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하 선생님께서 2011년 10월 26일에 쓰신 ‘전문 번역가 좋아하시네: 『스티브 잡스(안진환 옮김)』 번역 비판 - 8장’(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56)에 짧게나마 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덕하 선생님의 『스티브 잡스』 오역 지적에 대한 짧은 논의
지적 1. ‘…… had not yet fully admitted was his’의 경우
이덕하 선생님의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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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환(160쪽): 당시 많은 컴퓨터들에는 그 설계자의 딸 이름이 붙곤 했다. 그런데 리사는 잡스가 버리고도 자신의 자식임을 인정하지 않은 딸의 이름이었다.
Isaacson(93쪽): Other computers had been named after daughters of their designers, but Lisa was a daughter Jobs had abandoned and had not yet fully admitted was his.
l 오역 1: “not yet fully admitted”를 “인정하지 않은”이라고 번역했다. “아직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은”이다.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는 뜻인데 거의 반대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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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인정하다’를 ‘1. 확실히 그렇다고 여기다. 2. 『법률』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가 어떤 사실의 존재 여부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하다.’로 풀이합니다. 잡스가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는 아니므로 위 글에서 ‘인정하다’는 1번 뜻으로 쓰였겠죠. 이덕하 선생님은 이 글에서 ‘admit’의 역어가 영한 사전에 등재된 ‘인정하다’라고 생각하시는 듯한데 제 말은 ‘fully admit’를 ‘인정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법정에 선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할 때 80퍼센트만 인정할 수 있나요? 100퍼센트 그렇다고 여길 때 ‘인정하다’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잡스는 딸이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지어주고 몇 달간 양육비를 보낸 것 말고는 딸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리사가 10살이 되어 친자 확인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조차 자신이 불임이라며 유전자 검사 결과를 거부했죠(패소한 뒤에야 리사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LISA’라는 이름을 붙인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친자 확인 소송이 제기되기 전에 잡스가 리사를 자신의 딸로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인정하다’의 통상적인 한국어 용법으로 보건대 ‘딸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없지는 않았으나 인정하지는 않았다’로 보는 게 나을 듯합니다.
영어에서는, 특히 전기에서는 표현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컴퓨터 명명 사건 이전에 리사를 자신의 딸로 인정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지 한 번도 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은 잡스가 아니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had not admitted was his’라고 단언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패소 이후에 리사의 의료 보험료를 내주기로 한 것을 (이른바) ‘완전한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해석의 여지를 다투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덕하 선생님의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라는 번역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서툰 번역으로 보이거나 가독성을 방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번역자의 번역을 오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를 원서든 번역서든 읽지 않았고 잡스의 생애를 꼼꼼하게 조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판단을 내릴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제 판단이 옳다고 단언할 수는 없죠.
이덕하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문제 중 하나만을 논의하는 데도 두 시간 넘게 소요되네요. 관련 자료를 충분히 조사하고 더 엄밀하게 논증하려 한다면 훨씬 많은 시간이 들겠죠. 오역 지적을 툭 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번역자와 비평자의 해석 중에 어느 것이 더 타당한가를 놓고 엄밀히 논증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번역자가 자신의 번역을 방어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의 전 과정이 명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모르겠으나 원문을 읽고 번역문을 생산하는 과정은 대부분 암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수십 년 내공이 녹아 있기도 합니다. 이것을 명시적인 언어로 끄집어내 논증하려 한다면—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문장 하나를 놓고 책 한 권을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번역 비평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낼 필요가 있다는 데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비평자는 오역을 지적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때 자신의 한계를 자각해야 합니다. 비평자는 판사가 아닙니다. 법정 비유를 확장하자면, 번역자와 비평자는 독자라는 배심원 앞에서 변론을 펴는 두 변호사라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덕하 선생님의 비평은 대부분 단언입니다(“거의 반대로 번역했다”, “엉터리 번역이다”,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했다”, “오역이다”). 저는 이덕하 선생님이 무오류의 비평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첫댓글 마늘아빠님//
그렇다면
admitted, not admitted, not yet fully admitted
이 세가지를 서로 완벽히 분리해서 번역하기란 불가능하다 혹은 의미없다고 보시는 건지요?
제 짧은 생각에는
이덕하님의 교정은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거의 반대로 번역" 이라는 부연설명은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요.
영어 표현과 한국어 표현은 일대일 대응하지 않습니다. 정보가 유실되기도 하고 추가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번역학의 기본 상식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입니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컴퓨터 명명 사전 이전에 리사를 자신의 딸로 인정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지 한 번도 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은 잡스가 아니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had not admitted was his’라고 단언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패소 이후에 리사의 의료 보험료를 내주기로 한 것을 (이른바) ‘완전한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해석의 여지를 다투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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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제 3자가 보기에는 잡스가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는 100% 증거가 없으니까 저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군요.
짧은 문장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면서 번역에 임해야 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번역 비판이 무오류라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정곡을 찌르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Other computers had been named after daughters of their designers, but Lisa was a daughter Jobs had abandoned and had not yet fully admitted was his.는 "다른 컴퓨터들에는 그 설계자의 딸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리사는 잡스가 버렸던 딸로, 자신의 자식임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은 상태였다."정도로 번역을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안진환씨의 번역문은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문장의 의미를 불필요하게 그리고 부정확하게 여러 군데에서 많이 변형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문장이 더 한국어다운 매끄럽고 세련된 것도 아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