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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반 등산 기술
1, 알피니즘
2, 등산의 첫걸음
3, 기본 등산장비
4, 보 행 법
5, 등산식량과 취사
6, 야영
7, 등산의 계획
1, 알 피 니 즘
등산이란 무엇인가
알피니즘(alpinism)`은 "등산"을 말하는 외래어이며,오늘날에는 국제공통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말은 스위스를 가운데 두고,프랑스,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 등 다섯 나라에 걸쳐 있는 유럽 알프스라는 고산 지대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으며,alpinisme(불)에서 시작하여 alpinism(영)alpinismus(독)alpinismo(이) 등으로 번져나가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등산가를 `알피니스트`, 등산학교를 `알파인스쿨`, 산악회를 `알파인스쿨`, 등산 지팡이를 독일어로 `알펜 슈톡` 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기원이 된 것이다.
등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히말라야 등산을 `히말라야이즘`, 안데스 등산을 `안디니즘` 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알피니즘`은 등산의 역사적 기원 때문에 생겨난 말일뿐 `알프스 등산` 이라는 좁은 뜻이 아니며, 널리 일반적으로 `등산`을 뜻한다고 프랑스의 등산가 `뿔 베르시아` 가 그의 저서 "알피니즘"의 첫머리에 밝히고 있다.
알피니즘의 정의
그렇다면 알피니즘,다시 말해서 등산이란 무엇인가?
등산은 `登山`이라고 쓰고 산을 오른다는 뜻이지만, 원래 서구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서 온 서구적 개념이다.즉,`등산`은 알피니즘을 번안해서 만든 말이다.
이러한 등산에는 고전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가 있는데,전자는 모험과 도전의 의미가,후자는 탈출 수단과 의미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그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으며, 등산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등산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새삼 물을 것도 없다고 생각할런지 모른나, 이 물은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처음에 등산이 어떻게 시작하여, 어떤 과정을 밟아, 지금어디까지 왔는가 하는 이른바 등산의 역사를 대충이라도 훑어볼 때 비로소 그 가닥이나마 잡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니즘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영국에서 나온 "등산 백과 사전"(encycopedia of mountaineering)에는 알피니즘을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행하는 클라이밍` 으로 풀이하고 있다.
알피니즘의 역사적 기원
`알피니즘` 이라는 말에는 역사적 기원이 있다.
1760 년 스위스 재네바의 대학교수인 `베네딕트 드 소쉬를` 가 사모니에 가서 하늘 높이 솟은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을 보고, 정상에 오르는 길을 아는 자에게 상금을 걸었다.18세기라면 히말라야는 고사하고 알프스도 미지의 세계일 때였다. 그 무렵 사람들은 몽블랑에 악마가 살고 있고, 눈사태를 일으킨다며 무서워했다. 그런 몽블랑이 등정되기는 그로 부터 4반세기가 지난 뒤였다.
몽블랑의 정복은 미지의 세계, 그 공포와 곤란함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여기에는 알프스의 대한 숭고한 등산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일컬어 `알파니즘`이라고 했다 .
등산은 산과 사람의 만남으로 비롯하지만, 사람과 산의 만남이 반듯이 등산인 것은 아니다. 즉, 도를 닦으려 입산하거나 약초를 캐며, 짐승을 잡을 목적으로 산에 가는 것은 등산이 아니다. 승려나 심마니, 사냥꾼이 제아무리 산을 잘 오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등산가라고 하지 않느다. 등산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알피니즘의 세계
알피니즘에는 알피니즘의 실현을 위한 고유의 특수한 세계가 있다. 그것은 무형 또는 유형의 세계이며, 일정한 테두리가 없는 세계이다. 알피니즘의 무대는 대자연이며, 이 자연은 고산과 칼날 능선, 깍아지른 암벽, 눈과 얼음 그리고 넓은 공간과 허공 등으로 펼쳐지는 별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장시간에 걸쳐 극한적으로 벌어지는 알피니즘 활동은 한마디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이다. 심한 육체적 노력을 넘어서 정신적인 것을 얻는 것이 등산의 특권이고 본질이다. 등산은 지식욕과 탐험욕 그리고 정복욕의 소산이며, 이때 알피니스트는 진정 자기를 알고, 자기를 지배하며,자기를 이긴다. 알피니즘에는 또한 알피니즘 만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다. 그것응 일반 스포츠와 비교할 때 더욱 확실해 진다. 즉, 일반 스포츠에는 심판과 규칙과 승부와 관객이 있으나, 등산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프랑스 등산가 `리오넬 테레이(1921~1965)`가 말한 `무상(無償) 의 행위`가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순수하고, 가장 가혹하며, 가장 신중한 도전이다.
알피니즘 정신과 형식의 변천
몽블랑이 초등되던 1786 년 8월 7일에, 서구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한 `제임스 왓 `의 증기기관이 완성된 것을 보고, 등산과 서구 근대화가 같은 인강의 힘의 발로로 보는 학자가 있다. 이처럼 서구 근대화와 출발점이 같은 등산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250 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역사를 기록하며 오늘에 이른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데, 여기 그 발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안내 등반으로 시작하여 안내자 없는 등반으로
몽블랑이 등반되자, 곧 이어 만년설에 덮인 3~4 천 미터의 알프스 고봉들에 대한 도전에 불이 붙었다. 그러자 미지의 세계에, 찾아가는 지리도 잘 모르고, 힘과 능력도 부족해서, 그 지역 사람을 안내인으로 고용하고 그 뒤를 따라(guided)가다가, 점차 안내가가 없는 산행 (guidelessdimbimg) 으로 옮겨 갔다.
등정주의
이 무렵, 그들의 산행방식은 비교적 등반하기 구월한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산행이었다. 이런 형식을 등정주의(peak hunting) 라고 불렀으며, 이런 산행방식은 알프스 4000 미터 급의 마지막 봉인 마터흔(4478m)의 초등정(1865 년)까지 계속되었다 .
등로주의와 머메리즘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른던 한 시대가 지나면서, 이번에는 산 허리나 가파른 절벽을에 길을 내며 오르는 모험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길을 variation route 라 불렀다. 또한 난이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보조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인공등반` (artiflcial climbing)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보조 수단이라야 극히 초보적이고 소박한 것으로 나무쇄기와 줄사다리 정도였으며, 이런 험로 개척을 주장하고 나선 클라이머가 바로 `머메리` (Albert f.Mummery, 1855~1895)`였다. 그리하여 그가 주창한 산행 형식(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 를 등정주의에 대한 `등로주의`로 부르고, 그의 이름을 따서 `머메리즘 ` (Mummerism) 이라고 하였다.
등산무대의 변천
알프스의 4000 미터 급 고봉들이 모두 등정되자, 보다 높고 어려운 대상을 찾아 나선 `머메리`는 19 세기 말 히말라야 8000 미터봉인 낭가 파르바트(Nanga Parbat, 8125m)
에 도전하였고, 등반도중 실종되고 말았다. 등산 역사에 있어서 순수 등반대상지로 히말라야의 문을 두드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낭가 파르바트에 다시 등반대가 간 것은 그로부터 30년 뒤의 일이다. 또한 1953 년에 가서야 이 고봉이 초등 된 것을 보아도 `머메리`의 히말라야 진출이 얼마나 앞서 있었던 가를 잘 알수 있다.
벽등반 시대
등산 무대가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로 옮겨가고, 에베레스트와 낭가 파르바트가 도전을 받고 있던 1930 년대에, 알프스에서는 아이거와 그랑드 죠라드 그리고 마트흔의 3 대 북벽이 전위적 클라이머들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알프스 3 대 북벽의 등반은 등로주의의 결정이었고, 그 등반 형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난이도 높은 동계-직등-단독-속공 등으로발전하면서 많은 역사의 장을 기록하게 된다.
대원정 시대
`머메리`가 낭가 파르바트 도전 후 반세가가 자나 1950 년에 최초로 8000 미터 봉 안나푸르나가 초등 되었다. 이후 1964 년까지 히말라야의 최고봉급 14 봉이 모두 등정 되었다. 이때의 히말라야 원정에 소요되는 기간, 인원, 불자, 자금 등은 알프스 등반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규모 여서 `대원정` 이라 했으며, 이런 형식은 1977 년 한국팀의 에베레스트 원정까지 4 반세기가 넘도록 지속되었다.
무산소, 단독, 연속 등반
세계 등반사에서 일대 전환기라면 1978 년을 꼽을 수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고, 3 개월 뒤 낭가 파르바트를 단독으로 등정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로쏘 등산계의 세기적 과제로 남아있던 무산소/단독/연속 등반이 모두 해결되어 알파니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알피인 스타일과 속공
히말라야 등반의 새로운 장은 그밖에도 있었는데 알파인 스타일과 속공이 그것이다.
알파인 스타일은 말 그대로 `알프스 식` 이라는 뜻이며, 히말라야의 8000 미터 고소를 높이가 그반밖에 안되는 알프스를 오르는 식으로 등반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극지법으로 오르면서 곳곳에 물자를 저장하던 전통방식에서 벗어나, 고도순응만 끝나면 곧바로 정상을 향해 전진하는 등반 방식이다.
한편 속공으로 에베레스트를 24 시간 안에 왕복하겠다고 호언하던 클라이머가 있었는데, 그는 결국 그 시간에 정상에 오르는데 그치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기록은 계속 경신되기 마련이다.
등산은 어디까지 왔는가
더 오를길이 없다
알파인 스타일 즉 알프스 식(式)이라는 말은 정작 알프스에서는 쓰지않으며, 히말라야 같은 고소의 등반에서 비로소 그 가지가 평가된다. 다시 말해서 4000 미터 고소에서 통하는 등반 형식과 기술로 8000 미터 고소를 오를때, 그것을 알파인 스타일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소수 정예주의가 기본이어야 하고, 등반 방식은 속공(速攻)이어야 하기 때문에 으례 물량의 경량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막영구(天幕) 없는 설동(雪洞) 작전이 등장하기도 한다.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단독과 속공으로 가는 중요한 과정이지만, 단순한 속공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진정한 의 속공 등반은 고소 등반에서 아주 중요한 전술 개념이다. 일찌기 `이반 쉬나드` 는 등산에 있서 스피드는 클라이머의 사활을 좌우 한다고 까지 말했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 나도는 단순한 속공 등반기록은 그러한 진정한 의미와 거리가 멀다.
에베레스트 속공 등반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물론 이 때 클라이머가 발휘하는 주력은 놀랍지만, 마(魔)의 길목인 아이스 폴 지대의 루트 공작도 없이, 남이 뚫어놓고 만들어 놓은 길을 뛰어가다시피 한다면,그러한 에베레스트 등반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알파니즘의 이와 같은 추세는 결국 알파니즘 자체의 앞날을 예언하기도 한다.이미 등반의 세계도 1993 년은 에베레스트 초등 40 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해 봄철에 에베레스트에는 네팔 쪽으로만 15 개 등반대가 몰리고, 하루에 40 명이 그 정상을 밟았다. 한편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에서도 초등 80 주년을 맞아 등반 최적기인 5 월 하순에 무려 500 명에 달하는 클리이머의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고도의 산업화 사회가 출현하면서 고산 등반의 제반 여건이 성숙해진 데에 그 원인이 있으며, 이렇듯 고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산의 고도와 등산가의 태도
알파니즘이 오늘날처럼 일반화, 보편화되기 전 알파니스트들은 준엄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하고 행동했다. 그 무렵 대자연은 그들의 외경과 모험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기술 문명의 위력과 혜택속에서, 볼래의 자연관에서 멀리 떨어 지고 있다. 이것은 알파니즘의 본도 이탈이며, 아파니스트의 불행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진정한 알파니스트가 존립하려면, 보다 올바른 인식과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알파니즘의 세속화와 알파느스트 자신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여기 `고도` (altiude)와 `태도` (attitude)의 문재가 재기된다. 즉, 고산의 높이와 등산가의 마음가짐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요구된다.
등산은 고도를 지향하고 추구함을 본질로 이제 이제 더 오를 곳이 없으니 알파니니스트는 자연적 고도에서 정신적 고도로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흔히 등산을 육체적인 힘과 장비의 발달에 따른 등반기술에 절대적 비중을 두기 쉬우나, 그러한 조건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알파니즘은 처음에 이러한 정신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측면이 점차 약해지고, 지금에 와서는 거의 외형만을 중요시 하게 되었다.
편의성과 불확실성
현대 알피니즘에서 우려되고 경계해야 할 문제는 보편화에 따른는 세속화에 있다. 문명이 자연의 베일을 벗기면서 온갖 편의(expediecy)를 제공해 왔고, 알파니즘 세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불확실성(uncertainty)를 없애버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될때 알파니즘의 세계에 과연 어떤 매력이 있으며,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의아스럽다.
이 점에 대해 `프랭크 스마이스(Frank Smythe, 1900~1949)`와 `이반 쉬나드(Ivon Chouin
ard, 1938-)`의 주장이 새삼 주목된다.스마이스는 일찌기 에베레스트 등반에 인공산고의 사용을 반대하였고, 고산 등반에서의 어려움과 위험한과 싸우는 것이 알파니즘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등산에서 편의성 문제는 비단 인공산소 사용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각종 장비가 개량되어 사용이 편리해 지면서 등산가의 세계가 변질되고 있다. 매스너는 이 문제가 바로 산을 작게 여기는 요인이라고 보고, 장비의 과도한 사용에 반대 하였다. 다시말해, 제반 편의성이 알파니즘의 내실을 희박하게 하고, 약화시키는 것을 염려 하였던 것이다.
한편, 불확실성이야말로 등산의 세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 불확실성은 적어도 알파니즘의 초창기에는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미지의 세계는 더 이상비밀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오지의 구석구석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불확실한 것이 없어지고, 이에 따라 불안도 공포도 사라지고 있으니, 모험을 즐기는 알파니스트가 대자연에서의 보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등산의 인생
영국의 등산가 `죠지 훤치(1888~미상)`는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 이라고 했다. 등산은 의/식/주의 이동이며, 내적으로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고생하는 그 과정은 인생과 다름없다.
프랑스의 등산가 `샤뗄리우스`는 등산으 길이 끓어진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는데, 여기등산만이 가지는 특색,특권이 있다. 길이 없는 데에 길을 내며,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이를 극복하는 그 정신과 행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등산만이 사람은 많은데, 등산 서적을 읽는 사람이 적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등산가는 선인들이 간 길을 더듬고, 언제나 추체험(追體驗) 해야 한다. 정보의 홍수로 인해 미지의 세계가 없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서적을 통한 선각자와의 교감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1950 년 인류 최초로 8000 미터의 정상에 올라선 프랑스 등산가 `모리스 에르족`가 그의 저서 "안나푸르나 등정기" 의 결론으로 한 말에서 우리는 등산과 인생의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안나푸르나`에 빈손으로 갔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름으로 인생의 새 장을 열었다. 인생에는 다른 안나푸르나 들이 있다` 고......
미국의 유명한 등산교본 "Mountaineering - The freedom of the Hills" 에서 등산가는 산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로, 대자연의 시민권 (wildermess citzenship) 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권에는 특권과 보람도 따르지만, 책임과 의무가 또한 따른다`했다
알피니즘이 무엇인가 알려는 자, 그리고 알피니스트가 되려는 자는 남다른 특권과 책임과 의무가 어떤 것안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A 일반 등산 기술
1, 알피니즘에 관한 내용은 여기 까지 입니다....
첫댓글 대장님께서 수고를 마다 하지 않으시었네요?? 이런 글 자주 올려 주시면 복 받을 겁니다. ㅎㅎ
열심 하것슴니다...
대장님 이제 분발하신다카이..맛제 기분 억수로 조삔다 롱가서 올리삐~~~ㅎㅎ
총 대장님께서 바쁘신 와중에 이래 자료를 주시니 열공하겠습니다....계속 수고하세요~~~~~^*^
물량이 좀 많은데, 올리는 속도가 나지 않더라도, 이해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열심 올리겠읍니다..
열공하고 갑니다..휴..기~~인 자료 올리시는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글 읽고나니 지는 등산가도 아니고, 약초꾼도 아니고~~ 하여튼 아닌거 투성, 많이 참고 하겠슴다.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