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다섯 개가, 인간의 가치 판단의 척도입니다.
대자연이라고 하는 척도는,
항상 절대불변의 입장을 지키고,
게다가 늘어나지도 않으며 줄지도 않는,
<중도>. <법>의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중도(中道)라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척도로 해서 생활한다고 하면,
우리들 인류에게는, 한없는 진보와 조화가 약속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중도(中道)를 축으로 조화되어 있고,
조화는 다툼이 없는 세계이며,
파괴가 없으면, 그 (없는) 분량만큼 진보의 분량이 늘어가게 되니까요.
'전쟁은 발명의 어머니' 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듯합니다만,
인류의 의식이, 자연이라고 하는 가치와 조화에 눈뜰 때는,
발명 발견은 탐욕과 이득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의 행복, 이라고 하는 자각과 의무감 속에서부터
기세 좋게 용솟음쳐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의식을 거기까지 높여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들의 환경은 물론,
우리들이 생활 그 자체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전쟁, 파괴. 인플레, 실업. 그리고 경제 우선, 가치의 끊임없는 변화,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인류는 언제가 되어도 해방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어지러운 불안과 혼미의 사회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이 빠져나와서,
인간의 마음의 위대성과 가치의 척도의 존재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 의해,
안심과 희망의 세계가 열려 오는 것입니다.
자연의 척도는, 인간의 평가만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후생, 노동 등에 걸쳐서도,
그 가치를 정해 주고 있습니다.
즉, 대자연을 기본으로 한 정법 신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전인격(全人格)에 걸쳐서,
영향을 주고, 작용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혼미는, 마음의 부재로부터입니다.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경제, 이해타산, 욕망이,
인간의 최대 관심사로 되어 있는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신불은 존재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보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솔직하게, 바르게 보는 것이 가능하면,
그 마음으로 바른 상념과 행위로 노력하게 되면,
신불은 이 사람 저 사람 차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납니다.
신불은 결코 침묵을 지키지 않습니다.
신불로 하여금 침묵시키는 원인을 인간이 만들고 있기 때문에,
침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매(三昧)의 경애(境涯)는,
사람이 마음을 되찾았을 때,
즉, 신불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조화되었을 때에,
마음의 평안이라고 하는,
무한의 울림을 갖고, 우리를 감싸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떠들어도, 외쳐도,
이 지상으로부터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다고 해도, 대우주의 밖으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소위, 인간은 이 대우주 속의 지구라고 하는
이 환경 속에서 생활해 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의 흉중에서 살려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뽐내 보아도, 아무리 힘써 보아도,
인간과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들 인간은 대자연의 법이라고 하는,
정법에 따른 생활방식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우주, 대자연은 정법을 충실히 지키고 있고, 인간도 소우주이니까,
인간도 정법을 충실히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해서,
인간은, 그대로 정법입니다.
그러니까, 소우주입니다.
인간이 소우주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관념이나 소망이 아닙니다.
마음을 둥글고 크게 하면,
태양도, 지구도, 마치 우주선에 타서 보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의 넓고 높은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그 존재를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봐도,
심장으로부터 내뿜어진 혈액이 인체를 구석구석까지 순환하고,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오고,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의해,
인체 자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흡사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365일과 4분의 1, 순환해 오듯.
다시 춘하추동을 반복하는 것에 의해,
지상의 생명이 키워지고 태양계의 일원인 지구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면으로부터 보아도,
육체 여러 기관의 기능 하나만 보아도,
인간은 대우주의 기능과 같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즉, 인간은,
대자연이라고 하는 정법에 따른 생활방법을 하고 있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정법의 근본은 중도이며,
중도의 극점(極点)은 조화라고 하는 신불의 마음입니다.
거기에는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혹은 벗어나는 노력으로 정법에 맞는 삶의 방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미혹은 집착으로부터 생깁니다.
깨달음이란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입니다.
마음의 평안은,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떨어진 분량에 응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삼매의 경애는,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진짜 삼매는
중생제도를 목적으로 한 여래의 마음을 가리켜 말합니다.
여래의 마음은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봅니다.
지상천국이 언제 완성되는가,
지구 인류는 결국은 어떤 식으로 전진해 가는가,
사람들의 고뇌가 언제 맑아지는가,
그러한 것을 예측해서 현재를 어떻게 대처하여 갈까를, 숙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집착에 사로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절대(絶對)의 안심과, 무한의 지혜를 안에 간직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해 갑니다.
선정의 내용도 광명 세계로 가고 오는 것만이 아니고,
저 세상과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그 고뇌로부터 구합니다.
선정에도 제1부터 제 9까지 단계가 있고,
제8부터 제9의 선정은, 이러한 내용을 동반한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삼매의 경지는
마음이 텅 비게 되어, 무(無)로 귀일(歸一)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인간과 똑같이 행위하고 있습니다.
정중동(靜中動)의 자세가 선정의 중신(中身)이며 생활입니다.
적어도 사람들의 슬픔을 뽑아버리고,
사람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보살의 마음으로까지
사람들의 마음이 향상하게 되면,
삼매의 진의(眞意)도 명백하게 되어 가지요.
보살의 선정은 제7에 위치하고,
저 세상과 이 세상의, 구하는 자에게 빛을 주는 것이 가능한 선정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단계가 있습니다만......
어차피 이처럼, 삼매의 마음은,
사심(私心)이라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떠난
자기 자신을 확립시켰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정법에 따른 생활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고에 관계없이,
정법을 심신(心身)에 구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기회에, 마음에 새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