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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시인의 시작 방법
1. 자기의 핵심역량을 찾아라!
- 누구나 가장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찾으면 됩니다. 남을 따라하면 절대 최선을 다해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잘 쓸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와 맞는 글쓰기를 찾으세요!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합니다. 산에서 경주를 하면 백이면 백, 토끼가 이깁니다. 거북이가 이기는 방법은 바다에서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판단을 해야 합니다. 바다로 갈지 산으로 갈지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세요! 그걸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2. 차별화 해라
- <시창작 1>에서 자신의 핵심역량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여, 내가 거북이라고 판단을 해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갔더니 나 말고도 날고 기는 거북이들이 수두룩 한 것입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 역시 바다에 갔더니, 나와 비슷한 함민복 거북이, 이정록 거북이, 손택수 거북이, 문태준 거북이들이 먼저 장악을 하고 있더군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차별화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쓰기의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별화의 전략으로 위트, 해악, 쉽게 쓰기, 12남매의 가족사 등을 가지고 승부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토끼라고 판단을 했다면 토끼가 있는 곳을 한번 가볼까요? 그곳엔 이미 황병승 토끼, 김행숙 토끼, 김민정 토끼, 강정 토끼 등이 이미 토끼 마을을 장악했군요! 당신이 만약 조금 늦게 토끼 마을에 갔다면 어떻게 차별화 시킬 예정입니까?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자~ 당신을 차별화 하시기 바랍니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계란 한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쳐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혀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3. 경험을 써라! 가장 절실한 것을 써라! 줄거리(서사)를 만들어라!(공광규 시인의 시 작법과 동일)에서 한가지를 더 추가하면 '드라마틱'을 만들어라!
좋은 시에는 분명 드라마틱이 있다. 드라마틱을 만들기 위해서는 3미를 창출해야 한다. 3미란 바로 흥미, 의미, 재미이다. 드라마틱은 경험이고, 진실함이고, 줄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 그리고 그 안에 의미를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재미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흥미를 추구하면 소재주의에 빠진다 너무 의미만을 추구하면 잠언에 빠진다. 너무 재미만을 추구하면 꽁트가 된다. 이 상태를 얼마나 적절하게 간을 맞출 수 있는가가 시인의 관건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대체로 간을 잘 맞춘다. 당신이 만약 음식 솜씨가 없고 간을 잘 못 맞춘다면 시쓰기를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다^^ 우리 딸이 귓속말로 하는 말 “엄마가 끓인 라면보다 아빠가 끓인 라면이 훨씬 맛있어요!” 결국 시도 간을 맞추는 것이다. 얼마나 면발을 꼬들꼬들하게 할 것인지!, 냄비에 물을 얼마만큼 넣을 것인지! 불의 세기를 얼마만큼으로 조절할 것인지!!
퍼진 글을 내 놓는 것은 퍼진 라면을 독자에에 먹으라고 내놓은 라면가게 주인처럼 무책임한 것이다.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너와 동침을 한다 - 고영민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혀지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4.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라
펌프질을 안하고 반나절만 그냥 놔두면 펌프속의 물은 다시 땅속으로 잦아든다. 그럴 땐 한바가지 마중물을 붓고 다시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엔 탁한 물이 나오다가 나중에 차고 맑은 물이 나오기 시작 한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펌프질을 안하면 뻔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상이 떠오르면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일전에 시창작 강의를 한번 한 적이 있다. 5팀으로 나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을 해보았다. “당신에게 소포가 배달되었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배달된 소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장은 있고 인주가 없네요!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3분 동안 최대한 써보시기 바랍니다”
3분 동안 대략 각 팀마다 30개 정도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써냈다. 하여, 각 팀마다 처음 생각한 것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물감, 피, 흙, 봉숭아꽃, 김칫국물....뭐 이런 식이었다.
그럼 제일 끝에 나온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왔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처음 생각한 5가지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뻔한 시가 된다는 말이다. 결국 시가 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밑의 것을 끄집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흙탕물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펌프질을 하면 차고 맑은 물이 나온 것과 동일하다. 상투성을 벗는 것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꽃눈이 번져 - 고영민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 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속에 고이어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녀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
5. 쓰고, 또 쓰고, 또 써라!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없다.
나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 아니었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버렸을 때 나는 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어떤 것이 좋은 시인지도 어떤 것이 좋지 않은 시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나는 공짜로, 눈먼 잉어가 걸린 격으로 시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너무 무섭고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친 듯이 쓰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시가 될만한 것이 있을까 일어나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사연을 소개한다. 지금 여기에 들어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당시의 나 보다 훨씬 시에 대해서 많이 알고 경험이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도전을 해보길 권한다. 누구나 가장 잘 쓸 수 있는 자기 만의 핵심역량을 갖고 있다. 그걸 찾아 쓰고, 또 쓰고 또 쓰길 바란다. 시가 당신에게 넙죽 절을 하며 찾아 올 것이다. 자신을 믿어라! 불안해도 믿어라!
2006. 2월 문학사상 400호 기념특집- 문학사상과 나/ 고영민
“안녕하세요? 문학사상사입니다.”
“축하합니다.”
봄날 오후 화장실에 가서 끙, 누런 뱀 한 마리를 풀어주고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으로 이런 연락이 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제 드디어 10년 가까이 써온 나의 소설이 대한민국 문단에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순간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바로 전년, 나는 모 신춘문예 최종심과 <문학사상>의 소설 부문 본심에서 고배를 받아든 선례가 있었던지라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 축하합니다, 라는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감회라는 것은 더더욱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전화를 준 문학사상사의 여직원 분에게 이렇게 물었다.
“소설입니까? 시입니까?”
그러자 답변이 걸작이었다.
“소설도 내셨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나는 기쁨보다는 시에 당선되었다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해, 먼저 등단한 친구 윤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이건 정말 쾌거가 아닐 수 없다며, 학교 동기들의 인터넷 카페에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글을 올려놓았다.
“고영민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소설 아님. 진짜 시 부문이라고 함)”
이렇게 하여 나는 <문학사상>과 인연을 맺고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 되어 버렸다. 마치 뭘 어떻게 첫날밤을 치러야 할지 모르는 꼬마 신랑을 신방에 밀어 넣고 불을 꺼버린 그런 형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교에도 소문이 퍼져 한동안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들 사이에서 웃지 못 할 한 사건으로 회자되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소설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다짜고짜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임마”라며 드잡이에 꾸지람(?)까지 들어야 했다.
2002년 6월 <문학사상>은 나의 인생에 그렇게 일대 변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나는 단편소설 2편과 시 12편을 문학사상사에 보냈다. 대학시절 소설과 시로 전공이 나눠지기 전까지 잠깐 끄적거려 보았던 시가 10년이 넘은 2002년 3월쯤 느닷없이 나에게 다시 찾아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꼼꼼히 받아 적었고 소설 2편과 함께 동봉하기에 이르렀다.
“파블로 네루다가 시가 어느 날 길을 가는 자신을 불렀다고 말했듯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잘 보이고, 나를 들어 올리고 통과하곤 했다. 그게 시라고 일러주었다”
당시 당선 소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후, 나는 미친놈처럼 습작에 매달렸다. 시가 될 만한 것이라면 연주창 앓는 놈 갓끈이라도 핥아줄 듯 무작정 덤벼들었다. 남들처럼 습작 기간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시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짜 시인이 된지라 내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나무에 타이어를 매달아놓고 야구방망이질을 하듯 끝없이 써내는 일뿐이었다. 변변한 청탁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한 채 1년이 지나자 나는 여하튼 볼품없는 것들이지만 300편이 넘는 습작시를 써낼 수 있었다. 2년이 지나자 500편이 넘는 습작시가 나에게 남겨졌다. 그러자 조금씩 “아, 이게 야구구나! 이게 시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조금씩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스윙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고, 날아오는 공도 조금씩 커 보이고, 몸 쪽으로 오는 공은 당겨 치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은 툭, 밀어 치는 방법도 조금씩 터득이 되는 듯 했다. (후략)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6. 대상을 새롭게 의미부여하라.
기존에 부여된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나쁜 것을 좋은 쪽으로, 좋은 쪽을 나쁜 쪽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숭고한 것을 천박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일상적인 것을 금기시 하는 것으로.....
이러면서 시가 새롭게 환기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추한 것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의미부여 하라. 그곳에 바로 시가 있다.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7. 시를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시를 쓰는 것은 집 짓는 것과 같다. 누구나 집을 지을 수 있다. 하물며 개미도 집을 짓고, 까치도 집을 짓고, 벌레도 집을 짓는다. 사람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집을 잘 짓는다. 이 말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집을 짓는 순서를 모를 뿐이다.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서 기둥은 바로 줄거리이다. 처음부터 고대광실을 지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기둥부터 세워라. 기둥만 세우면 반은 집을 지은 것이다. 기둥만 세우면 비닐만 올려도 집이 되고, 양철만 올려도 집이 되고, 짚을 얹혀 놓아도 집이 된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기둥은 줄거리이다. 자기가 접한 대상에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제 트럭에 소나무 두 그루가 실려 가는 장면을 보았다. 자, 그럼 이걸 가지고 줄거리를 만들어 보자.
“뽑혀 실려 가는 나무 두 그루를 보니, 살던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는 가난한 내외 같다. 어디로 옮겨질지 불안하다. 잔 뿌리들은 어린 새끼들 같다. 트럭에는 살던 낡은 가재도구도 있다. 늦은 저녁 옮긴 자리에서 두 소나무는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두 내외(소나무)가 어둑한 집에서 밥을 먹는다.”
그대로 쓰면 된다.
이사
고속도로 밀리는 찻길,
옆 차선에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트럭에 실려간다
짐칸에 웅크리고 있는 가난한 내외 같다
잔뿌리들은 잘리고
먼저 살던 곳의 흙을 동그랗게 함께 떼어
얼기설기 새끼줄로 묶여 있다
흙이 말라 있다
저 흙도, 잘린 뿌리도 저 나무의 낡은 살림도구다
어디로 옮겨 심어질까
근근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릴까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어디에서 늦은 저녁밥을 지어 먹을까
일단 이렇게 기둥을 세워놓고, 그 다음엔 창문도 달고, 침실도 만들고, 부엌도 만들고 문고리도 달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 쓰기에 대해서 어려운 하는 것은 기둥도 세우지 않고 처음부터 큰 집을 지으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기둥 서까래도 올리지 않고 인테리어까지 하면서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커튼을 달고, 도배를 하고, 장식장을 놓은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시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맘대로 줄거리(기둥)부터 만들어 놓아라.
또 하나 얘기를 만들어볼까?
오늘 아침 출근하려고 보니, 아파트 앞 화단에 분꽃 씨가 까맣게 여물고 있었다. 여름내 화사하게 피었던 분꽃이 지고 까맣게 씨앗에 매달려 있다. 저 까만 씨를 이빨로 깨물면 그 속에 하얀 분가루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저 씨앗속에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있는 어머니가 있다고 얘기를 만들어본다. 어머니가 저 까만 씨앗속에서 친척 결혼식이 있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다. 여름내 밭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 아무리 분칠을 해도 분이 먹지 않는 얼굴, 희어지지 않는 얼굴, 그래도 연신 어머니는 코끝과 이마 볼에 톡톡톡 분을 두드리고 있다. 그대로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