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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 삶을 관조하는 존재의식, 정념의 시적 미학/ ≪한강문학≫ 29호 권두평론
삶을 관조하는 존재의식, 정념의 시적 미학
-. 이희정 제10시집 《해바라기씨》의 시세계
김 재 엽 _ 문학비평가, 정치학박사, 한국불교문인협회 회장
1. 들어가면서
시인의 길은 그가 살아가는 시대의 인간적 가치를 꿰뚫어내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희정 시인의 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상당수의 시가 육신을 원인으로 하여 정신 속에 야기되는 수동성인 패션(passion/ 정념)에 의하여 쓰여지고 있으며 존재 감각의 실체인 암호는 적절히 감추어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그의 마지막 저서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 1649)에서 정념을 이끌어주는 것으로써 놀라움(경이)을 비롯하여 사랑(애정), 미움(증오), 욕망, 비애 등 다섯 가지의 느낌을 들고 있다.
이희정 시인의 경우 그런 정념에 대한 설명은 불필요할 것 같은데, 이를테면 “희디흰 목덜미의 새 한 마리가/ 키드득 키드득 웃으며/ 내 울음 파내고 웃음을 채운다”(표제시 〈해바라기씨〉 중에서)처럼 아픔의 정념 속에 수동적 감정을 능동적 감정으로 환치시킬 수 있는 상상력을 담아냄으로써 미소를 자아내는데 이런 면에서 시가 성공작으로 보아진다. 놀라움을 비롯하여 울음과 웃음이 단지 조건반사가 아닌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서 융화되어 자연스럽게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서 표출되는 이희정 시인의 새로운 존재 감각이 매우 뛰어난 시로 승화되는 것이다.
아울러 상반된 감각의 시적 정감을 시인 특유의 현실에 투영시킴으로써 리얼하게 이미지화 시키는 이희정 시인의 시 〈해바라기씨〉의 탁월한 시적 미학에 독자들도 빠져들기를 기대하면서, 윤회로 대변되는 그녀의 구도자적 삶을 관조하며 정념으로 다가오는 존재의식을 조명해 본다.
2. 형이상학적 정념으로 표출되는 존재의식
앞서 언급했듯이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정념은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그 당시 회의주의에 반대했던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은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으며 연역법으로 이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연역의 기반이 되는 제1공리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어록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고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도출되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적어도 단 하나의 진실은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내가 보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거짓일지 몰라도 이것을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식의 관점에서 우선 이 시집의 표제시 〈해바라기씨〉를 감상해 보자.
해바라기씨를 한 움큼 까먹는다
손톱에서 토도독 토도독 소리가 난다
내 손이 새의 부리가 되는구나
입 속에서 이리저리 터지며
목구멍을 타고 고소하게 넘어가니
내 정강이에서 푸른 꽃대가 올라오고
크고 동그란 꽃이 피는구나
희디흰 목덜미의 새 한 마리가
키드득 키드득 웃으며
내 울음 파내고 웃음을 채운다
해바라기씨가 다시 꽃이 된다
다섯 개의 음표가 해바라기씨 위에 앉는다
곱다
사랑스럽다
-〈해바라기씨〉 전문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러한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해바라기씨를 한 움큼 까먹는다/ 손톱에서 토도독 토도독 소리가 난다/ 내 손이 새의 부리가 되는구나/ 입 속에서 이리저리 터지며/ 목구멍을 타고 고소하게 넘어가니/ 내 정강이에서 푸른 꽃대가 올라오고/ 크고 동그란 꽃이 피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야말로 해바라기씨가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정강이에서는 푸른 꽃대가 올라오고 웃음을 가득 채운 커다란 꽃으로 되살아나는 일련의 과정을 표출하였는데 비록 학문이라는 관점과는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희정 시인이 추구하는 존재의식은 ‘곱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확고하게 느낄 수 있어 더욱 친밀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이희정 시인의 존재의식에 곁들인 자화상이라 해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이희정 산조〉를 뒤이어 감상해 보자.
짐작하건대 태초에는
달빛 아래 한량이었을 것이다
그 옛날 백제 사람이
가야금 뜯고 노래하듯
음주 가무도 즐겼을 것이고
머물지 않는 구름 탓하며
풍류 또한 즐겼을 것이다
가끔씩
몸에 스미는 그리움 한 올씩 뽑아내며
일생을 누렸을 것이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는 것에 길들여지면서
막막한 길 걸어가야 하는데
백제 가야금 8현 대신
스물다섯 개의 목관악기 담보를 누르며
운명으로 살고 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육신의 해거름은 곱고 고왔을 것이다
-〈이희정산조〉 전문
이희정 시인은 늘 웃음을 잃지 않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다.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체감해 온 간난신고를 결코 울음으로 내비치지 않고 항상 웃음으로 승화시킨 그 편안함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적어도 1500년 이전의 백제, 특히 문화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의 백제인으로 자신을 투영시킨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그 옛날 백제 사람이/ 가야금 뜯고 노래하듯/ 음주 가무도 즐겼을 것이고/ 머물지 않는 구름 탓하며/ 풍류 또한 즐겼을 것이”라며, “가끔씩/ 몸에 스미는 그리움 한 올씩 뽑아내며/ 일생을 누렸을” 한량에다 어쩌면 시 외적으로 색소폰도 불고 다양한 목관악기도 불면서 봉사하는 악단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현실 속의 자신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 시 〈이희정 산조〉는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풍류 속에 해학을 듬뿍 담음으로써 그야말로 편안하게 웃으면서 감상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걱정거리 하나 없는 듯한 그녀의 부처님 화상에서 내비치는 삶의 여유와 함께 달관의 경지에 이른 보살의 풍모 또한 읽을 수 있도록 인도한다.
오랫동안 묻어둔 슬픔이
강물이 되는 날이다
깊은 물 속 퇴적층에 눈동자가 생길 때처럼
그 슬픔 생애로 와서
이렇게 풍류로 사는가 보다
내 맘의 퇴적층에는
해발의 숫자로 셈하기 어려운 넓이가 되어
가끔씩 떠밀려온 다른 생을 알아볼 때도 있다
아무래도 내 강물의 퇴적층에
각도가 생긴 모양이다
-〈나의 퇴적층〉 전문
위 시 〈나의 퇴적층〉은 모두에서 언급했던 데카르트의 정념의 존재의식에서 슬픔을 풍류로 승화시킨 이희정 시인의 대표적인 시라 지칭하고 싶다. 거역할 수 없는 그녀의 인생사에서 수많은 슬픔이 쌓이고 쌓여 “깊은 물 속 퇴적층에 눈동자가 생길 때처럼/ 그 슬픔 생애로 와서/ 이렇게 풍류로” 살게 만든 것일진대 이제 이순의 연치를 넘긴 그녀의 인생사에 쌓이고 쌓인 “퇴적층에는/ 해발의 숫자로 셈하기 어려운 넓이가 되어/ 가끔씩 떠밀려온 다른 생을 알아볼 때도 있다/ 아무래도 내 강물의 퇴적층에/ 각도가 생긴 모양이”라며 한바탕 거칠게 몰려올 듯한 변혁의 쓰나미를 예고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간 살아온 그녀의 삶이 아마도 차분하게 가라앉힐 듯싶다.
따라서 이희정 시인의 시는 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메타포 처리기법에 있어 언어 선택부터 애써 꾸미려 하지 않으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담백한 표현으로 시대적으로 복잡다단해진 심상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고 강조하면서 무소유의 홀가분함이라 할까? 얻지 못해도 잃어버릴 것 또한 없는 편안함이 더욱 좋아 보인다.
스물여섯 내 청춘의 도피행각은
청파동 숙대 기숙사 옆이었다
부모 몰래 한 내 사랑이 쓰리고 아팠지만
세상에 물들고 성장하면서
무릎에 염증 생길 때까지
내 사색은 닳고 닳았으니
아리면서도 달콤하기만 하다
시 쓰고
노래하고
노인들 돌봄하고
하늘에서 복을 줬는지
내 둘레는 늘 환하다
-〈내 청춘의 도피행각〉 전문
고뇌 속에서 마침내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고 한다. 고뇌는 철학가에게는 삶의 새로운 방법을 탐구해내는 과정이겠지만 시인에게는 삶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미지 창조의 소박한 축제가 된다. 따라서 얼마나 더 많은 고뇌가 선행되었느냐는 것이 그 시인의 시적 생명을 그만큼 오래도록 빛내줄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고뇌 없는 인간은 동물이며, 고뇌하는 시인은 만인을 낙원으로 이끄는 천사다”라고 주창했다. 미완의 인간은 끊임없이 완성을 추구하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하고, 시인은 완성을 지향하며 끝까지 고뇌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는 새롭게 탄생하며, 비로소 명시가 되는 것이다.
이희정 시인은 조선대학교 4학년 시절 졸업을 수개월 남겨놓고 사랑을 지키고자 가출하여 무작정 상경을 한다. “스물여섯 내 청춘의 도피행각은/ 청파동 숙대 기숙사 옆이었다/ 부모 몰래 한 내 사랑이 쓰리고 아팠지만/ 세상에 물들고 성장하면서” 생존이라는 크나큰 벽 앞에서 견디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끝내 감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인생여정에서 담담하게 체화된 기쁨의 정념이 되어 “무릎에 염증 생길 때까지/ 내 사색은 닳고 닳았으니/ 아리면서도 달콤하기만 하다”고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표출시킨다.
개성이 강한 시는 시문학적으로도 새로운 개성의 가치를 창출하며, 이상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여 객관적으로 창작하는 초자아의 시세계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최대한의 새로운 공감의 언어를 조탁해내는 능력의 소산으로써 개성 있는 시를 탄생시킨다. 이희정 시인 또한 결코 순탄치 못했던 삶의 여정에서 그렇게 “시 쓰고/ 노래하고/ 노인들 돌봄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하늘에서 복을 줬는지/ 내 둘레는 늘 환하다”고 최선의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참으로 경이로운 인생예찬이다.
3. 삶의 초월적 상상력, 순수서정의 시심
시를 창작하는 일은 시어에다 생명력을 불어 넣는 작업이다. 특히 시인은 메타포를 통한 정신작업의 엔지니어라는 사실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낱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옥을 갈고 다이아몬드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 구상화에 심혈을 기울여 시어를 탁마해야 비로소 훌륭한 시인으로 자리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 시단은 시의 우수성을 따지기 전에 수많은 시인들이 매스컴이 선도하는 이른바 유명시인의 그늘에 오랜 동안 짓눌려 묻혀 온 게 사실이다. 이제는 그런 어리석은 관행만큼은 확실하게 타파하고 유능하고 우수한 시인들을 냉철한 시선으로 발굴해내야만 할 것이다.
이희정 시인의 시 또한 삶의 진실을 초월적 상상력으로 관조하며 순수서정의 시심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무엇보다 이 시인의 시편들은 참으로 순수하게 우리의 문화를 추구하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시적 미학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희정 시인이 그 소중한 시 인생 내내 꾸준히 천착해 온 우리의 민족적 정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의 열쇠가 되어 전적으로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아무것 묻지 않아도
시인의 주소에는
오리나무 문패가 딱이다
맘 줄 것 없던 그 언덕에다가
곱디고운 집 한 채 지어놓고
초록빛 벤치 하나 앉혀놓으면
산새도 오고
바람도 다녀갈 것 같아서
언젠가 벼룩시장에서 구한 오리나무 판자에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새겨서
기다리고 있다
3번지가 될까?
5번지가 될까?
-〈시인의 주소에는 오리나무 문패가 딱이다〉 전문
위 시 〈시인의 주소에는 오리나무 문패가 딱이다〉를 대하려니 ‘황무지’로 유명한 영국 시인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이 생각난다. 그는 시창작의 현장을 작업장으로 비유하면서 동시에 시비평 방법으로서의 ‘워크숍 크리티시즘’(workshop criticism/작업장 비평)을 주창했던 장본인인데, 그 워크숍 크리티시즘은 타성적이며 진부하고 고루한 종래의 낡은 시작(詩作) 행위를 탈피하여 참신하고 새로운 시의 경지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엘리엇의 신고전주의 문학론의 전개 과정에서 등장한 방법론이기도 하거니와 소재(素材)가 낡았다 하여 작품의 내용이 낡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조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유능한 시인은 기존의 제재(題材)를 가지고 얼마나 새롭게 시를 쓰느냐 하는 것으로 그 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우리에게도 ‘온고지신’이라는 훌륭한 가르침이 있거니와 시인이 다루는 소재가 옛날것이라는 데에 결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 것들을 가지고 얼마나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느냐는 데서 그 시인의 뛰어난 표현력과 역량이 평가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이희정 시인의 시 〈시인의 주소에는 오리나무 문패가 딱이다〉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서정의 시세계에 꿋꿋이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언젠가 벼룩시장에서 구한 오리나무 판자에/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새겨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별은
지상에서도
고운 광채를 내고 있더라
오래 된 나의 고요가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울 때처럼
이파리들 흔들리는 이파리소리가 나고
서역기행에서 만난
말발굽소리도 나더라
내가 바라보는 별들은
곱고 고와서
후미진 구석에서도 뜨고 지더라
언젠가 서역기행에서 만난 별 하나도
지상의 소리들 속에서
높고도 낮게 붐비고 있더라
-〈구석에서도 별이 뜨고 지더라〉 전문
위 시 〈구석에서도 별이 뜨고 지더라〉는 늦은 저녁에 별이 “고운 광채를 내고 있”을 때 길을 걷다가 만난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오랜 동안 가슴 깊이 담아두어 고요하기만한 그 순간에 시인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들에게서 “이파리소리가 나고/ 서역기행에서 만난/ 말발굽소리도” 들으면서 네팔을 여행하던 그 때를 되돌아보는 시인의 심정을 잔잔하게 묘사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키워드는 ‘후미진 구석에서도 뜨고 지는 별’이다. 그리고 ‘고운 광채’와 ‘지상의 소리’이다. 이들의 유기적인 구조가 만들어 내는 시의 정서는 자연과의 화해 혹은 자연과의 화합이라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느끼게 되는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은 체념일 수도 있고 마음 내려놓기 즉 하심(下心)일 수도 있다. 이런 정서가 이희정 시인이 함유하려는 귀한 정신일 테고, “지상의 소리들 속에서/ 높고도 낮게 붐비고 있”는 별의 영혼일 것이다.
하여간에 봄은
수많은 연두색 귀를 달고
나와 상호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되풀이되는 내 노동의 일상들을 보며
저기 고비사막 마른 벌판에서
평생을 걷고 있는 낙타를 생각하며
나는 스스로
낙타의 우물이 되기로 했다
-〈낙타의 우물〉 전문
위 시 <낙타의 우물>은 “평생을 걷고 있는 낙타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그것도 “저기 고비사막 마른 벌판에서” 등짐 지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 낙타를 그리면서 쓴 시이다. 이 시가 표상하는 것은 새봄이 되었어도 노동의 현장에 머무르고 있는 시인의 일상이겠지만 조금 확대해 보면 우리 모두의 삶을 담고 있다. 시인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로 자신을 환치시키는데 이 시의 배경은 단순히 봄의 사막이 아니다. 시간적 배경은 아직도 겨울이고, 공간적으로는 시의 제목인 ‘낙타의 우물’인 것이다. 바로 낙타의 쌍봉 속에 자리한 물주머니가 그 공간적 배경인 셈이다. 계절은 바뀌어 “수많은 연두색 귀를 달고” 봄이 되었지만 그곳에서 시인은 노동의 일상에 묶여 있는 한 사람을 미학적 상상력으로 확대시키고, 그의 삶을 초월적 상상력으로 감싸 안는다. 시간적으로는 겨울에서 봄으로, 공간적으로는 노동현장에서 사막으로, 다시 마른 벌판에서 우물로, 고비사막과 우리나라의 공간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통해 살생 없이 갈증을 해결 하는 ‘낙타의 우물’ 속에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고 있다.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들이
PC에 돌아다닌다
삶의 허당을 위해
따스한 이모티콘 하나 보내주고 싶다
부재의 목마름으로 흐느끼고 있는 이의 침상에도
소식 같은 이모티콘 하나 띄워주고 싶은 날
나만의 이모티콘을 띄우고 싶다
지구의 기울기가 23.5도라고 배우던
어린 시절에게도
예쁘고 발랄한 이모티콘 하나 띄우고 싶다
-〈이모티콘의 미학〉 전문
시적 다양성의 추구라는 의미에서 오늘의 시인들이 관심을 갖고 접근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시의 특징은 세련된 감각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런 견지에서 위 시 〈이모티콘의 미학〉은 순수서정의 미학에 덧붙여 깔끔한 이미지의 포스트 모던한 메타포 작업을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시인은 새로운 노래로서의 서정시를 창작하는 자랑스러운 작업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데, 시는 언어를 가지고 억지로 만들어내는 조작품이 아니라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靈感)의 소산으로서 정교하게 탁마해내는 빛나는 정신적 산물인 것이다.
우선 〈이모티콘의 미학〉은 보이는 바 그대로 시 전편을 부드러운 연상적 수법으로 조화시켜 시의 표현미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희정 시인은 감각적으로 세련된 섬세한 시어와 자연과 우주에 이르는 온갖 사물을 적합한 퍼스니피케이션(personification)의 의인화 수법으로써 한국인의 순수한 삶의 정서와 자연을 밀도 짙은 상념으로 조명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부재의 목마름으로 흐느끼고 있는 이의 침상에도/ 소식 같은 이모티콘 하나 띄워주고 싶은 날// 나만의 이모티콘을 띄우고 싶다/ 지구의 기울기가 23.5도라고 배우던/ 어린 시절에게도/ 예쁘고 발랄한 이모티콘 하나 띄우고 싶다”는 시인은 테크니컬한 기교적 묘사는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 내면성의 자연스러운 레토릭(rhetoric/ 수사)으로써 지성미 번뜩이는 심도 높은 표현 수법으로 삶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지금은 만신창이로 누워계신 엄마가
몇 년 전 봄에
나와 함께 무등산 산자락을 오르면서
곱게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보고
“엄마, 진달래꽃 예쁘제” 했더니
“개꽃이여, 개꽃” 하시던 말
봄이면 늘 속이 에인다
해마다 진달래는 피어쌌는데
쇠침대에 누워계신 엄마가 생각나면
내 가슴에도 울컥울컥 개꽃이 핀다
희로애락의 얼굴빛 어딘가에 걸어두고
밤마다 꿈길로만 오는 엄마
오늘같이 진달래가 피는 날은
엄마가 무지무지 보고 싶다
-〈엄마의 개꽃〉 전문
〈엄마의 개꽃〉은 식물적인 시다. 식물이기 때문에 ‘식물적’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또, 동물적인 생명력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그 생명성을 움직임 없이 조용하게,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 역동성을 발휘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식물적이라는 말을 차용했다. ‘지금은 만신창이로 누워 계신 엄마’는 홀로 무소의 뿔처럼 우뚝 서가는 나무가 아니라, ‘더불어’ 혹은 ‘동행’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진달래꽃 나무다. 그리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입가에 올리는 향기 어울리는 숲길에서 지속적으로 엄마를 떠올리고 싶다고 시인은 염원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희로애락의 얼굴빛 어딘가에 걸어두고/ 밤마다 꿈길로만 오는 엄마”라는 시행이다. 최근(2022.4.12.)에 이희정 시인의 엄마는 이승을 하직하셨다. 그래서일까? 감정의 원형에서 “오늘같이 진달래가 피는 날은/ 엄마가 무지무지 보고 싶다”고 되뇐다. 이승에서 저승 사이에는 강이 흐르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것이 토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이라 해도 우리의 원형질 속에서 강이 흐른다. 그래서 그 강을 건너야만 저쪽 세상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로 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이희정 시인은 “밤마다 꿈길로만 오는 엄마”를 보면서 그래도 꼭 잡아두려고 한다. 이렇듯 이희정 시인은 진달래, 아니 엄마의 개꽃을 매개로 이승과 저승이라는 공간을 선험적 상상력으로 넘나든다. 바로 <엄마의 개꽃>에서 ‘개꽃’은 인간의 본성 탐색을 통해 ‘인간애’가 무엇인가를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매개체인 것이다.
4. 나오면서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댄디즘(dandyism)을 정신주의 혹은 극기주의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로 여겼으며 자아를 초극하는 의지의 미학으로 보았다. 종교적으로는 불교적 인식과 맞닿아 있는 과시적 인식의 결과로 보았으며 위로 오르려는 자아의 극복의지로 해서 초월자 앞에 제물이 되기를 갈구하는 희생정신으로 간주하였다.
이희정 시인은 제10시집 《해바라기씨》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엄마가 보고파서 울 때마다/ 나의 시들이 뎁혀지는 것을 느낀다”고. 그러면서 “엄마 생전에 바쳐야 할 나의 10시집이 수미단 위에 올려진다.” 그리고 “이제 휴식을 얻은 것 같다”며 회한에 젖은 지혜의 말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이 개진한 키워드로서의 ‘이제 휴식을 얻은 것 같다’는 보들레르의 댄디즘의 자아 극복 의지와 극기하는 정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희정 시인의 시에서는 미래를 창조적으로 투시하는 비스타스(vistas)의 시작법을 과감하게 제시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신선하고 진취적인 시적 이미지를 부각시켜 희망찬 한국현대시의 미래상을 눈부시게 제시하고 있는 이희정 시인을 새롭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참다운 의미가 담겨진 시언어의 구사 능력은 두 말할 것 없이 그 시인의 탁월한 상상력과 잠재된 내실을 확연하게 입증해 주기 마련인데 이희정 시인이 10권의 시집을 상재해 온 배경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시인이 끊임없이 탁마한 시문학 수업이 점철되어 마침내 오늘의 성과를 도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득 불교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오롯이 담겨있는 ‘집착이 없으면 근심도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뼛속 깊이 아려온다. “자녀를 가진 사람은 자녀를 보고 기뻐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를 보고 기뻐한다. 물질적인 집착이야말로 인간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녀를 가진 사람은 자녀 때문에 걱정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 때문에 걱정한다. 인간의 근심 걱정은 집착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나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근심도 걱정도 없다”는데, 이제 며칠 후인 5월 30일이면 지난 4월 12일에 별세하신 이희정 시인의 모친(백순자 여사)께서 이승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재일인 49재일이 된다. 그 마지막 날에 이 시집을 영전에 바치고 싶어 한 이희정 시인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어 필자로서도 마음이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