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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 53차 기획 간산 안내(2016년 6월 19일 남양주일대)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에서 실시하는 기획 간산 안내입니다. 경기도 지역에서 실시하는 53차 간산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쾌적한 도시, 살기 좋고, 맑고 푸른 문화도시로 부상한 남양주 일대에서 실시합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가까운 답사코스로, 조선의 역대왕릉이 주변에 밀집되어 있으며, 도읍지인 한양과 가까워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대부들의 유적과 무덤들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풍수 호사가 및 애호가, 초보회원들의 많은 동참을 바라며, 특히 풍수에는 문외한이지만 역사나 유적지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1. 간산 일시: 2016년 6월 19일(일요일) 08: 30분
▶ 태릉역: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7번 출구로 나오시면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참여하시는 분들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최대한 시간을 늦췄습니다)
2. 집결지
▶ 서울 : 태릉역 7번 출구(태릉 사거리에서 육군사관학교 가는 방향)
-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7번 출구로 나와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오시면 도로에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시간을 준수하시기 바랍니다)
3. 회비: 50,000원(교통비, 중식, 왕릉 입장료 등)
4. 답사 경유지 및 간산지 안내
서울 태릉역 출발(08:30) → 하도읍 → 능원대군 음택 → 천마산하 상제봉조혈 → 고형곤 박사 음택 → 흥선대원군 음택 → 홍유릉 → 서울 귀경(18:00)
※ 다른 장소에서 합류를 희망하실 분은 김명식 고문(010-2212-3494), 정철화 간산분과위원장(010-3475-2357)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5. 답사지 안내(답사지는 현지사정에 따라 장소와 순서가 바뀔 수 있습니다)
1) 능원대군(陵園大君) 이보(李俌) 음택
조선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具氏) 사이에서 제2남으로 태어났으며, 인조의 동생이다. 11세 때에 선조의 왕자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의 계자(繼子)로 출계(出系)하여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졌으며, 1631년(인조 9)에 능원대군(綾原大君)에 진봉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군신부자가 응당 각기 충의를 다하여 종묘사직을 위해, 성을 등지고 결사해야 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늠연하였다. 이후 일체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자에는 그대로 명나라 연호를 썼으며, 청에 대항하여 절의를 지켰다. 효종 초에 종실로서 궁궐에 나아가 추종하는 자가 많아지자 차자(箚子)를 올려 이들을 죄 줄 것을 청했는데, “법을 행함에 있어 반드시 친귀(親貴)한 자들부터 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묘역에는 문화부부인 유씨와 합장되었고, 곡장 안에 8개의 호석을 둘러 봉분을 만들었으며 봉분 앞에는 월두형의 묘표가 있다.
묘소 뒤로 산자락이 팔을 길게 벌려 개장(開帳)을 하고, 중출(中出)로 낙맥(落脈)하여 속기처(束氣處)를 일구고, 비룡(飛龍)으로 솟구쳐, 후부(厚溥)한 도두(到頭)아래에 부부 합장묘를 일구었다. 그러나 지근(至近)에서 완벽하게 환포하는 백호에 비해 역사(逆砂)로 공(供)해야 할 청룡이 짧거나 빈약하여 터에서 생성된 기운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흩어지는 형세가 되어 실기(失機)하였다.
송시열이 쓴 능원대군의 신도비 내용 중에, “산소 자리가 좋지 않아 후간(後艱: 훗날이 어려움)이 있을까 두렵지만 가산(家産)이 냉락(冷落)하여 옮길 계책이 없도다.” 하여 이곳 음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음을 피력하였다. 묘소 앞으로 고가도로가 지나가고,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우선수(右旋水) 을파(乙破)로 격침된다.
2) 천마산하(天馬山下)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의 대혈(大穴)을 찾아서....
이곳 대혈(大穴)은 2007년 5월에 필자가 간산기(看山記) 형식으로 세상에 공개하면서 산객들 사이에는 잘 알려진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이곳 일대의 빽빽한 밀림(密林)이 벌목(伐木)되면서, 세상에 속살을 드러내어 그간 진면모를 보지 못하고, 우물속의 개구리처럼 의심스러운 눈총을 보냈거나, 산안(山眼)이 깜깜한 산객들에게 나신(裸身)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들어 낸 것이다.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의 혈은 오래전에 타계한 장익호 선사께서 이곳 혈을 낙점(落點)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혈(穴)로 칭송했던 대명당(大明堂)이다.
장선사가 기록한 유산록(遊山錄)의 내용이다.
『필자(장익호)가 1965년 동절(冬節)에 천마산(天摩山)에 오르니 대성산(大成山)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한 충천(沖天) 준립룡(峻立龍)은 장차 천리행룡(千里行龍)을 다 마치고, 여장(旅裝)을 풀어 머물면서 탁립운소(卓立雲霄)한 천마산이 웅진(雄鎭)하였으니, 이는 파군대성(破軍大星)이다. 이 대룡(大龍)은 태조낙맥(太祖落脈)이후, 수 백 리 사이에 수단(數段: 여러 개로 구분)의 누전(樓殿)을 형성하여 이 태산준령의 웅룡(雄龍)은 마치 군봉(群峰)이 구름사이를 날아오는 격(格)이다.
차처(此處: 이곳)에서 일대(一大) 좌우개장(左右開帳)하고, 중심룡(中心龍)으로 낙맥(落脈)하여 중중개장(重重開帳)하면서 사오중후(四五重後)하여, 홀연 질단과협(跌斷過峽)이후, 금수대장중심(錦繡大帳中心: 비단에 수를 놓은 큰 장막의 중심)에서, 재락(再落: 두 번 낙맥)하여 결혈(結穴)하였으니 천하(天下)의 대지(大地)인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이다. 현무(玄武) 좌우수(左右手)를 미개(微開)한 이후, 중간(中間)에서 은은낙맥(隱隱落脈)하여 금수대와(金水大窩: 사방에서 터를 감싸는 金水砂星 안의 乳突穴)를 이루었으니 차혈(此穴: 이곳 혈)의 형태가 아름다움을 비할 바가 아니다. 제황(帝皇)이 옥좌(玉坐)에 오르고, 후면(後面)은 12성이 연주(聯珠: 천마산 산정에서 낙맥하는 모습이 12개의 구슬이 꿰어지듯 이어지고)하고, “무지개” 처럼 반원(半圓: 束氣處 뒤로 둥그렇게 개장한 모습)을 그리면서, 서광(瑞光)이 창공(蒼空)을 비추고, 좌우로는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숙연(肅然)이 공립(拱立)하며, 전면은 천봉조천안(千峰朝天案: 하늘아래 천봉의 조안산)이다. 수구(水口)는 중중직결(重重織結), 견밀(堅密)하여 불통주(不通舟)격이다.
대강(大江, 북한강)은 은은(隱隱)히 회포(回抱)하여 현무뇌후거(玄武腦後去: 현무정 뒤를 감싸면서 돌아가고)하고, 병오정(丙午丁)방의 삼양봉(三陽峰)이, 운소(雲宵: 구름 속에 은밀히 감추듯)하며, 간인봉삽천(艮寅峰揷天: 간인방의 봉우리는 하늘아래 꽂혀있고), 경유옥병준운(庚酉玉屛浚雲: 경유방에 옥병이 구름 속에 잠겨있으며), 손신첨수(巽辛尖秀: 손신방이 첨수하고), 금인곤(金印坤: 곤방에 금 도장 사가 있고), 요대갑앙(腰帶甲仰: 갑방의 요대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옥연계축(玉輦癸丑: 계축방의 옥 수레), 수구유귀암(水口有龜岩: 수구처의 거북바위), 내당석봉(內堂石峰: 내당의 바위 봉)이 아아(峨峨: 높게 솟구쳐 있으며)하니, 하위(何爲)요, 선교(仙橋) 등, 귀사(貴砂)가 혈 주변을 포진(近穴布陳)하였으며, 삼십팔장(三十八蔣)으로 나열(羅列)하니 이 어찌 명혈(名穴) 대지(大地)가 아니겠는가, 당국(堂局)이 웅여(雄麗: 숫컷처럼 고우며)하며, 천산만수(千山萬水) 융결(融結)하였고, 일해부조만상내진(一害不照萬祥來溱: 하나도 해로운 것은 비치지 않고, 만개의 상서로움만 보인다)하니 과연 천하의 대지임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천거하여 받들고, 끌어안아 천봉옹립(薦奉擁立)한 천상누각(天上樓閣)에, 수목(樹木)이 울울창창(鬱鬱蒼蒼)한 밀림(密林)속에 금반하엽(金盤荷葉)으로 맺은 이 혈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황홀도취(恍惚陶醉)한 이 유산객(遊山客)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군선봉(群仙峰)과 담논(談論)하는데, 어느덧 해는 서산에 떨어지고, 발길 돌리기가 아쉬워 다시 한번 돌아보니 옥좌(玉座)뒤에 둘러진 12 연주(聯珠) 무지개 봉(峰)이 또 한번 취객(醉客)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나』
이곳 명당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이 서울을 향해 가는 도중에 철원군과 포천군을 아우르는 광덕산(1046m)과 백운산(903m)을 치켜세우고, 강씨봉(830m)을 지나서 포천의 운악산(935. 5m)을 솟구친다. 계속 남쪽으로 진행하는 용맥은 주금산(814m)과 남양주시의 철마산(710m)을 일으키고, 오남읍 지경(地境)에서 거의 90°정도로 크게 전변(轉變)하여, 동쪽의 괘라리 고개까지 진행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용신(龍身)을 돌려 행도(行度)하다가 685고지에서 광대울 고개를 넘는 대청룡(大靑龍)을 분지하고, 629고지와 배랭이 고개를 넘어 암반으로 일군 파군성(破軍星)의 천마산(810m)을 탁립(卓立)한다. 이 산은 여기서 좌우로 개장(開帳)하면서 국세를 품안으로 아우르는 용호(龍虎)를 작국(作局)하고, 중출 대룡(大龍)을 정미(丁未)방으로 낙맥(落脈)시켜 정미(丁未)에서 곤신(坤申), 곤신에서 정미로 번갈아 전신(轉身)하다가 이곳 혈을 일으키는 입수룡을 내려 보낸다. 내룡(來龍)의 몸통이 워낙 튼실하고 강하다보니 기복굴곡(起伏屈曲)과 박환(剝換), 과협(過峽)을 하는 모습이 기세등등한 위용(偉容)을 느끼게 한다. 질풍처럼 달려온 내룡이 혈(穴)을 일구기 전 금체(金體)의 병장(屛帳)을 치고, 개장(開帳)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불상(佛像) 뒤로 둥그렇게 빛을 발하는 광배(光背)의 형상처럼 보인다. 개장처(開帳處)아래에서 평평한 양맥(陽脈)으로 진행하던 내맥(來脈)은 미인의 허리처럼 늘씬한 속기처(束氣處)를 일구고 위로 치오르는 모습이 마치 제왕(帝王)이 옥좌(玉座)에 오르듯, 완만한 비룡(飛龍)으로 올라 작혈(作穴)했는데, 선사께서는 이곳의 형상을 천상누각(天上樓閣), 또는 금 소반 위의 연꽃잎처럼 생겼다 하여 금반하엽(金盤荷葉)이라 하였다.
또 유산록에 첨부된 산도(山圖)에는 혈과 함께 표시된 세 개의 동그라미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혈장 좌우 및 전순(氈脣)아래에서 혈판의 기운을 짱짱하게 갈무리하는 요석(曜石), 또는 소반의 다리로 유추할 수 있는 세 곳에 박힌 암석덩어리가 그 모습을 들이민다.
그리고 옥좌(혈)를 중앙에 두고, 24방을 빙 두르는 사격(砂格)은 삼길육수(三吉六秀)방의 모든 기운을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포진하면서, 뇌문준(賴文俊)의 발사법(撥砂法)이 무의미할 정도로 국세가 조밀하다. 전후좌우로 장막을 치고 늘어선 사격의 형상은 제왕을 알현하는 문무백관(文武百官)과 제왕을 호종하는 무사(武士), 그리고 신료와 상궁나인을 표현하고, 그리고 입수처 뒤, 옥병사(玉屛砂)아래에 점점이 박힌 암석들은 제왕을 그림자처럼 경호하는 시위군사인 점병(鮎兵)과 같다.
이곳 혈은 지반정침(地盤正針)의 신방(申方)에서 입수(入首)하여, 경좌갑향(庚坐甲向)의 형세를 이루면서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에 합치되고, 중중직결(重重織結)의 불통주(不通舟)격인 수구(水口)는 좌측에서 나온 물이 도당(到堂)하여 8층 봉침(縫針), 을진방(乙辰方)으로 파구(破口)되면서 92향론의 자왕향(自旺向)의 격을 이루면서 귀부(貴富)를 모두 아우르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곳 터를 이루는 용맥은 천마산을 출발한 큰 용이 굴러 떨어지듯 곤두박질로 내려와 10절 이상을 기복(起伏)하면서 중심룡(中心龍)을 고집하는 대룡(大龍)이다. 강하게 행도하던 용은 전후좌우로 둥그렇게 개장을 하고, 속기처(束氣處)를 일구면서 기어올라 좌우양쪽으로 지각을 내려 보낸 용척(龍脊)의 중심선상에 정확히 작혈(作穴)하였다. 넘치는 여기(餘氣)는 당판 아래로 낮게 턱을 이루는 용척(龍脊)을 통해 길게 이어진다. 즉 이곳처럼 기세가 강한 대룡은 소룡(小龍)이나 지룡(枝龍)처럼 용이 끝나는 진처(盡處)나, 태진처(太盡處)에서 혈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진행하는 허리에서 혈을 내리는 것이 특이하다.
『담자록(啖蔗錄)』에 【대룡(大龍)은 길면서 기(氣)가 왕성하므로, 혈(穴)은 중간(中間)이 귀(貴)한 것이며, 소룡(小龍)은 짧고 힘이 미약하므로, 혈은 용진처(龍盡處)에서 취해야 한다. 간룡(幹龍)의 결작(結作)은 대궁진처(大窮盡處)에 있지 않고, 허리 사이에서 혈을 내리며, 반드시 여기(餘氣)의 산이 혹 수리(數里)를 가거나, 혹은 수십 리를 가기도 한다. 그 나간 산이 비록 멀어도 기맥(氣脉)은 모두 혈내(穴內)로 돌아 거두어 수용(受用)되므로, 이것을 일러 앞에서 끌고, 뒤를 끊는다 하여 견전차후(牽前扯後)라 한다. 경(經)에 이르기를 대지(大地)는 대부분 허리에서 혈을 내리고, 회전(回轉)하는 여지(餘枝)가 성곽(城郭)을 짓는다 하였다. 오씨(吳氏)는 여기(餘氣)가 수십 리를 나가지 못하면 결코 왕후지(王侯地)가 아니라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만약 소룡(小龍)이라면 힘이 약해 여기(餘氣)가 멀리 나가지 않으므로, 진처(盡處)에서 혈을 구해야 하는 것이 대룡(大龍)과 다르다. 그러나 혈은 태진처(太盡處)에는 있지 않으며, 태진처란 대부분 본신(本身)에서 생긴 호사(護砂)에 불과하므로, 혈이 없다. 또 지학(地學)에 이르기를 진룡(眞龍)이 국(局)을 열어 중간에 누웠다면 나간 산은 몇 십 곳이 되고, 전개(展開)되는 수각(手脚)은 수십 리까지 이어지면서 가지마다 회전하여 성곽(城郭)을 짓는다 하였다.】지가서는 이렇게 적시(摘示)하였지만 지가서에 능통치 못한 지사들이나, 선생들은 용진처나, 태진처에 목숨을 걸듯 아집(我執)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우리나라 풍수계의 현실이다.
한편 풍수 학인이라면 현장에서 번번이 접할 수 있는 것으로, 풍수지리학은 형세(形勢)를 위주로 하는 형가(形家)와, 또 이기(理氣)를 위주로 하는 법가(法家)로 양분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선사의 뜻에 충직한 도제풍수(徒弟風水)의 학인이라면, 이기만을 주장하여 형세를 멀리하거나, 혹은 이기는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여 나경(방위) 등을 멀리하고 오로지 형세만을 고집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지리학에서는 형(形)은 중(中)이요, 이(理)는 화(和)로, 중화(中和)는 본래가 체용(體用)의 관계이니, ‘중’ 은 지리의 대본(大本)이요 ‘화’ 는 지리의 묘용(妙用)이다. 따라서 형세와 이기는 체용(體用)이 되어, 어느 한가지만을 고집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 형세만을 주장하여 방위를 잃어서도 안 되고, 이기만을 주장하여 형세를 잃어서도 안 되는 것이 정통풍수가 추구하는 본질이다. 그래서 형세와 방위 모두를 충족시키는 터가 금상첨화의 대명당(大明堂)으로 취급받는데, 이곳 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고건 전 총리 부친 ‘고형곤’ 박사 음택(陰宅)
이곳 음택은 한때, 대권 후보로 랭크된 고건 전 총리의 선친으로, 2004년 6월에 작고한 고형곤(高亨坤, 1906~2004) 박사가 영면하고 있다.
선생은 서울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 전북대학교 총장, 국회의원 당선(민중당), 학술원 원로 등을 지내고, 말년에 산 속 암자에서 10여 년을 선(禪)수행과 집필 작업을 하다가 99세로 세상과 결별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하세시(下世詩) 한 편을 무덤 앞에 남겨 놓았다.
《山疊疊 水重重/ 何處去/ 山鳩一聲/ 飛去夕陽風/ 去不歸/ 江山寂寞/ 莫道/ 其餘事/ 天地玄黃/ 宇宙洪荒.》
“첩첩산중에 물길은 굽이굽이/ 어디로 가는가/ 산비둘기 한 마리/ 석양 바람에 울며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강산만 적막 하네/ 말하지 말게나/ 그 밖의 일들은/ 하늘과 땅, 검고도 누렇고/ 공간과 시간, 넓고도 끝이 없고나”
이곳 묘소는 고인(故人)이 생전에 직접 점혈(點穴)하였고, 재혈(裁穴)과 천심(淺深) 등을 명시한 장택기(葬擇記)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전한다. 한때, 이곳 묘소가 세인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아들(고건)이 대권후보였다는 것 말고도, 철학자인 본인이 생전에 유언한 의도대로 재혈되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풍수호사가, 철학도 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 묘소를 찾은 대부분의 풍수인들은 이곳 당판을 잇는 내룡(來龍)위로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바위덩어리가 촘촘히 박혀있고, 묘역일대에 돌 등이 너부러진 것을 보고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면서 속칭 “기도발을 잘 받는 암자” 로 유명한 남해 금산 보리암과 양양 낙산의 홍련암, 강화 보문사 등이 바위덩어리 위에 터를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땅 속의 바위나 암반이 박힌 곳은 대단한 기운이 흐르는 것으로 본다. 전국의 사찰만 보더라도 이름 있는 고덕대승(高德大僧)이 장기간 머무르던 암자나 절터는 반드시 암반 위로 터를 정했거나, 또는 암자 뒤에 커다란 암반 등이 널브러져 있는 곳이 유독 많다.
즉, 풍수에서는 흉지(凶地)로 치부하는 암반이나, 바위덩어리 위에 천년 고찰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악산 신흥사가 그렇고, 천보산 불암사, 도봉산 망월사, 그리고 가야산 해인사, 월출산 도갑사, 계룡산 신원사 등이 한결 같이 암반 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놓았다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괴혈(怪穴)의 하나로 석산지혈(石山之穴)이 있는데, 이곳 묘소처럼 돌무더기를 이루거나, 또는 바위틈 사이에 혈을 맺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석중혈(石中穴)은 토맥(土脈)으로 연결되는 생기처(生氣處)를 찾아야 하는데, 만약 체백(體魄)이 정확하게 생기에 휩싸인다면, 그 후손들은 당대에 대귀(大貴)를 기약하는 것으로 본다.
【담자록(啖蔗錄)】에《水口石奇而立。則中有潛龍。龍身石尖而飛。則前有蟄穴。凡入鄉村。但見有奇石立于水口。即是禽星。其中必有大穴。凡龍行度之間。但見有尖利之石。飛揚射出。亦是真龍。曜氣前途必有大穴。便可跟 尋也。以此證穴其穴無差。以此卜藏其藏可發》이다.
즉, “수구(水口)에 기이한 암석이 서 있으면 용은 그 속에 숨어 있으며, 용신(龍身)에 뾰족한 암석이 날리듯 이어진다면 혈(穴)은 그 앞에 숨어 있다. 향촌(鄕村)에 들어가 수구(水口)에 기이한 암석이 서있으면 그것이 금성(禽星)인데, 그 곳은 반드시 대혈(大穴)이 숨어있다. 그리고 용이 행도(行度)하는 지간(之間)에 뾰족하고 예리한 암석이 위로 날리듯 비양(飛揚)하거나, 쏘면서 나가듯 사출(射出)한다면 그것은 진룡(眞龍)으로, 요기(曜氣)앞에는 반드시 대혈(大穴)을 감추고 있으므로 뒤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이것으로 혈(穴)을 증명하는데, 그 혈은 착오가 없는 것이며, 이것으로 감춘 것을 점친 것이라면 그 감춘 장(藏)은 발복을 이룬다.” 하였다.
고인이 10 여 년이란 세월을 암자 등에서 수행 정진하다 자신의 사후지지(死後之地)로 이곳을 지목하고는, 여러 차례 답사 끝에 용사(用事)할 것을 적시(適時)해 놓았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터임이 분명하다. 즉, 도(道)를 깨우치지 못한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바위는 분명히 살기(殺氣)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 터도 풍수적 결함은 보인다. 묘소가 약간 앞으로 나와 용사되었다는 것과 용호(龍虎)가 완벽하게 감싸지 못했으며, 청룡자락 일부가 패어져 너절한 암석덩어리가 나뒹굴고 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4) 한숨만 나오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묘소
본래 대원군이란 뜻은 임금의 아버지지만 왕위를 거치지 못한 분을 이르는 칭호이다. 우리 조선역사에도 대원군은 세 분이 있다.
이곳 흥선대원군 말고도, 선조(宣祖)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철종(哲宗)의 부친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이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생전에 대원군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했던 인물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따라서 흔히 `대원군` 으로 불린다. 이하응(1820∼1898)은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843년(헌종 9)에 흥선군에 봉해졌다.
이하응은 분명 왕족의 적통이었지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불우한 나날을 보낸다. 당시 똑똑하거나, 영특한 왕족을 말살하려는 안동김씨의 권세로부터 살아남고자 이하응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파락호(破落戶)생활을 한다. 이하응은 당시 임금이던 철종에게 아들이 없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와 만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묵계를 받아낸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이하응은 일약 대원군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흥선대원군은 천하 명당이란 예산의 가야산 자락에 부친인 남연군 묘를 이장하여 당대 발복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대원군은 먼저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를 뽑았다.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고, 국가의 제정을 낭비하면서 당쟁의 원인을 제공한 많은 서원(書院)을 철폐한다. 이어 『육전조례(六典條例)』,『대전회통(大典會通)』등을 펴 법률제도를 확립하여 나라의 기강을 잡고자 하였다. 그리고 관리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철저히 막는 한편, 양반과 상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였다.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수한다. 그리고 서양의 세력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고자 쇄국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 호를 불태웠고, 그 해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기 위해 강화도에 들어온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이다.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한 미국 함대를 물리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1873년 고종을 대신하여 대원군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부당하다는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아 권력에서 물러난다. 이에 성장한 고종이 나라를 직접 돌보게 되는데, 대원군은 이때부터 세력이 커진 며느리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점차 사이가 벌어진다. 대원군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나라에 붙잡혀 갔다가 3년 뒤인 1885년에 귀국한다. 대원군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잠시 또 정권을 잡는다.
대원군은 부패한 정권을 바로잡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많은 개혁을 펼친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문인화(文人畵) 중에서도 난을 잘 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난은 흔히 `석파난(石坡蘭)` 이라 불렀다.
이곳 묘역에 들어서면 입구에 `흥원(興園)` 이란 작은 비가 세워져 있는데, 글씨를 쓴 후손의 이름은 알기가 어렵다. 흥원이란 뜻은 흥선대원군의 능원(陵園)이란 뜻이다. 그리고 의미(意美)란 분이 쓴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 란 비도 있는데, 이 또한 대원군의 능원이란 뜻이다.
대원군의 묘는 1898년에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처음 조성되었는데,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으로,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그가 손수 잡은 것으로 전한다. 그러다 조선이 패망하자 일제에 의거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였으며, 일제의 음모가 개입된 천장(遷葬)이다 보니, 분명 길지(吉地)는 아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이장은 1966년에 이루어 졌으며, 곡장 안 봉분에는 상석과 망주석이 있고, 문인석(文人石)과 석양(石羊), 석마(石馬)가 좌우로 서 있다.
이곳 터를 이루는 내룡(來龍)은 묘역 전방의 천마산(天摩山)에서 동쪽으로 낙맥(落脈)하여 387번 지방도를 건너 동남쪽의 송라산을 일으키고, 남동쪽으로 진행하다가 지하철 경춘선이 지나는 마석역 지근의 철로와 경춘로를 연거푸 지나 인방(寅方)의 마석 그랜드힐 1. 2차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여 대원군 묘역 후산(後山)인 갑방(甲方)에서 십자맥(十字脈)으로 분벽(分劈)하면서 기운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는 쇠룡(衰龍)내지, 무기룡(無氣龍)이다.
그리고 급하게 내려오는 지각(枝脚)을 인위적으로 절각(截脚)하여 그럴듯한 묘역으로 꾸몄으나,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고, 항상 묘역이 눅눅하여 이끼 등이 많이 낀다.
이곳 묘소의 결정적인 흠은 묘역 위로, 맥을 사방으로 나누는 분벽처(分劈處) 뒤가 오목한 앙와(仰瓦)의 공망(空亡)을 이루다 보니, 이곳을 통해 바람마저 들락거리는 흉지(凶地)로 작용하면서 한숨만 나온다.
이 터의 이기적 좌향은 정침(正針), 봉침(縫針) 모두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격침(格針)되고, 수구(水口)는 우선수(右旋水) 곤신파(坤申破)가 되어, 88향법으로는 길한 정묘향(正墓向)이지만, 이미 형기적으로 파(破)한 묘소가 되었는데, 무슨 영화(榮華)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5) 일제의 음모가 깔린 홍릉과 유릉
남양주시 금곡의 홍유릉(洪裕陵)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면서 유일 무일한 황제의 능으로, 망한 조선왕조와 함께, 불운했던 고종과 순종, 두 임금의 고뇌와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천마산(天摩山)에서 낙맥(落脈)한 내룡(來龍)이 백봉을 지나 이곳 터를 일구었지만 풍수적으론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능지이다.
고종은 1895년 일제가 저지른 일명 ‘여우사냥’ 이란 작전에 명성황후가 시해(尸解)되자, 청량리인(예전 양주군 천장산 자락) 홍릉(洪陵)에 장사를 지낸다. 그러나 홍릉은 산세로 보아 길지가 아니란 생각이 들자 자신과 명성황후와 합장할 왕릉 터를 찾도록 전국의 유명한 지관을 동원했는데, 그 때 참여한 지관이 친일파인 고영희를 포함하여 제갈, 주운한, 김광석, 전기웅 등이다. 고종은 현재 흥선대원군이 영면(永眠)중인 흥원 일대를 눈여겨 본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고종이 말한 그 흥원 일대에는 명당이 없는 것으로, 풍수가들이 정리를 한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붕어(崩御)했지만 능호를 받지 못한다. 일제가 그에게 능호를 줄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일본은 "그는 황제도 왕도 아니다" 며 그에게 능호를 내리지 않았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하면서, 만든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 200조에 "왕족 공족의 분영은 묘이다" 로 규정한 것인데, 왕의 음택을 능(陵)이나 원(園)이 아닌 일반 묘로 격하시키려는 의도였다.
고종이 승하하자 남양주시 금곡에 능역을 선정하여 산역을 시작한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의 홍릉에서도 천장(遷葬)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2월 12일 명성황후가 먼저 이곳 금곡으로 이장되고, 3월 4일 전날 발인한 고종은 명성황후와 합장(合葬)되면서 그들은 21년 만에 지하에서 해후를 하게 된다. 즉, 망국의 황제인 고종은 능호(陵號)가 없으며,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호를 차명(借名)한 것이다.
유릉(裕陵)도 마찬가지로, 순종도 능호를 얻지 못했다.
1904년 11월 5일 왕세자(순종)의 빈(순명왕후)이 33세로 요절하자 지금의 광진구 어린이 대공원 안에 안장되었다. 그의 신분은 세자빈으로 처음 유강원(裕康園)이란 원호(園號)를 받았으나, 그 후 순종이 1907년 왕으로 즉위하자, 유릉(裕陵)이란 능호가 내려진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승하를 하였는데, 4월 24일 순명왕후의 유릉도 어린이대공원 자리에서 먼저 이곳으로 천장(遷葬)을 한다.
일제는 고종과 마찬가지로 순종에게도 능호를 내릴 수 없다고 버텼는데, 이곳에 천장한 순명왕후의 유릉에 순종을 합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릉이란 능호가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본래 왕릉 장법에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때도 새로운 능호를 쓰도록 되어 있었다.
유릉은 순종과 순명황후 민씨(1872 ~ 1904 : 33세)와 순정황후 윤씨(1894 ~ 1966 : 73세)가 함께, 합장된 동봉이강릉(同封異岡陵)이다.
이곳 홍유릉에는 연못이 두 군데가 있는데, 홍릉 홍살문 앞에 있는 큰 연못이 우선 눈길을 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태가 아니라 연못 가운데 섬도 둥글고, 연못 둘레도 둥근 천원지원(天圓地圓)의 모습이 되어, 하늘도 둥글고, 땅도 둥근 것이 마치 일제의 일장기가 연상되면서 눈길을 찌푸리게 한다.
일제가 홍유릉 터에 연못을 판 것은 조선의 왕기(王氣)를 손질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으며, 홍릉 참도와 침전 사이 왼쪽에도 연못 하나 가 더 있다. 홍유릉 측은 침전 부근에 물이 늘 흥건하게 고이므로, 할 수 없이 연못을 파 물을 관리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명한다. 비록 침전 근처라 하지만 물이 그렇게 많이 찬다는 것은 이 터가 과연 황제가 영면하는 명당으로 적합한지를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 왕릉은 용세로 보나, 터의 입지로 보나 풍수와는 거리가 먼 자리이다. 고종의 능은 산이 다한 계곡사이에 흙을 메꾸어 조성한 무기처(無氣處)에 불과하며, 순종의 능은 용이 지나가는 과룡처(過龍處)에 조성되었는데, 홍릉 터를 잡았던 지관 중의 한 사람인 전기웅이 소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청 태생인 전씨는 풍수지리로 참봉벼슬을 지냈던 조선왕조 마지막 지관이며, 조선총독부가 편찬한〈조선의 풍수〉란 책을 쓴 실질적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유릉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곳 터는 십자통기형(十子通氣形), 또는 내팔겁팔형(來八怯八形)의 형국(形局)으로, 산세가 팔자형(八字形)을 이루면서 아래로 뻗었는데, 산자락이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팔자형(逆八字形)으로 마주보면서 한 줄기 안에 이루어진 명혈(名穴)이다.” 고 하였지만, 풍수의 이론을 왜곡한 궤변에 가깝다.
<홍릉과 유릉의 용맥도>
<명성황후와 합장된 고종의 홍릉>
<두 비와 합장된 순종의 유릉>
<일장기를 연상시키는 천원지원의 홍릉 전방의 연못>
6. 지참물
산행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복장과 나경패철, 필기도구, 간식 등
(우천 시도 예정대로 간산을 진행할 예정임으로, 비가 오면 우산이나 우의 등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7. 신청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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