에 돌아가 유치원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한다는 기사를 읽고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는데 나도 그 못지않게 평화스러운 명칭을 받았다는 기분에 혼자서도 싱글벙글 미소를 흘렸다. 이 나이에 내가 명예면장이라?
그동안 시장 군수 도 내무국장 등을 거쳐 다시 고향 땅 명예면장 직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악 등반을 마치고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는 중원 천지를 호령했던 항우도 누리지 못한 호사이며 오복(五福)의 마지막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을 보장받았다는 안도이기도 하다.
아— 고향 친구들아, 한 세기 동안 내 정든 사람들아!
호미곶 청보리 밭에 종달새 울고, 춘3월 보름밤 중천에 달이 뜨면 막걸리 몇 통 내가 부름세! 흑구 선생의 <보리>처럼 구만들 호미곶 모진 한파 견디며 한평생 살았거늘 이 아니 축복인가! 밤새워 마셔 보세.
서편에 달이 질 때 막걸리 통 두들기며 고향 노래 부르면 천상 선녀들도 부럽다고 내려와 함께 놀자 할 걸세!
고독 길들이기 신 미 경
전화선을 타고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다짜고짜 “너 디스크 환자냐?” 한다. 이 무슨 황당한 질문인가. 친구의 말로는 낮에 집 전화를 받는 여자는 모두가 환자란다. 요즘 전업 주부란 직장을 가진 주부들보다 더 바쁘다나. 그래서 대개는 낮에 집에 있지 않는단다. 세태 풍자이겠거니 하지만 왠지 가슴엔 작은 소용돌이가 인다.
지난여름은 길고도 무더웠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아스팔트를 녹일 듯했고, 문명으로 더 뜨거워진 지구를 사람들은 바삐 걸어 다녔다. 육체에 흐르는 비지땀으로 하여 영혼조차 그늘을 찾아 헤맸으리라. 집마다 창이란 창은 모두 열어 놓고 밖과 소통을 한다. 여름엔 혼자 있어도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하여 외로운 사람들이 살기엔 적합한 계절인지도 모른다.
비 내린 포도 위에 낙엽들이 젖은 채 뒹굴고 있다. 우수수 날리는 낙엽들은 목적지 없이 길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어, 가끔 허공에서 무의미한 춤을 춘다. 뻔뻔하리만큼 자기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던 아름드리 나무도 탈모되어 가는 노인처럼 변해 간다. 그러다 서늘해진 기온에 창문을 닫으며 세상에 유린당한 듯 혼자 있는 나를 만난다. 그맘때면 가을이 무르익어 간다.
언제였던가. 대중의 인기를 많이 받고 있었던 여배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수첩에는 세상이 무섭고 외롭다고 했다. 같은 연예인 친구들이 많아 ○○○사단이라고 할 정도였다는데 외로웠다니. ‘군중 속의 고독’이라더니 인간들이 부딪혀 살아도 고독은 독버섯처럼 번지는가. 그 외로움이 어린 금쪽같은 자식들보다 더 자신을 옭아매었던 모양이다.
몇 해 전 가을. 나를 시험해 보는 계기가 있었다. 좋아하는 재즈 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그런 곳은 공감대가 비슷한 사람이 아니면 동행하기가 힘이 든다. 차라리 그런 강박증에 눈치 보며 불편하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듣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시선에 주눅이 들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처음으로 대중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며, 상대적 고독까지 즐길 수 있으리라는 예감에 쾌재를 불렀다.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사회는 혼자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통념을 가진다. 친구처럼 집에 혼자 있는 사람을 디스크 환자라고 하기도 하고, 인간성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고독이란 말이 내 입에서 튕겨 나오자 반사적으로 “호강에 겨워서”란 말이 되받아 날아와 내 이마를 쳤다. 고독이란 말은 사치스러운 언어로 인식될 만큼 금기시되는 단어였던가. 위로받지 못하는 외로움의 실체는 허공에 던져진 순간 더 깊은 공허함을 부를 뿐이다.
그저 하늘 밑에서 같이 호흡하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모두 각각의 방에 유린당한 외로운 존재들인 것을. 일찌감치 나란 존재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완벽한 자유가 그리워 인연의 굴레도 버거워짐을 느끼는 날들이 불쑥불쑥 잦아졌다. 자매도 없고 딸도 없기에 외로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속삭이는 날이 많아졌다. 누구나 노년에 오는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며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려면 길들여야 한다고 나를 다그친다. 부단한 연습은 어느 순간 몸에 익게 될 것이다. 이제 어두운 밤에 혼자 밥 먹는 것쯤은 서글픔이 되지 않는다. 한때는 이런 나의 모습이 슬퍼 스스로 연민에 빠지며 목이 멘 적도 있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은 허무의 심연 속으로 빠지기보다는 이제는 너럭바위에 누운 듯 편해 간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될 수는 없고 혼자만의 시간으로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사람도 있다. 몰려다니며 혼자이기를 한사코 두려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을 황량한 사막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혼자만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 자는 내면의 뜰을 살뜰하게 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적당한 고독과 외로움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엔 글쓰기라는 친구와 있다. 꼭 생명만이 나를 고독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어느 순간 들기 시작했다. 수필이란 존재는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 고독의 미학을 얘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수필은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삶의 동반자가 되어 주고 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가을엔 낙엽과 고독을 떠올리는 것은 인간들의 보편적 정서인 것을, 인간 근원의 외로움이 어디 회색 빛 콘크리트 속에서만 새어 나올까. 수확을 끝낸 들판의 감나무 꼭대기에 달린 몇 개의 까치밥에서도 머물러 있다. 빈 가지만 남은 황량한 나무 사이를 비집고 가는 바람 소리가 가슴을 마구 저밀 날이 올 것이다. 뜨거운 여름 헐떡이며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 못한 삶의 조각들이 나의 영혼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청명한 하늘 같은 가슴이 되어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들이마시리라. 이 가을엔 고독을 길들여 더는 외롭지 않을 풍성한 영혼을 가진 여인이 되고 싶다.
잡채 안 현 주
“맛있다. 엄마도 맛있게 만들지만 이 잡채는 맛도 있고 그리고 뭔가 하나가 더 있는 것 같다.”
진주 아줌마가 만들어 보낸 잡채를 늦은 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맛나게 먹으며 말한다.
재료도 잡채를 만들 때 내가 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대체 뭐가 더 있다는 걸까. 젓가락을 들고 아이 옆에 앉아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본다. 우선 시각적으로도 내가 만드는 잡채보다 정갈해 보인다. 재료나 양념들이 알맞은 모양새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배어든 맛이 천천히 입 안에 녹아든다.
잡채를 만들 때면 나는 쉽고 빨리 만들려고 재료를 한꺼번에 모두 넣고 볶는다. 다 만들고 보면 질척한 것이 때깔도 곱지 않고 재료들이 서로 뒤엉켜서 모양도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음식이 되어 있곤 한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음식 만들기를 끼니만 때워 주면 되는 의무 이행하듯 대충대충 해치워 버린다.
“한꺼번에 일어나서 밥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아침밥은 없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 방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저희 엄마 성질을 아는지라 휴일 날 눈도 떨어지지 않은 채 대충 씻고 식탁에 와서들 앉는다. 식은 밥은 전자레인지가 해결해 주고 어제 먹다 남은 국은 가스레인지가 금방 데워 준다.
“나갔다 올 테니까, 밥 먹고 나면 반찬은 냉장고에 넣어.”
마치 ‘오늘 숙제 끝’ 하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드는 광고에 나오는 모델처럼, 할 일 후딱 해치워 버리고 손 터는 기분으로 빠르게 신발을 갈아 신고 현관문을 나선다.
옛날에 엄마는 아침이면 높지 않은 목소리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우리를 깨웠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인 듯 잠결에 지나가는 소리로만 흘려들었다. 겨우 일어난 놈,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놈들을 일어나는 순서대로 따끈따끈한 음식을 먹이려고 부엌문턱을 부지런히 넘나든다. 부엌은 방보다 많이 낮아서 오르내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엄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식은 음식을 데우려 국그릇, 밥그릇을 들고 몇 번이고 부엌을 힘들게 오르락내리락거려도 엄마는 으레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지금처럼 전자레인지라도 있었다면 일이 분만 왱 하고 돌리면 끝날 것을 다시 그을음 이는 석유곤로 심지를 올리고 냄비에다 물을 두르고 밥을 데웠다.
입식으로 편리한 부엌인데 때로는 나물을 다듬는다고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면 다리도 아프고 여기저기가 편치 않다. 끙 하고 소리를 내며 일어나 싱크대에 나물을 쏟아 넣는다. 이렇게 방바닥에서 일어나는데도 끙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 푹 꺼진 부엌을 올라와서 문지방을 넘어 상을 들고 오르내리던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아릿하다.
엄마는 반찬을 하더라도 양념도 처음 넣을 것 나중 넣을 것을 지켜 넣는다. 불 조절도 신경 써서 하며 시간도 알맞게 맞추었다. 엄마의 노동량과 고생을 생각해 보면 지금 나의 일상이 힘들다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아이는 학교를 마친 후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시내 학원으로 나온다. 날마다 토스트나 떡볶이 등의 거리 음식으로 저녁을 대충 때운다. 보다 못해 사무실의 다용도실 한편에 보온밥통을 가져다 놓고 집에서 밥을 해 나르기 시작했다. 밥솥이 커서 밥 외에도 따뜻하면 좋을 여러 가지 반찬을 넣어 데울 수가 있다. 아이가 도착하고 난 후 밥을 챙겨 아이 학원 앞으로 간다.
내 차는 저녁이 되면 식당차가 된다. 김치 냄새와 여러 가지 반찬 냄새로 차 안은 퀴퀴하지만 옛날 엄마의 따스운 밥을 생각하며 아침마다 반찬 만들기에 바쁘다. 기름진 것은 가능한 한 피하고 좀 더 채식을 넣을 순 없을까. 어떻게 하면 맛나면서 영양을 고려한 반찬을 먹일까. 아침마다 머릿속은 분주하다.
마치 무엇을 식별해 내려는 감별사처럼 다시 잡채를 한입 넣고 씹으며 나의 잡채와 다른 그 무엇을 찾기에 골몰한다.
진주 아줌마는 음식 만드실 때 보면 하나하나 정성과 공을 들이시는 품이 때로는 경건하게 보일 때도 있다.
뭘까, 다르다는 그것이 무얼까. 골똘히 잡채를 씹는다. 그래, 옛날 엄마들이 그랬듯이 애정과 정성의 농도 차이가 아닐까. 내가 아이들을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백분율로 나타낸다면 엄마가 우리를 사랑했던 농도보다는 내가 아이들에게 가지는 애정은 덜한 게 아니었던가. 엄마가 우리에게 쏟았던 그만큼의 정성이나 공을 과연 얘들에게도 들였던가.
진주 아줌마가 보내 주신 잡채를 먹으며 엄마의 맛 같은 그 여운이 오래 입 안에 남아, 늦은 밤 불 꺼진 거실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어두운 밖을 보고 있다. 가을은 다시 돌아와 온 거리가 단풍비에 젖어 아름답다. 하지만 다시는 엄마와 함께 낙엽 지는 저 길을 걸어가 볼 수 없음에 뜨거운 무언가가 목을 타고 올라온다.
가시고기 염 우 권
소위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우리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손오공이 천상천하를 자유로이 왕래하며 여의봉을 휘둘러 온갖 재주를 다 부렸으나 종내는 부처님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데, 생명 현상의 신비로움, 종(種)의 보존이란 대자연의 섭리가 경이로울 뿐, 이것을 인간의 지식으로 해석해 보려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저 숙연할 따름이다.
거울같이 맑은 물, 물고기 한 마리가 수초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수초를 옮기는 듯하더니 그들 나름의 보금자리가 마련된 듯 다른 한 마리의 물고기가 나타났다.
물고기 두 마리가 뭣을 살피고 확인하는 듯 주위를 몇 바퀴 돌더니 새로 나타난 녀석이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양 격렬한 몸 떨림을 하면서 알을 쏟는다.
알을 쏟은 녀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녀석이 엷은 은회색 구름 같은 뭣을 알 위로 흘리더니 계속 그 자리에서 지느러미 날갯짓을 하고 있다.
이 녀석은 가시고기 수컷이라고 하며, 알이 부화할 때까지 7〜10일간을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지느러미 날갯짓을 한다는데, 이는 알을 지키는 것이고 지느러미 날갯짓으로 알에게 물의 흐름을 좋게 하여 산소 공급의 역할을 함으로써 알의 부화를 돕는 것이라 한다.
얼마나 길고 긴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작은 물방울 같은 알에서 고물거리는 것이 생기더니 한동안의 몸부림 끝에 마침내 물방울을 헤집고 나온다. 이들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마치 마라톤 대회의 출발점에서 선수들이 앞 다퉈 쏟아져 나오듯 계속해서 알을 헤집고 고물거림이 쏟아져 나온다.
가시고기 아비의 지느러미 날갯짓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날갯짓은 느리고 힘이 없다.
맑은 물에 선명하게 빛나던 녀석의 몸빛이 희끄무레하게 변해 간다. 점점 그 날갯짓이 느려지더니 마침내 날갯짓이 멈춰지고 앙상해진 녀석의 몸뚱이는 물의 흐름에 맡겨진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아니 살신성어(殺身成魚), 가슴에 찡한 전류가 흐른다. 녀석의 명복을 빈다.
가시고기, 사전을 찾아본다.
큰가시고깃과에 속한 민물고기로서, 몸 길이 5〜6cm의 가는 방추 꼴, 회녹색 바탕에 등 쪽은 암녹색 배 쪽은 은백색, 산란기는 4〜7월, 하천중류의 물이 맑고 수초가 많은 곳에 서식하며, 등지느러미 앞에 독립된 작은 가시가 6〜10개쯤이 있는 특색을 가졌다고 한다.
나는 자연 생태계의 생존 비결과 생명 현상을 다루는 Documentary 영상물을 즐겨 본다. 살신성어의 현상은 가시고기에 한한 것이 아니며, 또 내가 아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민물에서 부화한 연어의 치어는 대양으로 흘러 성어가 된 후에 산란기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여울물을 찾아 수만 리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빠른 물살을 헤치고, 폭포수를 뛰어오르다가 기다리는 불곰에게 잡아먹혀도 계속해서 뛰어오른다.
불곰의 이빨을 피한 연어는 꼬리지느러미로 부채질을 해서 강바닥에 알자리를 다듬고는 혼신의 힘으로 몸을 틀어 알을 쏟아낸다. 수컷은 그 위에 안개구름을 덮는다.
알을 쏟은 연어는 그 빛이 불그스름하게 퇴색되면서 힘을 잃고 죽어 가는데, 강바닥을 흐르다가 물살에 밀려 나가 갈매기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사마귀, 버마재비 수컷은, 자신보다 몇 배나 몸집이 큰 암놈에게 매달리듯 꽁지에 붙어 교미를 하는데, 교미를 하고는 때맞춰 잽싸게 도망치지 못하면 암놈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교미를 하던 암놈이 앞발로 낚아채서 수컷은 이미 그 머리가 잘라 먹혔는데도 수컷의 꽁지 부분은 여전히 암컷의 꽁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것을 본다.
암컷이 교미하는 수컷을 잡아먹는 것은 장차 태어날 그 새끼들의 영양에 필요해서라고 하는데, 과연 수컷은 자신이 잡아먹힌다는 사실을 몰라서, 아니면 알면서도 목숨 바쳐 교미를 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를 상회하는 그 어떤 힘에 이끌리는 것이 아닐까?
논고둥은, 자신의 몸 안에서 새끼가 자라면 자신의 몸을 그 새끼에게 먹이로 제공하여 일생을 마감한다. 새끼는 어미의 몸을 먹이로 해서 자라 비로소 고둥의 형태를 갖추고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런 현상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인간의 지식으로 어찌 해석할 수 있으랴.
해마는 암컷이 새끼를 낳지 않고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나 실제가 그렇다. 배가 부푼 수컷의 배에서 고물거리는 작은 해마가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다.
하긴 이런 역천 현상(逆天現像)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하다. 해마의 암컷은 수컷의 배에 알을 낳는다. 수컷은 자기 배의 알주머니에서 새끼를 부화시켜 그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 해마는 암컷이 새끼를 낳지 않고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
우리는 우리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하고, 여타를 미물이라고 한다.
재물을 잃은 것은 적게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며, 명예와 신의를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고 했으니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미국 유학 대학생이 그 부모를 살해한 기사, 얼마 전에는 13살 어린이가 불을 질러 일가족을 살해한 일이 보도되어 머리를 어지럽힌다.
하긴 숭고한 인간상에 어찌 하필이면 잔혹한 측면을 연상하느냐고 항변도 해 본다. 만물의 영장, 미물, 살신성인, 살신성어,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다.
공자님은 우리 인간의 사람다움의 과정을,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 하셨는데, 고희(古稀)의 고개를 넘은 지가 한참이건만 “종심소욕 불유구”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집착에서 헤매고 있으니 이 아니 답답한가!
종(種)의 보존, 생명 현상이란 대자연의 섭리에 접하고 보면, 미물, 영장이 따로 있다 하기 어려우며, 영장이란 착각일 듯도 하여 이를 말함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로 그저 숙연할 따름이다.
石狂의 辯 —秀石列傳을 엮으며 尹 鍾 五
옷소매를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했던가요? 나는 일찍이 수석을 알고 평생의 동반자로 삼아 사랑하고 즐겨 오는 石緣을 맺어 왔습니다. 그 인연 참으로 나에게는 더없는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나는 수석을 신이 빚은 예술품으로 여깁니다. 산수경석과 형상석은 신의 조각이요, 문양석과 미석은 신의 회화입니다. 수석은 억겁의 세월을 두고 신의 최상의 솜씨로 빚은 예술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수석을 누구의 소장품이라 일컫지 작품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나는 수석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醉石齋란 당호를 걸어 놓고 수석을 사랑해 온 石歷이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결혼을 하여 4〜5년을 살다 보면 권태기가 온다는데, 나는 권태기를 모르고 여태껏 수석을 사랑해 왔고 수석을 사랑하는 징후는 짙어만 갑니다.
나에게 있어서의 수석은 매력 이상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애석 생활을 하다가 보면 다섯 가지의 즐거움을 맛봅니다.
첫째, 탐석의 즐거움입니다.
지금도 石友와 내일 탐석을 간다고 약조한 전날 밤은 초등학생이 소풍을 가는 전날 밤처럼 잠을 설칩니다. 신은 숨겨 둔 비장석 한 점 내 성의를 보아 내어 주겠지 하는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강물에 발을 담그고 철벅철벅 뛰노는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어쩌다가 心石 한 점 얻는 날은 온 천하를 얻은 듯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둘째, 鑑賞의 즐거움입니다.
내가 내 석실에 수석을 진열해 놓고 감상하는 데에는 네 번의 관문을 통과한 수석입니다.
그 첫 관문은 수석의 산지 돌밭에서 내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관문은 탐석해 온 수석을 정원에 늘어놓고 조석으로 목욕을 시켜 養石을 시킵니다. 石壽萬年의 세월감과 老苔 낀 고태미가 풍겨 나오면 뜰로 자리를 옮겨 놓습니다. 뜰에서 면밀히 관찰하여 선별이 되어야 석실로 옮깁니다. 산수경석은 수반에다 모래를 깔아 연출을 하고, 형상석과 문양석과 미석은 좌대를 파서 연출해 놓고 감상을 시작합니다.
한 점 한 점의 수석에다 石銘을 지어 작명을 하고 그 수석의 특징을 파악하여 石詩를 지어 읊으며 수석과 무언의 대화를 나눕니다.
연출에 있어서는 하나의 수석을 단독으로 연출도 하지만 四君子다, 十長生이다, 五友歌다, 四季節이다라고 테마를 정하면 테마별로 연출하기도 합니다.
나는 昏定晨省을 하듯 아침저녁 석실 문을 노크하고 드나듭니다. 나들이를 떠날 때에도 돌아와서 出必告反必面 신고를 하며 수석과의 무한한 대화를 나눕니다.
셋째, 展示의 즐거움 즉 남에게 보여 주는 즐거움입니다.
개인전이거나 회원전이거나 자기의 소장석을 보여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石友가 石室을 구경하겠다면 쾌히 승낙하여 초청을 함은 보여 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갖는 즐거움 즉 소장의 즐거움입니다.
수석은 그 많은 수석 중 똑같은 수석이 없기 때문에 많이 소장하고 싶은 욕심까지 납니다.
다섯째, 石友를 만나는 즐거움입니다.
石友는 초면에 만나도 십년지기같이 정다워 즐거운 돌 얘기로 밤을 새웁니다. 수석은 신의 예술품이기에 신비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수석은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인고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르침을 나에게 주기 때문에 비록 말은 없으나 스승으로 모십니다. 수석은 나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나는 수석의 신비에 수석의 매력에 취해 살아옵니다.
수석을 찾아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올 탐석의 길을 걸었고 돌을 메고 다닌 배낭을 스물한 번째로 갈아 메었습니다. 나는 수석이 나에게 베풀어 준 그 보답의 길로 수석을 더욱 빛내어 보겠다고 石狂처럼 살아왔습니다.
수석 개인전을 세 번이나 열었습니다.
수석에 관한 책자를 여섯 권을 펴내었습니다.
‘돌노래’, ‘돌 향기’, ‘시로 엮은 애석인집 Ⅰ·Ⅱ’, ‘수석 있는 곳은 지옥도 극락’, ‘애석계를 빛낸 인물’ 등 시조와 수필로 수석을 노래했습니다. 이 글은 일곱 번째 발간하는 ‘秀石列傳’의 서문입니다.
秀石列傳은 빼어난 수석 150점을 뽑아 石銘을 짓고 그 수석에 石詩를 지어 붙이고 소장자의 애석의 발자취를 남기고, 또 그 수석의 안태고향과 크기와 어느 전시 어느 수석보에 실리고 누구의 소장석이었음을 밝혀 적어 돌의 족보까지를 기록한 시가 있는 애석보로 남기고 싶어 엮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중증 석광입니다. 나의 묘갈에 ‘石狂 素民 尹公之墓’라 새겨 달라고 유언을 남겨 놓았습니다.
여덟 번째 저서로는 ‘素民의 紋樣石 100選’이란 책자 한 권을 더 펴내고 싶어 열심히 문양석을 모으고 시를 짓고 있습니다.
탈 이 금 태
화가 치밀어 올라 창자까지 아프다. 그렇지만 내 얼굴은 웃고 있다.
꼼꼼하게 기초화장을 하고 색조화장에 부드러운 얼굴을 연출한다. 곡마단의 곡예사같이 슬픔도 분노도 한 겹 입혀진 분장에 가려 있다. 내 안에 다른 내가 늘 다툼을 한다. 원초적인 이드(id)가 초자아(superego) 안에 꽁꽁 묶여 있다. 어떤 이는 짊어진 삶의 무거움을 덜어 버리고자 몸을 던졌지만 나는 얼굴이 벗겨지도록 문질러 씻는다. 화장이 지워진 얼굴이 무표정하다. 하루에도 수차례 표정을 바꾼다. 즐거운 사람에게는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하고 화가 난 사람은 같이 분노해 주어야 다른 말이 없다.
음식 냄새와 식기 소리에 주방 안은 부산하다. 착한 얼굴의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맡은 일을 한다. 꿈에 찌들고 지친 삶들이 주린 배를 채우고 남루한 모습을 남긴다. 도덕으로 포장하고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다정하고 나긋나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과장된 친근함을 표현하는 만큼 내면에서는 반대 감정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내면세계의 내 영혼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분열되어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육신의 허기와 외로움에 사무치는 그들의 눈동자는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가장 비참한 모습을 연출한다. 잠시 스쳐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랑을 그들에게 나누어 준다. 나눔 급식소에서 봉사 활동을 한 지도 제법 되었다. 내가 맡은 일은 출입구에서 어르신들에게 인사하고 자리 안내를 한다. 숟가락을 잡은 그들의 손등에 고달픈 삶이 묻어난다. 악착스레 긁어 먹는 사람, 허겁지겁 눈치 보며 먹는 이들. 음식물 씹는 소리가 서러움을 씹어 삼키는 것 같았다. 삶의 조각들이 오일장 난전 펼쳐지듯 펼쳐진다. 그들의 모습을 무심코 넘겨다보지 않았다.
삶에 짓눌린 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몸이 떨릴 때도 있다. 나 역시 가진 것이 없지만 타인에게 늘 베풂을 행하고자 노력을 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얼굴이 붉어질 일이 있을 때는 말소리조차 더듬거렸다. 줄을 오래 세운다고, 반찬이 허술하다고, 심지어 술을 달라 소리소리 지르는 어르신들도 있다. 부끄러움이 사라져 버린 건지 얻어먹어도 큰소리만 친다. 물욕을 좇아 부나방같이 날아들다 스러져 가는 인생들이 아직도 세상에 대한 끈끈한 애착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애써 웃는 얼굴로 대하지만 나의 속 좁은 품성은 얼굴에 금방 나타난다. 한때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겠지만 지금은 삶의 변방에 버려진 이방인들이다. 무관심에 대한 외로움이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이들이 가진 내일의 희망은 무엇일까.
제임스 F. 메스터슨은 ‘참자기’라는 책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참자기가 생겨나서 독특하고 자율적인 자기에 통합되기 시작하는 생후 첫 3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라고 했다. 나의 생후 첫 3년은 기억조차 없는데 아주 가끔 꿈속에서 어린 계집아이가 우는 모습이 떠오른다. 꿈을 깨고 나면 가슴 한쪽이 쓸쓸하면서도 짓눌리는 그 느낌 그게 나였을 수도 있겠다. 과거나 현재에서 느끼는 사랑의 결핍이 무의식 속에서 끝없이 자맥질하게 만든다. 그들의 생후 첫 3년의 상처와 나의 상처는 공통분모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에서 참자기를 찾으려 하고 그들을 통해 곪아 터져 버린 상처를 치유하려 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이율배반적인 행위이다.
이곳에서 하는 일이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인가, 참뜻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참사랑이든 거짓 사랑이든 봉사하면 그만인데 자신에게조차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또 하나의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물음을 통하여 나는 한 겹 가면을 쓴 채 이곳에 있음을 아파한다. 그렇지만 이 일 또한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다. 이 모든 행위가 결국은 나의 존재 의미를 깨닫고 인생의 벼랑 끝에서 살아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들을 위한 봉사를 통해 나 자신을 위로받는 것이다. 오히려 감사하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깊은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할 수 있고 생과 사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 거짓 사랑도 반복하다 보면 참사랑을 느끼는 것인지 그들에게서 피붙이 같은 연민을 느낀다. 늘 오던 분이 보이지 않으면 눈에 어른거려 눈으로 찾아보고 한다. 비록 사랑을 채워 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외로움은 함께하고 싶다.
벽에 걸린 탈 가운데 눈언저리 가느다란 주름살이 잡힌 실눈의 양반이 웃고 있다. 눈을 살포시 아래로 깔고 있는 각시와 갸름한 얼굴에 배시시 웃음기 머금은 부네, 능글맞은 웃음의 파계승 탈. 모두 저를 닮으란 듯이 웃고 있다. 나도 탈을 쓰면 마음이 자유로워질까. 그 속에서 미친 듯이 웃고 싶다. 인생을 마음껏 희롱하는 연극배우처럼……. 오늘 하루 후끈하게 달아오른 태양열의 뜨거움보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덩어리에 몸이 더 뜨거운 것은 왜일까?
있는 그대로 이 경 숙
길을 가다가 학교 건물이 보이면 잠시 멈추어 서곤 한다. 건물 유리창 너머로 어른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며 떠드는 소리가 정겹기도 하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십 년 가까이 근무하던 교직을 두 달쯤 전에 정년이 되어 나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긴 세월이었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나 빨리 지나간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동안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직업을 바꾸려고도 해 보고, 명예퇴직을 하겠다고 두 번이나 신청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많은 갈등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완주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좀 미련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번 혼인한 사람과 잘 맞지 않으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중도에 포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 흡사했다고나 할까.
퇴직을 축하하는 친정 식구들의 모임에서 오빠가 건배사를 하며 “별 대과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며 조금은 자랑스럽게 치하하는 말을 들으며 내심 담담해지는 심경이 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때는 수업 잘 하는 우수한 교사로서 각광을 받기도 했으나 후반부에 와서 승진이나 모든 명예를 뒤로하고 일개 무명 교사로서 말단 외직을 전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조금도 후회가 없고 오히려 그 과정들을 통해 얻은 바가 많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중학교 정도만 시키려고 마음먹었던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완강한 고집으로 진학을 감행했었다. 그리하여 평생을 교육자연하며 지낼 수 있었고 어딜 가면 ‘이 선생!’ 하고 불러 주는 호칭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르친다는 직업에 큰 자부심이나 보람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지탱한 것은 어쩌면 경제적 수단과 사회적 인정, 학생들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막상 정년퇴직 준비 휴가를 받아 몇 달을 지내면서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곳을 찾아다녀 보았다. 가는 곳마다 나이가 많아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자원봉사 활동 영역을 제외하면 연령 제한이 있어서 명함도 못 내밀고 돌아서야만 할 정도였다.
어떤 이는 지금까지 힘들게 일했으니 이제부터는 마음껏 놀기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일 중독에 가까운 천성 탓인지 무작정 놀러만 다닐 수는 없었다. 오히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처칠 수상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십여 년 전 정년이 단축되는 법이 통과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꽤 탐이 나는 명퇴금을 받아 들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이 떠나려고 마음먹었다가 끝내 포기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조금은 후회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처럼 장 담그는 것이 중요한데 괜히 구더기만 무서워하며 살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다른 부작용이 많을 거라는 우려. 결국은 용기가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그때 어떤 분은 당장 사표를 내고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가슴 벅찬 삶을 살라고 강경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그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되는 일’을 못 했던 것은 나름대로의 한계 같은 것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래도 교직에 대한 무게를 많이 두고 있어서였을까. 어쨌든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기 마련인가 보다.
퇴직자 간담회에서 교육감이 “이제 교육자라는 멍에를 벗고 사회에 나가 마음껏 즐겁게 사십시오”라는 뜻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이 뿌듯하게 느껴지고 이제 그 구속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나에게 최선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 말기 암을 앓으며 투병하고 있는 지인과 얘기하다가 문득 젊은 날 한때 이혼하고 싶어 했던 것을 기억하고 물어보았다. “그때 이혼 안 하길 잘했지요?” 했더니 예상 밖의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혼했어야 했다는 단호한 태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는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분은 사 남매를 혼자서 키우다시피 하여 다 취송하고 나자 모진 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몇 년간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다니게 되었는데 그사이 남편은 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자식들을 위해선 잘 참고 살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이혼을 했든 안 했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아마 이혼 안 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느 어머니는 자식을 잘못 키워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한탄하며 하는 말이 “다음 생에 다시 자식을 키우게 된다면 노을을 바라보듯이 하겠다”고 했다. 노을이 어떤 모양으로 물들든지 이렇다 저렇다 시비하지 않는 것처럼 자식이 부모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고 탓하거나 속을 끓여서는 안 된다는 말 같았다. 자식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할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그것이 어찌 자식 키우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일까마는.
지나간 세월을 좀 다르게 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되뇌어 볼 때도 있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일 뿐이다. 그냥 저녁노을을 무심히 바라보듯이 인간사 모든 일을 주어지는 대로, 어떤 기준이나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편안하게 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것은 아닐까.
벽과 벽 이 동 민
대학에 봉직한 동기까지 정년퇴임을 하였으니 우리도 나이가 꽤 들었나 보다. 한가해서인지 동기 모임에는 전보다 많이 출석한다. 6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녔으므로 살기가 무척 어려웠던 때에 대학에 갔다. 자연히 등록금이 쌌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 많이 진학하였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퇴임한 동기들이 많다.
데모 때문에 신문의 지면이 시끄러울 때는 동기회가 이들의 성토장이 된다. 교육자들이었는데도 목소리는 거칠기 짝이 없다. “밥 먹고 살도록 하였더니 빨갱이 짓이나 해. 이런 놈들은 모조리 총살감이야.” 나는 이들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면으로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우리는 끼니를 때우기도 어렵던 시절에 오로지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배고프지 않는 세상, 이것이 꿈꾸어 온 유토피아이었다. 국가가 요구하면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을 하였다. 자유니, 민주니, 독재니 하는 구호는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을 듣긴 했어도 배가 부르니까 철없는 자들이 하는 사치스러운 놀이쯤으로 생각하였다. 사회에서 역할이 끝나고 노후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까지 4·19, 5·16, 새마을 운동, 월남전쟁, 박 대통령 시해, 광주 사건, 민주화 운동, 북한에 대한 정책의 변화 등 끊임없이 바뀌는 세월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나 동기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념이랄까, 믿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보수 꼴통’이라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동기들의 생의 지표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더러 내심과 다르게 이제는 세상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동기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였을 때는 몇몇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동기도 있었다. 친구들을 설득하려 들면 이들은 단박에 얼굴이 험악해진다. ‘모조리 때려죽여야 한다.’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곡간에 채워둔 곡식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꺼내 먹는 것이 못마땅한데, 한술 더 떠서 정의니 평등이니 하면서 곡간을 마구 풀어 헤치려 한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서 분노하고 있다.
나는 이해를 하면서도 스스로가 믿고 있는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그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겹겹이 쌓은 사고의 벽이 너무 견고하다. 스스로 허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내가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 30〜40대의 젊은 층이 주축을 이룬다. 종강을 하고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광우병 사태가 이야기로 떠올랐다. 나이 차이가 많다 보니 나는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였다. 그들은 광우병 사태란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정상적인 저항이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런 이유로 그들이 벌인 항의는 지극히 정의로운 일이었다고 하였다. 참았어야 했는데… 듣기가 거북하여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데모의 이유로 광우병을 핑계 삼는 것은 잘못이다. 2007년에 WHO의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의 60억 인구 중에 광우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1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라가 시끄럽도록 데모를 할 사유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내 직업도 있고, 내 나이도 있으니까 수긍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순진하였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면서 내가 틀렸다고 아주 강하게 말하였다. 덧붙이기를 “이번 천안함 사건만 보아도 뻔하지 않습니까. 정부가 국민을 얼마나 속이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데모를 하여야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는 실상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하였다. “글쎄, 천안함은 내가 전공이 아니므로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광우병은 정부가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지만 내 말을 받아들이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만 합시다.”라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엄마쯤 되는 여자는 “선생님은 지적 수준도 꽤 높으신 분인데 어떻게 그런 낡은 사고에 젖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조금은 가엾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병을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인으로서 광우병이 나의 소관임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슬펐던 것이 아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이념의 벽 앞에서 무기력하였던 내 자신에 절망하였다. 좀 더 벽의 높이를 낮추고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여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 친구들이 “모조리 때려죽여야 한다.”고 하였듯이, 나이 차이라는, 같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벽이 없었다면 이들도 또한 꼭 같은 말을 하였으리라 싶었다.
이 세상을 티 하나 없는 깨끗함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말했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49%의 악과 51%의 선만으로 채워도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 세상이 완벽하게 채워지기를 바란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쟁이 났던 해의 모심기 때였다. 하루는 순경 두 명이 찾아와서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우리 집 일꾼을 데려갔다. 그다음 날에 오리재라는 산골짜기에서 총살을 하였다고 하였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젊은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을라고. 뭐라더라 빨갱이들이 모이는 모임에 우연히 나갔다가 순경에게 붙잡힌 일이 있었다더라. 그때는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하라더라고 하였는데, 전쟁이 나니까 느닷없이 잡아가서 죽였다.”고 하였다. 다음 날에 아버지라는 분이 찾아와서 마루에 맥없이 앉아 있던 모습이 선하다, 라고 하였다. 만약에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친다. 6·25 때 겪은 아픔의 역사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왜, 내가 만든 감옥 속에 나를 가두어 둘까. 그 벽을 조금만 허물고 다른 사람의 주장도 받아 준다면 ‘모조리 죽일 일’도, 나를 가엾다는 투로 바라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감옥에 가두어 두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소름이 끼치도록 체험하였다.
‘미스 사이공’이 불편한 이유 이 병 훈
지금 머릿속 잔상에 교차되는 베트남 출신의 두 여자가 있다. 한 사람은 인기 있는 뮤지컬 공연 속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치는 숙명 앞에 절규하는 여자이고, 한 사람은 TV 속에서 농촌 노총각에게 시집와 물 설고 낯선 살림살이에 절망하는 여자다. 두 경우 모두 젊은 나이에 감내하기 힘든 인생의 쓰디쓴 고뇌를 끌어안고서 몸부림치고 있다. 뮤지컬이란 예술로 승화된 여자는 웅장한 무대가 주는 감동으로 열렬한 갈채를 받았고,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타국의 여자는 어색한 일상 위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그런데 둘 다 우리 현실의 서글픈 이면이 들춰진 듯하여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도 ‘킴’(여주인공)이 있었다. 종전(終戰) 뒤 그들에게 가해진 비난의 눈초리는 이 땅의 그늘에서 움츠리며 살게 했다. 그 세찬 날카로움에 목숨을 버린 이도 있고, 아이의 뿌리를 찾아 떠난 이도 있었다. 우리의 부이도이(buidoi: 삶의 먼지란 뜻으로 미군 병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도 질시의 냉대 속에서 질곡의 가쁜 숨을 쉬어야 했다. 그뿐인가. ‘크리스’(미군 병사)도 있었다. 월남 참전의 화려한 전적(戰績) 뒤에 우리의 용사들이 남긴 1만 명 이상의 한국계 혼혈인이 베트남의 하늘 아래서 어렵게 ‘킴’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국계 혼혈인 대부분을 본국으로 전입시킨 미국과는 비교되는 우리의 부끄럽고 아픈 모습이기도 하다. 혹자는 ‘미스 사이공’이 갖는 예술적 가치만을 평가할 것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 안이 아려 옴을 부인할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베트남 처자와의 국제결혼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농촌 현실의 타개책으로 시작되었지만 요즈음에는 사회적인 문제로 심심찮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배타적 민족 차별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이 주장되기도 하고, 취학 적령기 2세(코시안)들이 갖는 또래 간의 부적응 상황이 거론되기도 한다. 자신의 생일에 초대한 친구들이 오지 않자 맑은 눈망울에 가득한 실망감을 지켜보며, 뭔가 ‘다름’이 존재하는 현실을 설명해야 하는 베트남의 엄마는 정녕 말이 없었다. 급속히 번지는 다문화 사회의 다원주의 속에서도 민족적 정체감의 문제는 넘기 힘든 벽임을 보여 주는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오늘도 지구촌이란 남풍은 불고 있다. 그런데 ‘미스 사이공’에 투영된 모든 존재들의 아픔은 진정 그들만의 몫인가.
한일 횡언(閒日橫言) 이 원 성
망중한(忙中閒)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인생의 명암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쉼이요, 삶의 여유다. 여유는 다음 시간에의 발돋움을 위함이요, 새로운 박차를 가하기 위한 힘의 축적이기도 하다. 그러니 망중한의 ‘한’은 삶의 맛이요 멋이다. 이 맛과 멋이 없으면 인생은 부조화(不調和)에 빠진다.
망구(望九)에 이른 나에게는 망중한의 ‘망(忙)’은 멀리 가 버리고 ‘한(閒)’만이 있다. 그러니 내 오늘의 삶은 ‘한중한(閒中閒)’이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한 쉼의 ‘한’이 아니고 힘이 소진한 무기력의 ‘한’이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가함뿐이다.
옛날 중국의 어느 고승이 “無事於心 無心於事(마음에 일이 없으면 일에도 마음이 없다)”라 설법을 했다. 이것은 무심 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란 뜻인데, 나의 ‘한’은 무심이 아니라 공허(空虛)다. 아무것도 찾을 수도 없거니와 얻을 것도 없다. 그냥 멍하니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외출을 한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집을 나선다. 볼일 없는 장에 할 일 없이 가는 격이다.
막연히 그냥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인상에 남을 만한 것이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어중간한 심정에서이다.
지하철을 탔다. 러시아워를 한참 지난 시간이라 혼잡하지 않아 마음이 느긋하다. 타고 내리는 승객들의 모습들도 가지각색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화장을 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타기가 무섭게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거는 사람도 있다. 눈을 감고 무겁게 명상에 잠긴 중늙은이의 옆에, MP3 플레이어를 열심히 듣고 있는 젊은이의 얼굴은 무척 즐거워 보인다. 수첩에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적고 있는 사람의 표정은 심각한 듯하고, 우연히 차중에서 만난 친구끼리 악수를 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중년 신사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른다. 쇼핑백의 시장 본 물건을 다시 챙기며, 손가락을 꼽아 계산을 한 번 더 해 보는 알뜰한 주부도 있다.
나의 옆자리에서는 나이 지긋한 두 여인이 정답게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니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 대목의 말이 내 귀에 또렷이 들어온다.
“나는 혈압도 없고 당뇨도 없니더!”
“참 좋을시더”
내 고향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사투리다. 순박하고 토속적인 맛이 묻어나는 고향의 정을 아득히 느꼈다. 이 대화 속에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태의 축도 같은 지하철 속에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으로 묵묵히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오늘 하루의 볼일 중 하나라고 한다면, 나의 ‘한중한’도 굳이 나쁘다 할 것이 아니다.
도심지의 환승역에 닿아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사이에 끼어 나도 내렸다.
사방으로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제 갈 길을 열심히들 가고 있다. 나도 이 사람들 흐름에 섞여 방향 없이 걷는다. 한 교차로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무턱대고 가기보다는 오가는 군상들의 행색과 모양새들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도 볼거리가 될 성싶어서다. 한참을 서 있었으나 특별한 것이 없다. 처음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방관자로 차갑게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이 구름 잡는 짓이다.
다시 시간이 흐른다. 그냥 걷다 보니 활기 넘치는 젊은이의 거리에 이르렀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 젊은이의 걸음걸이에는 자신감이 넘쳐있다. 옷차림이 밝고 약동적이다. 어딘가 모르게 탄력이 있어 새 맛과 멋이 흐른다. 이런 분위기 속을 걷고 있으니 내가 이방인이다.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는 젊은 여자가 있다. 그에게서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젊은 모습을 본다. 배꼽티를 입고 옛날 우편낭 같은 가방을 옆으로 둘러멘 채, 연한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왼팔에는 쇼핑백을 걸었고 그 손에는 최신형 휴대폰이 쥐어져 있으며, 다른 손에는 빨대를 꽂은 유명 커피점의 커피 잔을 쥐고 있다. 현대적 감각으로 포장된 젊은이의 대표적인 모드다.
이 자신감 넘치는 명품녀의 모습 위에, 허름한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그녀의 할머니 또는 어머니 세대 때의 여인이 환상으로 겹쳐져 보인다. 나는 기가 질려 얼른 샛길로 빠져나왔다.
이런 저런 시간으로 어느덧 하루가 저문다. 저녁을 먹고 나니 새로운 공한(空閒)이 거실에 가득하다. 석간을 뒤적여 본다. 세상이 어지러울 뿐 신통한 게 없다. 텔레비전에는 불륜으로 뒤엉킨 드라마가 신나게 돌아간다. 많은 집에서는 이것을 보고 정신없이 감동하고 있으리라. 나도 하릴없이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멍청이가 되는 순간이다.
세상이 정신없이 변하고 있는 속에서 무용지물이 되어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숨이 콱 막힌다.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소요유(消遙遊) 조(條)를 되새겨 본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에 있는 한 그루의 큰 가죽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어 대목도 돌아보지 않는데, 당신도 이와 같아 누구도 상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장자가 이르기를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무 쓸모가 없다 하느냐. 무위로 날을 보내다가 그 밑에서 낮잠을 자지 않는가. 그리고 아무 쓸모가 없으니 도끼로 베어질 염려도 없을 것이기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 어찌 마음의 고통이 된단 말인가”라 하였다.
장자의 이 유연자적(悠然自適)하는 자유의 경지를 부러워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내 ‘한중한’의 쓸모없는 무료를, ‘소요유’의 가죽나무에 비긴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닌가. 주어진 자연 그대로 내일의 또 다른 한가함을 맞이해야겠다.
병실 풍경 이 은 재
유례없는 더위가 2010년 여름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지병이 다시 도져 꼼짝없이 찜통더위 속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개띠로 태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에게 여름은 위험한 계절로 상기된다.
그동안 나는 늦깎이 학생으로서 아플 겨를도 없이 살아온 것 같다. 그런 나를 너그럽게 이해하면서 오랫동안 인내해 주던 탈장이 1학기 말이 다가오자, 마침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논문 지도 일정에 맞춰 논문을 작성하다가 나도 모르게 무리를 했던 모양이다. 졸업 논문을 이미 제출한 상태라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탈장 전문 의사를 찾아갔다. 진단 결과는 하루속히 수술하라는 판단이었다. 방학을 맞이한 후라서 시간적인 부담은 없었다. 다만 무더위와 갇힌 공간에서 지낼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20대 젊은 나이 때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쓸개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신경성 위장병이라고 했다. 찾아가는 병원마다 심각한 병세에 놀라면서 입원조차 허락하는 곳이 없었다. 영락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쳐 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병든 몸을 어머니께 의탁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식부터 보낼 수가 없다고 백약 찾아 시방을 헤매셨다. 어디 그뿐인가. 위장병에 좋다는 소양을 사 나르기 위해 매일같이 읍내를 다니셨다. 길섶도 말라붙는 무더위를 마다 않고 삼십 리 길을 다니셨다. 그 길에서 십 리 길은 걸어 다녀야 했으니, 그 고통을 노구로써 감내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로 인해 그해 여름은 치명적인 수난의 계절로 기억된다.
수술하기 위해 입원하던 날, 병실 풍경은 그지없이 삭막했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은 선입관이 빚어낸 오해였다. 내가 입원한 6인 병실 환자들은 탈장을 수술하거나 담석을 수술한 몸들만 있었다. 배를 째고 생살에 구멍 뚫는 일이란 죽음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병문안 갈 때면 환자보다 더 엄살 부리면서 병실에선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듯, 하루속히 쾌차를 빈다며 입에 발린 말 한두 마디 남겨 놓고, 수인사 나누며 칼바람같이 빠져나오곤 했다. 그런 내가 오늘은 배 째고 기운 사람들과 함께 6인 병실에 누워 있다.
수술을 앞둔 사람은 누구라도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나는 엄살이 심한 몸이라서 수술한 환자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약이 되어 내 가슴을 얼어붙게 했던 긴장의 끈마저 풀어 주었다. 모든 생명체는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진화해 가듯이 나도 어느새 병실 환경에 익숙해져 갔다.
인간은 죽음의 경계가 가까이 올수록 순화되어 가는 것일까. 병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잘나고 못난 사람이 따로 없어 좋았다. 또 모두가 동병상련으서 한 몸같이 대해 주는 것이 좋았다. 또 가시 돋친 말도 감언이설도 전무한 진공의 상태라서 좋았다. 치장을 탈각한 순수한 사람들을 대하는 순간은 한결 편안함을 안겨 준다. 위로의 말과 감사의 말만 주고받는 세상이라면 더 바랄 게 무엇이랴. 환자들은 가끔씩 우스갯소리로써 자신들의 통증을 달래면서 나의 긴장감도 풀어 주었다. 그때 인상적으로 각인되었던 병실 풍경을 실사처럼 그려 본다.
한때 사격 선수로 활약했던 이력으로 멧돼지 사냥에 도가 텄다는 최 포수. 총알이 스쳐 간 구멍같이 뻥 뚫린 구멍에서 쓸개를 떼어냈다며 쓸개 빠진 사람답게 싱글벙글 웃었지만, 옆구리가 항문이 되어 버린 또 다른 사람이 그의 웃음이 복더위처럼 짜증스럽다는 듯, 깊이 파인 주름살로 푹푹 인상을 쓰고 있다. 담석 수술로 네 군데나 구멍을 뚫은 동지고교 박 선생은 볼링 공인가. 십팔 미터 전방, 열 개의 핀을 표적 삼아 네 개의 손가락으로 공을 막 던지려는 볼링 선수같이 아주아주 심각하다. 병 수발하러 따라온 그의 아내도 응원석의 열렬한 팬처럼 조마조마 담석보다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나는 중학교에 진학 못한 대신 3년 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자신을 자해하는 행위는 불효막심한 일이라고 배웠다. 그로 인해 탈장 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 묵인해 왔던 것이다. 의사로부터 수술 시기를 놓치면 창자가 썩어 들어간다는 경고성 발언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의 성화를 더는 못 견디고 입원을 하고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한 이상, 나의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의 견고한 사고방식이 비로소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불안하고 초조했던 심상을 글로 옮겨 본다.
앓는 소리 끙끙거리는 병실은 공포의 도가니, 금식 경계령이 내려진 뒤 너무 불안해 쥐불 놓듯 가슴 태우고 목까지 태우지만, 피난처라야 혼자 끙끙거리는 적막밖에 없다. 곤란한 뒤처리 예방하듯 수술동의서 조목조목 받아 간 다음, 푸른색 수술복으로 갈아입히고 울창한 몸의 숲 벌목하듯 밀어내자 신성한 동산은 사라지고 지석만 남은 부끄러운 민둥산 된다. 수술대로 실려가 팔다리가 묶이고 푸른 마스크, 빛나는 눈동자들이 쏘아보는 차가운 시선 앞에 지석조차 여지없이 쪼그라드는데 배를 째든 창자를 잘라내든 모든 게 칼자루 쥔 사람 몫이라서 나는 마냥 죽은 듯이 누워 있다.
세월은 약이 되어 그때의 상처도 깨끗이 치유해 주었다. 그러나 여름은 개띠에게 언제나 위험한 계절이라서 경계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환하게 상기되는 그때 그 환자들의 웃음이 오래오래 기억되리라. 2010년 여름과 함께.
호모 라피엔스 이 재 호
서점을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또 아프리카 어디에서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된 모양이지.’
하면서 책을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간을 비판하는 신랄한 글들이 실려 있었다.
‘이분이 나치 강제 수용소를 보고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지.’
그 글에 찬성을 하지 않으면서도 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느끼면서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면서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뜻인데 과학 문명을 이룬 현재의 우리를 호모 사피엔스&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혜롭고 지혜로운 인간이라 이름 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우리의 먼 조상인 호모 히빌리스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쯤 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호모 에렉투스는 모양은 비슷하지만 언어 능력이 없었다.
호모 라피엔스는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대신에 약탈하는 자, 잔인한 자를 뜻한다.
저자는 런던 정경대학의 교수였던 존 그레이 박사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주어진 본성을 초월할 수 있으며 자기의 운명과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믿음은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로 여기는 이러한 휴머니즘을 생각 없이 받아들인 신념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수할는지는 모르지만 잔인한 약탈자라고 설파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 작년 히로시마 여행이 떠올랐다. 내가 속한 여행 클럽에서 히로시마 여행을 권유받았을 때 참가할까 말까를 한참 망설였다.
그전에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들른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느꼈던 비참함이 떠오르며 또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본 사진 중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사진은 가스 처형실로 끌려가는 트럭 위에서 서로 장난치며 천진하게 웃고 있는 어린이들의 사진이었다. 흐트러진 인형, 나체로 가스실로 밀어 넣는 인간의 잔인성을 보며 인간이라는 동물의 잔인성이 저주스러웠다. 저자인 존 그레이 교수도 그곳에서 이 책을 저술할 빌미를 찾았을 것이다.
‘지푸라기 개(Straw Dog)’가 이 책의 원제인데, 인간을 지푸라기 개만큼 하찮게 여기고 멸시하며 나치 수용소를 떠났을 저자를 상상했다.
동료들의 권유도 있고 볼 것을 다 보아 두자는 마음으로 히로시마 여행 길에 올랐다.
인간의 탐욕이 낳은 허허벌판에 서 있는, 원자 폭탄에 녹다 만 앙상한 건물 한 채. 저들이 일으킨 전쟁이며 저들의 만행을 덮어 두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일본인들의 사진들을 걸어 두고 있었다.
인간의 잔인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진나라 장수 백기는 포로 사십만 명을 생매장했으며 항우도 관중을 돌파할 때 이십만 명을 생매장한 역사가 있다.
원자 폭탄 한방에 삼십만 명이 비참하게 죽었다. 어린 생명들. 죄 없이 끌려간 한국인 이만명의 위령탑이 공원 한 켠에 쓸쓸히 서 있었다.
소위 지도자라는 인간들의 욕망, 허망한 무명(無明) 때문에 이런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되어 왔다.
잔인한 동물, 호모 라피엔스.
지금 세계에는 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원이 수십만 명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하며 밤을 새워 가며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그 결과로 매년 더 강력한 살상 무기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노을이 지는 히로시마 공원에서 하늘 저 켠을 보니 별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주 저 멀리 태양의 모성(母星)인 오리온좌 어디엔가는 도솔천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도솔천의 스님들이 별빛을 타고 내려와 어리석어 욕망스럽고 잔인한 이 인간들을 제도할 수 없을까 하는 상념 위로 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자는 노자 사상에 심취되어 있는 듯했다. 지푸라기 개, 추구(芻狗)는 노자 도덕경의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여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에서 나오는 말인데 인간을 그 추구에 비유한다.
추구는 제사 중에는 존귀한 대접을 받지만 제의가 끝나면 하찮게 버려지는 존재다. 자연은 애증 없이 존재하며 인간도 그 자연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지구를 파괴하면 추구처럼 비참하게 버림받을 수도 있다고 설파한다.
어떤 대목은 저자의 주장이 너무 과격하여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 설파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반 휴머니스트인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로 인간을 걱정하는 휴머니스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손톱과 이빨에 피가 가득한 원죄의 인간들. 창밖에는 풀벌레가 울고 오리온좌가 빛나고 있었다. 호모 라피엔스가 아닌 호모 사피엔스가 되기 위해서는 도솔천의 스님들이 별빛을 타고 내려와야만 하는가?
명품 얼굴 브랜드 이 정 기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라만 봐도 즐거움이 넘치는 막역한 사이다. 오늘 같은 날은 잡다한 일상들 다 접어 두고 인생의 역주행을 논의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날이면 삶이 고달픈 친구의 하소연이며, 건강이 나빠 고생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바로 인생 상담소가 되고, 종합병원이 되기도 한다. 집단 토론 형식이랄까. 우리 모두는 지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 할 수 있는 방법 찾기에 분주하다.
각자의 경험과 지식, 다채널의 정보까지 총동원된다. 진지한 인생 상담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우연하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수도 있다. 이야기의 메뉴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그에 적절한 처방도 내려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수다에서 배우는 인생 해법이고 만남의 구실이요, 만나서 행복한 이유다.
뒤늦게 들어온 한 친구, 안과에 다녀온단다. 속눈썹이 안구를 찔러 염증이 생겨 고생 중이란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쌍꺼풀 수술 이야기가 나온다. 방 안은 일시에 성형외과 쪽으로 화제의 가닥이 잡힌다. 얼굴의 주름살 펴기, 그리고 뼈를 깎는 성형 수술까지 점점 범위가 확대된다. 한 친구가 처진 눈꺼풀을 위로 당겨 올리며 “이렇게 하면 나 더 예뻐?”라고 얼굴을 들이민다. 그 몸짓 하나에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넘친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읽는다. 주름진 얼굴, 그리고 늘어나는 잡티가 마음속 깊이 서글픈 그림자를 드리운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친구들이다. 힘들고 부족한 현실을 채워 가며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있는 이들에게도 세월의 그늘은 비켜 가지 않았다. 남은 삶에 큰 변수가 없는 초로의 문턱에선 이들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이 또 다른 변신을 꿈꾸고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이야기가 도마에 오른다. 그들은 외모 자체가 삶의 수단이요 상품인 사람들이 아닌가. 젊음을 연장해야 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연예인들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절박함이 있겠지. 하지만 사람은 서로 다름으로 아름답고, 자기만의 개성을 가질 때 최고의 얼굴 브랜드가 되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할 필요까지 있을까.
결론도 없는 이야기는 제법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삶의 흉터를 덮고 고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점점 커지는 모양이다. 자신의 딸과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 모습까지 다시 만들어 볼 계획에 열을 올린다. 나이도 존재의 가치도 다 잊어버린 사람이 된 듯하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다운 꽃이 되어 거울 앞에 설 것처럼.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나는 말이야 이 얼굴에 주름 하나 더 잡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그걸 왜 지워, 그러면 새로 만들어질 때까지 그 고생을 또 해야 되나.” 이 말 한마디에 스쳐 지나간 무거운 세월들이 그의 얼굴에 투영된다. 순간 방 안은 숙연해졌다. 금방이라도 멋진 미인이 될 것처럼 야단법석을 하더니 그건 그냥 농담처럼 끝날 모양이다. 자신의 부가가치를 업그레이드시켜 멋진 인생 반전을 꿈꾸던 열띤 논쟁은 싱겁게 꼬리를 내렸다.
현실과 과거와 미래가 함께 공존한 내면의 세계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투영된 것이 내 얼굴의 바탕 화면이다. 그 위에 삶의 무게만큼이나 깊고 얕은 골 하나씩 더하고, 애면글면 키운 자식들이 그려 준 검버섯과 잡티, 그리고 행복해서 웃다가 생긴 눈가의 주름 하나까지 그려진다.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쉽지 않았던 지난날의 상처요 흔적이 만들어낸 무늬 결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솜씨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명품 얼굴로 최고의 브랜드 가치가 되지 않을까.
이제 인생 3막의 마지막 무대에서 내려설 일만 남았다. 다시 한 번 변신할 수 있다면 온화하고 폭넓은 마음 바탕을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의 밥상머리에서든 따뜻하고 넉넉한 얼굴 반찬이 되고 싶다.
유전 이 정 연
‘어머니처럼 살지 않기’는 내 마음의 벽에 걸어 둔 표어 같은 거였다. 썩거나 흠이 난 과일을 먼저 먹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고 아깝다고 해서 쉰내가 나는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제 새끼들이 먹다 만 밥도 어찌 안 먹느냐?”라는 시어머니의 지청구를 꾸준히 못 들은 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로 산 옷은 걸어 두고 아끼는 게 아니라 많이 입는 게 투자 가치를 회수하는 거라고 새 옷부터 부지런히 입었다. 심지어 생선조차 물 좋은 걸 냉동실 앞쪽에 두고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입지 않은 새 옷들과 우리가 드린 용돈이 고스란히 든 주머니를 안고 흐느끼던 순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맞아 우리 어머니들은 너무 아끼고 희생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사셨어!” 수긍하였고 어머니를 쏙 빼닮은 언니조차 “엄마도 진즉 우리처럼 살았으면” 하고 자주 아쉬워하였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어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다짐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내 삶은 어머니의 끝없는 궁상에 가까운 절약이나 희생과는 비교적 거리가 있어 보였다. 늘 기분 좋게 물건을 소비하는 느낌이 들었고 내 삶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가벼운 자만은 살림의 권태 같은 것쯤은 가볍게 물리쳐 주었다.
지난 토요일 다른 일 없으면 주말 농장으로 놀러 오라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황금빛 벼 이삭이 일렁이는 들판 위로 잠자리 떼의 군무가 아름다워 천국의 정원이 저럴까 싶게 황홀했다. 땅콩은 너무 많이 열어 한 포기를 들기도 버거웠고 알알이 여문 들깨는 이제 잎이 연노랑으로 물들어 장아찌 담기에 딱 좋았다. 열무는 보드랍게 손가락에 감기는데 물김치를 담그면 밥도둑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애기 고추와 함께 고춧잎도 다 훑어서 봉지에 담았다. 고추밭에 드문드문 돋아난 고들빼기도 캐서 담고 사위도 안 준다는 가을 부추도 베어 가지런히 담아 놓았다.
저물도록 밭에 남아 싸 놓은 보따리를 내려다보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옛날 생각나지?” 언니도 고향 집 가을이 생각난 것이다. 가을이면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거두어들였다. 익은 고추는 따서 너럭바위에 널고 애기 고추는 밀가루를 묻혀 쪄서 말리고 콩잎 깻잎은 소금물에 담그고 굵은 조약돌로 눌러 놓았다. 잘 익은 호박은 따서 방 윗목에 가지런히 놓고 애호박은 길게 돌려 깎아 처마 아래 장대에 걸어 놓았다. 동면을 앞두고 필사적으로 먹이를 물어 나르던 다람쥐같이 들판의 모든 것들을 물어 날랐다. 심지어 호박넝쿨조차 다 걷어서 썰어 말려 쇠먹이까지 비축해 놓고서야 우리의 추수는 비로소 끝이 났다. 아이들의 추수는 낮 동안이었지만 어머니의 추수는 첫눈 오는 밤까지 끝나지 않았다. 소도 별로 반기지 않을 것 같은 무는 썰어서 조금이라도 편평한 바위가 있으면 모두 점령해 널어놓았다. 별로 양식이 될 것 같지 않은 벌레 먹은 콩조차 골라서 따로 보관하셔서, 쇠죽솥에 몰래 쏟아 버린 씁쓸한 기억이 생채기처럼 쓰리다. 그때는 그저 어머니가 하는 일 모두가 구차하게만 보였다.
집에 돌아와 땅콩을 깨끗이 씻어 말리고 고들빼기며 부추도 다듬어 놓았다. 고추도 다듬어 냉동실에 넣고 한 장 한 장 깻잎을 모아 실로 묶는데 저만치 아이들과 남편이 그걸 보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득 어릴 때 밤늦도록 깻잎을 모아 혼자 묶음을 짓던 어머니 얼굴이 동그랗게 깻잎 속에 떠오른다. “다 먹지도 못할 거 뭐 이렇게 자꾸 해?” 짜증 부리던 어린 나도 보인다. 꾸벅꾸벅 졸면서 깻잎을 가지런히 하는데 아이가 “그렇게 고단하면 좀 주무세요! 누가 다 먹는다고.” 짜증을 낸다.
놀라워라!
졸다가 개켜 놓은 깻잎마저 와르르 쏟아 버린 어머니를 향해 참다못한 내가 내던 짜증과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 도와주진 못할망정 원망 대신 나도 그때의 어머니처럼 빙그레 웃으며 깻잎 보따리를 저만치 밀쳐 놓았다. 나는 어머니의 삶을 닮지 않으려 애썼지만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는 내 안에 계셨다. 미련에 가까운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예비가 자식을 가진 부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생의 본능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녀석에게도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하리라.
어머니의 시간 이 필 영
머리맡을 피해서 어머니가 가만가만 베란다로 나가신다. 새벽이다.
꿈자리가 어지러운 밤이었다. 막다른 골목이었고 형체가 분명치 않은 무엇인가에 불안하게 쫓기고 있었다. 뒷덜미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바라본 어머니는 이미 세수를 마쳤다. 기력이 쇠잔해져 만사를 힘들어 하는 아흔넷의 연세임에도 옛 여인의 법도가 몸에 배어 있다. 몸져눕지 않는 한 아침마다 베란다로 나가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세수를 하고 검은 머리 한 올 없는 백발을 찬찬히 빗는다.
‘오늘도 출근하느냐?’고 묻는 눈빛이 애처롭다. 어머니가 살아낸 세월은 출가외인이란 법도가 여자의 일생을 관통하던 시대였다. 출가하여 새로운 가문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모진 시간들이었으면 출가외인이라는 족쇄로 빗장을 질렀겠는가. 여자에게 친정은 떠나왔음에도 떠나올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이 여인들을 살아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푯대가 되어 앞만 보고 걷게 하였고 튼튼한 가문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자 자존감이었다. 여느 여인들처럼 어머니의 삶도 질곡의 세월이었지만 그 모든 것은 잦아들고 지금은 가느초롬한 어깨가 박꽃처럼 애잔하다.
허리를 다치고 일 년을 누워서 지내는 동안 쪽 찐 머리는 잘려 나갔고 일어서지를 못한 이후 어머니는 정물에 가깝다. 어떠한 일도 마다해 본 적이 없는 손이었지만 지금은 푸른 정맥만 선명할 뿐 소일거리가 없다.
어머니가 혼례를 올린 그해, 같은 문중으로 시집온 여덟 명의 규수가 문중의 규범을 익히면서 서로를 꽃에 비유했는데 어머니는 목단화였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았을 열일고여덟의 새색시들이 모여 앉아 서로의 품성과 자태를 꽃의 이미지로 비유한 것도 놀랍지만 화중왕이라는 모란이 내 어머니의 꽃이었다는 것에 눈시울이 젖어 온다. 유장한 세월은 그 아리따운 새색시를 백발의 언덕에 무심히 부려 놓은 것이다.
한 생이 잠깐이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던 계집아이가 부표처럼 떠오른다. 그때는 어머니의 등이 세상의 넓이였는데 가랑잎 같은 어머니는 이제 딸의 등이 세상의 넓이다.
환한 달밤, 병중에 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논물을 대러 가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질척거리는 들길을 걸으면 조그만 돌부리에도 넘어지곤 했다. 들판을 가로지르며 콸콸 흘러가는 봇도랑의 물살은 장정도 빨려 들어갈 정도로 거셌다. 물길은 춤추고 아우성치며 아득한 들판을 유유히 적셔 나가지만 봇도랑과 멀리 떨어진 논에는 늘 물길이 약했다. 모심는 날은 내일인데 논물이 더디게 흘러들자 어머니는 봇도랑에 엎드렸다. 물살을 조절하기 위해 걸쳐 놓은 짚단을 걷어내기 위해서였다.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물길이 달빛에 구불거렸다. 나는 어머니의 몸이 빨려 들어갈세라 허리를 잡고 버둥거렸다.
간신히 짚단을 걷어내고 봇둑에 앉은 어머니는 “달도 밝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두려움에 뻣뻣해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옆에 서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었다.
지금도 달이 환하면 아득한 슬픔이 가슴에 차 오른다. 집 밖을 나서면 휠체어에 앉아서도 넘어질세라 딸의 손을 꽉 움켜잡지만, 어머니를 의지하는 내 마음은 아직도 봇도랑에 앉아 달빛에 젖어들던 그 밤처럼 오롯이 남아 있다.
혼자 남겨질 노인은 생업의 현장으로 출근하는 딸의 부산한 움직임을 고즈넉이 건너다본다. 간간이 눈길이 마주치고 모녀는 흔연스럽게 미소를 나누지만 서로의 속내는 짐짓 모른 체한다. 일찍 오느냐는 한마디를 끝내 입 안에 감추는 어머니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도 딸은 일찍 온다는 답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겪어 보지 않은 삶이 가늠될까. 노인이 되어 보지 않고서야 그 심정을 낱낱이 헤아리기는 어렵다.
딸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나면 집 안은 먼지 한 톨의 움직임도 포착되는 적막이 감돌 것이지만 어머니는 내색을 않는다. 모녀간이라 하여도 소통이 완전할 것인가. 무심히 지나쳐 가는 미진한 구석이 허다함에도 딸의 마음을 먼저 품어 안는 모성이다.
쓰임새가 적은 무명실을 사 오라고 할 때마다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다. 나무젓가락 양끝에 빨간 천을 덧대어 실패를 만들어 놓고 나날이 기다리는 눈치가 등을 떠밀 때쯤이라야 마지못해 사 온다. 방바닥에 둥글게 타래를 펴 놓고 실오리를 풀어내자 대각선의 결을 이루며 도톰하게 감겨 가던 하얀 실꾸리, 그것은 삶과의 교감이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교직이었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하 많은 삶의 곡절이 한 뼘으로 접혀져 버린 어머니의 시간을, 그 하얀 삶의 경전을, 톱니바퀴같이 맞물린 일상을 뒤쫓느라 허둥대는 딸은 아직 다 읽어 내지 못한다.
쓸쓸함을 감춘 채, 잘 다녀오라고 밝게 배웅해 주는 짤막한 한마디가 등에 서늘히 부딪는다. 저 애틋한 음성을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까. 슬픔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다.
산다는 것은 인연의 매듭을 엮어 가다가 매듭은 다시 풀리고, 종내는 혼자 돌아가는 것이다.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은 어머니를 잃을까 근심하는 불안감이었다. 예견하고 준비해도 이별은 찰나다.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그 캄캄한 작별 후,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행위는 고작 울음뿐이다.
종종걸음을 치던 발길을 불안한 마음이 돌려세운다. 현관 문을 다시 열고 일찍 온다고 크게 소리친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아름다운 인연 임 도 순
인연(因緣)이란 말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무수한 연관의 교류를 이르는 말이다. “소매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다.”의 속담은 순간적으로 흔히 있는 일도 마련된 말미암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소한 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우연이란 없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말,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불가에서 이르기를 ‘부부의 인연’은 8천 겁이요, 형제의 인연은 9천 겁, 부모와 사제간의 인연은 10천겁이다. 한집에 사는 연도 4천 겁이란다. 부모의 은혜가 최고이며 사제간의 관계도 부모 맞잡이다. 고사(故事)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다.
겁(劫)이란 천지개벽을 이른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대의 급수(級數)다. 하늘과 땅이 새로이 열리는 신천지의 세계는 영원무궁의 세월인가?
나는 인연이나 운명(運命)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운명은 의식 속에 있다.’는 말을 믿는다. ‘스스로 자기가 운명을 짓는다.’고 생각한다. ‘인연이겠지.’ 하는 자포자기적인 체념과 자위는 약자의 신음 소리로 여겼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니 인과응보의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 같다.
40여 년 전 나의 교사 시절, 봄 방학의 틈새를 이용하여 S시인과 함께 남해의 잔잔한 포구인 통영(統營)을 여행했다. 통영은 임진란 한산 대첩에서 전승을 마감한 충무공과 인연 있는 이름의 고장이다.
그곳에서 S시인과 알음 있는 분으로 미래사에 머물고 계신 효봉(曉峰) 스님을 방문하는 바람을 손꼽고 있었다.
통영에 이르는 노정은 육로와 다른 해저 터널을 지나 미지의 세계로 향한 가슴 설레는 즐거움이었다. 숲 속 길목에는 쭉쭉 뻗어 있는 전나무가 하늘 높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방문한 미래사는 웅대한 사찰이 아닌 암자인 듯 기억된다. 효봉 스님의 거처는 외딴 방으로 단출한 편이었다. 시인은 나를 소개하고 담소를 나누면서 스스럼없이 나의 불명을 부탁한 것이다. 스님은 주저 않고 안상에 놓인 필묵으로 접어 둔 한지에 ‘大佛頂 曉峰’이라 써 주셨다. 호기심에 부풀었지만 무보수로 얻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꼍으로 함께 나와 바위언덕에 한 지점을 지팡이로 짚어 보이면서 “내가 묻힐 자리”라고 담담하게 유언처럼 이르시는 품새로 고령의 노스님이 걱정스럽게 느껴졌다.
‘대불정(부처님의 이마)’이라니 굉장한 명명(命名)이었다. 불명은 뜻하는 바 지향으로 심신의 수양을 돕는 법명이다.
나는 신자가 아니어서 그 이름으로 불려지지도 않았지만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연기를 소중히 여겨 관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명의 뜻대로 생활신조로 수계(守誡)하지 못했다.
그 후 2년 어느 날, 신문에 대서특필로 효봉 스님이 열반에 입적한 기사와 함께 영롱한 사리가 쏟아진 것이다.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노스님의 회상과 함께 그때 써 주신 불명이 문득 떠올라 책갈피 속에 넣은 것 같아 아무리 뒤져도 없는 것이다. 가로 10센티 세로 20센티 가량의 한지에 지방(紙榜)처럼 쓴 모양이 아련히 떠오른다.
스님은 젊은 시절 법관으로서 사형 선고를 한 자책으로 출가에 발심하여 득도하기까지 범상찮은 인품이었다고 들었다. 내가 본 만년의 스님은 범상한 인상으로 비추어졌고 그 법명을 어렵사리 수계하였다면 더 소중히 간직하였을 것을 만감이 교차했다.
사리(舍利)란 부처나 고승의 유골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면 각성의 진수로 뼈의 결정체가 영롱한 옥골로 이루어지는 환골탈태의 조화가 발현되는 진귀한 현상이다.
마치 조개가 살을 깎는 아픔을 통하여 값진 진주를 잉태하는 변이의 화신이런가! 범인도 일상생활의 인고와 시련 끝에 생명의 핵이 탄탄하게 여물어 변신의 파장이 정점에서 성인의 경지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나는 이르리라, ‘효봉 스님은 대불정의 경지에 각성하였노라’고.
이제 내 생애에 아름다운 인연으로 큰 굴절과 번뇌 없이 희수(喜壽)를 누렸다. 내 둘레를 에워싼 연연한 혈육의 정으로 하여 혼신의 정열을 기울이고 풍우에 시달린 거목의 표피를 닮은 주름살이 지나온 세월을 이야기한다.
앞으로의 여생은 ‘본연의 진아(眞我)를 찾고 <대불정 최고봉>의 경지를 비출 높은 혜안을 밝히기 위하여 끊임없이 본심(本心)으로 여여(如如)한 삶을 살게 하사이다’고 발원한다.
평소 애창하는 염불 시조를 참선(參禪)의 화두(話頭)로 읊어 본다.
“팔만 대장 부처님께 비나이다.
나와 임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여래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시방보살 오백 나한
팔만 가람 아재아재 서방정토 극락세계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후세에 환도 상봉하여
방연을 얻게 되면 보살님 은혜를 사신보시 하오리다.”
젊음에 대한 나이 든 자의 불평 임 만 빈
어느 날 오후 늦게 수술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이제 수술은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만 쉬시지요. 부탁한 환자나 수술하고.”
젊은 동료 교수의 말이었다. 웃음 띤 얼굴로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연구실로 들어왔지만 기분이 그리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쉬라니. 젊은이들한테 모든 것을 물려주고 구경만 하고 있으라니. 그렇게 내가 나이가 들었단 말인가? 환자를 돌볼 수 있는 능력도 다되었단 말인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는 비애와 허무감이 솟아올랐다.
나이가 들면 정보를 얻는 양이 줄어든다. 그것들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대처하는 속도도 느려진다. 이것을 보고 나이 든 사람들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렇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단점들을 잘 안다. 자신을 알면 적을 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서로 협조를 해서 일을 처리한다. 그 방법만이 젊은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즐기는 테니스 경기만 보아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들보다 테니스 경기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식은 몰라도 복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젊은 조는 힘으로 이기려 하나 나이 든 조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로 이기려고 한다. 짝과 협조를 잘해서 넘어온 공을 받아넘기고, 상대방이 공을 받기 힘든 자리로 공격함으로써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
수술도 마찬가지다. 수술은 집도자와 수술 보조자 및 간호사 등의 협조가 잘 이루어져야 성공한다. 어렵고 오랫동안 수술해야 하는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젊은 의사들은 자신들의 체력을 믿고 혼자서 전 수술 과정을 완수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젖기도 하고, 남한테 도움을 받는 것을 수치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에 나이 든 의사들은 체력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남한테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움이 닥치면 아랫사람한테도 전혀 부끄럼 없이 도움을 청한다. 자기의 체력적 한계를 알기 때문에 고도의 경험을 요구하는 부분만 직접 수술하고 나머지 부분은 체력이 강한 젊은 교수나 수련의에게 맡긴다. 개인보다는 조직을 이용하여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나이 든 의사들도 젊은 의사들과 똑같은 시력으로 수술을 할 수 있다. 루페(확대경)와 수술 현미경을 사용해서 말이다. 수술을 시작할 때에는 루페를 쓰고 하고 뇌를 건드리기 시작하면 미세 수술 현미경을 사용한다. 과거라면 시력이 떨어진 나이 든 의사들은 수술하는 것을 접어야 했다. 신이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으면 수술을 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육체의 단점이 과학의 발달로 메워진 것이다.
나이가 들면 흔히 듣는 말이 ‘힘드시는데 편히 쉬시라’는 말이다. 이 말만큼 앞면과 뒷면의 뜻이 다른 말도 드물 것이다. 연로한 부모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자식이 부모님한테 이 말을 했다면 그 말의 앞면과 뒷면의 뜻은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도 앞면만 부모님을 위로하는 말이지 뒷면은 진실로 부모님을 위한 말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일하는 데 사는 재미를 느끼고, 농사로 얻어진 수확물을 자식들한테 나누어 줄 때 삶의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우면 부모님을 집에 모시고 와서 한 달만 편히 쉬시도록 해 보아라. 일주일만 지나면 안절부절못하시고, 이 주일이 되기 전에 곡식은 물론 집 주위의 잡초까지 걱정하기 시작하며, 한 달이 지나면 우울증에 빠지는 것을 볼 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직장의 후배가 선배한테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앞면과 뒷면의 뜻이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앞으로는 선배를 위하는 듯이 보이지만 뒷면의 뜻은 자신이 올라설 자리를 내 달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 도 그것은 거짓인 것이다. 인간은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행복과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신한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다.
나이 든 자들을 ‘쉬시라’고 내치지 말고 같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들은 젊은이들보다 지혜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지식은 공부를 해서 얻을 수 있으나 지혜는 깨달음에서 얻어진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지식보다는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흔하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쟁 중 군대가 길을 잃고 헤맬 때 늙은 말 하나를 풀어 놓고 그 뒤를 따라가니 큰길에 도달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하는 고사(故事) 말이다.
나이 든 자들의 지혜가 일반 직장에서도 필요한 경우가 생기겠지만 수술할 때에도 생긴다. 특히 어려운 수술을 할 때에 그러하다. 수술 중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집도자는 대개 당황한다. 그렇게 되면 그 상황을 안전하게 해결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 경험 많은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그의 조언은 집도자를 안정시켜 문제를 차분하게 해결하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직접 수술을 도와주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내치지 말아야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쭉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나 학문이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갈 것인지를 어느 정도 예측을 한다. 어느 방향으로 젊은이들이 나아가야 미래에 그들한테 도움이 되는 길인가를 가르쳐 줄 수가 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나이 든 자들만 편들고 젊은이들을 편향적으로 미워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고 나도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진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글을 쓰는가? 그것은 내가 떠나보낸 젊음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젊음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그 속에는 불확실성이라는 불안감도 숨어 있지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라는 꿈이 숨어 있지 않은가. 내 젊었던 시절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대한 꿈을 키웠던 내 인생의 가장 화려했던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절실하게 깨닫고 아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기찬 시선을 감당하면서 장 영 향
아침부터 지하철을 타고 내려 긴 통로를 지나 테제베를 타고 관광지를 둘러보았고,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트람(Tram)을 타고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다.
점심은 딱딱한 바게트와 와인이 나왔다. 가져간 햇반을 먹다가 바닥이 났다. 바게트는 내 입장에선 군것질로도 시원찮은데 요기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다 눈에 띄면 줄을 서서 이십여 분 기다려야 사 먹을 수 있는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먹었다. 어떤 때는 샐러드만 먹는 레스토랑도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한 곳은 헨느(Rennes)라는 도시였다.
몸도 지치고 허기도 졌다. 여러 날 여행을 하였기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었다. 해가 방금 진 듯한데 시간은 벌써 밤 10시였다.
낯선 도시에서 한식당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대로변이 아니고 소방도로쯤 되는 곳이었다. 간판의 한글을 보니 반갑고 설레어 코끝이 찡하였다.
문을 밀치고 들어간 식당은 좁다란 굴처럼 입구가 좁아 양 벽 쪽에 2인용 탁자가 겨우 하나씩 놓였고, 가운데 통로는 두 사람도 지나지 못할 정도였다. 주인인 듯한 남자의 안내로 따라가니 좀 넓어져 4인용 식탁이 3개씩 놓인 넓이였다. 마침 아주 구석진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에 앉자마자 화장실부터 다녀왔다. 지나며 본 주방은 얼마나 좁은지 음식과 냄비류가 바닥에 놓여 있고, 화덕에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설거지하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 말고는 빈자리가 없었다. 서빙 하는 여자는 빈 그릇을 놓을 데가 없어 통로에 두고 음식을 나르고 모두가 바빴다. 화장실 가려면 그 사이를 지나야만 했다.
의자에 앉아 차림표를 보아도 탕이 없어 불고기덮밥과 김치볶음밥을 시켰다. 음식이 나올 동안 여러 종류의 비닐을 정리하여 짐을 간추렸고, 딸은 숙박할 곳을 찾아보고 있었다.
나는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둘러보았다. 그제야 식당의 윤곽이 제대로 보였다. 벽 사이마다 초가집, 지게, 한국 인형, 삿갓, 담뱃대, 문짝, 고추가 많이 달린 장식품들이 걸려 있어 이곳은 마치 한국에 온 듯하였다.
한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는 대각선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마쳤는지 식탁엔 음식이 없었다. 나는 이제 보았는데 청년은 눈길을 거두지 않고 표정 없이 말갛게 건너다보는 것을 보니 나를 여태껏 지켜본 것 같았다. 마주 앉은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사람은 언젠가 영화인가 아니면 비디오에서 조연으로 나옴 직한, 짧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멋쟁이였다. 청년은 사관생도들이 입는 카키색 윗도리를 입은, 얼굴이 네모진 형으로 말쑥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움직임도 없이 계속 시선을 보내온다. 마주 앉은 노신사도 나를 본다. 부담이 되어서 내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나를 자꾸 쳐다본다.”
딸은 고개를 돌려 아주 짧게 보았다.
“입양아이다, 자꾸 보지 마라.”
그랬었구나, 어쩐지 낯익은 듯 동양계 사람인 것 같아 짐작이 갔는데 입양이라니, 그렇다면 저 청년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눈을 나에게 고정시켜 마치 줄이 쳐져 있는 것처럼 나를 자신의 엄마인 양 바라보고 있구나.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벌써 20분이 지나가는데 나갈 수도 없다. 음식 냄새는 식욕을 돋우고 배에선 소리가 나고 오늘따라 내 차림새가 더 초라하다. 며칠 여행의 피곤에다 입에 맞지 않은 음식에다 내 얼굴은 또 어떤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세련된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아직 개발이 안되어 새마을과에 속한 수더분한 여자라 좀 부끄럽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다볼까, 자신을 버린 엄마나 형이나 동생을 떠올릴까. 아마 입양이 되어 올 때나 떠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세월을 헤아리고 있는 마음인 듯 이삼십 년 시간이 온갖 감회가 담겨 있는 표정인 듯 마음이 축축해진다. 밥 먹는 것까지 쳐다보고 있으니 입맛이 쓰고 맛이 없다.
“배고프다더니 왜 안 먹나, 얼마 만에 먹는 음식인데.”
“배고픈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맛이 없다. 너 많이 먹어라.”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내일 여행이 남아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나가지 않고 있냐.”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 시간이 두 시간이다. 먹고 이야기하고 마시고. 엄마, 저 사람들 보지 마라.”
“그래.”
말은 그리 했지만 청년의 마음이 나한테로 와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다.
내가 손잡으면 참았던 눈물을 끝내 흘릴 것 같고, 내 가슴을 두드리며 엉엉 소리 내어 울 것 같다. 감정을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 처연하다.
몽울몽울 피어오르는 그리움이 미움으로 바뀌고 원망과 섭섭함을 누르고 있을까. 나는 그윽하게 애절한 듯 쳐다보는 눈길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저려 온다.
우리가 식당을 나올 때까지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옷깃을 잡아당기는 듯한 끈질긴 시선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회화나무에 핀 능소화 꽃 전 상 준
도산서원을 금년 들어 두 번째 찾았다. 봄에는 문화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곳곳을 돌아보며 서원 건물과 소장품의 문화적 가치를 공부했다. 이번에는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숲생태 해설가들과 함께 서원의 나무를 돌아보았다. 장소는 같으나 보는 시각은 엄청 달랐다.
구권 천 원짜리 뒷면에 나오는 도산서원 전경 사진을 보며 촬영 방향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지폐 속에서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두 그루 나무다. 하나는 도산서당 앞에 있는 금송(錦松)이고, 다른 하나는 서광명실 옆의 회화나무다.
금송은 참 예쁘게 자랐다. 햇살을 받아 그 색깔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나무 앞 표지석에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시던 금송으로서 도산서원의 경내를 더욱 빛내기 위해 1970년 12월 8일 손수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심은 지 40년이나 된다. 연륜을 느끼게 할 정도로 많이 자랐다. 가지 여기저기에 솔방울도 달고 있다.
함께한 대부분의 사람이 금송이 심어져 있는 위치에 대해 부정적이다. 도산서당은 서원의 많은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퇴계 선생이 직접 제자를 가르쳐 선비 정신을 꽃피운 곳이다. 금송이 바로 그 앞에 심어져 있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금송을 그저 한 그루의 나무로 보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금송이 가진 이미지가 일본을 떠올린다. 금송이 우리나라 나무가 아니고 원산지가 일본이다. 특히 일본의 신궁(神宮)에 천황을 상징하기 위해 심는 나무로 알려져 있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구권 천 원짜리 뒷면 사진 속에 금송이 들어 있어 더욱 마땅하지 않단다. 신권 천 원짜리 뒷면에는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보물 제585호)으로 바꿔 다행이다. 계명대 참나무교실에서 생태학을 가르치는 김종원 교수도 이 나무는 일본산이 틀림없다면서 도산서원의 사회적·역사적 상징성으로 볼 때 다른 곳에 옮겨 심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회화나무는 찾을 길이 없다. 구권 천 원짜리 지폐를 들고 위치를 추적해 본다. 서광명실 옆에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가지에는 누르스름한 능소화 꽃이 깔때기 모양을 하고 덩굴 따라 달려 있다. 봄에는 담쟁이 연푸른 잎이 가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구권 천 원짜리 뒷면 사진에는 회화나무가 서광명실의 건물보다 높게 자라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다.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 함께한 사람들이 안타깝다며 한마디씩 한다. 나무를 어떻게 관리했기에 죽인단 말인가. 죽었으면 빨리 다른 회화나무로 교체를 해야지.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겼다. 집 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인물이 난다고 생각했으며, 좋은 기운이 모여 잡귀신이 가까이 못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 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고,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서원과 회화나무는 참 잘 어울린다. 나무의 모양이 호탕해 영웅의 기개와 고결한 학자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엄숙한 위엄에 압도되어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저절로 몸가짐을 바로잡게 된다.
담쟁이덩굴과 능소화 넝쿨에 몸을 맡기고 썩어 가고 있는 회화나무가 수명을 다해 죽진 않았다는 생각이다. 주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나무둥치의 삼면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수분과 영양 공급이 제대로 될 수 없다. 잘못된 삶의 공간과 시간을 만나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나무를 쳐다보다 능소화 꽃에 시선이 머문다.
옛날 한 궁중에 ‘소화’라는 아름다운 궁녀가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왕의 성은을 입어 빈(嬪)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더 이상 왕이 찾지를 않아 기다림에 지쳐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죽거든 담 밑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그 후 그녀가 묻힌 곳에 나무가 솟아 담벼락을 타고 오르더니 생전에 임금을 기다리듯 담 밖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꽃을 피우는 능소화가 되었다. 참 애절한 이야기다.
죽은 회화나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소화’가 꽃이 되어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담아 담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다. 회화나무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 죽은 육신도 누군가 필요로 할까.
하늘에는 초여름의 햇살이 따갑다. 금송과 회화나무가 말을 걸어 온다. 자신들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갈 뿐이라고. 인간의 시각으로 마음대로 매도하지 말라고.
등줄굴노래기 정 상 규
칠흑처럼 어두운 굴속이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만 적막을 깬다. 울려 퍼지는 소리, 하지만 물이 아닌 다른 것이 있는 듯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진다. 무엇일까. 무엇이 숨어 있는 걸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어둠에 눈이 익자 진흙으로 빚은 듯한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보였다. 등줄굴노래기다. 그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고생대 5억 3천만 년 전의 신비가 고스란히 숨어 있는 대금굴에서였다.
등줄굴노래기, 그는 어떤 신비한 경관도 볼 수가 없다. 일생을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그는 어쩌면 애초부터 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퇴화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캄캄한 곳에서 어떻게 생을 유지해 나갈까. 어디서 왔으며 언제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종유석 위가 그의 자리인 듯 그는 정물로 엎드려 있다. 아직 수억겁의 세월을 더 기다릴 자세다. 다른 생물은 없어 보인다. 희끄무레한 몸 색깔에 크기는 손톱만큼 작다. 저 빛나는 천지 밖 하늘과는 아예 무관한 듯 움직이지 않는다. 주위에는 각종 종유관들이 창이나 병기인 양 솟아나 있다. 어떤 것들은 천장에 매달려 고드름이나 엿가락형으로 신비감을 더해 준다. 마술 세계의 만물상 광장을 데려다 놓은 듯 천지연이나 비룡폭포의 모습이다.
언젠가 영국의 모 잡지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조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가장 행복한 이들은 돈이나 명예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을 몰입하게 만든 놀이나 애정, 보람 등이었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의 공통된 점은 눈을 통해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눈, 갓난아기를 목욕시킨 후 젖을 빠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눈, 혼신의 힘을 기울여 수술을 성공한 외과 의사의 눈, 작업 중인 예술가의 눈 등이 있다.
그렇다면 행복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그에 대한 느낌을 가질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걸까. 여러 상념들이 꼬리를 문다. 어두운 굴속에서 만난 등줄굴노래기의 모습 위로 겹쳐지는 한 얼굴, 항상 미소를 잃지 않던 황갈색 안경의 H선생님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선천적인 맹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취학 전 한국전쟁 때 미군이 버린 수류탄을 가지고 놀다가 그것이 터지는 바람에 눈과 팔을 잃었다. 좌절로 여러 해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소리에 민감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잃어버린 눈에 대한 보상일까. 놀랍도록 예민한 청력이었다. 특히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욕구, 그것은 노래였다. 음악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음악은 그에게 삶의 의욕을 북돋우고 용기를 주었다. 장애로 인하여 음악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하느님의 배려에 감사하기조차 했다. 음악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다루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악기와 함께했으며 노래를 불렀고 음악 공부를 했다. 왼손만으로도 칠 수 있게 피아노도 연습했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를 더욱 강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기 위해 점자도 배웠다.
지문이 닳고 피멍울이 맺히도록 수백, 수천 번의 시도를 하고 이룩한 점자의 정복…….
그의 노래는 기성 음악가와 다르다.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노래로 발산하는 것을 보노라면 땅속에서 이글거리며 기다린 마그마가 힘차게 불기둥을 쏘아 올리는 화산의 모습과 흡사하다. 얼굴은 신비스런 광채로 빛난다. 노래가 아름다운 선율과 조화를 이루어 울려 퍼지면 청중들은 전율한다.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는 그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음악에 대한 전력투구는 마침내 그를 맹인학교 음악 교사가 되게 했다. 장애인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흰 지팡이를 두드리며 길을 찾아 나가곤 하던 그의 등 뒤로 등줄굴노래기가 길게 따라간다.
오랜 세월을 장애 학생들과 음악으로 함께 보낸 그가 마침내 소리와 춤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전국장애자예술단 단장이 되었다. 자신이 장애를 가졌지만 교회나 교도소, 독거 노인 등을 찾아다니며 사랑과 정성을 나누게 된 것이다.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그가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비장애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그는 머리와 귀로, 열린 심안으로 더 큰 걸 그린다. 두뇌의 상상 능력은 무한대가 아닌가. 오늘날 그가 꿈으로 가꾸어 온 숱한 일들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을 봐도 그렇다.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던 등줄굴노래기. 굴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H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생각난 김에 휴대폰을 찾았다. 환청일까, 굴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나는 듯하여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안 중근 의사의 시 세 편 정 휘 창
1908년 7월 어느 날, 함경북도 국경 근처 경흥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한국 의병 약 2백 명과 일본군 사이의 싸움이다. 의병들은 연해주 일대에서 참여한 애국자들이고 의병을 통솔 지휘한 이는 참모중장(參謀中將) 안 중근(安重根)이다. 당시 일본군은 수비대(守備隊)라 하여 한국의 요소마다 점거해 있었다.
처음 전투는 의병의 승리로 일본 수비대는 후퇴했다. 이에 의병진에 문제가 생겼다. 안 중근 대장이 포로로 잡힌 일본 군인과 장사치 몇 명을 석방해 주었기 때문이다. 옛 삼국지(三國志)나 수호지(水滸志)의 전술을 생각했고 말단의 병사나 상인들은 죄가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이로써 의병진에 많은 갈등이 생겨 예하 분대들이 이탈해 가 부대는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안 중근은 다음 같은 시를 지었다.
男兒有志出洋外(남아유지 출양외)
事不入謨難處身(사불입모 난처신)
望須同胞誓流血(망수동포 서유혈)
莫作世間無義神(막작세간 무의신)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다짐한 바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렵구나.
동포들아, 맹세하고 피 흘려 싸워서
세상에서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마라.
안 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2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관향은 순흥(順興)이고 할아버지 인수(仁壽)는 김해 현감을 지냈으며 아버지 태훈(泰勳)은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걸쳐 7개의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 자(字)를 지었고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는 뜻에서 중근(重根)이라 이름을 지었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했으나 공부보다 활쏘기, 총으로 사냥하기 등 무예를 좋아하였다. 항우(項羽)를 좋아하여 글은 이름자를 쓸 줄 알면 되고 큰일을 하여 이름을 천추에 남겨야 된다고 다짐하였다.
16세가 되는 1894년 갑오년(甲午年)에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자 정부군을 도와 토벌에 참전하였다. 같은 해에 한 살 위인 김 아려(金亞麗)와 혼인하였다. 19세인 1897년에 천주교의 세례를 받아 ‘토마스’란 세례명을 받았다. 그 후 10년 동안 황해도 각지에 다니면서 복음 전도에 힘썼다.
26세가 되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과의 소위 러일전쟁은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은 한국을 차지하려는 일본과 남으로 세력을 펴려는 러시아와의 싸움이었다. 싸움에 이긴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국 지배에 착수하였다.
1906년 2월에 한국 통치 기관으로 통감부란 기관을 만들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왔다. 안 중근은 나라를 구해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힘을 기르는 길이라 믿고 그 길로 나섰다. 진남포로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경영에 몰두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일본이 덮어씌운 나라의 빚을 갚아야 된다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대구에서부터 일어나 온 나라에 물결치고 6월에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퇴위당하였으며 7월에는 군대가 해산되고 말았다.
안 중근은 교육의 힘만으로는 독립을 되찾기 어렵다고 깨달아 러시아 땅 연해주로 나아가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1908년 여름에 경흥으로 나와 일본군과 싸웠던 것이다.
경흥 싸움이 끝난 뒤에 다시 연해주로 돌아갔다. 국경 가까운 크라스키노라는 산골에서 안 중근을 비롯한 12명의 애국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태극기를 앞에 펴 놓고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대한 독립이라고 적었다. ‘단지동맹’이라 하여 지금 그곳에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쯤에 하얼빈 역에 총성이 울렸다. 3발의 총탄은 이토 히로부미의 몸뚱이를 뚫어 30분 후인 10시쯤에 69세로 숨을 거두었다. 안 중근은 이 거사에 앞서 여관에서 시를 지었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장부처세혜 기지대의)
時造英雄兮 英雄造時(시조영웅혜 영웅조시)
雄視天下兮 何日成業(웅시천하혜 하일성업)
東風漸寒兮 壯士義熱(동풍점한혜 장사의열)
憤慨一去兮 必成目的(분개일거혜 필성목적)
鼠竊伊藤兮 豈肯比命(서절이등혜 기긍비명)
豈度至此兮 事勢固然(기탁지차혜 사세고연)
萬歲萬歲兮 大韓獨立(만세만세혜 대한독립)
萬歲萬歲兮 大韓同胞(만세만세혜 대한동포)
장부가 세상에 나아감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낳음이여 영웅이 때를 만들도다.
웅대하게 세상을 바라봄이여 어느 날 큰일을 이룰까.
동풍이 점차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거워지도다.
분개함이 한번 스쳐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쥐도적 이토 히로부미여 어찌 그따위 목숨이야.
이리 되리라 어떻게 헤아렸으랴 사세 이미 굳어졌구나.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대한 동포.
안 중근의 웅대하고 강개한 뜻을 나타낸 시다.
力拔山兮 氣蓋世(역발산혜 기개세)
라는 항우(項羽)의 시가 연상된다.
1910년 3월, 안 중근은 뤼순[旅順]의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지은 시가 있다.
男兒寧詩欺心正(남아영시기심정)
判檢何知用誣言(판검하지용무언)
骨捕鐵戶平生誤(골포철호평생오)
罪作審重百行先(죄작심중백행선)
已矣於今無可奈(이의어금무가나)
사나이 어찌 글로써 바른 마음을 속이랴.
판사 검사는 무엇 때문에 거짓말로 다스리나.
사로잡혀 철창 속이니 평생의 그르침이로다.
죄를 다스림에 자세하고 신중함이 우선인데
인제 이렇게 되니 어찌할 수 없구나.
1910년 3월 26일 10시, 이토 히로부미가 숨을 거둔 그날 그 시각에 안 중근은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감옥에서
安應七歷史(안응칠 역사)
라는 자신의 이력을 썼다. 한자로 약 2만 자가 되는 이 글은 1909년 12월 13일에 쓰기 시작하여 1910년 3월 15일에 탈고하였다. 자신의 생애와 신념을 후세에 남기려고 쓴 옥중기(獄中記)로서 68년 후인 1978년 2월에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발견되었다. 이어서 동양 평화(東洋平和)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그 집필이 끝날 때까지 형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했지만 일본은 허락하지 않았다.
안 중근의 염원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와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이룩함이다.
안 중근 의사의 명복을 빌며 나도 염원한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
동양 평화로 세계 평화를 이루자.
⁎참고 자료
백 도 지음 영웅 안 중근
和佳出版社 人物韓國史
乙酉文化社 韓國史
민족문화협회 의사와 열사
市川正明 지음 安重根と日韓關係
佐木隆三 지음 伊藤博文と安重根
中野泰雄 지음 安重根 日韓關係の原象
응답 조 경 숙
불길한 조짐이다. 어제까지도 만개할 날을 꿈꾸던 동백꽃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런 것쯤이야 흔한 일인데도 뭔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기도가 끝나는 날이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 예민한 탓이리라 애써 위로했다.
법당에 들어선 내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도를 시작한 첫날부터 앉았던 자리에 누가 먼저 떡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심의 자리도, 불광화의 자리도, 연화수의 자리도 비었는데 하필이면 내 둥지란 말인가. 몸은 뒤로 물러가서 염송을 하면서도 마음 자락은 그곳에 걸려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어디 앉느냐가 무에 그리 중한 일이냐며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못이 튀어나온 마룻바닥에 앉은 것만 같다.
남편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참선하는 스님과 기왓장을 갈던 스님 이야기를 한다. “공부도 기도도 하지 않고 기왓장만 갈던 스님을 보고 참선만 하던 스님이 그 연유를 물었지. 기왓장을 갈던 스님의 대답이 가관이라. 글쎄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는 거야. 그러자 참선하던 스님이 기왓장을 아무리 갈아 봐라, 거울이 되나라고 퉁바리를 놓았겠지. 이에 질세라 기왓장 갈던 스님이 참선만 한다고 다 부처 되나 그랬단다.” 뱃속에 욕심이 그득하니 아무리 무릎이 닳도록 절해 봐야 헛일이라는 남편의 충고가 더 기운을 빠지게 한다.
전전긍긍 애태우는 사이에 새벽 예불이 끝나고 참선으로 이어졌다. 불상 앞만 두고 소등을 하고 나니 넓은 법당은 적막 속에 파묻힌다. 옆 사람의 모습은 어둠에 먹히어 희미하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나릿한 향내가 약이 되었는지 콩 볶듯 하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다. 행여 내 자리에 누가 먼저 앉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나서 헐레벌떡 뛰어왔던 지난 세월이 선명한 영상으로 한 장면씩 떠오른다.
중학교 다닐 때였다. 시험을 칠 때마다 앞줄부터 성적순대로 앉았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수재까지는 아니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로 알려진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반 아이들 서넛이 모여 소곤소곤 얘기라도 하면 내 흉을 보고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특히 영어 시험을 망친 내게 모욕적인 말과 한심한 놈으로 보는 선생님의 눈빛은 나를 숨이 막힐 지경으로 몰고 갔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 앞으로 좀 더 앞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를 먹었어도 그 강박감은 끊임없이 나를 담금질하게 했다.
문화교실에 갔을 때도 나는 꼭 앞자리를 챙겼다. 그런 나를 학습에 대한 의욕이나 흥미가 대단한 사람으로도 보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에서 주인공 정수가 생각난다. 그는 딸이 지망하는 서울대 영문과에 정원이 35명이라는 것을 알고 버스를 타도 35번 뒷번호의 좌석에는 앉지 않는다. 오직 자식을 위한 소박하고 순수한 정성에 반해 나는 내 염원을 관철하기 위한 집착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사그라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백 배, 천 배 오체투지했다. 나를 낮추리라. 나를 낮추리라. 그렇게 절을 올리면서 염원하지 않았다. 억겁 동안 쌓인 업을 봄날 얼음 녹듯 소멸해 달라고 소원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다 공이라고 깨닫게 해 달라는 발원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앞자리를 차지하고 싶다고 빌었다. 기도문에 남편과 자식 사진을 큼직하게 붙여 어머니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비손을 하듯 부처님 전에 빌었다. 자식이 명문 대학을 나와 뜨르르한 직업을 갖도록, 남편이 누구보다 먼저 승진하기를 소원했다. 남편과 자식의 후광으로도 내 자리를 당기고 싶었다.
그때 정적을 깨는 소리가 났다.
“나가레다. 나가레.”
나가레라니. 깜짝 놀라 둘러보니 老보살의 잠꼬대였다. 참선하던 사람들이 입술을 깨물어도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老보살은 깜빡 잠이 들어 날마다 가는 경로당으로 간 게 분명하다. 꿈속에서 십 원짜리 화투판에 끼었다가 혼자 바가지까지 쓰게 될 형편에 ‘나가레’가 되었으니 기쁜 나머지 소리 지른 것은 아닐까? 몸뚱이는 법당에 앉았지만 마음은 허방으로 떨어져 화투판에 끼었으니 老보살의 기도가 다 헛될까 염려스럽다. 그 순간, 老보살의 잠꼬대는 죽비가 되어 어수선하던 내 마음을 내리쳤다. 내 몸이 어디 있느냐 보지 말고 내 마음자리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라는 부처님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아바나에서 살사춤을 조 낭 희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친근함이 나를 유혹한 나라, 쿠바는 결코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밤 아바나에 도착하자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여전히 낯설고 가늠하기 어려운 추상화 같다. 별이 그려진 국기와 위압적인 혁명의 냄새, 게다가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의 입국 수속은 유난히 삼엄하다.
긴 비행 시간으로 인한 여독을 풀고 싶은데 잠이 오질 않는다. 내가 가진 지식과 감성으로 쿠바를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두근거림만 앞선다. 어디선가 라틴 음악이 들려온다. 밤이 깊도록 끝나지 않는 라이브 음악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진정한 쿠바의 속살은 어떤 것일까. 한때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장면들과 헤밍웨이의 작품을 떠올리며 쿠바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아바나의 아침 공기는 민트 향처럼 신선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것처럼 오래 전에 개발은 멈추어 있었다. 고향의 품속 같은 이곳에도 스페인과 미국의 점령 그리고 우울한 혁명의 그림자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낡은 건물들과 가난조차 여유롭게 승화시킨다. 도시는 정겹고 따뜻하다. 지난했던 역사의 아픔을 꿋꿋하게 간직한 채 문명의 속도에 휘말리지 않는 특유의 강인함, 그것이 쿠바만이 가진 정서였다.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으로 반미 감정은 크지만 열정과 낭만 그리고 낙천성으로 쿠바는 요염할 정도로 향기롭다. 가난도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 앞에서는 무색하다. 50년대 인기를 누리던 클래식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거리를 누빈다. 자기만의 문화를 잃지 않으면서 그들은 느림의 가치를 아는 듯하다. 디지털 혁명과 속도전에 승부를 거는 우리의 현실이 통증이 되어 아리다. 나 역시 자유조차도 물질의 바탕 위에서 지탱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아르마스 광장에는 아름드리 나무와 헌책을 파는 노점상들이 평화를 수놓는다. 시간이 한가로이 벤치 위에서 뒹굴고 사람들의 표정은 저마다 예술이다. 빨간 별이 그려진 군용 베레모를 쓰고 굵은 시가를 피우는 젊은 여인의 이색적인 모습, 그녀의 비장하고 검푸른 고독을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노옹들의 은빛 머리카락이 여유롭게 빛나고, 살사춤을 추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건강하게 흩어진다.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투명한 영혼들의 울림이 한 편의 영화처럼 섬세하다.
샌프란시스코 광장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작은 악단이 흥을 돋운다. 그들은 남미 음악의 모태인 쿠바 음악과 살사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듯하다. 어쩌면 다양한 춤이 그들을 호의적이고 개방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타악기와 기타의 조화로운 음색에 젖어들며 나는 클럽에 등장했던 ‘아마티토 발데스’를 떠올린다. 모히토 한 잔의 위력 때문이었을까. 그들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갑자기 춤판이 벌어졌다. 여간해서 춤을 추지 않는 나도 어깨와 엉덩이를 흔들며 어울렸다. 어색한 관계 사이에 존재하던 벽이 일순간 허물어진다. 경계란 얼마나 유치하고 조잡한 관념 덩어리인가? 엉성한 몸놀림이었지만 짧은 일탈을 통해 나는 단단한 껍질을 벗는다. 스스로 규정지어 왔던 틀을 깨는 일, 그것은 희열을 동반했다. 자유와 정열, 희망이 공존하는 이곳에 와서야 헤밍웨이가 왜 그토록 쿠바를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바나의 밤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연인들의 사랑과 음악이 밝힌다. 라틴 음악이 매력적인 밤, 카리브 해안은 노래를 부르고 살사춤을 추는 젊은이들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늘씬한 흑인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 리드미컬한 스페인어로 흥을 돋우는 마부의 외침으로 아바나의 밤은 지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아르마스 광장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 조용하다. 고난의 역사와 빈한한 현재를 모두 내려놓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내 몸에서는 여전히 라임 향과 살사춤의 여운이 떠나질 않는다. 물질이 삶의 질을 평가하는 시대, 나는 무한 경쟁에 심한 멀미를 느낄 때마다 세계와 맞지 않아 방황했다. 그로 인해 고독했으며 자주 삶에 주눅들곤 하였다. 깜깜한 씨방 속에서 끊임없이 탈바꿈을 시도하던 나의 꿈들이 서서히 지쳐가는 것은 아닐까.
녹청색의 삶 속에서도 환하게 날갯짓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허기진 상처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범람한다. 그러고 보니 나의 자유는 언제나 완고했다. 그래서 타협할 수 없었다. 삶이 가파르다고 느껴지거나 선택의 귀로에 섰을 때 나는 카리브 해변의 몸짓을 기억하며 되뇌리라. 인생은 짧지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진홍 불꽃 조 명 래
원래 이름은 ‘Flame Tree’이다.
사이판 상공에 도달한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면서부터 화려한 색깔로 내게 다가온 나무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곳곳에 조경수로 심어져 있다. 진초록 이파리에 주황색 꽃봉오리들이 얹혀 있는 형상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기둥은 느티나무처럼 생겼고, 자귀나무를 닮은 이파리에 백합과 분꽃을 합한 모양의 꽃이다. 열대 식물 특유의 풍성한 초록 이파리와 진홍색 꽃의 조화는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때맞춰 내리는 스콜에 젖어 흔들리며 다가오는 희열 그 자체이다.
길은 북쪽으로 뻗어 있다.
야자나무 숲과 나란히 뻗은 해안선을 따라가니 하얀 비석이 맞아 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징병으로 일본에 의해 끌려와 사이판에서 노역을 하거나, 종군 위안부로 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국인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한국인평화위령탑’이다. 뜨거운 햇살을 상관하지 않은 채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일본군 최후 사령부가 있다.
바다를 향한 대포와 전차가 금방이라도 포탄을 쏟아낼 것같이 살벌하다. 뒤쪽 바위산에는 미국군의 상륙 작전 때 맞았던 총포 자국이 선명하다. 큰 바위를 깎아 만든 태평양전쟁 최대의 격전지. 바위도, 대포도 비바람에 깎이고 깎여 한낱 낡은 정물로 변해 있으니 세월보다 더 강한 것은 없나 보다.
바위가 까마득히 솟아 있다.
해발 249m의 마피산 정상의 바위에서 수백 명의 일본군 병사와 민간인들이 항복을 거부하며 뛰어내린 ‘자살절벽’이다. 무서워서 주저하는 사람들은 손과 발을 묶어 뒤에서 떠밀었다고 한다. 그중 징병으로, 정신대로 끌려왔던 수많은 한국인 젊은 남녀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꽃다운 청춘은 또 어쩌고.
저 멀리 또 하나의 절벽이 보인다.
일본인들이 그들만의 방법으로 죽음을 택했던 곳이다.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천황은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4년 여름 어느 날, 수천 명의 군인과 부녀자, 노인들이 줄지어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며 바다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날 이 ‘만세절벽’도 오늘만큼이나 더웠으리라.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발아래 짙푸른 코발트빛 물결이 태평양을 향해 넘실거리고 있다. 이 바다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저 바위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날 최후 사령부를 뒤덮은 포탄 연기를 보았을 것이다. 자살절벽과 만세절벽에서 몸을 날리는 생명들의 아우성을 들었을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뜨거워진다. 스콜이 내리면 이 더위를 식힐 수 있을까.
돌아오는 차창으로 풍경이 스쳐 간다.
녹슬어 바스러져 가는 전차,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포신,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마침내 몸을 던진 절벽. 이 기막힌 풍경의 복판에 세월을 지켜 온 불꽃나무에 진홍빛 꽃이 피어 타오르고 있다. 쇳덩이가 해풍에 시달리며 가루가 된 세월이 흘렀다. 그날 허공으로 몸을 날린 생명들은 흔적도 없지만, 올해도 불꽃나무 꽃은 여전히 진홍빛으로 피어 영혼을 어루만지고 있다.
몸을 날렸다는 절벽에
꽃비가 내리네.
한 맺힌 남국 하늘 아래
못다 핀 청춘의 흔적이 선명하다.
맑은 달빛 아래 스쳐 가는 바람 한 점
오, 아픔이어라.
후두둑, 스콜이 내린다.
휴식을 위해 찾았던 남국 사이판에 ‘불꽃나무’가 젖는다. 진홍빛 흔들림이 가슴을 채워 준다. 아, 이 비는 슬픈 영혼들에게 바치는 성찬이다. 비바람, 거친 파도에 절벽이 무너져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영혼들이 일어선다. 벼랑 끝에 희망의 진홍 꽃잎이 날린다. Flame Tree! 사이판의 진홍 불꽃이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목소리 조 병 렬
목이 쉬어 말을 할 수 없다. 본디부터 아름답고 강한 목소리를 타고나지 못했는데, 이제 탈까지 나서 본래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넘어 스스로 말하고 듣기에도 불편하니 남들은 오죽 거북할까 싶다.
며칠 동안 평소와 달리 목을 무리하게 사용하였다. 학교 수업에다 주민 배움터 수필창작반과 수필대학에서의 강의가 주야로 겹친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수십 년 동안 강단에 서 있지만, 아직도 때로는 목소리를 조절하지 못한다. 스스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나의 성질 탓이다.
목소리가 크다고 만사 해결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아직 대화할 때 점잖지 못하게 목소리가 커지는 경우가 잦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권위를 밀어 올리듯 목소리를 낮게 깔면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으련만, 나는 아직 그러지 못한다. 상황에 따라 흥분과 고성을 참지 못한다.
이번 일은 몸을 무리하게 다룬 나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이를 잊고 아직은 몸뚱어리가 성하다고 무슨 일이든 신중하지 못하게 달려든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러 주위에서 주의보를 전해 주었거늘 귀 밖으로 날려 버리기 일쑤였다. 체육관에만 가면 역기의 무게를 높이려 하고,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여 무리하게 달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근년부터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것도 처음부터 조심하며 몸 상태를 점검해야 하거늘, 아예 연회원으로 등록함으로써 중도에 포기할지도 모르는 나 자신을 스스로 옭아 묶어 버리는 과욕을 부렸다. 운동 중에 내 몸에서 몇 번이나 이상 징후를 보였지만, 그때에도 너무 가볍게 대처했다. 연습장 출입 한 달 만에 가슴에 통증이 있어 병원을 찾았더니, 갈비뼈에 금이 갔으니 한 달 가량은 중지하라고 했다. 그 후, 보름 정도가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운동을 재개하다가 다시 덧나게 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이 정도의 이치는 알 만한 나이임에도 순리를 거스르고 말았다. 막대기 하나 휘두르더라도 몸의 상태를 고려해야 하거늘, 무거운 골프채를 온 힘을 다하여 연일 몇 시간씩 휘둘러 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의 과욕이 때때로 발동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만 앞서 가는 무모함을 아직 못 털어 버리고 있으니, 인생 수양이란 말은 감히 입 밖에 꺼낼 수가 없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는 말년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 계기가 되어 더는 모든 일에 욕심을 접어 버리고 마음과 성품 기르기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더 일찍이 자신의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음을 한탄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교훈을 나도 당장 실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쉰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모자라는 인품을 조금이나마 보완할 수 있도록, 인생의 작은 도라도 깨닫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보았다. 내 목소리에 이상이 있으면 함부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않을 것이고, 말을 적게 하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실수도 줄어들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옛 성인의 교훈을 뻔히 알면서도 쉽게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기운 빠진 쉰 목소리로 변해 버렸으니 저절로 분수를 지키는 목소리가 되어 좋다고나 해야 할까? 나이가 들면서 큰소리 지른다고 해서 위엄과 권위가 생겨나지도 않을 뿐더러 굴복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다행스럽게 된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늘 젊은 시절의 몸으로 유지되리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도 큰 병이니 하는 말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를 계기로 몸이든 마음이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교훈을 하나 얻은 셈이다. 내가 아직 젊음을 잃지 않았다고 큰소리친들 어느 누가 알아줄까? 그것을 모르고 그런 마음만 더 오래 간직한다면 더욱 큰 화가 내 몸과 마음을 괴롭힐 것이다.
『예기』라는 옛 문헌에는 사람이 예순이 되면 새삼스레 학문과 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장수하는 시대로 바뀌어 예순의 나이는 너무 억울하다 하더라도 더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과욕을 부리는 것은 예순이나 일흔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다.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몸과 마음이 더욱 평안을 찾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왜 몰랐을까?
영혼의 꾀병 조 재 현
나의 영혼은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잠들었던 나의 육신을 깨워 또 하루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찰나 여느 때와는 달리 무엇이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순간 자리를 박차고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황당한 나의 꼴을 본 집사람은 “팬티 차림으로 어딜 가요?”라며 놀란 모습으로 묻지만, 대답할 여유조차 잃은 채, 아직도 어제저녁과 그대로인 반쯤 열려 있는 대문을 화들짝 제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휴〜우 있구나!”라며 혼자 시부렁거렸다. 시동도 꺼진 채였다. 연료가 완전 소진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꺼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급히 운전석 쪽의 문을 열고 계기판을 보니 그러나 연료는 거의 그대로였다. 반사적으로 시동 키를 확인해 보니 뜻밖에도 키가 제동 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참으로 괴이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시동을 꺼 주었을까? 아마도 길을 사이에 둔 한 이웃집 사람의 선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이 끌고 가 버리지나 않았나 싶었던 나의 순간적인 생각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 담벼락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걸어 공회전을 시켜 놓은 것은 어제저녁의 조금 늦은 귀가 때였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운행하지 않았기에 배터리의 방전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 놓고는 세수를 마치고 나가서 곧 시동을 끌 요량으로 대문도 잠그지 아니한 채 들어왔는데, 그 일을 밤새도록 까맣게 잊어 먹어 버렸다. 나의 영혼이 꾀를 피운 것이다.
영혼의 꾀병은 나이가 쌓일수록 점점 심해져만 간다. 집사람도 마찬가지다. 전열기나 화기를 끄지 않아 그릇의 밑창을 태워 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화재를 당하지 않은 것만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외출을 준비할 때도 둘 다 소지품을 챙기지 못하여 들락거리기가 일쑤이며, 외출 중에도 이를 놓쳐 버려 어려움을 겪었던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나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지갑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일일 게다. 몇 해 전의 삼복더위 때였다. 그날따라 정장 차림으로 무슨 행사에 참석했다가 가로등이 짙은 불빛을 뿌릴 즘에 전철역에 내려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손에는 책자 봉투와 접은 우산이 들려져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더위와 갈증이 한꺼번에 밀려와 바로 옆의 편의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주면서 지갑은 거스름돈을 받아 넣기 위해 계산대(유리 진열대) 위에 얹어 놓은 채 음료수 한 통을 골라 마셨다. 그러나 나올 때는 그만 깜박하여 거스름돈과 다른 소지품만 챙겨서 나오고 말았다.
200여 미터나 갔을까, 그때야 생각이 떠올라 “아뿔싸” 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가게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이미 나에게 음료수를 팔았던 여인이 아닌, 한 남자가 대신 있었다. 연령으로 보아 부부간일 것 같았다. 그에게 조금 전의 사실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주머니의 휴대전화 번호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가지고 있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고 돌아섰지만 되찾기란 물 건너간 일이라고 여겨졌다.
지갑에는 카드와 면허증 신분증은 물론,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용돈이 들어 있었다. 돈은 챙기더라도 제발 지갑만은 되돌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허사였다. 수십 년 전, 동대구역 매표구에서 차표를 사던 중에 소매치기가 붙어 지갑을 통째 빼내 가 버린 적이 있었는데, 며칠 후에 지갑만은 우편으로 배달되어 왔다. 이 일을 당하고 보니 그때 소매치기의 양심(?)이 그리웠다.
이런 깜박해 버리는 현상은 일상에서 조금 벗어난 동작과 관련된 일을 일정한 시간을 둔 후에 다시 행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종의 해프닝인 것이다. 이름 하여 건망증. 이럴 때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참으로 영혼이 얄밉지 않을 수가 없다. 육신이 영혼을 너무 혹사한 탓일까, 아니면 영혼이 육신을 너무 노쇠했다고 얕보고 괄시하는 짓일까.
영혼의 꾀병이 심해지면 이 건망증은 더욱 짙어진다. 경증일 때는 행동으로 옮기려다 놓쳐 버렸더라도 조금 후에 그 놓친 행동을 기억해 낼 수 있지만, 좀 더 심해지면 행동으로 옮기려 했던 그 사실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아주 심해지면 넋이 나간 사람, 또는 혼이 빠진 사람으로 취급되며, 치매라는 딱지를 달고 망각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삶을 다하는 날까지 육신은 그 형상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영혼이라는 비물질적 존재로부터 철저히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영혼이 육신의 끈을 놓는 날이면 영·육이 분리되어 영원으로 떠나게 되겠지만, 살아 숨 쉬고 있는 날까지는 육신은 영혼의 충실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영혼의 꾀병으로 인하여 육신의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육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어서 삶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나의 영혼에게 가만히 속삭여 본다.
‘내 육신이 그대 영혼을 그리 혹사한 일이 있었던가? 아마도 있었다면 그것은 꽤나 오래된 수십 년 전의 일일까 싶네. 그때는 대류 속에 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그대 영혼만이 아닌 육신도 함께 수고로웠잖아.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대의 배려로 내 육신은 매일 밤 얼마나 많이 깊은 잠에 빠졌는가, 그럴 때면 그대 역시 내 속의 쉼터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그대는 왜 그렇게 꾀병을 자주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원망 겸 하소연을 해 보지만, 내 영혼의 꾀병은 멈추어 줄 턱이 없을 것 같다.
낯선 여자 하 정 숙
그립고 애틋한 것이 어찌 세월뿐이고 마음뿐이랴. 머리털이 약쑥같이 희어진다는 애년(艾年)의 나이를 지난 지도 몇 해, 나는 지금 내가 그립다.
오래 전에 남북 이산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이 TV에 방영될 때 전파를 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노랫말이 문득 가슴에 파고든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같이……”라는.
외동딸인 나를 가장 깊게 기억해 줄 엄마(어머니보다는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와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헤어졌다. 그 빈자리를 할머니나 고모가 채워주었기 때문에 어릴 때는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엄마는 바로 내 기억의 연줄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연줄이 끊어지듯 내 기억이 뚝 잘린 것도 어쩌면 엄마와 헤어진 그때부터인지 모른다.
여고 2학년 때 학교 생활관에서 1주일씩 여성의 부덕을 닦는 실습 마지막 날에 반상을 차려 놓고 각자 어머니께 대접하는 의식이 있었다. 할머니는 연로하셨고 엄마 역을 맡아 주던 고모는 농번기라 시골에서 마늘 농사에 여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큰집 올케 언니가 학교에 왔다. 자존심 강하던 내게 엄마가 없다는 것은 상실감 이전에 말하기 싫을 정도의 수치로 와 닿았다. 다른 엄마들에 비해 유독 젊은 엄마에 속하는 올케 언니에 대해 그날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그나마 내 흔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던 고모도 지금의 나보다 적은 나이인 마흔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 내 기억이 멈춘 것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사촌 오빠들도 계시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내 시절은 하나의 단편들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처럼 추억이 섬세하지 못하다.
20, 30대 때만 해도 나 스스로 나를 기억할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어린 유년 시절의 기억은 어른들의 기억을 빌려서 알아야 했지만 철이 들고 나서의 기억은 일기장에, 사진에 남아 있는 것을 그대로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흔의 나이를 지나고 나서는 언제부턴가 서서히 내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잦추르며 사느라 나도 나를 잊어버린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어쩌면 사진에 찍혀 나오는 내 모습이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을 보고였을 것이다. 거울 속을 바라봐도, 사진을 바라봐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을 때가 많았다.
나는 어떤 여자였을까?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여자였는지 더 궁금하다. 여자는 자기를 돌아볼 거울로 딸을 남기는 것인지 모른다. 모습이 닮은 모녀가 걸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며 한참씩 쳐다보게 된 것도 내 자신이 낯설어지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딸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 신기하게도 그 딸의 모습에서 친구의 옛날을 볼 수 있다.
만일 내게도 딸이 있다면 지금 내가 처음 사랑에 눈을 뜨고 가슴 설렐 나이로 자랐을 테니 당시의 내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딸이 내가 살아가는 나이를 뒤따라 살면 불혹이 지난 가슴에도 바람은 불고 지천명을 넘겨도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렵던 내 시간들도 딸을 통해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분명 남편과 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인데도 아들 둘 속에서 나는 내 모습을 짐작해 내기가 어렵다.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가 내 나이 스물한 살 때였으니까 아마 옛날의 나를 많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여보, 나 옛날에 어땠어요?” 그러나 무뚝뚝하기만 한 남편이 나 자신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나를 어찌 기억하고 있겠는가. “몰라!” 생뚱맞은 질문을 한다는 듯 툭 던지는 대답. 어쩌면 가장 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
저 말수 적은 남자와 찻집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의문이고 경포 호숫가를 자전거로 달리며 빨갛게 내려앉던 석양을 바라본 일도 전설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가 출장 가고 없는 도시가 온통 텅 빈 것 같아 허전하기만 하던 일도 남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지는데 어찌 그에게서 아련한 대답을 기억할까?
“천사인 줄 알았는데 살아 보니 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천사처럼 맑고 고분고분한 심성을 지녔던가 보다. 그런데 그 ‘천사’가 정반대의 형상으로 비춰질 만큼의 변화가 있었다니 나 역시 내 모습이 어색할 때가 많다.
요즘은 흔적을 남기는 장치가 많다. 그런데 증발해 버린 시간들 속의 내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나는 어떤 여자였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오련한 내 시간을 곰살궂게 살려 주던 그리운 이들이 보고 싶다. “누가 나를 모르시나요?” 이 말에 ‘너는……’ 하고 여일하게 답해 줄, 낯익고 마음 익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그립다.
하산 길에서 강 찬 중
말복을 며칠 앞두고 유난히도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친구에게서 산행을 하자는 전화가 왔다. 그늘도 좋고 오르는 길도 비교적 평탄한 앞산을 오르자고 했다. 20여 년 전, 금오산 아래 연수원에서 함께 근무하였고 운전면허를 딴 후 실질적인 도로 연수를 시켜 준 은인이어서 늘 고마움을 가지는 친구다. 지금은 모두 정년퇴직을 하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질 못하였는데 같이 공을 치는 초등학교 동기를 통해 가끔 안부를 물었다. 충혼탑 아래 주차장에서 셋이서 만나 산을 올랐다.
지금까지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정상을 오르는 데에만 정신을 쏟은 것 같다. 사실은 전문 산악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 오르는 산이야 ‘정상’이랄 것도 없지만 그걸 오르고서도 ‘정상 정복’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누가 그 꼭대기에 올랐다 해서 산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도 않았고, 산은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누가 발자국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산을 오르면서 나무들도, 들풀도, 바위들도, 하늘도 보고, 바람하고도 손을 잡는 여유도 가져야 하는데……. 그리고, 그래도 정상에서는 발아래 경치도 보고 맑은 공기도 실컷 마시면서 즐겨야 하는데 대부분 눈도장만 찍고는 서둘러 하산에 열을 올린다. 지금까지 여러 산악회에 따라다니며 정상을 오른 게 수없이 많은데 과연 무엇이 얻어진 걸까?
산행에서 삶을 본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정상에는 명예도 있고 돈도 따라온다고 믿고 있다. 또 처음 직장에서 곁눈질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을 자랑으로 삼기도 한다. 그래도 쉬지 않고 이 길을 꾸준히 달려왔기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과연 그럴까?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보지 않고 오직 성취만을 위한 삶이 가치가 있고 행복한 것이었을까?
어느 날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젊은 부부가 ‘적게 벌어서 행복하게 사는 법’으로 화려한 도시를 떠나 섬으로 가서 동화처럼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그 이야기 중에 남편이 외출을 하면서 아내에게 용돈으로 천 원을 얻어 간다. 그것으로 커피 세 잔이나 마실 수 있다고 행복해 하고……. 가족끼리 여는 아기의 돌잔치에서 남편이 쓴 사랑의 편지에 아내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젊은 엄마는 보살펴 주는 시어머니께 꾹꾹 눌러쓴 감사의 편지를 전하며 서로 위하는 모습에서 사랑과 행복을 느끼게 하였다.
산행에서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산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어떤 분이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인생이었다. 명예가 최고의 경지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이유로 어렵게 오른 그 자리를 내놓고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오는 모습은 한 편의 희화처럼 느껴진다. 산에서 내려올 때 떠오르는 시가 있다. 조용히 하산의 의미를 그리게 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고은)
그리고, 도대체 돈, 그건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목숨 줄을 건다. 돈 때문에 죽고 사는 일이 어디 한두 사람이던가? 인간의 욕심은 아무리 채워도 끝이 없음에랴.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을 불러오는 사람이다. 누구나 재벌일 수는 없지 아니한가? 풍요를 누리는 사람은 남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이다. 이웃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보고 같이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재벌이어서가 아니고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어 주는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다. 탈무드에는 죽음을 앞두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동행하기를 바랐는데 한 발짝도 갈 수 없다는 친구가 재물이라지 않던가? 우리는 어쩌면 엉뚱한 곳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없지 않다.
EIU 연구 기관이 OECD 30개국을 포함한 세계 40개국을 대상으로 ‘품격 있는 죽음을 맞느냐?’에 대한 죽음의 질을 조사하였더니 우리나라가 하위권인 32위란 발표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완화 의료의 수준과 비용 부담 등 27개 지표를 비교 분석한 결과로 ‘1위는 영국이고,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벨기에’ 순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도 아름다운 마무리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든다는 생각이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어찌 보면 몸에 붙은 장기를 반세기 넘게 괴롭혔으면 고쳐 끼우기도 하고 수리도 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 아니한가? 병이 왔다고 하여 슬퍼할 일만이 아니고 지금까지 혹사한 것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대책이 있어야 마땅하리라. 명예나 부를 누렸지만 끝 날에 중환자실에 누워 초점 잃은 눈으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온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채 투병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어찌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평화롭게 맞기를 소원한다.
이제는 명예나 재물도 다 강을 건너갔고 무거운 십자가도 다 내려놓은 처지가 아닌가? 그러니 ‘가장 단순하게’에 마음이 끌린다.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고 사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생각하고 이제까지 누리고 산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친구와 함께 한 앞산 산행에 4시간, 수건 하나를 땀으로 흥건히 적시고 거둔 열매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봉수대(烽燧臺) 견 일 영
봉수대 불꽃 연기가 하늘을 찌르며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을 때, 역사는 운명이란 명찰을 달고 천방지축 달아나기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봉수대만 믿고, 앞사람을 따라 내닫다가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쳤다. 먼데서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시궁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웃기만 했다.
세월은 흐르는 물 따라가고, 싸늘하게 식은 봉홧불 재 속에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타고 남은 사리만 남았다. 그렇게 열렬히 봉수는 타올랐는데 병사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애꿎은 백성만 적군 손에 맞아 죽었다. 알고 보니 그들을 쓰러뜨린 건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내 영혼을 그렇게 불태운 자리, 그 봉홧둑은 무너져 한낱 돌무더기로 남았고, 무상한 세월에 헤진 가슴은 제법무아(諸法無我) 속에 잠들었다. 부질없이 지난 세월의 이삭을 줍고 있는데 골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모진 세월에 하얗게 바랜 눈으로 다시 봉수대를 올려다보니 설한풍에 싸늘해진 봉수대가 넋 없이 서 있고, 그 위에 올라선 초동목수(樵童牧梏)가 겁도 없이 오줌을 갈기고 있다.
다 가져가셨습니다 고 윤 자
옛날 어느 산골 외딴집에 어머니와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날도 산 너머 잔칫집에 일을 하러 갔습니다. “집 잘 보고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때 떡 많이 가져다줄게.” 이런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오누이들의 인사를 들으며 어머니는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 신은 우리에게 세상에 태어나겠느냐고 물은 적도 없었고, 자기 앞에 펼쳐지는 인생에 대한 선택권도 주지 않았다. 단지 부모의 몸을 빌려 첫 호흡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몽매한 애착만 부여받았을 뿐이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의 말씀에 순종하는 정말 착한 딸이었다. 나는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면 시집도 잘 가고 순탄한 미래가 보장되리라 기대하며 살았다. …
저녁 무렵 일을 마친 어머니는 한 광주리 가득 떡을 머리에 이고, 부지런히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고개를 올랐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고갯마루에 떡 버티고 있는 게 아닙니까. 호랑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협박을 했습니다.
“떡 하나만 주면 안 잡아먹지.”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호랑이에게 떡을 던져 주었습니다.
“옜다. 먹고 저리 가거라.”
… 누구라도 그러듯이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전부를 쏟아 부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다. 남편은 사회적으로 기반을 잡을수록 점점 더 큰 원 주위를 그리며 밖으로만 돌았다. 마음을 맡겨두고 온기를 받았던 내 둥지는 빈 껍질만 남았다. 그들에게로 향하던 나의 사랑은 목표를 잃었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주위를 살피지 않던 나의 정성과 사랑은, 그 형체를 제대로 확인할 사이도 없이 기화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과물은 만져지지도 않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누구도 그런 종류의 준비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너무나 피로하게 했던 것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를 되풀이하는 상실감이었다. 서핑 선수도 아니고, 감정의 파도타기는 나를 너무나 지치게 만들었다. 누가 내 것인 줄만 알았던 떡을 묻지도 않고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
어머니는 호랑이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헐레벌떡 두 번째 고개를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호랑이는 더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넘어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떡 하나만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는 아까 어머니가 떡을 준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더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습니다.
“옜다. 먹고 저리 가거라.”
… 젊음으로 눈부셨던 탱탱한 피부와 삼단 같던 검은 머리도 걷어 갔다. 나에게 던져진 것은 빛을 빼앗겨 그늘진 얼굴과 쪼그라져 버린 자존심뿐이었다. 우중충한 흰머리는 앞으로 다가오는 나머지의 삶이 비굴하고 힘이 없을 것임을 미리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주름살의 후유증은 완만하고 길게 다가왔다. 자신감을 잃은 나는, 누구의 사랑이라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손사래 치며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하는 나에게 신의 요구는 도를 넘었다. 살아오는 동안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설마 동반자조차도 데려가 버리는 일이 나에게 생길 줄이야. 나의 허락은 없어도 좋았다. …
어머니는 남매가 기다리는 집으로 세 번째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전혀 무시하면서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조금씩 어머니의 생명을 조여 갑니다.
“떡 하나만 주면 안 잡아먹지.”
그래도 어머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호랑이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또 남은 떡 몇 덩이를 던져 줍니다.
“옜다. 먹고 저리 가거라.”
… 이번에는 나의 여성성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천하디천하고 거추장스럽게만 느끼던 달거리였다. 마지막 숨이 걷혀 가는 것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에, 슬펐지만 던져 줄 수밖에 없었다. 사회는 내게 주변을 정리하며 조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정물 같은 늙은이이기를 원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뺀 ‘7만 시간의 공포’라고 부르는 시간 속으로 던져진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손자 손녀의 사랑이나 고아원, 양로원의 보편적인 인류애를 논할 수밖에 없는, 범위가 정해진 사랑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안다. 너무 넓고도, 나를 가두는 좁은 한계 속에 갇히게 되었다. …
어머니는 얼마 남지 않은 떡 광주리를 머리에 이었습니다. 더 잰걸음으로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눈곱만치의 염치도 없이 호랑이는 어머니의 뒷덜미를 또다시 덥석 잡았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이번에는 광주리째 던져 주고 걸음아 날 살리라며 필사적으로 내뺍니다. 하지만 가엾은 어머니는 끝내 호랑이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 이제는 더 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다. 더 이상의 포기를 요구하는 호랑이를 탓할 시간도 없다. 어머니는 먼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수도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호랑이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나 아닌 남이어야 하고, 그것이 이렇게 빨리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욕심 사나운 호랑이는 어머니에게서 받아먹은 떡은 개의치 않는다.
돌이켜 보면, 닥쳐오는 상황이 어떤 존재에게는 고통이 되었고 어떤 존재에게는 즐거움이 되었다. 같은 상황이 어떤 존재에게는 죽음을 초래하고 어떤 존재에게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인 것이다. 다만 그 결과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살면서 겪어 온 온갖 고통이 생각난다. 과거의 죽어 버린 고통과 현재의 살고 있는 고통을 용광로에 넣었다. 고장 난 물건, 잘 알지 못하는 물건, 공연히 붙들고 고생하던 물건들을 용광로에 털어 넣었다. 무쇠를 녹여서 이제는 금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용광로에서 모든 것을 재생산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하지만 너무 늦었다.
신은 용광로의 불을 꺼 버렸습니다.
‘자, 이제 다 가져가셨습니다.’
문병 공 진 영
늙어지면 찾아오는 것은 병마요, 떠나가는 것은 친구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지닌 병은 점점 기승을 부리고 없던 병은 새로 터를 잡는다.
친구들 가운데는 벌써 세상을 뜬 사람도 많지만 몇몇은 병상에 누워 죽음을 거부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남들이 들으면 잔망스럽다고 탓할지 모르겠다만 희수, 그것도 나이라고 친구 문상, 친구 문병이 하루의 일과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다. 상가에 가서 상주를 위로하는 말도 거북스럽고 껄끄럽지만, 병자 앞에 가서 아픔을 위로할 때도 그런 것을 느낀다.
며칠 전에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에게 문병 간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간암 말기에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들 치유될 가망은 전혀 없을 거라며 문병 가기마저 꺼리는 형편이었다.
그는 재력이 넉넉해서 일등실에 누워 있었다. 들어서자 숨 막히는 적막, 뚜껑 열린 무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병상엔 환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고, 그 머리맡에는 부인이 초췌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인기척이 나자 일어나 나를 맞았다. 대번에 말이 막혔다.
‘좀 어떻습니까?’ 하려니 너무 상투적인 말 같아서 그냥 병자 곁으로 갔다. 그도 감았던 눈을 뜨고는 손을 약간 들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황달기인지 온통 노랗게 외꽃이 피어 있었다.
“아침에 복수를 빼고 나서 좀 생기가 도는 것 같니더.”
침묵이 지루했던지 부인이 입을 먼저 뗐다. 내가 너무 천연덕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이 사람, 고생이 많구나. 가을엔 털고 일어나얄 텐데.”
그의 손을 만지며 병상 곁에 다가앉았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킨다. 부인이 얼른 물수건을 가져와 입술을 추긴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또 왔나. 고맙다.” 하며 배시시 웃음을 머금는다. 슬픈 웃음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래 자주 못 와 미안타. 먼저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구나.”
나는 생판 거짓말을 했다. 그는 또 입술을 가리켰고, 부인은 물수건으로 입술을 축인다.
“친구야. 고독해 못 견디겠다. 저승 문턱이 이렇게 고독한 건지 자넨 모르지?”
그의 음성은 가늘었고, 바람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의미 전달은 분명했다. 나는 또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농담이나 하자 싶어
“이 사람아, 꽃 같은 사모님이 곁에 계시는데 고독하긴?”
했더니, 그는 같잖다는 듯 웃고, 부인은 겸연쩍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말을 너무 하면 해롭다고 부인이 말린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는 몸을 약간 뒤척이더니 또 입을 연다.
“보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피울 줄 모르고, 알맞게 운동하고 남한테 모진 짓 한 적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모르겠네. 아이구 아파라. 아파서 못 견디겠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여기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자네같이 착한 사람에겐 육신의 고통을 주지만, 나같이 죄투성인 사람한테는 심령의 고통을 내릴 거야” 하고 말을 하긴 했다마는 환자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었을지.
부인이 내겐 음료수를 건네고, 환자에겐 입술을 축여 주었다. 그는 몹시 갈증이 나는지 자주 입술을 빨았다. 엔간히 시간이 흘러, 내가 일어서려 하던 참에 그는 또 입을 열었다. 부인이 그만 하라고 고개를 젓는데도 그는 막무가내다. 그의 음성은 아까보다 더 가늘었다.
“나는 말이다. 삶은 데데하게 살았지만 생의 마감만은 멋있게 하렸더니 그게 맘대로 안 되네. 죽음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지루할 줄은 미처 몰랐어.”
거기에 대한 대답은 끝내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아. 병은 환자 자신이 고치고, 의사는 보조자일 뿐이라네. 힘내게. 자넨 필경 이겨낼 걸세.”
기껏 바람에 띄워 보내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멋진 생의 마감’ 과연 그것이 어떤 것일까.
죽음에 다다라 보기 전에는 해답을 찾지 못할 화두(話頭)를 가슴에 안은 채 C병동의 긴 복도를 걸어 나왔다.
달맞이꽃 곽 흥 렬
중학에 들어가고부터 하교 시간이 늦어지는 날이 잦았다. 지금 아이들처럼 방과 후에 이 학원, 저 교습소 옮겨 다니느라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영어암송대회다 웅변대회다 백일장이다 해서 걸핏하면 대표로 뽑혀 연습을 하다 보니 야심토록 학교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잠직하고 재주도 하찮았던 촌뜨기였건만, 어디가 그리 미쁘게 보여 선생님들의 분에 넘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하루 치 연습이 마쳐지고 뒷정리까지 끝나면, 서둘러 귀갓길에 오른다. 시계는 벌써 밤 열 시가 훌쩍 넘어 있기 일쑤다. 요사이야 열 시께면 아직 초저녁에 불과하지만, 그때는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기껏해야 몇 시간에 한 대씩 있는 시외버스마저 끊긴 지 오래다. 쌀에 뉘처럼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해만 빠지면 거리는 이내 적막 강산이 된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신작로를 지나오려면 주뼛주뼛 머리끝이 곤두서면서 오싹 소름이 끼쳤다.
지난날엔 늑대와 여우, 개호주 같은 산짐승도 많았지만 도깨비며 귀신 이야기는 또 어찌 그리 흔했던지……. 어린 나는 자연 풀어낼 수 없는 두려움을 가슴에 들였다. 그런 잠재된 공포에의 기억이 무섬증을 불러와, 처녀 귀신이 나타나서 사람을 호린다는 골짜기 앞을 지나칠 때면 걸음아 날 살리라며 부리나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정신없이 내달려 마을 언저리까지 다 왔을 때는 식은땀으로 등줄기가 흥건히 젖어 있곤 했다.
동구 밖에 들어서면,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가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와 계셨다. 저만치 어머니의 희미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무섬증과 고단함은 눈 녹듯 일시에 풀려 나갔다. 아들의 모습을 확인한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이 되시는지, 한차례 깊은 눈 맞춤을 하고는 집을 향해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 침묵 속에 어리비치던 당신의 자애로운 눈빛을, 머리에 서리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지금 이 나이까지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달이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당신의 아들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어 줄 달이기를, 그것도 보름달이기를 소망하셨을 것이다. 지금 헤아려 보니, 어머니가 꼭 달맞이꽃을 닮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터처럼 수선스럽고 살벌한 세상에서 내가 오늘 이때까지 쓰러지지 아니하고 꿋꿋이 버티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달맞이꽃이 되어 지켜 주신 어머니의 염려와 보살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지병으로 시난고난하다 생의 가을 녘에 훌홀히 저 세상으로 떠나가 이제는 더 이상 달맞이꽃이 되어 주실 수 없는 어머니, 어쩌다 고향 집을 찾을 때면 그때의 어머니가 동구 밖에 달맞이꽃으로 서 계시는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들곤 한다.
해바라기가 정열의 꽃이라면 달맞이꽃은 소박함의 꽃이다. 꼭 달이 뜨는 저녁을 기다려 피어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달맞이꽃,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꽃말을 얻게 되었나 보다. 야심한 밤에 달팽이각시처럼 살그머니 찾아오는 꽃이라 하여 ‘야래향(夜來香)’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야래향, 미혹되지 않을 수 없는 향도 향이려니와, 무엇보다 꽃 이름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어쩐지 권력자를 치어다보며 간살을 떨고 있는 듯싶은 해바라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은근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이름이 나는 좋다.
일찌거니 저녁술을 놓고는 달 바라기라도 할 겸 동구 밖으로 산책을 나선다. 아니나 다를까, 달맞이꽃이 어느새 제가 먼저 달을 마중하고 섰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건만, 달 오시는 밤만 되면 그는 어김없이 얼굴을 내민다. 뒤란에서 말없이 나타나는 은근한 정인 같기도 하고, 멀리서 소식 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같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이슬을 맞고서 함초롬히 피어 있다 아침 해가 부챗살을 펼치기 시작하면 다시 저녁을 기약하며 조용히 입을 오므린다.
대다수의 꽃들은 낮에 다투어 피건만, 이 달맞이꽃은 어찌하여 밤을 틈타 수줍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무슨 정이 그리 많아 남들 다 깊이 잠든 시간에도 저 홀로 잠들지 못하고 온밤을 지새우는 것일까. 하얀 밤에 노란 꽃, 그 선명한 색채의 대비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달맞이꽃에 찬찬히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애달픈 전설 하나가 망막에 맺혀 온다.
오랜 옛적,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 틈에 유독 홀로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요정은, 별이 뜨면 달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조바심에 무심코 이런 모진 말을 하고 말았다.
“하늘나라의 별들이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럼 매일매일 달을 볼 수 있을 텐데…….”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요정들이 곧바로 제우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잔뜩 화가 난 제우스는 그만 달 없는 깜깜한 세상으로 그 요정을 유배시켜 버린다.
나중에야 사연을 알게 된 달의 신은 자기를 좋아했던 요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곳곳에서 제우스가 곁쐐기를 박는 바람에 둘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달을 사랑했던 요정은 너무 지친 나머지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요정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찾아올 수 있었던 달의 신은 눈물을 흘리며 요정을 땅에 묻어 주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 제우스는, 그 미안한 마음을 자책하며 요정의 영혼을 달맞이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달맞이꽃은 일편단심 달을 따라 함초롬히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조용히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볼 때에도 이 슬픈 전설이 가슴을 적셔 오곤 한다. 그것은, 달의 신이 요정을 찾아 헤매듯 이제 이승에서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달 뜨는 시각이면 어김없이 달마중을 나오는 달맞이꽃처럼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면 여부없이 아들의 밤 마중을 나오셨던 어머니, 내가 해바라기꽃보다 달맞이꽃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마 이런 까닭에서가 아닌가 싶다.
이제 그때의 늑대도, 여우도, 개호주도, 도깨비도 그리고 처녀 귀신도 죄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한다. 유괴다 폭력이다 사기다 뭐다 해서 세상이 너무 어둡고 흉흉한 일들로 뒤덮여 가기 때문이다. 별의별 사건, 오만 사고들이 어느 하루도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지 아니하는 날이 없다. 이런 사회가 무섭고, 이런 세태가 두렵다. 이 무서움, 이 두려움을 지켜 줄 달맞이꽃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무엇으로 이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도 가시고 없는 이 풍진세계에서, 나는 얼마만큼 밝은 달이 되어 세상을 비추며 살아왔는지…….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 보면 그저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마음뿐이다.
해마다 선들바람이 불어오고 달맞이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시절이면, 달맞이꽃이 되어 아들의 귀갓길을 밝혀 주셨던 어머니가 그립다. 몹시도 그립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새로움을 느끼 읽고 있습니다.
수필집 한 권 전자책으로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