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에서 시작되는 경계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을 구별합니다. 크고 작음, 밝음과 어두움, 안과 밖, 나와 타자를 구별하면서 복잡한 세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이해합니다. 이처럼 구별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바꾸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만일 구별할 수 없다면,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언어 역시 이런 구별의 체계입니다. 어떤 대상을 ‘나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린 그것을 돌이나 동물과 구별합니다.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대상의 특징을 드러내는 동시에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의와 불의, 자유와 억압, 성공과 실패 같은 추상적인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의 개념을 만든다는 건 무엇인가를 다른 무엇과 구별하고, 그 사이에 하나의 인식적 경계를 세우는 일입니다.
따라서 경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경계가 있기에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선택하고 피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일도 일정한 구별과 기준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런 구별이 없는 세계에선 생각도 판단도 이루어지기 어렵고, 인간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도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경계는 기본적인 인식의 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별은 동시에 배제를 낳기도 합니다. 무엇인가를 하나의 범주에 넣는 순간, 그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있고,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개념엔 안과 밖이 있고, 모든 지식엔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하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구별을 편리한 인식 기준이 아닌, 세계 자체의 절대적인 구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생긴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