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지성의 영역만이 발달해서,
마음에 여유가 없고 정서가 없는 인간은,
인생에서의 올바른 판단조차 결정할 수 없다.
지성(智性)은,
인생을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가 하는,
조화된 생활을 하기 위한 지름길이며,
자기 보존. 자아아욕의 도구는 아니다.
지책(智策), 지식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성과 이성, 본능과 감정, 그리고 상념의 영역이 조화된,
원만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신리이다.
시험, 시험...의 인생은,
자기 보존적인, 편협된 인격을 만들어 내어,
인간 본연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결과로도 되고 만다.
또한 본능적인 영역만이 발달해도,
부조화한 인격을 만들고 마는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마음의 부조화가,
상념에 구름을 만들어내어,
신불의 자비와 사랑의 빛을 가로막아,
노이로제의 원인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다.
그 어두운 상념 의식은,
부조화한 영에 의해 빙의되어, 인생을 잿빛으로 바꿔 버린다.
부조화한 만족을 모르는 마음의 병은,
신리를 깨달은 생활 이외에,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부자연한 종교를 믿고,
맹신, 광신하여 자신을 잃고 마음에 평안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신불의 벌이 무서워서,
조직의 세포가 되어 마음의 자유를 잃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신불은 절대로 벌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귀여운 자신의 아이를 누가 불행하게 할 것인가?
신불의 자식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왜 신이 벌을 주겠는가?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는,
지위나 명예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고 있을까?
신불의 자비와 사랑의 빛은
우리에게 완전히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도,
자기 자신이 그 안에서 수행하려고,
스스로의 혼이 결정하고 나온 것이다.
과거세의 혼은, 일찍이는 왕후, 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가난한 사람이든 부호의 집에 태어나든
혼의 수행에 변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경제력이나 인간의 지위, 명예 등은,
인간 세계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신불(神佛)의 의지(意志)에는 없다.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차(車)라고 할지라도,
운전수의 혼, 즉 마음이,
훌륭한 길을 깨닫고 있다면,
인생 항로를 바르게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혼은, 그 결함이 있는 차(車)로 수행할 것을
자기 자신이 원해서 온 것을 잊고 있다.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불만 가득한 마음을,
신불에게, 신앙의 대상으로서 찾는 것은,
부자연한 위선자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잘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혼까지 결함이 있는 차(車)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잃고 작은 틀을 마음에 만들어 버린다.
인간이란, 정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1971년 3월,
어느 신흥종교의 영적 현상에 이끌려 그 신자가 되었던 부인이, 나에게 왔다.
그녀는 일 년 가깝게,
그 교단의 신자로서 상급 연수를 받아 세뇌되어,
일류회사를 그만두고,
불쌍한 사람들의 구원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마음을 잃어,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한 때 “연생의 배”의 신리 편을 읽고,
또한 신앙에 대한 의문이,
그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사무소에 온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부조화한 동물령에게 빙의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 영의 모습을 간파해 버렸기 때문에,
그 빙의령을 제거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이전의 자신을 되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2500년 이전의 과거세에서,
인도 마가다국의 그리그라도의 산정에서 붓타 스트라를 배운 비구니로,
바바리의 제자 사라난다라고 하는 여성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당시의 말로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 마이트레야, 반갑군! 오랜만입니다. 나는 기뻐>
라는 눈물의 대면의 장(場)은,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가슴에 따뜻한 것을 치밀어 오르게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기억을 소생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고,
과거에서 배운 사람들은,
부자연한 가르침에는
반드시 마음속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 진실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납득할 때까지,
의문, 의문의 해답을 쫓는 것이 필요하다.
<왜>에 대답할 수 없는 신앙은 신리가 아닌 것이다.
기도하는 대상물을 사게 하거나,
혼이라고 칭하는 부적을 강요하는 신앙은,
교단을 위한 돈벌이이며, 정법은 아니다.
우리는, 대신전인 이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
그것을 믿는 것이다.
올바른 길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에는 노력과 용기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칸다(神田)에 살고 있는 회사 경영자가 방문해 왔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자세에 자신(自信)이 없고,
여러 가지 타력적 신앙을 찾아 헤매,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용신, 이나리대명신(오곡을 풍요롭게 해 준다는 신)등 이것저것 모시어,
마음의 평안이 없고 정신분열 상태였다.
이러한 경우는 대부분 동물령에 빙의되어,
몸도 완전히 부조화로 되어 있다.
용신이다, 이나리대명신이다, 라고 숭배해도,
진짜 용신이나 이나리대명신의 식별도 하지 않고
신앙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시(靈視)로 볼 수 있거나,
마음의 눈이나 수호령, 지도령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비록 영매(靈媒)의 입을 통해 얘기했다고 하여도,
동물령이 사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불을 모르는 사람들이 믿게 되면,
우선 영매의 인격을 꿰뚫어 보는 것이 선결일 것이다.
사생활과 그 언동이 정법에 적합한 것인지 어떤지,
입으로는 정법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어도,
행위가 갖추어지지 않는 지도자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가가 말하는 대로 인간은,
부조화한 것까지 제사 지내고 기원하는 대상물로 만들어버린다.
이와 같은 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빙의하는 영(靈)의 100%는 지옥의 영(靈),
성불하지 못한 혼들이다.
정법을 잘 타일러,
그런 자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필요하며,
빙의되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상으로 되돌려,
올바른 길의 마음과 행위를 실행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 사람도 완전히 자신을 되찾아,
지금은 일에 기쁨을 갖고 일하고 있다.
기쁨이 있는 실생활,
이것이야말로 정도(正道)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고통, 슬픔의 원인에 대해 연구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