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를 먼저 다녀온 부부의 권유로 우리 부부는 다른 부부(총 15명)들과 함께 터키 행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첫째 날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성당을 찾았다. 당시의 건축수준으로 이런 건물을 세울 수 있음이 현재의 건축가들도 의아심을 자아낸다는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잘 조화된 성소피아 성당은 530년경에 세워진 현재 가장 오래 된 교회 건축물이며. 가까이 가니 붉은 벽돌의 외관이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대략 1500년을 버텨오면서 힘들게 서 있는 아야 소피아(Aya Sophia) 성당, (현재 정식 명칭은 박물관)내부를 보기로 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본당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부의 웅장함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약 천년을 기독교의 총 본산으로의 중심이었지만,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점령당한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모자잌으로 장식된 기독교의 성화들은 회칠로 덮어버렸다가. 1900년 초에 오스만터키가 망한 후 1930년경에 회칠 속에 성화가 숨겨져 있는 걸 밝혀낸 후에 고증과 절차를 거쳐 부분적으로 회칠을 벗겨 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라고 불리는 성 소피아 대성당의 규모는 높이가 56m이고 동서의 폭이 31m, 남북의 폭은 33m이다. 모든 건물의 내부는 대개 기둥이 있지만 이 건물은 기둥이 없어 더 넓고 웅장하게 보인다. 천정에서부터 반원 형태의 지붕이 서로를 떠받치는 15층 높이의 거대한 둥근 돔(Dome)이 있고, 그 둘레에 40개의 창문이 있는데 아름다운 모자잌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2층 난관 곳곳에 십자가 양 날개 표시를 굵어내어 작대기만 남은 곳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성소피아 성당, 그만큼의 회칠도, 이슬람식 무늬도, 눅눅히 건재 하는 건물이다.
이렇듯 세월을 달리한 두 문화는 한 공간에서 역사라는 울타리 안에 무심한 공존을 하는 듯 보였다. 카메라 풀래시 빛에 성화에 치명적인 손상을 준다고 카메라 풀래시를 켜지 못하게 하여 내부 전체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부분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100년에 한번 꼴로 지진을 당하여 족히 10번은 지진을 당했을 거라는 바닥은 금이 가고 문틀이 기울어 졌어도 버티고 건재 하는 것이 신비스러웠다. 긴 시간과 많은 인간의 손을 거치며 변질되고 버티고 서 있는 그 나이만큼이나 힘들어 보였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아래 중앙에 제대가 있었던 곳을 향하여 조용히 묵상기도를 하면서 언제 이 성전을 신도들로 채울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의 청원기도를 드리고 다음 순례를 위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소금호수)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리는데 창밖에 대 평야가 펼쳐지며 속이 확 트이는 듯 했다. 역시 실크로드의 종착지다웠다. 앙카라에 도착하여 하룻 밤을 지내고 버스에 올라 다시 얼마쯤 달려서 소금호수에 닿았다. 물이 수정처럼 맑고 찍어 먹어보니 칼칼한 맛의 소금물이다. 흰 설경 의 산이 물에 비추니 색다르게 아름답다. 바로 영화 스타워즈(starwars)의 배경이 된 곳이다.
(버섯 바위)
(터키 화페(리라)에 찍힌 실제 장소 : 아버지 어머니 자식 가족바위)
가파도키아가 가까워지자 일행들은 벌어진 입이 다물지 못했다. 바위 고울이었다. 벽장 같은 비둘기 집으로 가득한 바위산 웃추히사르. 버섯 쌍둥이 파샤바,를 바라보면서 점심을 먹는데 진수성찬이었다.
점심을 끝내고 30곳 이상의 석굴 교회가 있는 괴뢰메 골짜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지하도시 데린구유, 을 들러보는데 한 사람씩 겨우 드나드는 굴, 그것도 관광객을 위하여 넓혔다고한다. 굴을 드나들기 위하여 살이 찌면 안 되기에 음식을 먹지 않고 며칠씩 건너 뛰어 먹었다고 한다.
(지하교회 데린 구유 굴)
(지하 교회의 세례 받는 곳)
깊이가 8층이나 되었다. 일행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굴을 내려갔다 굴속의 지하 교회는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세례 받는 곳과 그 안에서 죄를 지면 벌을 받는 곳 학교 등 여러 곳을 들러보는데 가슴이 아팠다. 로마의 카타콤베 보다 더 비참해 보였다.
드디어 사도바오로가 넘던 고개 토로스 산맥을 너머서 휴게실에 들려 잠시 쉬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달리고, 사도 바오로는 험한 산맥을 걷고 또 걷고 끝이 안 보이는 그 먼 길을 선교하셨던 모습을 그려 보려니 숙연한 분위기에 각자 기도 하는 모습들이다. 콘야로 향하는 도로 역시 평야였다. 콘야에 도착하여 중식을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지중해 해변 의 최고인 휴양지인 안탈랴로 이동 하는데 4시간을 달렸다.
오후 5시가 되어 안탈랴에 도착했다. 석양을 뒤로 하고 지중해 해변의 절벽 성안 쪽 아름답기로 유명한 38m 높이의 아울리 탑, 섬세하고 뛰어난 조각들로 장식된 3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하드 리아누스의 문, 구시가지 등을 들러보는데 지중해 해변에서 터키 아이스크림(마라쉬 돈두르마스) 을 1불씩 주고 사 먹는데 쫀득쫀득 한 것이 우리나라 인절미 떡과 비슷하며 차고 뜯어 먹는 것과, 많이 달지 않는 것이 일품이었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버스에 올랐다. 올림포스 산으로 꺼지지 않는 불타는 돌 야나르타쉬에 오르는데 이름 모를 꽃들이 많았다.
땀을 흠뻑 빼고 정말 불타는 산 정상에 올랐다. 오징어나 쥐포를 가져 가야하는데 일행들은 후회를 하고 모두 바위에 앉아서 기도를 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뜨겁게 기도를 바치고 즐거워하였다. 하산하여 골짜기에서 송어구이를 먹고 목화의 성이라 불리는 파묵깔레, 로 이동하는데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언덕위에 히에르폴리스, 원형극장에 앉아서 한숨을 돌리는데 석양 노울 빛이 아름다웠다.
예수님의 제자 필립이 순교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신의도시‘라는 뜻을 가진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고대 유적지에서 필립의 묘를 바라보면서 짧은 기도를 하고 온천수가 있는 석회 봉으로 이동했다. 온천수 석회 물에 발을 담그니 따듯한 물이 피로를 확 풀어주는 듯 했다.
다음 날 밤이라 찍지 못한 파묵깔레 꽃길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새벽 같이 눈이 뜨이자 다시 나가서 꽃들과 석회 봉을 사진기에 담았다. 공기도 상쾌하고 아침햇살에 석회봉과 꽃들이 한층 산뜻하게 빛을 바랜다
데린구유 내부 설명도(초대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있던 지하 동굴 도시)
지하 동굴 공기 순환구
데린구유 수로관
동굴 안 신학교
동굴 안 교회
동굴안 교회
동굴 내부
동굴 내부
동굴 내부 모형도(지하 18층)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구유와 카이막카르 지하 도시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현재 6층까지만 개방하고 있었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의 넓이가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다. 지하 도시 안에는 평상 시에 밖에서 사료를 날라다가 저장해 둘 뿐 아니라 추수한 곡식들이 서늘한 지하 도시에 보관되고, 비상시 음료수를 위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를 놓아둔 흔적들도 있다. 땅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또한 이것을 지하 공기를 맑게 해 주는 통풍 장치로 원용하였다.
동굴 중간 중간에는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둥근 맷돌 모양의 큰 석물도 놓여 있다.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허리를 굽혀야만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넓이이다. 20,000명 정도 수용되는 이 지하 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 부엌, 교회,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 성찬및 세례식을 갖는 장소, 신학교, 지하 매장지 등 도시 기능을 완전히 갖추었다. 또한 적이 쳐들어왔을 때, 긴급하게 타 지하도시로 피신 할 수 있는 지하 터널이 무려 9 Km 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같은 지하 도시가 이 지역에 36개 정도가 있다. 이 지하 도시에는 일체의 성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