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팅스타
2010001022 전민지
[매달 마지막 날은 베스킨 데이! 패밀리 사이즈를 시키면 하프 갤런으로 사이즈 업!]
아이스크림이라 하면 길거리에 파는 쭈쭈바부터 한 그릇에 몇 천 원씩 하는 고급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좋다. 한의사는 내가 손발이 차고 혈액순환이 잘 안되기 때문에 차가운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을 먹으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커피를 먹어도 아이스, 물을 먹어도 찬물, 더운밥 보다는 찬밥을 좋아했다. 그중 아이스크림의 차가움은 단연 매력적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은 차가운 맛이 단 맛을 이기는 그런 묘미(味)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이벤트라며 문자가 왔다. 어서 드시러 오시라고. 아직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며 담요를 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동생을 일으켜 세웠다.
베스킨라벤스의 사이즈 개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패밀리 사이즈는 약 900g으로 다섯 가지 맛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위의 사이즈인 하프 갤런은 약 1300g 여섯 가지 맛을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저 문자는 고작 다섯 가지 맛을 고르는 가격으로 무려 여섯 가지의 맛을 고를 기회를 준다는 뜻이 된다! 눈앞에 펼쳐진 파스텔 톤의 색색의 아이스크림은 웅웅거리는 냉장고 속에 담긴 채 냉기와 열기를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고심 끝에 각각 세 개씩 여섯 개의 맛을 골랐지만 하필 내가 고른 것 중 하나가 다 떨어졌고 동생이 다시 하나를 골랐다. 슈팅스타. 아 제발 슈팅스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아이스크림의 맛보다는 온도를 좋아하는 것이기에 어떤 맛이든 싫은 것은 없지만 딱 한 가지, 슈팅스타는 싫었다. 아이스크림 주제에 과하게 나댄다고 해야 할까 아이스크림인데도 유일하게 단 맛이 차가운 맛을 이겨버리는 이건 정말이지 별로였다. 집에 와 신나는 마음으로 1300g의 육중한 몸을 펼쳤지만 교묘하게 다른 맛들을 가리고 있는 ‘그 맛’ 덕분에 내 숟가락은 영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것 좀 빨리 걷어내라고 닦달하는 내 앞에서 동생은 이 맛을 톡톡 튀는 맛이라고 설명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터터덕덕 맛있다니까 터터더덕 토도독 이게 왜 싫어 타타닥] 아 싫다.
내 성격은 원래 좋지 않았다. 사소한 아이스크림 맛 하나에도 싫음을 느낄 만큼 난 악독한 사람이었다. 모든 맛을 다 좋아하는 척 헤헤거리고 어떤 맛을 갖다 대도 다 맞춰주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은 숟가락에 묻는 것조차 싫은 정도로 몸서리치게 싫은 맛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맛은 절대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애초에 내가 선별한 맛의 사람들하고만 깊게 사귀었다. 아닌 사람들은 조용히 티 안 나게 마음속에서 정리했다. 이렇게나 악독했지만 단지 그것을 싫다고 말을 내뱉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순하다 혹은 착하는 명찰을 달게 된 것 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슈팅스타의 맛을 알게 해 준 사람을 만났다. 슈팅스타도 그냥 많은 아이스크림의 맛 중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을 만난 것이다. 지금 나와 같이 방을 쓰고 있는 룸메이트. 내가 마음을 줄 수 없는, 요란스럽게 톡톡 튀면서도 더럽게 단 슈팅스타 같은 애였다.
슈팅은 초면부터 지나치게 솔직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슈팅은 나를 언니언니 하며 살갑게 굴었지만 이상하게도 하는 말마다 톡톡 거슬렸다. 언니 인피니트 좋아해? 난 아이돌은 별로. 언니 과제 좀 미리미리 해. 사진 봐봐 음 내 스타일은 아니야. 돈 좀 아껴 써 옷이 몇 벌이야. 공부 좀 해 지금까지 뭐했어. 붙임성이 좋은 게 아니라 조심성이 없는 거다 저건. 요란스럽게 틱틱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나대는 게 전공인 듯 보였다. 가끔 술에 취해 취중진담이랍시고 돌직구를 날리는 날이면 당장이라도 마음속에서 푹푹 숟가락으로 퍼내듯 걷어내고 싶었지만 룸메이트인 이상 슈팅은 골라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교묘하게 모든 맛에 걸쳐있는 ‘그 맛’처럼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대야하는 존재였다. 방을 나가면서 “갔다 올게” 들어오면서 “다녀왔어” 하는 말에 차마 입을 닫지 못하고 더럽게도 단, 내가 아주 싫어하는 그 맛의 아이스크림을 물고 뱉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슈팅 때문에 마음이 요란스러워지면 난 내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내 취향의 맛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서 슈팅에 대해 한바탕 털어놓기도 했고 (그러고 방에 들어와 슈팅의 얼굴을 보는 건 사실 조금 미안했다.) 언제는 글쓰기 과제로 슈팅 얘기를 써낸 적도 있었다. 글로 써놓고 보니 속이 시원했지만 나도 아직 모르는 우리의 결말을 거짓말로 지어서 쓴 건 조금 찝찝했다. 글을 쓸 당시 우린 같은 방을 쓰고 있었고 한 학기동안 같이 쓸 예정이었지만 저질러놓은 글을 마무리는 지어야했기에 그냥 그렇게 지내다가 결국 헤어졌다고 써버렸다. (그때 선생님은 그 글을 보고 마무리가 애매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슈팅과 나는 내가 쓴 소설(?)같은 사이로 한 학기를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소설은 예상치 못하게 사소한 것에서 다르게 전개되었다. 나는 보통 주말에 집에 가서 일요일에 돌아오는데 (슈팅은 집이 멀어 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날은 평소와는 다르게 일이 있어 토요일에 돌아왔다.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안에서 당황한 듯 후다닥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자 내 쪽 침대에 베개가 이제 막 안착한 듯 출렁 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지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 마셔야겠다며 방을 나갔다 들어왔더니 베개는 아까와는 다르게 이불을 조금 덮은 채로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베개가 있는데 왜 내 베개를 썼을까. 혹시 막 발에 대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얘기는 친구들에게도 할 수 없었다. 이거까지 말로 꺼내놓고 나면 슈팅은 정말 나쁜 년이 될 것 같았다. 사실 슈팅은 그렇게 나쁜 년은 아니었다. 방에서 숨소리도 없이 과제를 하고 있으면 먼저 정적을 깨고 과자를 권해주는 건 슈팅 쪽이었다. 급식을 먹고 나오면 오늘 밥이 맛이 없었다며 핫바를 사주는 것도 슈팅이었고 빨래할 때 동전이 없으면 저금통에서 기술적으로 500원을 꺼내주기는 것도 슈팅이었다. 슈팅이 잘 때도 난 윙윙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지만 내가 잘 때 슈팅은 항상 축축한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말고 조용히 컴퓨터를 했다. 내가 싫어하는 맛이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니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혼자 마음속으로 슈팅을 심문하고 변호하고를 반복했다. 주말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마침 슈팅이 좋아하는 크리스피 곡물 과자가 세일을 하길래 덜컥 사버렸다. 옆에 있던 엄마가 너 그거 먹을 거냐고 물어보자 룸메 사줄 거라고 대답하면서 사실 요즘 룸메가 나한테 잘해줘서 나도 뭐 하나 사주려고 그런다고 변명까지 했다. 야금야금 내가 걔한테 신세진 것도 있고 뭐 사주고 나도 같이 먹으면 되니까. 집에 와서 곡물이 그려진 네모난 과자박스를 보니 내가 무슨 박애주의자라도 된 듯 뿌듯했다. 집에 있던 오렌지도 몇 개 박스에 담았다. 뚱뚱해진 박스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빈자리에 네임펜으로 몇 자 끄적이기도 했다. [To.자매님☆ 현아야, 나 룸메야. 허허]
슈팅은 고맙다며 사진까지 찍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먹어보더니 이거 맛은 그냥 그렇다며 틱틱거렸다. 까서 먹어보니 정말 별로였다. 별거 아닌 일은 그렇게 별로인 과자 하나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슈팅이 언니 베개가 어쩌고 얘기를 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굉장히 맛이 없었던 곡물과자. 내가 사온 거지만 내가 먹어도 굉장히 맛이 없어서 둘 다 신명나게 욕하면서 한 박스를 다 까먹은 기억이 난다.
나는 아이스크림은 다 좋지만 슈팅스타만큼은 정말 싫다. 차가운데도 너무 달아서 싫고 톡톡거리는 맛이며 퍼렇게 뿌려진 시럽 같은 건 정말 도저히 참고 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슈팅스타 같은 사람? 그건 좋은지도 모르겠다. 난 확실히 박애주의자가 아니니 아무래도 내 악독한 성격, 까탈스러운 취향이 바뀌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아침 시간에는 서로 준비하느라 뒤통수로 말한다. 오늘 아침 뭐야? 먹을 거야? 너 몇 시 수업이야? 지금 몇 분이야? 서로 머리를 말리는데 워낙 방이 좁아 각자 틀어 논 드라이어기 바람이 서로 머리를 말려주는 웃긴 상황이 연출된다.
“아 언니 내 머리 말릴 셈이야? 바람 넘어오거든? 나 근데 원래 언니들한테 진짜 깍듯하다? 아 왜 웃어 진짜야. 근데 언니한테는 왜 이렇게 막 대하는지 모르겠어. 언니는 언닌데 친구 같아 정말. 왜지? 왜지? 근데 언니도 웃긴다. 언니도 나 막 대하잖아. 에어컨 끄면 안 돼? 헐 담요 없거든?”
요란스럽게 틱틱거리는 모습, 저건 조심성이 없는 게 아니라 붙임성이 좋은 거다. 기지개만 펴도 뒤통수가 맞닿을 크기의 방에서 똑같은 모습을 한 하프 갤런 사이즈의 슈팅스타 두 통은 서로 톡톡거리며 같은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